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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놈될-59화 (59/219)

00059 3-3. 두 명이서 휘말리다 =========================

갑자기 휑해진 저택 안에서 행해진 저녁식사는 썩 유쾌하지 못했다.

카넨이 억지로 남편욕을 하며 블랙조크로 분위기를 환기시키려 했고, 로엘과 엘로나가 그녀의 기분에 맞춰 억지로 웃어주며 힘겹게 시간을 흘려보내었다.

평소에는 술을 마시지 않는 엘로나지만 오늘은 취하고 싶다는 카넨에게 맞춰주려다 와인 몇 잔에 넉다운 되고 말았다.

세 갈래 촛대 몇 개가 어둠을 몰아내고 있는 방 안.

엘로나를 침대에 재워주고 온 로엘은 술을 마시던 방으로 돌아왔다.

로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카넨의 앞에 빈 병 한 개가 늘어나 있었다.

고꾸라질 듯 말 듯 턱을 괴고 있던 카넨이 로엘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대로 침실에 드셨어도 되는데 다시 오셨네요.”

카넨쯤 되는 마나 사용자라면 마나로 취기를 배출하는 게 가능하나 오늘은 취하고 싶은지 취기에 흠뻑 젖어있었다.

로엘은 그녀의 기분을 고려해 그만 마시라는 말 대신 새 와인병을 땄다.

새로 딴 와인을 카넨의 잔에 부어주던 차에 로엘의 손짓이 멈추었다.

창문 너머로 녹색 불빛이 일렁이는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녹색 불빛은 텅 빈 정문을 통해 거침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녹색 불빛을 띤 존재가 다가올수록 형태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해골의 모습을 한 유령 같은 존재였다.

대놓고 저택 안의 누군가를 해치러 오는 건지 적의를 유감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카넨도 저택 안에 들어선 강력한 존재감을 느꼈는지 마나로 취기를 배출하며 긴장감을 갖추었다.

로엘은 잠시 풀어놓았었던 아디만티움 검을 잡았고, 카넨 역시 자신의 검인 선혈의 장미를 챙겼다.

“전하 지금 오고 있는 건......”

“나도 모르겠어. 적어도 아군은 아닐 테지.”

겐크 왕국이 보복 차 보낸 자객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드워프 왕국에서의 사건, 그 이후에 브리튼 교의 제재를 껄끄럽게 여긴 겐크 왕국이 이판사판으로 승부를 걸었다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얌전히 당해줄 로엘이 아니었다.

로엘과 카넨은 계단을 타고 내려갈 것도 없이 창문을 통해 정원으로 나갔다.

녹색 유령은 이제 막 정원에 발을 들인 참이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그 형체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해골의 모습에 실체가 없는 양 녹색 해골에 스친 풀잎들이 그를 관통하여 지나쳤다.

로엘은 아디만티움 검을 앞으로 내세우며 말했다.

“인간도 아니고 몬스터도 아닌 것 같군. 이봐, 너 정체가 뭐야?”

인간의 말을 못 알아듣는 건지, 아니면 알아듣고도 무시하는 건지 녹색 유령은 다짜고짜 들고 있는 검을 휘둘렀다.

검신이 물결모양으로 구불구불 휘어있는 특이한 검이었다.

아직 사정거리에 들지도 않았건만 왜 검을 휘두르나 했는데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녹색 유령의 검 궤적을 따라 검격이 생겨나더니 바람의 칼날마냥 로엘과 카넨에게 날아들었다.

검격에 스친 풀잎이 베여나가는 걸로 보아 검격은 실존하는 공격인 것 같았다.

로엘과 카넨은 각자 양옆으로 뛰어 검격을 피해냈다.

두 사람 사이를 지나친 검격은 정원에 놓인 바위 하나를 베고 지나갔다.

바위가 무 썰리듯 가볍게 두 동강 나버렸다.

방금 일격에 최소 마나유저 상급 이상의 위력이 담겨 있던 셈이다.

카넨이 먼저 앞으로 뛰쳐나가며 선혈의 장미에 마나를 부여하였다.

마나를 머금은 선혈의 장미가 휘감고 있던 넝쿨을 카넨의 손까지 뻗어내 그녀의 손을 휘감았다. 가시가 피부 사이로 파고들면서 피를 빨아들였고 푸른 마나가 붉게 물들면서 위력이 배가 되었다.

한순간에 자신의 무력을 마나 익스퍼트 단계까지 끌어올린 카넨은 검을 휘둘러 녹색 유령의 허리를 베었다.

“하앗!”

녹색 유령은 막을 생각조차 않고 그대로 카넨의 검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웬걸.

카넨의 검은 녹색 유령을 베지 못하고 허공을 벤 양 관통해버렸다.

녹색 유령이 검을 짧게 휘둘러 카넨에게 짧은 검격을 가했다.

카넨은 날아드는 검격을 막기 위해 검면이 앞으로 가게 하여 넓게 휘둘렀다.

붉은 검막이 생겨나며 참격을 막아냈다.

위력은 역시 마나유저 상급 정도.

녹색 유령의 공격을 막는 건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베어도 베어지지 않는 유령이라는 점이었다.

“로엘 전하! 이 녀석 이상합니다! 조심하세요!”

아무래도 녹색 유령의 검도 실체가 없어 검 자체만으로 무언가를 베진 못하는 것 같았다. 다만 검에서 발하는 검격만은 실체를 가지고 있어 물리적 공격을 행하고 있었다.

즉, 로엘과 카넨 측에선 녹색 유령을 벨 수 없는데 녹색 유령은 공격이 가능한 상황이라는 거다.

녹색 유령은 카넨에겐 관심 없다는 듯 곧장 로엘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였다.

로엘은 녹색 유령이 연이어 쏘아 보내는 검격을 피해내며 서서히 접근했다.

“거참 하나하나 다 뭉개줬으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지.”

어디서 데려온 존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지스가 다룰 수 있는 정도의 존재라면 그만한 약점이 있을 터.

한 번 공격이 관통되었다고 가만히 당해줄 로엘이 아니었다.

로엘은 적절한 움직임과 검막으로 쏟아지는 검격을 막아내며 녹색 유령의 지척에 다다랐다.

녹색 유령이 자신의 사정거리에 들어오자마자 칠흑빛 검이 휘둘러졌다.

쉬익!

괜히 탐색한답시고 마나 블레이드만 쓰는 우를 범하진 않았다.

처음부터 바로 마나 오러를 분출해 녹색 유령을 베어냈다.

그런데 마나 오러조차도 녹색 유령의 몸통을 관통하는데 그쳤다.

‘마나 오러도 무시하는 건가.’

그리 생각했으나 녹색 유령의 자세가 살짝 무너졌다.

녹색 유령의 옆구리 부분이 약간 벌어져 있는 게 아닌가.

벌어진 부분은 금방 수복되었지만 방금 로엘의 공격 중 어느 요소가 녹색 유령에게 타격을 입힌 셈이었다.

로엘의 아디만티움 검 끝이 녹색 유령의 옆구리를 살짝 스쳤었다.

더불어 아디만티움 검의 끝에는 녹색 유령의 일부로 추정되는 녹색 기운이 묻어나더니 이내 곧 흡수되었다.

녹색 유령 자체가 무형의 기운으로 이루어진 존재고, 기운을 흡수하는 아디만티움의 성질로 인해 피해를 입게 된 것이었다.

약점을 알았으니 공격에 있어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로엘은 마나 오러로 검막을 펼치며 아디만티움 검을 녹색 유령이 몸에 깊숙이 찔러넣었다.

아디만티움 검에 가슴을 찔린 녹색 유령이 턱뼈를 달그락거리며 고개를 기이하게 꺾었다.

가슴 부위를 중심으로 아디만티움이 녹색 유령을 차츰차츰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녹색 유령의 입에서 손톱으로 유리를 긁는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끼이이이이!”

겐크 왕국에서 로엘의 암살을 위해 준비했던 비밀병기였지만 그의 유일한 약점을 로엘이 쥐고 있었기에 암살의도는 수포로 돌아가나 싶었다.

하지만 아직 상황은 종료된 것이 아니었다.

아디만티움 검에 흡수당하던 녹색 유령이 별안간 강한 빛을 발하였다.

로엘은 녹색 유령의 기운이 팽창하는 것을 느끼며 그 의도를 읽어냈다.

“젠장, 자폭이라고? 정말 가지가지하는구만.”

뒤늦게 검을 빼내려 했지만 녹색 유령은 이미 자폭 직전이었다.

카넨이 로엘을 지키기 위해 달려와선 로엘을 감싸려 했다.

“위험해요, 전하!”

“바보야! 감싼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야! 비켜!”

로엘은 자신을 감싸려는 카넨을 역으로 끌어안은 후 검을 최대한 크게 휘둘렀다.

아디만티움 검이 아래에서 위로 휘둘러지면서 마나 오러가 넓게 퍼졌다.

마나 오러로 이루어진 검막이 두 사람을 감싸는 가운데 녹색빛 폭발이 일어났다.

퍼엉!

폭발이 가라앉은 후, 정원에는 폭발로 인한 거대한 구멍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

트라켄 가 저택에서 얼마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삼림 안.

유달리 높이 자란 나무 꼭대기에 검은로브 사내가 서있었다.

검은로브 사내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은 저택 정원을 바라보며 짧은 숨을 토해냈다.

싸움을 보는 내내 그 역시 긴장하고 있던 것이다.

“설마 유일한 약점이었던 아디만티움 검을 가지고 있었을 줄이야.”

로엘이 소문대로 마나 마스터였다는 것까지는 그래도 계산 범위 내였다.

허나 아디만티움 검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한순간 긴장했지만 그래도 녹색 유령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능력인 자폭능력까진 막아낼 수 없었다.

오로지 상대를 멸하기 위해 존재하는 유령 전사이기에 가지고 있는 능력이었다.

사람을 바쳐 얻은 녹색 유령이 자폭한 건 아쉽지만 당초의 목적은 달성했다.

로엘이 사라졌으니 겐크 왕국은 거칠 것 없이 군사를 일으킬 것이다.

검은로브 사내는 매우 만족스러워 하며 나무 꼭대기에서 사라졌다.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로엘은 얼굴에 떨어지는 차가운 물방울 느낌에 눈을 차렸다.

가장 먼저 보인 건 눈을 쌓아 많은 눈집의 천장이었다.

시야 한구석에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흰색 갈기털의 야인들이 보였다.

야인들은 로엘이 눈을 뜬 걸 확인하곤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정신이 드나?”

머리가 띵하여 잠시 동안 멍하게 있던 로엘은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정신을 잃기 전에 녹색 유령과 싸웠던 것, 자폭에 휘말린 것까지는 기억난다.

로엘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덥수룩한 흰색털의 야인들을 둘러보았다.

눈집, 흰색털의 야인들, 드문드문 보이는 얼음상 같은 여인들, 바깥에 휘몰아치는 눈보라.

가이아 대륙에서 이와 같은 풍경을 가진 곳은 한 곳밖에 없었다.

겐크 왕국 북쪽 너머에 위치한 프로즌 필드.

그 중에서도 살얼음 지옥이라 불리는 거대한 크레바스 지대에 둘러싸여 있어 인간의 발이 닿지 않는다는 프로즌 마운틴이었다.

로엘은 찌뿌둥한 몸을 움직이며 바로 옆에 있는 설인을 보았다.

다른 설인보다 주름이 깊은 것이 이곳 마을을 이끄는 설인 촌장인 모양이었다.

“여긴 설마 프로즌 마운틴입니까?”

“그렇다네. 정말 깜짝 놀랐지. 눈집을 보강하고 있는데 갑자기 허공에서 사람이 떨어지지 않는가.”

녹색 유령의 자폭과 로엘의 마나 오러가 부딪치면서 마나폭주가 일어나 이상현상이 발생한 것 같았다. 아니, 단순히 녹색 유령과 로엘의 경합으로 일어난 일이라 할 수는 없다.

충돌 당시에 카넨의 마나, 아디만티움에 흡수된 녹색 유령의 기운까지 모두 겹쳐져 있었으니 각종 상반되는 요소가 모두 맞물려 공간이동이란 현상에 이른 걸지도 몰랐다.

다행이라고 할 만한 점은 다친 곳이 없다는 점이었다.

약간 찌뿌둥한 걸 빼면 부상은 없었고, 마나도 정상적으로 운용되고 있었다.

로엘은 자신을 소개하며 설인 촌장에게 감사를 표했다.

“전 빌로스 왕국의 엘리오스 킨 로엘이라 합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는 됐네. 눈밭에 떨어진 사람을 그냥 놔둘 순 없었으니까. 그런데 빌로... 어디의 누구라 했던가?”

“빌로스 왕국의 엘리오스 킨 로엘입니다.”

“빌로... 뭐 아무튼 인간의 왕국 사람인 거로군. 이해해주게나 우린 인간 쪽 세력은 아무 것도 몰라서 말일세. 난 츄보라고 하네. 서리 마을의 촌장이지.”

프로즌 마운틴 바깥으로 나갈 일이 없으니 세간의 일을 알 리가 없었다.

그거랑 별개로 츄보는 단순히 기억력이 나쁜 것 같지만 말이다.

막 일어나서 정신이 없는 탓에 몰랐는데 좁은 눈집 안팍으로 설인과 설녀가 바글바글 모여 신기한 것을 구경하듯 로엘을 보고 있었다.

츄보는 어느새 구경꾼이 몰려든 것을 보곤 그들을 쫓아냈다.

“이놈들아! 구경하지 말고 돌아가거라! 누구 눈집 무너뜨릴 생각이더냐!”

“에이, 촌장님. 우리도 인간 구경 좀 합시다. 털이 머리에만 나있는데 저래서 생활이 되나?”

“바보야, 남쪽은 따뜻하다잖아.”

“따뜻한 게 뭔데?”

“글쎄.”

“돌아가래도!”

겨우 구경꾼들을 물린 츄보가 얼음잔을 내밀며 말했다.

“미안하게 됐군. 최근 100년 동안 인간이 찾아든 적이 없어서 모두들 신기해하는구먼.”

설인의 수명은 인간보다 약간 많은 120살 정도이다.

이 마을에서는 츄보 정도만 인간을 본 적이 있는 듯했다.

추위가 곧 일상인 종족에게 불을 피울 이유 따윈 없는지 따뜻함의 정의조차 모르고 있었다.

츄보가 내민 얼음잔 안에도 차가운 물이 담겨 있었다.

로엘이야 추위를 이겨내는 육체를 지니고 있었기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차가운 물을 마셔 목을 축였다.

어느 정도 상황이 가늠되자 카넨이 떠올랐다.

카넨도 폭발에 휘말렸으니 공간이동을 했을지도 몰랐다.

“혹시 다른 인간 여자는 못 보셨습니까?”

“인간 여자? 여기엔 떨어지지 않았다네. 대신 옆 마을에 인간 여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려오더군. 설마 동료인가?”

“네, 지금 당장 확인하러 가고 싶습니다만.”

“금방 일어났는데 괜찮겠나?”

“괜찮습니다.”

로엘이 폭발에 휘말려 사라졌으니 지금쯤 빌로스 왕국과 킬더 왕국에선 난리가 났을 거다.

얼른 카넨을 데리고 남쪽으로 돌아가야 했다.

츄보는 흔쾌히 눈썰매와 아이스 울프를 준비해주었다.

온몸이 얼음으로 이루어진 아이스 울프, 그 아이스 울프가 이끄는 눈썰매는 프로즌 마운틴의 주요 이동수단이었다.

로엘이 눈썰매에 올라타자 츄보가 눈집에서 걸어 나와 물건 하나를 내밀었다.

로엘의 아디만티움 검이었다.

“자네와 함께 떨어진 물건인데 자네 물건이 맞는가?”

“아, 네. 챙겨주셨군요. 고맙습니다.”

“마을 아이들이 기념품으로 챙기려는 걸 막느라고 혼났다네. 하여간 신기한 것만 보면 사족을 못 쓰는 것들이라 미안하게 됐네, 로... 로......”

로엘은 아디만티움 검을 허리춤의 빈 검집에 꽂아 넣으며 말했다.

“로엘입니다.”

“인간의 이름은 기억하기 어려워서 말이지. 그럼 출발하겠네, 로.”

이름을 기억하기는 포기했는지 그냥 ‘로’라고 부르는 츄보였다.

로엘은 츄보가 눈썰매를 모는 걸 보며 옆 마을로 가는 길을 제대로 기억하고나 있을까 걱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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