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0 2-5. 천재는 다 괴짜인가 =========================
2-5. 천재는 다 괴짜인가
겐크 왕국의 북쪽에는 사시사철 눈이 내리고 냉기가 감도는 프로즌 필드가 있었다.
너무 추워 일부 원주민 빼곤 아무도 안 사는 휑한 땅, 그 중에서도 특히나 지형이 거칠어서 몬스터조차 들리지 않는 절벽 위에 겐크 왕국의 비밀연구소가 있었다.
골렘을 만들기 위해 아지스가 다른 왕국들의 눈을 피해 만든 곳이었다.
여태껏 골렘을 만들 마법사과 자원은 충분했으나 단 한 가지 골렘의 동력원이 될 물질이 없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의문의 사내에게 마력의 결정을 받아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
아지스가 비밀연구소에 마력의 결정을 보낸지도 어언 한 달째.
아지스는 골렘 연구의 진행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비밀연구소에 행차했다.
그런데 눈폭풍을 뚫고 도착한 아지스를 기다리는 건 연구중지직전이라는 소식이었다.
골렘 제작을 위해 데려온 마탑의 마법사가 사라졌다.
가장 중요한 물건인 마력의 결정체와 함께.
이번 골렘 연구는 설계도가 따로 있는 게 아니었다.
데려온 마법사가 직접 설계도를 제작 및 수정해가며 만들던 것이었기 때문에 모든 제작 방법 및 수정 방안은 모두 그 마법사의 머릿속에만 존재하고 있었다.
아지스는 연구소 안에서 돌로 만들어진 벽을 주먹으로 강하게 쳤다.
퉁!
“대체 어떤 놈이 마법사를 납치해 갔느냐!”
연구소의 경비를 책임지던 기사가 이마를 땅바닥에 찧으며 벌벌 떨었다.
“죄송합니다. 조사해보고 있으나 아직까진......”
“머저리 같은 놈! 짐의 일생일대의 계획을 네놈이 망쳐놓았구나! 여봐라! 당장 이놈의 목을 쳐라!”
아지스의 뒤에서 뿔투구를 쓴 마스크헬름의 기사가 걸어 나오더니 등에 걸치고 있던 클레이모어를 뽑아들었다.
언뜻 봐도 수십 킬로그램은 나갈 법한 무게였으나 한 손으로 가볍게 들어보였다.
얼굴이 비칠 정도로 매끈한 검면을 가진 클레이모어가 기사의 앞에 드리워졌다.
클레이모어에는 겁에 질린 기사의 모습이 비쳐졌다.
“부, 부디 기회를! 기회를 주십시오! 반드시 루엔 양과 마력의 결정구를 되찾......”
서걱!
기사가 기회를 달라 빌었으나 클레이모어는 단두대마냥 용서 없이 그의 목에 떨어졌다.
연구실 복도에 시체 한 구가 널브러지면서 피바다가 되었고, 루엔이라 불리던 마법사를 보조하기 위해 연구소에 파견된 인력들은 모두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아지스는 죽은 기사따윈 안중에도 없는 듯 마스크헬름을 쓴 기사에게 명령을 내렸다.
“덱스터. 당장 추격대를 편성해서 루엔과 마력의 결정구를 되찾아와라. 기한과 수단은 묻지 않으마. 반드시 찾아와야 한다. 알겠나?”
마스크헬름을 쓴 기사가 클레이모어의 피를 털어내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오크평원 토벌이 끝난 이후로 어언 보름째.
빌로스 왕궁은 활기로 넘쳐나고 있었다.
로엘의 복귀도 복귀지만 레이아가 빌로스 정사에 관여하면서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로엘은 레이아의 능력을 알고 있기에 하니온 왕국에서 그녀가 맡았던 것처럼 빌로스 중앙정계의 상임고문 직책을 맡겼다.
정식으로 빌로스 왕궁에서 일하게 된 레이아는 자신의 능력을 한껏 발휘하였다.
“라이너리 백작, 여기 있는 창고관리비는 정확하게 어떤 용도로 쓰이는 거야?”
“아, 공주님. 그건 왕궁창고 유지비입니다. 경비를 위한 인건비와 건물 보수, 토지관리 등을 합친 총액입니다.”
“창고가 너무 많잖아.”
“꺼내 쓰기 쉽게 세세히 분류하다보니 그리 되었습니다.”
“분야별로 정리하니까 그렇지. 문자열 순으로 재배치하도록 해. 그러면 창고 3개는 비울 수 있을 거야. 남은 창고는 상인들이나 용병길드에 임대해줘. 여태까지 살림을 어떻게 한 거야? 불필요한 지출이 너무 많잖아.”
라이너리 백작도 5왕국 중에선 제법 수완 좋은 편에 속하는데 레이아에 비하면 달밤의 반딧불 수준이었다.
라이너리 백작은 젊은 여성이 핀잔준다 하여 불쾌하지 않고 한 수 배웠다는 느낌으로 좋게 받아들였다.
“공주님 말씀대로하면 지출이 절반가량 줄어들겠군요. 이거 또 한 수 배웠습니다.”
“흥, 나한테 걸리면 이 정도는 기본이지. 뭐 몇몇 사안을 제외하면 전부 훌륭해. 하니온의 술고래들 보단 훨씬 뛰어나다고 할 수 있겠네.”
“허허, 칭찬 감사합니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로엘의 반려자란 부분이 크게 작용하여 레이아를 좋게 보면 좋게 봤지 나쁘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각 부서에서 시키지도 않았는데 알아서 찾아와 레이아의 조언을 구했다.
“공주님, 수도 관문 바깥에 시행될 도로공사계획입니다. 십자 도로를 중심으로 마차 전용도로를 만들까 하는데 선바위가 있어 어찌할까 고민 중입니다.”
“파내는 건 인력낭비에 예산낭비가 될 가능성이 커. 지반을 다져도 금방 울퉁불퉁해질 거고. 차라리 선바위를 중심으로 원형도로를 닦도록 해. 일방통행으로 해서 빠져나가는 길을 여러 개 만들어두면 마차사고가 5할 이상 줄어들 거야.”
“네.”
레이아를 중심으로 활기가 도는 가운데 별궁 뒤편에서 빨래를 널던 메이아가 레이아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메이아의 시선이 레이아에게 고정되어 있자 옆에서 일을 돕던 동료 궁녀 에아가 실실 웃으며 팔꿈치로 옆구리를 찔렀다.
“우리 메이아 아주 생각이 많아지겠어~.”
옆구리를 찌르는 느낌에 메이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생각은 무슨. 갑자기 왜 이런데.”
“사모하는 로엘 전하에게 저리 예쁘고 똑똑한 여인이 붙었잖아. 복잡해질만도 하지.”
“그런 거 아니야.”
“아니면 왜 애꿎은 옷을 찢어놓았을까?”
레이아에게 정신을 팔고 있는 사이에도 메이아의 손을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손만 움직이고 있던 탓에 주름을 펴기 위해 털고 있던 옷이 살짝 찢어져 있었다.
메이아는 찢어진 옷이 그나마 자신의 치마였다는 것에 안도하였다.
다른 사람 옷이었다면 미안해질 뻔했다.
그러나 아직 에아의 놀림은 끝나지 않았다.
“케시어 갈 때 전하랑 둘이서 지냈잖아. 그때 뭔가 있었던 거지?”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시중드는 입장임을 잊지 않고 평범하게 로엘을 대했던 메이아였으나 대륙회담 참가 이후 멍하게 있는 날이 많아졌다. 그리고 멍하게 있는 경우의 대부분이 로엘을 바라보거나 그와 관련된 일을 할 때였다.
그래도 메이아는 끝까지 부정했다.
“정말 아니래도. 너도 참 가십거리를 너무 좋아하는 거 아냐?”
“궁녀 일하면서 즐길 거라곤 가십거리밖에 없잖아. 그리고 아니라고 잡아떼기에는 항상 하고 있는 머리핀이 걸리지 않아?”
메이아의 머리에는 고르디에서 로엘에게 받은 머리핀이 꽂혀 있었다.
모조 비취로 만든 싸구려 머리핀이지만 로엘에게서 받은 이후로 한 번도 뺀 적이 없었다.
할 말이 없어진 메이아는 빈 빨래바구니를 안으며 몸을 홱 돌렸다.
“이상한 소리 말고 다음 일로 넘어가자. 아까 수석궁녀님이 저녁까지 연회장 청소 해놓으라 하셨어.”
다음 일로 넘어가려고 이동하던 와중 수석궁녀 루니스가 메이아를 불렀다.
“메이아 양. 지금 바쁜가요?”
“지금 시키신 연회장 청소하려던 참이에요.”
“거기는 따로 다른 사람을 보낼 테니 메이아 양은 별궁으로 가세요. 전하께서 찾고 계십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그거야 가보면 알겠지요. 얼른 가세요. 전하를 기다리게 할 생각입니까?”
“아, 네!”
메이아에게서 빨래바구니를 전해 받은 에아가 휘파람을 불며 응원했다.
“휘유~ 전하의 호출이라네~. 아리따운 궁녀는 치맛자락 휘날리면 달려간다네~.”
“너 진짜 나중에 혼날 줄 알아.”
메이아가 별궁으로 향한 후, 루니스가 에아에게 말을 걸었다.
“에아 양. 방금 노래는 무슨 의미죠?”
“요즘 메이아가 전하를 의식하는 것 같더라고요.”
사정을 들은 루니스는 평소의 딱딱한 표정을 풀고 걱정스런 얼굴을 하였다.
“그럴 나이이긴 하죠.”
“어라? 잔소리하실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대대로 전하의 궁녀가 첩이 되는 건 일상다반사였으니까요. 다만 후궁의 삶은 그리 평탄치가 못하죠.”
엄밀히 말하면 국왕의 궁녀는 왕자시절 때부터 함께하는지라 소꿉친구라 할 수 있었다. 거기에 언제 어느 때고 봉사하는 입장이라 국왕들이 은근히 자주 찾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후궁의 삶이라는 건 언제나 눈치의 연속이다.
그건 제아무리 편견이 적은 빌로스 왕궁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아니었다.
루니스는 아닌 척하고 있지만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어가는 메이아를 보며 걱정의 시선을 보냈다.
///
로엘의 서재로 불려간 메이아는 문을 앞에 두고 심호흡을 하였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호출이나 에아가 괜한 소리를 한 탓에 긴장하고 말았다.
메이아는 자신의 뺨을 가볍게 두드리며 정신을 바로 잡았다.
‘지금 이 상태가 딱 좋아. 레이아 공주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해 보이시는데다 내년이면 엘로나 여왕님까지 함께하게 되잖아. 나는 봉사하는 입장으로도 충분해.’
마음을 다잡은 그녀는 손을 올려 노크를 하였다.
똑똑
“전하, 메이아입니다. 부르셨습니까?”
“안으로 들어와.”
문을 열고 들어가자 총 5명의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로엘을 찾아온 손님이 없을 텐데 이상한 일이었다.
방문을 알리지 않은 4명의 손님 중 3명은 메이아도 아는 얼굴이었다.
포이그에서 로엘이 거두었던 3명의 청부업자들이었다.
포이그에서 삼형제를 거둔 후 바로 겐크 왕국으로 보냈었는데 그 이유는 골렘계획 저지를 위해서였다.
로엘의 첫 번째 삶, 전전생에 발생한 대륙통일 전쟁의 시발점은 겐크 왕국이었다.
그들이 고대의 병기 중 하나인 골렘을 만드는데 성공하여 킬더 왕국을 침략했었고, 킬더 왕국이 무너지면 다음 차례는 빌로스라 여겨 로엘이 킬더 왕국을 지원했었다. 당시의 로엘은 킬더 왕국의 병력을 미끼삼아 가까스로 골렘을 처리했으며 안 그래도 약한데 더 약해진 킬더 왕국을 삼킴으로서 겐크, 하니온, 브리니아를 차례로 쳐낼 수 있었다.
전생에선 아예 그란데 백작과 더프를 직접 파견하여 골렘개발자를 암살하는 걸로 골렘개발계획을 막은 후 직접 통일전쟁을 일으켰고 말이다.
이번 생에서만큼은 피를 보지 않기 위해 납치라는 수단을 취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삼형제가 데려온 사람이 바로 마탑의 천재라 불리는 6써클 마법사이자 18세의 소녀 루엔이었다.
루엔은 흔치 않은 은발에 눈에 내려앉을 듯 기다란 속눈썹, 창백함에 가까운 피부를 지닌 미소녀였다. 반쯤 감겨 있는 듯한 눈꺼풀은 그녀의 조막만한 얼굴과 어우러져 몽환적인 매력을 품고 있었다.
그녀는 세속에 존재하는 모든 욕망을 배제한 듯 공허함이 담긴 눈빛을 띠고 있었다.
“오빠는 누구?”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무 생각도 없었는지 이제야 로엘의 정체를 묻고 있었다.
로엘은 웃으면서 그녀의 눈높이에 맞춰 허리를 숙였다.
“엘리오스 킨 로엘이야. 빌로스 왕국의 국왕이지.”
“나 연구해야 돼. 돌려보내줘.”
“그건 무리야. 네가 겐크 왕국으로 돌아가면 전쟁이 벌어질 게 분명하거든.”
“그런 거 몰라. 난 내가 하고 싶은 연구를 완성시키고 싶을 뿐이야.”
“마탑으로 돌려보내줄 테니까 거기서 하면 안 될까?”
“싫어. 거긴 이제 안 돌아가.”
“어째서?”
“안 돌아가.”
이유를 말하기 싫은지 같은 대답을 반복하는 루엔이었다.
아무래도 마탑에 있기 싫어서 빠져나왔다가 겐크 왕국의 기사들에게 납치당하여 프로즌 필드로 가게 된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겐크 왕국의 연구소로 돌아가겠다 하는 걸 보니 그녀에게 납치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고 그저 연구만 할 수 있으면 만족하는 것 같았다.
로엘은 머리를 긁적이며 하는 수 없이 차선책을 택했다.
“다시 말하지만 겐크 왕국으론 돌려보내줄 수 없어. 마탑에도 돌아가기 싶으면 빌로스에서 지내는 건 어때? 연구에 필요한 건 모두 지원해줄게. 대신 골렘 말고 좀 더 유익한 걸 연구해줄 순 없을까?”
루엔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구상도 많아. 연구만 할 수 있으면 여기 있어도 상관없어.”
“그럼 결정됐네. 저기 메이아 이 아이를 데려다가 씻겨주고 몸에 맞는 옷을 입혀줘.”
무슨 일 때문에 불렀나 했더니 루엔을 맡기기 위해서였나보다.
메이아는 의식하던 걸 잊고 본연의 업무로 돌아가 루엔을 안내하였다.
“따라오세요. 욕실로 안내할게요.”
메이아가 루엔을 데리고 나가면서 서재 안에는 로엘과 삼형제만 남게 되었다.
삼형제 중 첫째가 품 안에 손을 넣더니 손바닥만한 수정구슬을 꺼냈다.
“주군이시여. 이건 연구소에서 발견한 물건인데 혹시나 싶어 가져왔습니다. 받아주십시오.”
로엘은 단박에 수정구슬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어찌 모를 수 있겠는가.
전전생에서 골렘을 제거할 때 부수었던 마력의 결정체였다.
마력의 결정체가 가진 힘이라면 누구보다 잘 아는 로엘이기에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마력의 결정체를 받아들었다.
“이 물건은 내가 맡아두지. 수고들 했어. 다음 명령이 있을 때까지 대기하도록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