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8 3-3. 두 명이서 휘말리다 =========================
로엘은 일부러 곤란한 연기를 펼쳤다.
“흠, 너무 어린 걸. 좀 더 나이가 든 다음에 오도록 해.”
“아, 인간들은 어린 물고기를 잡으면 커서 다시 오라고 풀어준다고 들었어요. 그런 건가요?”
“그거 좋네. 아니, 바로 그거야. 그러니까 좀 더 성장해서 다시 오렴.”
멋쟁이 재밍의 지속시간은 대강 1~2주 정도이니 일단 떠나보내기만 하면 다시 올 일이 없을 거라 여겨 한 말이었다.
다행히도 셸리는 로엘의 의도대로 움직여주었다.
“알겠어요. 그럼 좀 더 성장해서 돌아올게요. 아참, 다리를 유지할 방법도 찾아놓아야겠네요. 로엘이랑 같이 있으려면 다리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 너무 급하게 찾지 말고 느긋하게 찾도록 해.”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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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셸리는 다리를 계속 유지할 방법을 찾아보겠다며 강으로 들어갔다.
아마 하류를 통해 바다로 나아가 돌아다니다보면 멋쟁이 재밍이 풀려 알아서 해저섬으로 갈 것이다.
셸리를 떼어내자 엘로나의 따가운 시선도 멎어서 한결 편한 마음으로 마차에 오를 수 있었다.
올 때는 카넨, 엘로나와 함께 왔지만 돌아갈 땐 콘라드 남작의 무리도 함께 하게 되었다.
콘라드 남작은 편히 이동하자는 로엘의 말에도 불구하고 호위를 하겠다며 병사들로 하여금 마차 주변을 호위하라 일렀다.
호위 받는 마차는 눈에 띌 수밖에 없다.
로엘은 왔던 길로 그대로 돌아가면 요란해질 게 뻔하기에 큰 도시가 적은 국경 근처의 루트를 이용하기로 했다.
국경선을 따라 남쪽으로 길게 이어져 있는 길.
중간에는 카넨의 영지도 있어서 오랜만에 카넨을 고향에 들리게 해줄 수도 있으니 안성맞춤이라 할 수 있었다.
로엘은 마부석으로 이어지는 작은 창문을 열어 카넨에게 말을 붙였다.
“오랜만에 고향에 들리게 돼서 기분 좋겠어.”
“덕분에 고향에 들릴 수 있게 되었어요. 배려 감사해요.”
“얼마 만에 들리게 되는 거야?”
“어디 보자. 거의 2년만이네요. 오랜만에 남편이랑 시간을 보낼 수 있겠어요.”
“내 능력 때문에 고생했을 텐데 만나서 회포나 풀어.”
“후후, 그래야겠죠.”
로엘과 거의 붙어 다니다시피 함께 했는데도 야크트 마을을 제외하곤 한 번도 몸가짐이 흐트러진 적이 없는 카넨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정조를 중요시 여기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지금은 남편이 영지를 다스리고 있는 거지?”
“네, 이런 말하긴 뭐하지만 데릴사위로 들어온 사람이거든요. 그래도 착한 사람이에요. 저 대신 영지를 잘 다스려주고 있기도 하고요.”
현재 카넨의 남편인 워그우스가 다스리는 트라켄 영지는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었다.
빌로스 왕국으로 따지면 임모벨 영지랑 비슷한데 삼림을 끼고 있어 공기가 맑고 거닐기만 해도 삼림욕을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지금 로엘이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지라 내일이면 도착할 예정이었다.
로엘은 카넨에게 깜짝등장을 권하였다.
“이왕이면 조용히 찾아가서 놀라게 해주는 건 어때?”
“전하께서 샹데르에서 하신 것처럼요?”
“그게 생각 외로 재밌더라고. 내가 모자 벗었을 때 엘로나 표정 봤지?”
로엘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동그랗게 벌리며 당시의 엘로나 표정을 흉내 냈다.
엘로나는 당시의 일이 떠올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귀 끝까지 새빨갛게 물들였다.
“놀리지 마요.”
“놀리지 마요~.”
“아이 참. 하나도 안 똑같아요.”
“아이 참. 똑같아요~”
알콩달콩 잘도 노닥거리는 로엘과 엘로나를 보며 저도 모르게 흐뭇한 표정을 짓는 카넨이었다.
부럽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하는 커플이었다.
카넨은 워그우스와 자신도 저리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멍하니 중얼거렸다.
“서프라이즈... 나도 해볼까.”
그녀의 중얼거림을 들은 로엘이 엘로나를 따라 하기 위해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펼치며 말했다.
“할 거라면 이대로는 너무 눈에 띄겠군. 콘라드 남작!”
마차 후방에서 말을 타고 따라오던 콘라드 남작이 로엘의 목소리를 듣고 마차 옆에 바짝 붙었다.
“부르셨습니까?”
“트라켄 영지에 조용히 들어가고 싶은데 거리를 두고 늦게 들어와 주지 않겠어?”
“뒤에서 전부 들었습니다. 카넨 경을 배려하려는 전하의 마음을 어찌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 트라켄 영지 앞에서 병사들을 뒤로 물리겠습니다. 3시간 뒤에 들어가도록 하죠.”
“그래, 부탁할게.”
“부탁은 너무 과분합니다. 언제든 명령으로서 절 부려주십시오.”
로엘은 콘라드 남작을 물리며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하여간 적당히 충성해도 될 텐데 꼭 저런단 말이지.”
“좋은 일이죠. 킬더 왕궁에선 아직 절 못 마땅하게 여기는 세력이 있거든요.”
“피차일반이야.”
클라임 후작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왜일까.
피차일반이라 말하면서도 마음속으론 그를 적으로 느끼지 않고 있었다.
로엘이 왕위를 물려받은 후에도 계속 왕좌를 노린다고는 하지만 막상 일을 맡겼을 땐 성심성의껏 일 해준다. 게다가 느낌 때문일지는 몰라도 그가 말하는 왕좌쟁취에선 열정이 느껴지지 않는다.
로엘은 단순한 느낌일 뿐이라 여기며 굴러가는 마차바퀴 소리를 가만히 감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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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로엘 일행은 트라켄 영지 안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소나무가 빽빽하게 늘어서 있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푸르름을 유지하고 있었다.
미리 얘기한대로 콘라드 남작이 병사를 물려 3시간 뒤에 쫓아 들어가기로 하고, 로엘 일행이 먼저 트라켄 영지의 숲길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갔다.
인구밀도가 낮은 곳답게 주택이 밀집되어 있지 않았고 숲 사이사이마다 오두막집이 한두 채씩 나타날 뿐이었다.
카넨은 혹여나 누가 알아볼까 싶어 일부러 챙이 넓은 모자를 꺼내 푹 눌러썼다.
오두막집 근처에서 장작을 패거나 산나물을 말리고 있던 영지민들이 일손을 멈추고 쳐다보다가 무심히 하던 일을 이어서 했다.
휴양지로 유명한 곳이다 보니 킬더 왕국 곳곳에서 부잣집 사람 혹은 귀족 가 사람이 찾아오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그래서 또 휴양 온 누군가겠거니 하고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이었다.
덕분에 로엘 일행은 무리 없이 호숫가에 위치한 트라켄 가문의 저택에 도착하였다.
카넨의 경우 3자매의 장녀에 부모님은 돌아가신 터라 그의 남편인 워그우스만이 저택을 지키는 중이었다.
카넨은 저택이 내려다보이는 비탈길 위에 마차를 세우며 고삐를 놓았다.
“그럼 염치 불구하고 먼저 다녀오겠습니다.”
카넨이 몰래 저택으로 들어가서 워그우스에게 서프라이즈를 선사한 후에 로엘과 엘로나가 방문하기로 하였다.
로엘과 엘로나가 같이 가면 워그우스가 예의 차린다고 딱딱하게 행동할 것이다.
카넨과 워그우스가 마음 편히 재회할 수 있도록 시간차를 두고 따라갈 예정이었다.
엘로나는 자신의 기사이자 친구인 카넨이 좋은 시간을 보냈으면 하여 빙긋 웃어주었다.
“느긋하게 들어갈 테니까 좋은 시간 보내도록 해요.”
그 동안 로엘과 엘로나는 호숫가를 거닐며 둘만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기에 시간은 넉넉했다.
카넨은 거듭 감사하며 뛸 듯이 달려 저택으로 향했다.
카넨을 보낸 로엘은 마차 문을 열어 엘로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산책을 해보실까요, 여왕님?”
엘로나는 카넨에게 지어보였던 미소 이상의 미소를 지으며 로엘의 손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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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더 왕국 동부 20대 명소 중 한 곳이라는 트라켄 호수.
먼 옛날 호수 안에 거대한 수중 몬스터인 크리스털 엘리게이터가 호수에 살며 물속의 물고기는 물론 주변의 인간들까지 덮쳤다고 한다.
살아있는 것은 모조리 삼키려드는 포식자 때문에 숲 전체가 메말라 가던 중 클레이모어를 짊어진 여성 한 명이 나타났다. 그녀는 몸길이 20미터의 크리스털 엘리게이터를 상대로 주눅 드는 것 없이 클레이모어를 휘둘렀고 결국엔 그 거대한 몸뚱이를 박살내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때 부서진 크리스털 엘리게이터의 파편이 호수에 녹아들면서 밤이건 낮이건 호숫물이 반짝이게 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전설대로 트라켄 호수는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이고 있었다.
로엘과 엘로나는 모처럼 눈치 볼 일 없이 산책하게 되었기에 신발을 벗고 얕은 물살을 발로 차며 호숫가를 거닐었다.
발목까지 잠긴 발을 움직일 때마다 물방울이 튀면서 보석조각처럼 흩날렸다.
한가로운 때를 보내고 있던 중 근처 휴양시설에 머무르고 있는 귀족 영애들이 멀리서 로엘을 보고 수군거렸다.
“저 남자 봐봐. 딱 내 취향인데 말 걸어볼까?”
“옆에 부인이 있잖아. 그것만 아니면 바로 말 걸어봤을 텐데.”
“저 분을 보고 있으니까 워그우스님이 시시하게 느껴지네. 저택에 남지 말고 빨리 나오길 잘한 것 같아.”
여자들이 로엘을 보고 말걸까 말까 고민하는 거야 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귀족 영애들이 워그우스의 이름을 언급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로엘은 가만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귀족 영애들에게 손짓을 하였다.
“거기 너희들. 잠시만 이리와 봐.”
로엘이 먼저 말을 걸어줄 줄은 몰랐는지 귀족 영애들이 좋아라하며 치맛자락을 붙잡고 뛰어왔다.
옆에서 엘로나가 왜 불렀냐고 눈빛을 쏘아 보내고 있었지만 로엘은 아랑곳하지 않고 귀족 영애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방금 워그우스의 이름이 들렸던 것 같은데 무슨 뜻이야?”
두 귀족 영애는 말하기 껄끄러운 내용인지 고민하는 듯했으나 로엘 앞에선 자물쇠 없는 금고나 마찬가지였다.
“항상 이곳에 놀러오면 워그우스님이 영애들을 저택으로 초대하거든요.”
“여자들만?”
“네. 부인이 안 계셔서 그런지 항상 다른 가문 여인들을 불러다 다과회를 여시더라고요. 저희야 낮에 열리는 다과회에만 참가하고 있지만 다른 분들은 종종 밤까지 남아계시는 것 같아요.”
벌써 해는 서산에 걸려 있었다.
귀족 영애들의 말에 의하면 다과회가 파한지 오래 되었고 오늘‘도’ 여인 몇 명이 저택에 남았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카넨이 저택에 몰래 가고 있는 상태다.
옆에서 얘기를 듣고 있던 엘로나가 심각한 얼굴로 로엘의 등에 손을 올렸다.
“로엘. 얼른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로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엘로나와 함께 트라켄 가 저택으로 향했다.
카넨이 항상 말하길.
워그우스는 항상 카넨만을 생각하며 매사에 열심히인 좋은 남자라 했었다.
카넨은 그의 얘기를 할 때마다 외로움 반, 설렘 반의 표정을 띠었었다.
그런 그녀가 갑작스럽게 남편의 외도장면을 목격하게 된다면 엄청난 상처를 받을 게 분명했다.
로엘과 엘로나는 걱정이 되어 발걸음을 재촉하였고 이내 곧 트라켄 가 저택 앞에 도달하였다.
트라켄 가 저택 정문에선 마차 여러 대가 빠르게 빠져나오고 있었다.
마부가 급하게 채찍질을 하면서 마차를 몰고 있었는데 스쳐지나가는 차창 사이로 옷조차 제대로 입지 못한 여인들의 모습이 얼핏 보였다.
마지막으로 나온 마차 차창에는 고통으로 얼룩진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가 타고 있었다.
로엘과 엘로나는 이미 늦은 것을 예감하며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저택 안에선 집사, 하녀 할 것 없이 모두 짐을 꾸리는 중이었다.
남편의 외도를 목격한 킬더 왕국 최고의 기사이자 여귀족.
외도 사실을 알고도 쉬쉬하며 감추고 있던 고용인들을 그냥 남겨둘 리 없지 않은가.
두려움에 빠진 고용인들에게 갑작스럽게 들어온 외부인이 누구인지 확인할 여력은 없었다.
로엘과 엘로나는 부산히 움직이는 고용인들 사이를 헤쳐 2층으로 올라갔다.
유일하게 불이 켜져 있는 방 안을 들여다보니 부서진 가구들 사이로 카넨이 숨을 몰아쉬며 허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럴 땐 그녀와 가장 가까운 사이인 엘로나가 나서는 게 옳았다.
엘로나는 로엘에게 기다려달라는 눈빛을 보내며 혼자 방 안에 들어갔다.
“카넨?”
엘로나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카넨이 보인 반응.
그녀는 화를 내지도 않고,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저 평소의 모습대로 격식을 차리며 웃을 뿐이었다.
“죄송합니다, 여왕님. 작은 사고가 있어서 못난 모습을 보여드리고 말았네요.”
“무리할 거 없어요. 나와 카넨 사이잖아요.”
“벌써 소식을 들으신 모양이군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다시는 남자구실 못하게 가랑이 사이를 박살내줬거든요. 헛소리조차 못하고 허덕이는 게 어찌나 후련한지. 아, 좀 더 깨끗한 방으로 이동하시죠. 주방장에게 저녁식사를 준비하라 하겠습니다. 바보 같은 고용인들은 다 잘랐지만 주방 사람들은 남겼거든요.”
얼굴은 웃고 있지만 말투에서 미묘하게 흐트러진 숨소리가 섞여 나왔다.
한 명의 여자이기 이전에 기사인 것.
그것이 그녀가 정한 길이기에 끝까지 고수하려고 애쓰는 거였다.
엘로나는 카넨의 부단한 노력을 무너뜨리는 짓은 차마 할 수가 없어 억지로 같이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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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도착한 콘라드 남작과 병사들은 워그우스와 고용인들이 없는 걸 보곤 상황을 짐작하여 눈치 좋게 움직여주었다.
콘라드 남작은 저택에서 대접 받는 대신 따로 여관을 잡아 거기서 머무르기로 했다.
갑자기 휑해진 저택 안에서 행해진 저녁식사는 썩 유쾌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