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4 3-2. 누가 누굴 꼬셔? =========================
드워프 전사들은 여자의 목소리가 곧 왕의 목소리라도 되는 양 즉시 도끼를 거두고 문을 열어주었다.
드르르륵!
거대한 석문이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큼 벌어졌다.
로이스 백작은 드워프 전사들을 일부러 손으로 밀치며 성질을 부린 후 문 안으로 들어섰다.
갖가지 황금상과 금박으로 덮인 벽으로 이루어진 루드르의 방.
방 한가운데에는 금실로 짠 천이 드리워져 있는 침대가 있었다.
침대 너머로 촛불이 비친 드워프와 매끈한 곡선을 지닌 인간 여성의 실루엣이 비쳤다.
드워프는 당연 루드르 왕이었는데 그가 여성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는 모양새였다.
로이스 백작이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루드르 왕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대신 여인이 모든 실권을 가지고 있는 양 말을 꺼냈다.
“로이스 백작, 이 밤중에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제멋대로인 성격인 로이스 백작이지만 눈앞의 여인은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닌지라 바로 한쪽 무릎을 꿇었다.
“반드시 전해야 하는 일이라 심기가 불편하실 걸 알면서도 이리 찾아왔습니다. 사실은......”
로이스 백작은 낮에 로엘이 찾아온데다 공문의 허점을 이용하여 자신을 모욕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물론 로이스 백작이 사죄한 일은 쏙 빼놓았고 말이다.
얘기를 들은 여인은 공문의 허점보다는 로엘의 등장에 흥미를 보였다.
“후후,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젊은 성군이 직접 오신 거군요.”
“분명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텐데 어떻게 할까요?”
“소문대로의 사내라면 막아서더라도 의미가 없겠죠. 차라리 여기까지 오게 놔두세요. 마침 이 냄새 나는 드워프를 데리고 있기 지루했는데 잘 됐네요. 젊은 성군을 포로로 만드는 것도 재밌겠어요.”
대단해도 사내는 사내.
그리 말하고 싶은 건지 로엘이 왔다는 이야기를 듣고도 그녀의 목소리에서 즐거움이 듬뿍 배어나왔다.
금색 천에 비치는 여인의 옆얼굴에 기다란 초승달이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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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엘과 카넨은 광산 안을 순찰하는 드워프 전사들의 눈을 피해 흔들다리를 횡단하였다.
커다란 구멍 앞에 포진되어 있는 겐크 왕국 병사들.
두 사람은 약간 떨어진 곳에서 겐트 왕국 병사들을 살펴보았다.
“숫자는 서른 명인가. 십인장 이상급 지휘관은 없는 모양이군.”
“소란 없이 제압할 수 있을까요? 전부 일반병사들이라지만 30명쯤 되면 단번에 제압하긴 힘들어요.”
“이럴 때일수록 고전적인 방법이 잘 먹히지. 여기서 대기하고 있어.”
로엘은 몸을 숨길 것도 없이 대놓고 겐크 왕국 병사들에게 다가갔다.
그의 걸음걸이에 있어 어색함이나 머뭇거림 같은 건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광산 안에 주둔하고 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던 것 같은 걸음걸이였다.
당황해서 안절부절 못하는 카넨을 뒤로 한 채 로엘은 계속 걸어나갔다. 그리곤 하품을 해대고 있는 겐트 왕국 병사들에게 호통을 쳤다.
“이놈들! 로이스 백작께서 광산 정문을 지키고 있으라 했거늘 왜 아직도 이곳에 있느냐!”
누구인지 싶어 쳐다보려던 겐크 왕국 병사들은 직책이 높은 사람이라 여겨 고개를 숙였다.
예를 갖추는 그들에게 로엘의 얼굴을 자세히 확인할 틈은 없었다.
가뜩이나 어두워서 아는 사람도 자세히 살펴야 알아볼 수 있는 마당에 웬 모르는 사람이 나타나 호통을 쳐대고 있다.
겐크 왕국 병사들은 평소에 자주 보기 힘든 백인장급 이상의 인물이라 여겨 깍듯이 대하였다.
“광산 정문을 말입니까? 그런 명령은 전해 받지 못했습니다.”
“이런 망할 것들. 바로 전해라 일렀건만.”
“저기... 십인장님들 부를까요?”
“됐다. 그랬다간 괜히 너희들에게 불똥이 튈 것 아니더냐. 내가 나중에 따로 불러 조용히 얘기할 테니 너희들은 광산 정문 앞을 지키고 있거라. 로이스 백작님이 이 시간부로 광산출입 자체를 금하셨으니 상대가 누구건 간에 아무도 들이지 마라.”
“아, 네. 명을 받들겠습니다.”
겐크 왕국 병사들은 자신들의 고충을 알아주는 상관의 모습에 내심 기뻐하며 곧장 명령을 받아들였다.
그들은 로엘의 명령대로 광산 정문으로 향하면서 저희들끼리 대화를 나누었다.
“십인장들 나중에 깜짝 놀라겠는걸. 백인장께서 불시 순찰을 나올 줄 누가 알았겠어.”
“근데 우리 백인장님 원래 저리 젊은 목소리였나?”
“야, 말조심해. 못 알아봤다고 뭐라하실라.”
거리를 걷다가도 나는 모르는데 상대방이 반갑게 인사해오면 아는 사람인가하고 고민하지 않는가.
개방된 길거리에서도 그러할지언데 물 샐 틈 하나 없는 광산 안에선 더더욱 의심하기 힘들었다.
괜히 정체를 의심했다가 자신들을 배려해주는 백인장을 호랑이 교관으로 만들까 싶어 깊이 의심하지 않고 내려가는 병사들이었다.
병사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벗어나자마자 카넨이 어이없어 하는 얼굴로 걸어 나왔다.
“아니 안 먹히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랬어요?”
“말했잖아. 이럴 때일수록 고전적인 방법이 잘 먹힌다고.”
“정말 대단하시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네요.”
“그리폰 그만 태우고 할 일이나 하자.”
커다란 구멍에는 설치한지 얼마 되지 않은 걸로 추정되는 쇠창살이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쇠창살 사이로 대략 100명쯤 되는 드워프 장인들이 갇혀있는 게 보였다.
드워프 장인들은 별안간 병사들이 물러나는 것을 이상히 여기더니 그 뒤에 나타난 로엘에게 주목하였다.
로엘은 드워프 장인들의 시선을 받으며 발검을 행했다.
스걱!
뽑혀진 미스릴 검이 가느다란 선을 그었다가 다시 검집에 꽂혔을 때.
굵직한 쇠창살이 비틀어지며 일부분이 잘려나갔다.
만들어진 출구 사이로 드워프 장인 한 명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드워프 장인 중에서도 유달리 주름이 많고 백색의 털을 지닌 노인 드워프였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영문을 알 수 없어서 그런데 설명 좀 해주십시오.”
“난 엘리오스 킨 로엘. 드워프 왕국에 문제가 있는 걸 알고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왔어. 이번엔 내가 질문할 차례로군. 대륙 최고의 기술자들이 왜 이런 곳에 갇혀 있는 거야?”
“엘리오스 킨 로엘이라면 빌로스 왕국의 그... 인간의 예법은 잘 모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저희가 갇힌 이유를 물으셨죠. 일단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한 여자 때문입니다.”
“여자?”
노인 드워프는 놈이란 자로 벌써 100년째 장인 노릇을 하고 있는 장인 중 장인이었다.
놈이 말하길 반 년 전에 루드르 왕이 겐크 왕국의 의뢰를 받고 황금 대신 한 여자를 받았다고 한다. 여자는 소문이 나지 않게 굉장히 큰 무쇠상자에 넣어진 채로 운반되었으며 드워프 장인들도 제대로 본 적은 없었다.
드워프의 여자외모기준은 인간과 다르다.
드워프 장인들로선 루드르 왕이 왜 인간여자를 받아들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호기심에 받아들이고 며칠 데리고 있다가 질려서 돌려보낼 거라 생각했지만 완벽한 오산이었다.
그 여자는 루드르 왕을 완전히 휘어잡았고, 루드르 왕은 그녀에게 푹 빠져 그녀의 말이라면 곧이곧대로 듣는 꼭두각시가 되어버렸다.
사태의 심각함은 한 달 전에 나타났다.
별안간 루드르 왕이 드워프 장인들을 불러다 선언하길.
[이제부턴 겐크 왕국의 의뢰만 받아들이겠다!]
...라고 하는데 드워프 장인들이 받아들일 리가 있겠는가.
수 천년 동안 오는 의뢰 막지 않는다는 이념을 고수해온 장인들에게 손님을 가려 받는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루드르 왕은 드워프 장인들을 모조리 감금시켜버렸고 굴복할 때까지 꺼내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한다.
제공되는 건 하루에 1번 주는 작은 빵조각과 물 한 컵뿐.
거친 광산 일로 단련된 장인들이라 할지라도 슬슬 한계에 다다랐을 즈음에 로엘이 온 거였다.
로엘은 사정을 이해한 후 놈의 이마를 가볍게 밀어 도로 쇠창살 안에 들여보냈다.
“대강 사정은 알았어. 힘들겠지만 조금만 더 그곳에 있도록 해. 갑자기 너희들이 풀려나면 드워프 전사들과 싸우게 될지도 모르니까.”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이 상황을 타개해야지. 겐크 왕국 놈들 뜻대로 되게 놔둘 순 없으니까. 겸사겸사 선배 국왕으로서 너희 왕에게 덕담도 한 마디 해주고 말이야.”
드워프 장인들이 이해하지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드르 왕이 즉위한지 10년차이건만 이제 겨우 1년차인 로엘이 왜 스스로를 선배라 칭하는지 알 수 없었다.
로엘은 의아해 하는 드워프 장인들을 뒤로 하고 카넨과 함께 광산 최하층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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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루드르의 방에선 여전히 루드르가 여인의 무릎을 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