00060 3-4. 아깝지 않다 =========================
3-4. 아깝지 않다
빌로스 왕국에 급전이 날아들었다.
킬더 왕국의 엘로나가 직접 써서 보낸 급전이었다.
테헤란 외곽 개발 건으로 잠시 자리를 비운 레이나 대신 클라임 후작이 급전을 확인하였다.
편지를 본 클라임 후작의 낯빛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낀 후작파 귀족들이 넌지시 말을 붙였다.
“무슨 내용입니까?”
클라임 후작은 충격에 잠긴 얼굴로 눈을 깊게 감으며 말했다.
“로엘 전하께서 실종... 되셨다는군.”
후작파 귀족들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손에 땀을 쥐며 되물었다.
“그게 사살입니까?”
“킬더 왕국의 엘로나 여왕님이 직접 쓰신 서신일세.”
“믿을 수 없군요. 그 로엘 전하께서 실종이라니... 대체 누가......”
“아무래도 겐크 왕국이 범인인 것 같군. 편지에 의하면 로엘 전하께서 실종되자마자 겐크 왕국의 서쪽 국경에 병사가 밀집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네.”
로엘의 실종과 맞물려 병사를 움직이고 있으니 따로 범인을 지정할 것도 없었다.
후작파 귀족들은 지금이 클라임 후작이 올라설 때라 여겼다.
“후작님, 이럴 때일수록 후작님께서 주도하여 겐크 왕국을 쳐야 합니다. 자국의 국왕이 습격당했는데 가만히 있을 수야 있겠습니까.”
“게다가 지금 왕궁 안을 휘어잡아 놓아야 사태를 해결할 후에 왕좌에 오르시기 편할 겁니다.”
일국의 운명이 걸린 일이니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했다.
아직 로엘이 후사를 만들지 않았기에 왕좌가 빌 경우 유일한 왕족인 클라임 후작이 왕위계승 제1순위로 떠오르게 된다.
후작파 귀족들은 그토록 염원하던 상황인지라 가감 없이 간언을 올렸다.
그러나 정작 클라임 후작은 불 같이 화를 냈다.
“전하께선 아직 돌아가시지 않았다! 어디서 그딴 망발을 지껄이느냐!”
“허나......”
“지금 전하의 전권을 위임 받은 건 레이아 공주님이며 나는 보좌역을 부여 받았으니 그에 전념하겠다. 이 내가 공석인 틈을 타 자리를 노릴 소인배로 보였더냐?”
“아닙니다. 저희가 생각이 짧아 실언을 하였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후작파 귀족들로선 클라임 후작이 왕위를 차지할 절호의 기회라 여겼으나 의심 없이 뜻을 거두었다.
모든 건 클라임 후작이 평소에 자신이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지 피력해둔 덕분이었다.
클라임 후작은 겉으론 자존심 강한 야심가의 모습을 유지하면서도 속으론 로엘을 걱정하느라 바빴다.
‘너 정도 되는 아이가 이만한 일로 다칠 리가 없다 믿는다. 부디 무사히 돌아와다오.’
더하여 머릿속에 선왕의 유언이 맴돌았다.
선왕, 로엘의 아버지이자 클라임 후작의 형제였던 그가 죽은 이후로 한 번도 유언을 잊은 적이 없었다.
[클라임 후작. 어려운 부탁인 줄 아네만 로엘을 위해 반대세력을 형성해주게나. 왕궁에 하나의 세력만 존재하게 되면 고인 물이 되어 썩어버린다네. 그 역할을 맡아줄 책임감과 능력을 가진 이는 자네밖에 없구먼.]
로엘이 왕위를 넘겨주려 했을 땐 적잖이 당황했지만 그란데 백작을 이용해 어떻게든 넘겨냈다. 그 뒤에도 여러 상황이 있었지만 로엘이 생각 이상으로 잘해내어 무탈하게 여기까지 흘러왔다.
그러나 로엘이 없어진다면 얘기가 다르다.
클라임 후작은 최악의 상황만은 벌어지지 않길 바라며 감히 이따위 짓을 벌인 겐크 왕국에 분노를 품었다.
“당장 레이아 공주님께 왕궁으로 돌아오시라 이르고 각 영지에 공문을 돌려라! 언제든지 전쟁을 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놓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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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왕궁 전체에 소란이 퍼지지 않은 시점.
루엔은 에아와 함께 왕궁 뒷산을 오르고 있었다.
루엔이 심심풀이 삼아 만들어낸 반영구 입욕제를 시험하기 위함이었다.
산기슭의 너른 풀밭에 도착한 루엔은 마법진을 새겨 넣은 입욕제를 망사주머니에 넣고 풀 사이에 내려놓았다. 그리곤 에아에게서 철제 수통을 건네받아 안에 있던 뜨거운 물을 졸졸 부었다.
뜨거운 물이 닿은 마법 입욕제에서 거품이 뽀글뽀글 생겨났다.
루엔은 솟아나는 거품을 보고 쬐그마한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렸다.
“오~ 거품 뽀글뽀글.”
오늘 루엔을 돌보는 당번이라 함께 따라오게 된 에아가 흐뭇하게 웃으며 물었다.
“루엔 님, 성공하신 건가요?”
하염없이 거품을 바라보던 루엔이 고개를 저으며 에아의 치맛자락을 잡아당겼다.
에아는 루엔의 손길에 끌려 뒤로 물러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일반 입욕제와 같은 반응을 보이던 마법 입욕제이나 물을 조금만 부었는데도 거품이 계속해서 생겨났다.
끝없이 생겨나던 거품은 어지간한 방 하나 크기만큼 불어났다.
루엔은 자신이 개발한 물건인 터라 가차 없이 평가를 내렸다.
“실패작. 너무 많이 생겨.”
왕궁욕실의 크기는 어지간한 대욕탕 수준이다.
병 하나 분량의 물로도 이 정도이니 욕조에 담갔다간 왕궁욕실의 절반까지 불어나리라.
에아 역시 이건 너무 많이 생겨난다 싶어 은근슬쩍 문제의 본질을 짚었다.
“그냥 일반 입욕제 구입해서 쓰시면 되는 거 아닐까요?”
루엔은 물끄러미 에아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하니온 왕국에서 공수하려면 오래 걸려.”
항상 하니온 왕국의 물건이 도착하는데 오래 걸린다고 투덜거리는 레이아이기에 그녀를 위해 개발한 물건인가 싶었다.
서로 만날 때마다 으르렁거리는 사이지만 썩 사이가 나쁜 건 아닌 것 같다... 라고 에아는 생각했다.
그러나 루엔의 뒷말이 에아의 생각을 완전히 꺼뜨렸다.
“이것도 좋아. 오늘 괴수가 목욕할 때 넣어.”
“네? 그랬다간 레이아 공주님이 많이 당황하시지 않을까요?”
“괴수는 퇴치해야 옳은 법.”
레이아에게 선물하려고 만들던 게 아니라 자기가 마음에 들어서 만들던 거였다.
실패했더라도 이 정도면 레이아를 골리기 충분하니 오늘 저녁 때 쓰라고 말하고 있었다.
레이아가 화내면 또 이리저리 도망 다닐 거면서 말이다.
에아는 뭐라 말해야 될지 몰라 그저 웃을 뿐이었다.
진짜로 레이아의 욕조에 넣을 수는 없기에 말을 돌릴 겸 루엔이 걸고 있는 목걸이를 지목하였다.
푸른빛 마나석이 박혀 있는 백금 목걸이였다.
“그런데 웬일로 목걸이를 다 하셨어요? 평소에 치장 같은 거 안 하시잖아요.”
루엔은 목에 건 목걸이의 마나석 부분을 매만졌다.
“빙하의 목걸이. 마음에 들었어.”
루엔이 검지가 마나석을 누르자 루엔의 주변으로 가느다란 눈송이가 사뿐사뿐 흩날렸다.
예전에 로엘이 즉위선물로 받은 물건 중 하나인데 쓸 일이 없어 창고에 박아뒀던 걸 루엔이 쓰고 싶다 하여 그녀의 손에 들어왔다.
빙하의 목걸이가 가진 능력은 눈송이 효과를 내는 것.
보통 파티 때 입장 연출용으로 여인들이 많이 쓰는 물건이었다.
킬더 왕국에서 보냈던 물건, 즉 엘로나가 보냈던 물건이니 여인들 전용 물건이라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지금 엘로나에게 왜 빙하의 목걸이를 보냈냐고 물어본다면 귀까지 새빨갛게 물들겠지만 말이다.
빙하의 목걸이로 인해 소환되는 눈송이는 4써클 물 속성 마법 스노우 클라우드를 약화시킨 버전인 건지 실제로 루엔의 발치에 작은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에아가 제대로 화제를 돌렸다 생각하여 칭찬을 꺼내려던 차에 풀밭 너머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터벅! 터벅!
풀밭 너머에서 나타난 이는 마스크헬름을 쓴 풀 플레이트 아머의 기사였다.
얼굴을 가린데다 등에는 둔기에 가까운 클레이모어가 매달려 있었다.
마스크헬름 기사가 루엔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등 뒤로 손을 넘겨 클레이모어 손잡이를 잡았다.
적어도 로얄 기사단 소속 기사는 아니었다.
에아는 좋지 않은 낌새를 느끼곤 루엔의 손을 잡아 산 아래로 달렸다.
“루엔 님! 뛰어요! 저 사람 뭔가 위험해요!”
아니나 다를까 마스크헬름 기사가 클레이모어를 뽑으며 루엔과 에아를 쫓아왔다.
분명 풀 플레이트 아머와 수십kg의 클레이모어를 들고 있건만 그냥 뛰는 루엔과 에아보다 훨씬 빨랐다.
에아는 급하게 내려다가 뻗어 나온 나뭇가지가 얼굴을 후려쳐 생채기가 생겼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내달렸다. 그 와중에도 루엔은 다치지 않게 손등 살갗이 벗겨지는 걸 감수하면서 미리 나뭇가지를 꺾어냈다.
퉁! 퉁! 퉁! 퉁!
점점 거리를 좁혀 오는 마스크헬름 기사를 두고 루엔이 주머니에서 손바닥만한 플라스크 몇 개를 꺼내 내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