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4 2-6. 등가교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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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접실에서 벌어진 검과 화염의 대결은 빌로스 왕궁에서 벌어진 전투 중 가장 치열하면서도 가장 조용한 전투가 되었다.
역사에 남지 않을 전투를 벌인 두 거물은 검댕을 씻어내느라 데운 물을 몇 바구니나 써야했다.
목욕 이후, 로엘이 루엔을 납치했다는 건 결국 맥셀의 억측이었음이 드러났기에 맥셀이 오해를 인정하면서 원만하게 마무리되었다.
잘 풀린 것 같기도 한데도 로엘은 이번 사건이 많이 일그러져 있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먼저 루엔이 가출한 이유가 걸린다.
이토록 맥셀이 루엔을 아끼고 사랑하는데 뭐하러 가출한 걸까?
두 번째론 루엔은 빌로스 왕궁이 편하고 로엘이 마음에 들어서 남겠다고 했는데 어디서든 태평하기 그지없는 그녀가 유독 빌로스 왕궁을 고집할 이유가 있을까?
마지막으로 아무리 오해라 한들 갑자기 결혼 얘기로 건너뛸 필요가 있었을까?
여태까지 많은 어긋남을 보아왔지만 이번 사건에선 특별히 많은 곳이 어긋나 있었다.
마치 다른 시간대에 일어난 일을 조각내어 한 곳에 모아놓은 것처럼 말이다.
원래 일어나야 할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된 것과 관련이 있는 걸까.
다툼 자체는 원만하게 해결됐지만 로엘은 마음 한구석에 찜찜함을 안은 채 맥셀을 서재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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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의 영향 때문에 피곤할 텐데도 불구하고 로엘과 맥셀은 로엘의 서재에서 새로이 자리를 가졌다.
이번에는 본래 용건인 검은 구슬을 살펴보기 위한 자리였다.
서로 어느 정도 데미지가 남아있기에 술 대신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었다.
맥셀은 로엘이 내민 검은 구슬을 테이블 위의 촛대 위에 가져다 대며 유심히 살폈다.
“흠, 쉽게 볼 수 있는 물건은 아니군.”
“알아보시겠습니까?”
“잠시만 기다려보게. 나도 기억이 가물가물하구먼. 분명 예전에 본 고대서적에서 이와 비슷한 것을......”
맥셀도 직접 본 적은 없는 물건인지 기억을 더듬다가 결국 물건의 정체를 기억해냈다.
“아, 기억났네. 이건 반영구 회로구먼.”
“반영구 회로?”
“고대의 기술일세. 특정 마법을 건 회로를 만들어 생명체의 혼에 새기는 기술이지. 회로가 새겨진 혼은 특정현상을 겪게 된다네.”
“예를 들면 환생이나 회귀 같은 것 말입니까?”
“알고 있었나?”
“아뇨, 이건 제가 오크평원을 토벌할 때 얻은 물건입니다. 한 오크가 죽기 전에 자신은 리치의 환생이라 말하더군요.”
“이 회로에 담긴 현상은 환생이었나 보군.”
“반영구 회로는 보통 무슨 목적으로 사용되는 겁니까?”
“알 수 없지. 반영구 회로라는 게 여러 조각을 만들어 조각을 다 모았을 때 발동하도록 되어 있으니까. 회로가 다 모일 때까진 특정현상이 반복되는 걸로 아는데 회로가 새겨진 본인들 외엔 딱히 신경 쓸 필요 없는 물건이기도 하지.”
왜 자꾸 회귀가 반복되나 했는데 로엘에게도 반영구 회로가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엘에게 새겨진 반영구 회로는 두말할 것도 없이 회귀다.
대륙통일을 해선 안 되는데 해버려서 회귀가 되는 것이 틀림없었다.
누가 로엘의 혼에 회로를 새긴 걸까?
반영구 회로가 보이는 비정상적인 현상을 감안하면 적어도 인간의 수준에서 만들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회귀를 막을 구체적인 방법이 보였다는 거다.
로엘은 해결책을 확고히 해두고자 맥셀에게 질문을 날렸다.
“반영구 회로는 회로 소유자 전원이 죽어서 구슬로 모여야 충족됩니까?”
너무나도 진지하게 날아드는 질문에 맥셀이 로엘을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그가 입을 연 건 시계의 분침이 움직일 즈음이었다.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문헌에 따르면 회로를 가진 자 한 명이 나머지 회로를 전부 모아야 하는 걸로 알고 있네. 꼭 죽여야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군. 자세한 자료는 마탑에 있는 고대서적을 좀 더 살펴보면 나올 게야.”
“알아봐주십시오. 부탁드리겠습니다.”
“내가 폐 끼친 것도 있고 하니 그 정도야 얼마든지 해주겠네.”
회귀를 막으려면 로엘 본인이 나머지 반영구 회로를 모아야한다.
반영구 회로의 존재를 알게 된 맥셀이 이제야 납득이 된다는 양 저 혼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군. 그런 거였나.”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루엔이 가출하게 된 이유 말인데 사실은 사소한 말다툼이었다네. 가출까지 할 일은 아니었지. 반영구 회로가 나를 자네에게 인도하기 위해 주변 상황을 조금씩 어긋나게 만든 것일 수도 있네.”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로엘도 국왕의 자리에 오르지 않으려고 수를 쓸 때마다 상황이 격변하면서 로엘에게 유리한 상황이 된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회귀를 반복하면서 조금씩 반영구 회로를 모을 수 있는 방향으로 이끌리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로엘이 깊은 생각에 빠져 있자 맥셀은 검은 구슬을 로엘에게 돌려주며 조언을 해주었다.
“자네가 무슨 고민을 안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만 말해두겠네. 살아간다는 게 항상 정렬하면서 살아야 하는 건 아니라네. 어긋난 것은 어긋난 것대로의 즐거움이 있지. 어떤 때는 정리하고, 어떤 때는 어긋난 상황을 유지하면서 그 경계선을 잘 타도록 하게나.”
루엔만 관련되면 별의별 상상을 다하는 팔불출 노인이지만 그 외에는 마탑의 수장답게 관록을 보여주고 있었다.
너무 깊이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로엘의 고민을 짐작하여 필요한 말을 해주고 있었다.
로엘은 끝에 뭐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회로를 모으는 쪽으로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맥셀의 말마따나 정렬하는 게 그리 좋지 않은 선택이라면 어긋난 것을 유지하며 나아가는 방법을 찾으면 그만이다.
이로써 용건은 끝났다.
오늘 격하게 움직인 것도 있고 하니 자리를 파하고 쉬려던 차에 맥셀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탁자를 두드렸다.
“어딜 가나. 자네 용건만 끝내고 일어나면 안 되지.”
“따로 할 말이라도 있으십니까?”
“당연히 있다마다. 우리 루엔을 거두기로 했지 않은가. 당당하게 프로포즈 해놓고 얼렁뚱땅 넘어가면 쓰나. 내 생각해봤는데 왕비는 너무 짊어질 게 많으니 후궁이라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단, 우리 루엔을 가장 많이 신경 써줘야 하네. 우리 루엔이 말이야 몸매는 조금 빈약하지만......”
그날 밤, 맥셀은 자신이 생각하는 루엔의 장점을 늘어놓느라 밤새도록 로엘을 붙잡고 있었다.
팔불출을 뛰어넘은 팔불출에게 붙잡힌 로엘은 정말로 어긋난 삶이 괜찮은 건가하고 심각하게 고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