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5 2-7. 방문 =========================
2-7. 방문
여전히 촛불 하나만이 켜져 있는 방 안.
어둠 속에서 사람 실루엣 하나가 아른거렸다.
그는 손 안에서 호두를 굴리면서 다소 거칠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겐크 왕국이 루엔과 마력의 결정체를 잃었다고 했나?”
보고를 올린 로브 사내가 고개를 조아렸다.
“빌로스 왕국이 루엔을 빼내간 것 같습니다. 게다가 맥셀이 로엘이 루엔을 취하는 걸 인정한 모양입니다.”
맥셀이 공인한 사이라는 게 의미하는 바는 컸다.
마탑이 로엘의 손에 떨어진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어둠 속 사내는 일이 하나둘씩 꼬이고 있음을 직감했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이상하군. 레이아 건도 그렇고 루엔 건도 그렇고 뭔가 꼬이고 있어.”
원래 사내의 계획대로라면 레이아 암살시도로 인해 울크가 나머지 4왕국을 의심하게 되고 대륙회담이 엉망이 될 예정이었다. 거기에 아지스가 골렘을 개발하여 대륙전쟁을 시작하게 되는 시나리오를 그렸었다.
그런데 현실은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두 사건의 도화선이 되는 두 여자가 로엘에게 흘러들어갔지 않은가.
어둠 속 사내는 일이 꼬이고 있는 게 로엘 때문이라 여겼다.
“그 작자가 모든 걸 일그러뜨리고 있군.”
“제거할까요?”
“경솔하게 판단하지마라. 맥셀이 인정할 정도라면 소문대로 정말 마나 마스터일 가능성이 농후해. 이 방법은 쓰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군.”
“그 방법이라면 설마......”
어둠 속에 있던 사내가 의자를 뒤로 밀며 몸을 일으켰다.
“배를 준비해라. 내가 직접 신대륙에 다녀오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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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릉!
초겨울치곤 며칠 간 따뜻하다 싶더니 별안간 폭우가 쏟아졌다.
빗소리가 테헤란의 활기를 먹어치우고 있는 가운데 빌로스 왕궁 안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기름먹인 토끼가죽 로브를 뒤집어쓴 자 한 명이 주변의 눈치를 살피며 왕궁 뒷마당을 향해 뛰어갔다.
비를 맞는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우직하게 순찰을 돌고 있던 블랑코가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하였다.
블랑코는 왕궁 성벽 위를 신속하게 달리며 콧등에 고인 물을 털어냈다.
‘수상한 자로군. 첩자일 수도.’
로브를 쓴 자는 제5별궁 뒷마당에서 마찬가지로 로브를 쓴 자와 접촉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 밀랍을 칠한 양피지가 오갔다.
뭔가 중요한 정보를 빼내어 외부인에게 넘기는 현장 같았다.
블랑코는 즉시 성벽에서 뛰어내려 잔디밭에 착지하곤 들고 있는 쇠도끼를 겨누었다.
“꼼짝마라! 신성한 왕궁에서 첩자질이라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구나!”
왕궁에 온 이후로 눈대중으로 귀족들의 말투를 배워 써먹는 블랑코였다.
하지만 아직은 어울리지 않아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외부인에게 양피지를 넘긴 자가 블랑코를 보더니 가느다란 웃음을 흘렸다.
“후후, 저예요 저.”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였다.
왕궁에 출입하는 남자들이야 블랑코에게 금방 익숙해졌지만 여자들은 아직 블랑코의 무서운 외견을 어려워하는 편이었다.
걔 중에 유일하게 블랑코에게 먼저 다가와 주는 여자가 있었는데 바로 궁녀 에아였다.
털털하고 장난기 많은 성격 때문에 궁녀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좋아 궁전 내부의 마당발이라 할 수 있었다.
블랑코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는 역할을 맡고 있기도 했는데 음식을 가져다줄 때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친근하게 구는 여자이기도 했다.
전사는 주어진 임무에서 눈을 떼면 안 된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는 블랑코에겐 그저 수다스런 여자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블랑코는 에아임을 확인한 후에도 도끼를 내리지 않았다.
“에아, 지금 뭐하는 것이냐. 대답 여부에 따라 널 구속하겠다.”
외부인이 블랑코의 외견에 압도되어 걱정스레 에아에게 말을 하였다.
“이봐, 괜찮은 건가?”
“문제없어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잠시만 양피지를 줘보세요.”
한 번 줬던 양피지를 잠시 돌려받은 에아는 블랑코에게 접근하며 배시시 웃었다.
“저 분은 킬더 왕국에서 파견되어 오신 분이세요. 킬더 왕국 아시죠?”
“빌로스 북쪽의... 흐음, 분명 내 주군의 아내 될 분이 다스리는 나라인 건 알고 있다.”
“엘로나 여왕님이 로엘 전하의 소식을 자세히 알고 싶어하신다 해서 개인적으로 정보를 보내주려던 참이에요.”
에아가 양피지를 펼쳐서 내용을 보여주었다.
양피지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로엘 전하 관찰 일지. XX월 XX일. 오늘은 아침부터 레이아 공주님이 화를 내셨다. 루엔이 밤사이에 멋대로 침대에 끼어들어 전하의 옆자리를 차지한 모양이다. 아직 루엔과 관계하지 않으셨지만 이 상태로 가면 언제 해도 이상할 게 없다. XX월 OO일. 전하의 침실에 깔 새로운 시트와 사일런스 마법 물품이 대량으로 도착했다. 쉬쉬하고 있지만 궁녀들 사이에선......]
에아는 별로 문제 될 거 없는(?) 내용이란 걸 확인시켜주며 블랑코를 납득시키려 했다.
그런데 블랑코는 유심히 양피지를 보더니 붉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전혀 모르겠군. 뭐라고 적힌 건지 말해주지 않겠나?”
아직 인간이 사용하는 대륙공용어에 대해선 배우지 않은 블랑코였다.
에아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으며 양피지를 접어 외부인에게 넘겨주곤 블랑코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속닥속닥
일부러 야릇함을 과장하여 설명을 해주었기에 블랑코는 멋쩍어하며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곤 오크 특유의 헛기침을 하였다.
“크릉, 내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었군.”
“후후, 알아주셔서 감사해요. 그나저나 아직은 글을 읽지 못하시나 보네요.”
“가끔씩 더프가 가르쳐주긴 하는데 머리가 돌이라서 새겨지지 않더군.”
“그럼 내일부터 제가 가르쳐드릴게요. 집에 동생만 5명이라 어린애 가르치는 거 하나는 잘하거든요.”
“나는 전사다. 어린애 취급은 그만둬주지 않겠나?”
“흐응~ 전사요? 조금 야한 말 들었다고 안절부절 못하는 전사라~.”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웃고 있는 에아.
그녀를 바라보던 블랑코는 뭉글뭉글해지는 기분이 들어 곧바로 마음을 다잡았다.
일단 첩자가 아니라는 걸 확인했으니 외부인은 갈 길 가라고 보냈고, 그 후에 블랑코가 웃고 있는 에아에게서 등을 돌리며 한 마디 날렸다.
“글은 역시 더프에게 배우도록 하지.”
“에이~ 왜요? 잘 가르쳐줄 수 있는데.”
“나와 친하게 지내면 다른 궁녀들이 꺼려할 거다.”
오크가 인간 여자와 잘 지내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오크는 오크 나름대로 전사의 감이 무뎌질 테고, 여자는 여자 나름대로 안 좋은 시선을 받을 테니까.
냉정하게 거리를 두며 도로 성벽 위로 올라가려던 차에 블랑코의 몸에 로브가 씌워졌다.
에아가 자신의 로브를 벗어 블랑코에게 씌워준 것이었다.
로브를 벗은 것 때문에 에아의 몸이 흠뻑 젖었지만 그녀는 상관치 않고 블랑코의 뒤통수를 강하게 두드렸다.
“아하하! 마당발인 제가 왕따라도 당할까 싶어서 그래요? 덩치는 산만한데 의외로 소심하네요. 됐으니까 내일 봐요.”
“로브를 주면 네가......”
“어차피 들어가서 목욕하고 잘 거거든요. 아, 로브는 왕궁 비품이니까 안 돌려주셔도 돼요. 그럼 열심히 해요.”
에아는 젖어서 눌러 붙은 곱슬머리를 쓸어 넘기며 궁녀가 쓰는 제5별궁 안으로 들어갔다.
몰아치는 비바람 속에서 블랑코는 온기가 남아 있는 로브 안쪽에 자신의 몸에 묻은 물방울이 스며드는 걸 가만히 감상하였다.
///
드디어 루엔의 연구실이 완성되었다.
라이너리 백작이 특히 힘써 추진한 덕분에 상당히 빨리 준비되었다.
연구실 안에는 루엔이 요구한 각종 마법물품과 재료 외에도 왕궁창고에 쓸 일 없이 뒹굴고 있던 잡동사니까지 들여놓았다.
루엔은 카펫을 깐 나무바닥과 돌을 쌓아 만든 화덕, 루엔의 키높이에 맞춰 제작된 낮은 선반들을 보며 눈빛을 반짝였다.
“마탑 공방보다 좋아.”
새 집에 오면 집안 구조부터 확인하는 고양이마냥 복층으로 이루어진 연구실 안을 돌아다니는 루엔이었다.
로엘은 루엔이 기뻐하는 걸 흐뭇하게 쳐다보면서 라이너리 백작에게 수고의 말을 건넸다.
“고생했어. 빨리 완성한 것치곤 제대로 만들었는걸?”
“원래 있던 건물을 청소하고 물건만 배치했을 뿐입니다. 원래 더 빨리 만들 수 있었는데 벽에 방음처리를 하느라 일주일 더 걸렸습니다.”
“방음처리는 왜?”
“아무래도 공방이 완성되면 루엔 양이 대부분 이곳에서 지내시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말입니다. 복층 위에 침대를 놓아두었으니 편하실 때 쓰십시오.”
라이너리 백작이 무엇을 배려하여 침대를 놓았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로엘은 너무 세심한 배려라 여기면서도 불쾌히 여기진 않았다.
불쾌히 여길 리가 없었다.
“흠흠, 아직은 가르칠 게 많으니까 너무 앞서가진 말도록.”
“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절제된 남자토크가 오가던 중 로엘이 연구실 구석에 놓인 검은색 금속덩어리 하나를 발견했다.
오크평원에서 얻은 아디만티움이었다.
“아디만티움도 가져다 놨네.”
“혹시나 루엔 양이 쓰시지 않을까 싶어 한 덩이만 가져다놨습니다.”
오크평원에서 아디만티움을 얻긴 했는데 제련할 수 있는 기술이 없어 곤란하던 차였다.
토벌 이후 왕궁에 귀환하자마자 드워프 왕국이 있는 오르보르 산에 사람을 보냈으나 아직 답장이 없었다.
“드워프들에게선 아직 답장이 없어?”
“안 그래도 보고를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오늘 아침에 편지 한 장이 도착했습니다. 오르보르 산에 파견한 사절단에게서 온 편지입니다.”
로엘이 막 편지를 뜯어보려던 차에 레이아가 연구실 안으로 들어왔다.
레이아는 연구실 내부를 둘러보더니 심통난 얼굴로 비꼬듯 말했다.
“흐응~, 엄청 잘 꾸며놨네. 예의 모르는 꼬맹이한테는 너무 과분한 걸?”
레이아의 목소리를 들은 루엔이 복층 난간 위로 머리를 빼꼼 내밀며 덤덤한 목소리로 반격했다.
“내 공방이야. 바보는 들어오지마.”
“너야 말로 나랑 로엘이 잘 때 들어오지 말라고. 문 잠가놓는데 항상 어디로 들어오는 거야?”
“만능열쇠 있어.”
“그런 건 또 언제 만들었데. 내놔. 다시는 그런 물건 못 쓰게 할 거야.”
루엔이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열쇠 하나를 레이아에게 던졌다.
레이아는 열쇠를 받으려다 실패하여 이마에 얻어맞고 말았다. 이마를 문지르면서 인상을 쓰긴 했지만 그래도 루엔이 순순히 열쇠를 내놓은 것에 만족하였다.
“오늘은 말 잘 듣네. 평소에도 이렇게 말 잘 들으면 얼마나 좋아.”
찰그랑
복층에서 들려오는 쇠 마찰 소리.
레이아는 주운 열쇠고리를 검지에 끼우고 빙글 돌리다가 복층을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난간에 머리를 빼꼼 내밀고 있던 루엔이 손을 들어보였다.
그녀의 손에는 고리에 잔뜩 꿰여져 있는 만능열쇠가 있었다.
루엔은 무표정을 유지한 채 손으로 입을 가리며 짧고 강한 소리를 내었다.
“풉.”
빠직!
레이아의 뇌리에서 무언가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레이아는 팔을 걷어붙이며 냅다 복층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이게 지금 누굴 놀려? 너 이리와! 오늘이야 말로 혼줄을 내주겠어!”
“괴수 출현. 큰일.”
“누가 괴수야!”
복층에서 두 여자가 엎치락뒤치락 노닥거리는 사이 로엘은 한숨을 내쉬며 편지를 뜯어보았다.
급하게 썼는지 편지지에는 깃펜으로 휘갈겨 쓴 듯한 글씨가 가득했다.
그 중 답장이 늦은 이유를 포함하여 눈에 띄는 문구가 있었다.
[이곳에 도착한지 일주일 동안 광산 문을 두드렸으나 드워프들이 문을 열어주지 않습니다. 이유를 알아보려 해도 대화 자체를 시도할 수 없어 의뢰를 넣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대기 혹은 복귀 명령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전생과 전전생에서 드워프들에게 문제가 생긴 적이 있던가?
로엘의 기억 속에는 없다.
인간의 의뢰를 거절하는 경우는 있어도 문을 닫아놓는 적은 없는 드워프들이었다.
그런 드워프들이 삶의 의미나 다름없는 광산일도 제쳐둔 채 숨어 있는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로엘로선 지켜야 할 사람이 늘어나고 있는 만큼 아디만티움으로 로얄 기사단의 장비를 만들어 왕궁 수호에 보탬이 되게 하려하고 있었다.
귀한 광물을 썩혀둘 순 없으니 드워프들에게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알아낼 필요가 있었다.
로엘은 직접 오르보르 산에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오르보르 산에 다녀오겠어.”
“그럼 킬더 왕국을 지나게 되겠군요. 레이아 공주님을 데리고 가실 겁니까?”
마침 복층에 놓인 킹 사이즈 침대를 발견한 레이아가 복층 위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로엘! 이 침대는 뭐야! 너 이제 침실 놔두고 여기서 자겠다 이거야?”
또 방방 날뛰며 바가지를 긁으려는 레이아였다.
로엘은 빠르게 바깥으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안 데리고 가는 게 낫겠어. 쟤한테 전권 맡긴 걸로 칠 테니까 얼른 마차 준비해.”
“아, 예. 즉시 준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