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0 3-1. 어디서 수작질이야? =========================
3-1. 어디서 수작질이야?
야크트 마을을 지난 이후부턴 평온한 여행길이 되었다.
물론 여기 평온한 여행길이라는 건 신변에 위협을 받는 일이 없었다는 뜻이다.
헤프닝면에서는 행복한 두통을 여러 번 겪어야 했다.
먼저 베르나트의 정력강화 덕분에 매일 해도 지치지 않게 되어 엘로나가 로엘의 몸을 염려하지 않고(?) 마음껏 덤벼온다는 점.
두 번째론 안 그래도 가뜩이나 준수한 외모인데 멋쟁이 재밍까지 걸려 마주치는 여자들마다 잘해준다는 점.
특히 멋쟁이 재밍의 효과로 인해 로엘이 이득 본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머무르는 귀족 저택마다 여귀족들이 있는 거 없는 거 다 챙겨주려 하고, 어쩌다 시가지에서 차창이라도 열면 여자들이 꽃을 꺾어다 바치느라 난리법석이었다.
원래 킬더 왕국에선 집집마다 화단을 만들어 꽃을 키우는 게 일상화되어 있는데 로엘이 지나친 마을마다 화단의 꽃이 모두 꺾여 꽃의 나라라는 게 무색해질 정도였다.
오르비르 산이 있는 에메랄드 산맥 끝자락에 도착했을 때.
로엘의 마차는 여자들이 하도 꽃을 꽂아두어서 스스로 꽃을 피우는 요정마차처럼 되어있었다.
로엘은 마차 창문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며 전방에 펼쳐진 높고 험준한 오르비르 산을 쳐다보았다.
“저게 드워프 왕국이 있는 오르비르 산이구나. 저 산 전체가 왕국인 거지?”
“네, 마탑과 마찬가지로 중립지역 중 하나죠.”
대륙에는 총 10개의 중립지역이 있었다.
브리튼 교의 총본산 케시어.
마법사들의 탑이 있는 마탑.
드워프 왕국이 있는 오르비르 산.
생명의 나무를 중심으로 펼쳐진 엘프의 숲,
용왕과 3천 인어가 헤엄치고 있는 해저섬.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모른다는 공중도시.
설인, 설녀가 눈집을 짓고 사는 프로즌 마운틴.
종족불허 하프 혈통이 모여 만든 자유의 도시 빌렝턴.
우리도 좀 살자 이것들아, 고블린의 왕국인 고블린 고원.
죄인 모집합니다, 평생 가. 족같이 함께하실 분. 대륙 최악의 흉악범들을 가두는 지저감옥.
이 10개는 중립지역으로서 함부로 건드렸다간 중립협정에 의해 왕국들이 명분 없이 침공할 수 있게 된다.
10개의 중립지대 중 오르비르 산은 여러 모로 많은 구설수 속에서 설립된 지역이다.
원래 드워프들은 자기 땅이 없던 자들이었다.
고대 때부터 자신들의 땅 없이 유랑하다가 광산을 발견하면 개발하여 채굴하고, 무기를 만들어 주변에 있는 종족과 물물교환을 하며 지내왔던 종족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수가 급증하면서 나라가 생기고 국경이 생겼고 드워프들에게도 정착할 땅이 필요해졌다.
브리튼 교에서는 드워프 족을 위해 인간이 없으면서도 드워프에겐 최고인 산을 중립지대로 선정해주었다.
원래 겐크 왕국의 땅이었지만 겐크 왕국에서도 거주민이 없어 방치해두던 산.
그 산이 바로 오르비르 산이었다.
이제는 드워프 왕국이 건설되어 중립지대가 된 땅이었다.
오르비르 산의 위용을 충분히 감상한 로엘은 마차 안으로 고개를 들였다.
“드워프 왕국에 들어가면 더 이상 고생할 일은 없겠지.”
“왜요?”
“왜냐니. 여태까지 겪은 일을 생각해봐.”
멋쟁이 재밍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드워프들은 대부분 남자인데다 드워프 남녀들은 발정기가 따로 있어 1년에 한 번만 욕정이 생긴다 하니 여태까지처럼 여인행렬로 이득 및 고생할 일은 없었다.
엘로나는 로엘의 말을 알아듣곤 입을 가리며 조신하게 웃었다.
“후후, 한 눈 팔지 않아줘서 고마워요.”
낮에 보면 정말 현모양처에 요조숙녀 그 자체다.
로엘은 밤의 엘로나, 그러니까 로엘을 쥐여 짜낼 기세로 덤벼오는 엘로나의 모습을 알고 있었다.
정력강화능력을 부여 받은 로엘을 밤새도록 상대할 정도이니 그것만 해도 말 다했다.
여자의 하루는 밤에 시작된다는 말도 있잖은가.
지금 현모양처 모습 뒤에 180도 다른 모습이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로엘은 창틀에 턱을 괴며 얌전히 대꾸할 뿐이었다.
“엘로나가 워낙에 예뻐서 다른 여자에게 눈이 안 갈뿐이야. 그런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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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비르 산은 3단계 구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1단계는 산 능선 부분으로 거주민은 대부분이 인간이었다. 드워프에게 의뢰를 하러 온 자들이 머물 수 있게 여관을 운영하거나 드워프에게 물건을 받아 대륙 곳곳으로 팔러 나가는 상인조합들이 모여 있는 구간이었다.
2단계는 산기슭 부분인데 드워프들이 5겹으로 이루어져 있는 성벽을 쌓아 출입을 관리하는 곳이었다. 드워프 특유의 기술로 만들어져 7써클 마법 플레임 버스터에도 한 번에 무너지지 않는 성벽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드워프들은 드워프 성벽 안쪽의 산기슭에 살고 있었다.
3단계는 오르비르 산 안쪽으로 들어가야 나오는 오르비르 광산이었다. 산 전체가 철광산인지라 그를 개발하여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고 광산 깊숙한 곳에는 현 드워프 왕인 루드르의 왕궁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로엘을 실은 마차는 1단계 구간에 있는 인간의 마을에 들어섰다.
로엘은 빌로스 사절단이 머무르고 있는 저택 수준의 여관에 들어섰다.
경비병까지 갖추고 있는 고급 여관에 들어선 로엘과 엘로나는 마차에서 내려 커다란 여관 로비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에서 로엘이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던 빌로스 사절단이 로엘을 알아보곤 부리나케 뛰쳐나왔다.
사절단의 대표로 뽑혔던 콘라드 남작이 헐레벌떡 뛰어나와 로엘을 맞이했다.
“먼 걸음 행차하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전하. 제가 능력이 모자라 전하를 여기까지 오게 하셨으니 이 못난 신하를 꾸짖어주십시오.”
“여긴 빌로스가 아니니까 적당히 해둬. 남작도 어쩔 수 없으니까 대기한 거잖아.”
“전하의 하해와 같은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적당히 해두라니까 거참 말 안 듣네.”
“아, 죄송합니다. 전하의 방은 제일 좋은 방으로 잡아두었습니다. 그런데 옆에 계신 분들은......”
“엘로나, 옆에 있는 기사는 카넨.”
“엘로나 여왕님과 카넨 경이셨군요. 미리 전해 듣지 못해 방을 잡지 못했습니다. 지금이라도 알아보겠습니다.”
“엘로나는 나와 함께 방을 쓰면 되니까 카넨의 방만 따로 잡아둬.”
로엘로선 자연스러운 판단이었지만 콘라드 남작 입장에선 매우 경사스럽게 다가오는 말이었다.
축하의 말을 올리려던 콘라드 남작이지만 로엘이 그러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을 주어 입을 다물게 했다.
콘라드 남작이 신속하게 카넨의 방까지 잡아주면서 로엘을 포함한 세 사람은 각자의 방에 들어가 몸가짐을 정돈했다.
제일 좋은 방을 잡았다는 말이 사실인지 로엘의 방은 스위트룸 그 이상이었다.
선조들의 기술을 온전히 물려받은 순수 드워프들이 지어준 건물인지라 방 안에 개울물을 끌어올린 작은 수영장이 있었고, 침실에는 단단하기가 다이아몬드 못지않다는 발열석을 깔아놓아 벽난로가 없음에도 따뜻했으며, 찬장에는 여관 측에서 준비한 각종 와인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휴양 온 기분으로 쉬어도 되겠지만 실제로는 휴양 온 게 아니기에 로엘은 곧바로 콘라드 남작을 불렀다.
로엘은 부르자마자 바로 달려온 콘라드 남작을 앞에 두고 본제에 들어갔다.
“드워프 왕국에 의뢰를 넣을 수 없게 되었다 들었어. 자세히 말해봐.”
“저희가 여기 도착했을 때 이미 2단계 구간에서 출입금지령이 떨어진 후였습니다.”
“드워프 킹의 명령으로?”
“네, 루드르 왕이 직접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아직 이유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아디만티움을 맡긴다고 전했는데도 출입을 못 했다 이거지?”
“물론 전했습니다. 아디만티움이건 테리토늄이건 전부 안 받아들이겠답니다.”
“광물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종족이라 들었는데 아디만티움도 거절했다 이건가. 점점 더 이유가 궁금해지는 걸. 드워프 성벽으로 가봐야겠어. 안내해.”
직접 가서 협상을 해볼 참이었다.
그런데 콘라드 남작이 쭈뼛쭈뼛 눈치를 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전하, 지금 드워프 성벽으로 가는 길에 겐크 왕국 병사들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로엘은 나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짧은 질문을 던졌다.
“이유는?”
“드워프들의 요청을 받아 성벽으로 가는 길목에 지원병을 파견했다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정말 드워프의 요청을 받고 진을 친 거라면 중립협정에 포함되니 함부로 건드리기 힘들었다.
하지만 다른 왕국도 아닌 겐크 왕국이 드워프 왕국으로 가는 길에 진을 쳤다.
겐크 왕국이 대륙통일의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아는 로엘 입장에선 꿍꿍이가 있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로엘은 깊이 고민할 것도 없이 검과 망토를 챙겨 바깥으로 향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캐물어 봐야 아는 법이지. 따라와, 뭐든 답이 안 나올 땐 직접 부딪치는 게 최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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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엘은 엘로나를 여관에 놔두고 콘라드 남작만 대동한 채 산을 타고 올라갔다.
콘라드 남작은 로엘의 호위를 자처하며 검 손잡이에 손을 올린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염려 마십시오, 전하. 전하는 제가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로엘이 알기로 콘라드 남작은 검술을 배운 적 없는 문관에 불과했다.
전투 한 번 해본 적 없는 그가 대외적으로 마나 익스퍼트인 게 확정된 로엘을 지킨다는 게 우습긴 했지만 그래도 그 의기는 높이 살만 했다.
드워프가 닦아놓은 돌계단을 오르고 있는데 앞길을 막고 있는 기사 1명과 병사 10명 보였다.
기사의 투구에는 녹색깃이 달려있었다.
겐크 왕국의 기사들은 투구의 깃으로 직위를 표시하는데 녹색깃은 십인장을 의미했다.
로엘이 올라오는 걸 본 기사가 검을 뽑았다.
“멈춰라. 이 앞으론 허가 받은 자 외엔 지나갈 수 없다.”
로엘은 빌로스 왕가의 문양이 새겨진 금패를 꺼내보였다.
“빌로스 왕국에서 온 엘리오스 킨 로엘이다. 들소의 문양을 짊어진 기사여, 문양을 알아보았다면 길을 열어라.”
금패에 새겨진 독수리 문양.
빌로스 왕가의 인물임을 증명하는 물건이었다.
겐크 왕국의 기사라면 아지스가 대륙회담에서 로엘을 무시했다가 굴욕을 받은 사건을 모를 리가 없었다.
녹색깃을 단 기사는 검을 도로 집어넣으며 보여주기 식 예의를 갖추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로엘 전하. 아시고 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드워프 왕국의 요청으로 성벽으로 가는 길을 지키고 있는 중입니다.”
“드워프 왕국의 드워프 성은 철벽과 다름없다 들었는데 왜 겐크 왕국에게 요청했는지 모르겠군.”
“설마 제가 거짓을 고하고 있다 의심하시는 겁니까?”
“궁금해서 혼잣말을 했을 뿐이야. 민감하게 반응하는 걸 보니 더욱 의심스러운 걸? 드워프 왕국의 공문을 보여줄 수 있을까?”
기사는 로엘에게 제시할 공문이 없는지 주춤하다가 변명거리를 늘어놓았다.
“제겐 공문이 없습니다.”
“그럼 누가 공문을 가지고 있지? 책임자를 불러.”
“로이스 백작님이 가지고 계시는데 지금 부재중이시니 내일 다시 와주셨으면 합니다.”
로엘은 콘라드 남작을 흘깃 보았다.
콘라드 남작이 로엘의 눈길을 읽어내곤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콘라드 남작이 찾아왔을 때도 겐크 왕국의 로이스 백작을 빌미로 쫓아냈던 것이다.
아무리 타국의 귀족이라 할지라도 남작이 타국의 백작을 부르라 말하는 건 힘들었다.
그래서 콘라드 남작도 어찌하지 못하고 본국에 서신을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타국의 국왕이 찾아왔으니 로이스 백작의 이름값으론 물릴 수가 없었다.
겐크 왕국의 기사가 궁여지책으로 짜낸 게 부재중이라는 핑계였다.
허나 거기에 순순히 넘어갈 로엘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