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9 2-4. 양치기 백작 =========================
2-4. 양치기 백작
로엘이 테헤란으로 돌아오자 또 축하 퍼레이드가 벌어졌다.
대관식, 대륙회담, 오크평원 건.
빌로스 역사상 이토록 자주 축하 퍼레이드를 벌인 적이 있던가.
하도 빈번하게 축하 퍼레이드가 펼쳐지다 보니 일부에선 로엘이 대외활동을 안 했으면 하는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뭔 놈의 국왕이 나갈 때마다 큰 성과를 거두냐며 지금도 충분히 미치도록 존경스러우니 제발 좀 쉬라는 원성(?)이 터져 나왔다.
왕궁에 복귀하자 기다리고 있는 건 하니온 왕국의 사절단이었다.
사절단을 이끌고 온 하니온 왕국의 2대 마나 익스퍼트 중 한 명인 바카스 공작이었다.
로엘은 복귀하자마자 왕좌에 앉아 바카스 공작을 마주해야 했다.
“바카스 공작. 멀리서 여기까지 찾아온 노고를 알아주고 싶지만 난 더 먼 곳을 다녀왔거든? 용건부터 말해.”
용건이야 이미 라이너리 백작에게서 전해 들은 터라 알고 있지만 절차란 게 있으니 일단은 물어줘야 했다.
이래서 공식적인 자리를 귀찮다.
바카스 공작은 로엘의 심기를 건드렸나 싶어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로엘 국왕이시여. 정 심기가 불편하시다면 내일 이야기하셔도 됩니다.”
“이미 자리 다 마련해놨는데 이제 와서 다시 쉬어라고?”
“아, 아닙니다. 아참, 용건을 물으셨지요. 다름이 아니라 레이아 공주님과 크라넬 경을 하니온 왕국으로 송환해주셨으면 해서 찾아왔습니다.”
“울크 국왕, 아니 장인어른이 더 낫겠군. 장인어른께서 하신 일에 대한 건 이미 들었다. 너무 경솔히 행동하셨으니 앞으로는 술을 줄이고 국사에 전념하셨으면 한다고 사위가 말했다 전해라.”
아무리 장인사위 지간이라도 아직은 결혼 전이니 이름을 언급하는 게 지극히 당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엘이 고쳐 말했다는 게 의미하는 건 한 가지뿐이었다.
바카스 공작은 로엘과 레이아가 충분히 진도를 나갔음을 깨닫곤 벌어지려는 입꼬리를 겨우 닫으며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응당 그리하겠습니다! 부디 공주님과 편히 지내옵소서!”
레이아와 크라넬이 빠지면서 하니온 왕궁의 전력이 크게 감소되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 모든 타격을 합치더라도 로엘과 레이아의 사이가 고속으로 진전된 것에 비하면 사소한 수준이었다.
로엘을 설득하여 레이아와 크라넬을 돌려보내라 할 참이었지만 그럴 마음이 싹 가신 바카스 공작이었다.
끈덕지게 들러붙을 것 같았던 바카스 공작은 오히려 기뻐하며 하니온 왕국으로 떠났고, 로엘은 드디어 쉴 수 있게 되었다.
최근 너무 바쁘게 돌아다닌 탓에 파티에 참석할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라이너리 백작이 오크평원 토벌을 축하는 파티를 준비했지만 로엘은 한사코 거절하곤 왕의 침실에 들었다.
먼저 침실에 들어와 있던 레이아는 침대를 두드리며 로엘을 불렀다.
로엘을 배려하기 위함인지 오늘은 네글리제가 아닌 평범한 잠옷이었다.
“피곤하지? 얼른 와서 누워.”
“한 가지 확실하게 해두고 싶은데 오늘은 곤히 잠만 자기다.”
“평범한 잠옷일 땐 안하는 날이라고 정해뒀잖아. 나도 피곤하니까 잠이나 자자.”
“난 해도 상관없는데?”
옆으로 누운 레이아를 뒤에서 감싸 안으며 귓바퀴에 숨결을 불어넣는 로엘이었다.
레이아는 간지러운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며 등진 자세 그대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사일런스 용품 없으면 안 해.”
앞으로 지내게 될 왕궁에서 큰 소리를 내면 부끄러워서 돌아다니지도 못할 거다.
그걸 염려하여 할 말인데 로엘은 예상이라도 한 듯 사일런스 마법이 담겨 있는 마법구슬을 꺼냈다.
“말하는 용품이 이 구슬이야?”
사일런스 마법구슬을 깨뜨리면 방 하나 정도의 넓이에 방음 효과가 발생하면서 안에서 생기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된다.
레이아는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척 로엘 쪽으로 몸을 돌렸다. 돌아서며 손으로 로엘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얼굴은 웃되 말투는 평소의 뾰루퉁함을 그대로 가져왔다.
“나니까 받아주는 거야. 감사하라고.”
“예예, 어련하시겠습니까.”
///
로엘을 위해 준비된 파티는 결국 귀족들의 연회가 되었다.
그란데 백작은 오크평원에서의 일을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전하께서 마나 마스터셨다더군. 역대 최고의 검사 반열에 오르신 분을 모시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한 영광이 어디 있겠는가! 모두 전하를 위해 건배를 합세!”
기세 좋게 외쳤으나 아무도 호응을 해주지 않았다. 모두 호응 대신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고 있었다.
열화와 같은 반응을 기대했던 그란데 백작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전하께서 마나 마스터가 되셨는데 아무도 기뻐하지 않는 건가?”
보다 못한 클라임 후작이 동정어린 시선으로 그란데 백작을 보며 어깨를 두드렸다.
“그쯤하게나. 충성심이 너무 과해도 문제가 되는 법일세. 명색이 백작의 직위를 가진 자가 허풍을 떨고 다니면 대외적으로 시선이 곱지 않을 걸세.”
허풍쟁이 취급당한 그란데 백작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상대가 항상 왕위를 노리는 클라임 후작인지라 그 기분이 더했다.
“무엇이 허풍이란 말입니까? 전하께서 마나 마스터의 힘으로 적을 베었다는 건 원정대에 속한 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소문을 듣자하니 검짓 한 번에 땅을 갈랐느니, 구름을 갈랐느니 하던데 그건 너무 과장일세. 백작이 항상 과하다곤 생각해도 충성심은 대단한 사람이라 여겼는데 이번 건 아무래도 좋게 봐줄 수가 없군.”
평소에 으르렁대던 것에서 벗어나 진심으로 안타깝게 여기는 클라임 후작이었다.
그란데 백작으로선 의문이 솟아올랐다.
‘내가 거기까지 말했던가?’
본인도 잘 기억이 나질 않아 말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당시에 너무 기뻐서 흥분한 것도 있고 술에 취한 상태였으니까.
혹여나 부풀려 말했다곤 해도 로엘이 마나 마스터인 것만은 확실했다.
그란데 백작은 자신이 허풍쟁이가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가장 가까이에 있던 더프를 불렀다.
“더프 경. 전하의 무위를 직접 지켜본 자네가 말해주게. 전하께서 마나 마스터에 올랐다는 것을 말일세.”
당시 현장에 있었던 더프라면 충분히 증인 역할을 맡길 수 있었다.
허나 더프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양 모르쇠로 일관했다.
“무슨 말씀이시진 모르겠군요. 전하는 마나 익스퍼트십니다.”
“자네야 말로 무슨 소리를 하는 겐가. 분명 전하께서 마나 마스터라 했지 않았는가.”
“저는 그런 소리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생각해보니 더프는 로엘의 경지에 대해 언급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언급한 자는 분명 블랑코였다.
그란데 백작은 자신을 측은하게 바라보는 눈빛이 더욱 많아졌음을 느끼며 블랑코를 찾아 헤맸다.
“블랑코! 블랑코는 어디 있느냐!”
“블랑코라면 왕궁 입구의 성벽 위에 있을 겁니다.”
증명할 수 있는 사람이 더프, 케이델 공작, 블랑코뿐인데 더프는 이상하게도 모른다 하였고, 케이델 공작은 먼 곳에 있으니 물으러 갈 수 없으니 남은 건 블랑코뿐이었다. 처음에 로엘이 마나 마스터라 언급한 게 블랑코였으니 블랑코라면 증인이 되어줄 거라 믿었다.
그란데 백작은 연회장을 나가 블랑코를 데려왔다.
아직은 대부분이 오크가 왕궁에 있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도 로엘이 데려온 자이니 그만한 능력이 있을 거라 여겨 꺼리진 않았다.
갑자기 연회장으로 끌려오게 된 블랑코는 정중한 어투로 말했다.
“제가 있으면 파티를 마음껏 즐기지 못하실 겁니다. 관문 위에서 순찰을 계속하는 게 나아보입니다만.”
“지금 순찰이 중요한 게 아니라네. 자네는 오크 평원에서 전하께서 마나 마스터임을 말했었지. 그때처럼 모두에게 전하께서 마나 마스터였다는 걸 말해주게나.”
블랑코의 말 한 마디면 모든 게 해결된다.
그러나 블랑코 역시 더프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저었다.
“전하께서 마나 마스터라니요. 그란데 백작께서 잘못 들으신 모양입니다.”
그란데 백작으로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그때 분명히 내 귀로 똑똑히 들었었는데 어떻게 된 거지? 꿈속에서 본 걸 내가 잘못 받아들인 건가? 그때의 일은 꿈이었던 거야?’
///
기분 좋은 밤을 보내고 햇살이 비치는 침실 안.
로엘은 햇살이 얼굴에 닿기 전인 이른 시간에 깨어나게 되었다.
바깥에선 로엘의 잠을 깨운 노크소리가 들려오는 중이었다.
똑똑
“전하, 그란데 백작이 전하를 뵙길 청하고 있습니다.”
정규기상시간까진 아직 1시간이나 남아 있었다.
옆에선 레이아가 알몸인 채로 로엘의 팔을 베고 자는 중이었다.
어젯밤의 격렬함이 남아있는 키스마크와 헝클어진 머리.
그를 감안하더라도 곤히 자고 있는 레이아는 한 마리의 고양이마냥 귀엽기 짝이 없었다.
로엘은 레이아가 깰까 싶어 조심스럽게 대답을 전했다.
“아직 취침시간이니까 2시간 후에 다시 오라고 전해줘.”
“네, 알겠습니다.”
문 바깥에서 메이아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게 들렸다.
대화소리에 깬 레이아가 이불 속에서 꿈틀거리며 로엘의 품에 파고들었다.
“우웅.”
“깼어?”
“무슨 일이야?”
“그란데 백작이 찾아온 모양이야. 아직 취침시간이니까 좀 더 자.”
“잘자라는 키스해줘.”
“어젯밤에 해줬잖아.”
“안 해줄 거야?”
품에 안겨 슬며시 올려다보는 눈빛에 로엘은 못 당하겠다는 듯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두 사람 다 평온한 시간 속에서 다시 잠들었다.
다시 깨어난 건 정확히 기상시간이 되었을 때였다.
로엘과 레이아는 메이아의 시중을 받으며 세안을 한 후 옷을 갈아입었다. 그 뒤 그란데 백작을 호출하려 했는데 그란데 백작은 호출할 것도 없이 별궁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어젯밤 파티가 끝난 후에도 돌아가지 않은 건지 눈은 충혈 되어 있고 머리를 기름기로 떡져 있었다.
항상 로엘 앞에서 깔끔한 모습만 보이려 하는 그란데 백작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래서 로엘은 그의 모습을 탓하기보다 그를 이렇게 만든 원인이 뭘지 궁금했다.
“백작, 뭔 일 있었어?”
그란데 백작은 로엘의 손을 덥석 잡으며 간절한 투로 말했다.
“전하! 전하께선 마나 마스터가 맞으시지요? 그렇지요?”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자세한 사연을 들어보니 어제 로엘이 마나 마스터가 된 것을 축하하려다가 역으로 몰려 사실확인을 위해 로엘을 기다린 거라 한다.
더프도, 블랑코도 모른다고 하기에 결국 본인인 로엘에게 온 것이었다.
로엘은 레이아의 계책이 제대로 먹혀들었음을 알곤 속으로 웃었다.
한편으로는 이토록 로엘의 강함을 증명하기 위해 안절부절 못하며 밤까지 샌 그란데 백작이 불쌍하게 여... 겨 질 리가 없지 않은가!
여태까지 그란데 백작 덕분에 고생한 걸 생각하면 한 번 정도는 크게 데여봐야 된다 여겼다.
로엘은 그란데 백작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나지막이 말했다.
“하여간 그란데 백작은 날 너무 존경한다니까. 존경하는 건 좋지만 조금은 자제하도록 해.”
“그 말은... 역시 꿈이었던가. 허어, 꿈이었구나.”
허탈해하며 ‘드디어’ 반성의 기미를 보이는 그란데 백작을 보며 로엘은 회귀 이후 가장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