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7 2-3. 나의 새침때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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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저녁, 로엘의 수도군은 임모벨이라는 영지에서 머무르게 되었다.
아름다운 호수를 끼고 그림 같은 삼림이 펼쳐져 있는 임모벨은 다산의 땅으로 유명했다. 부모를 중심으로 6인~10인 가족이 기본일 정도였다.
임모벨 영지를 다스리는 임모벨 남작은 로엘의 수도군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오크평원의 무용담은 익히 전해 들었습니다. 이렇듯 전하를 대접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신세 좀 지도록 하지.”
“네, 전하를 비롯한 귀빈 분들은 저택으로 가시지요. 병사들에겐 술과 고기를 베풀겠습니다.”
“조금은 야채도 섞어줘. 오크 평원에서 하도 고기만 뜯어 대서 죄다 독가스 제조기가 되어버렸거든.”
오크평원에서 승전 파티할 때도 고기, 이곳으로 오는 내내 고기, 심지어 케이델 공작이 챙겨준 보급품도 고기였던지라 의도치 않게 불균형한 식단이 계속되었었다.
지금은 오크의 돌격에도 흐트러지지 않던 진형이 누가 방귀 한 번 뀌면 흐트러질 지경이었다.
임모벨 남작은 진지함 반 유머 반섞인 농담에 웃으면서 로엘과 귀족, 기사들을 자신의 저택 안으로 들였다.
호숫가에 지어진 임모벨 남작 가의 저택 안으로 들어서던 중 크라넬이 그란데 백작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백작님. 한 가지 협조를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음? 자네가 내게 부탁을 하다니 별일이군.”
명색이 대륙에 몇 없는 마나 익스퍼트이기 때문에 이런저런 행사에서 많이 접촉한 적이 있는 두 사람이었다.
원래 타국의 마나 익스퍼트끼리는 사이가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특히 그란데 백작과 크라넬 같은 경우 2년 전 브리니아 왕국 주최의 무투대회에서 붙었다가 서로에게 부상을 입힌 경력이 있었다.
크라넬도 그란데 백작을 마음에 들어하는 편은 아니지만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은 공통의 목표를 위해서 서로 손을 잡도록 하죠.”
“공통의 목표?”
“로엘 전하와 레이아 공주님이 한 방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게 협력하자는 겁니다.”
레이아가 로엘의 왕비로 확정된 건 기쁜 일이지만 문제는 엘로나도 함께 결혼한다는 점이었다.
레이아를 모시는 크라넬로선 레이아가 좀 더 우위에 있었으면 했다.
레이아 본인을 위해서, 나아가 하니온 왕국을 위해서.
그를 위한 첫 걸음으로 로엘과 밤일을 치렀으면 했다.
그란데 백작은 소리 없이 미소를 지으며 넉살 좋게 크라넬의 어깨를 두드렸다.
“자네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었군. 나도 전하께서 이제 여자를 알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네.”
“그럼 임모벨 남작님까지 끌어들여서......”
“그건 내가 맡도록 하지. 자네는 레이아 공주님을 설득하게나. 밀어 붙이는 것도 좋지만 본인들도 어느 정도 그럴 마음이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해보니 그렇군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원래 결혼 전에 거사를 치르는 건 순결하지 못한 일이니 정조를 지켜야 한다 알려져 있지만 꼭 그렇게 빡빡한 것도 아니다. 물론 쾌락을 목적으로 이 남자 저 남자 갈아타는 건 비난 받기 일쑤지만 이미 결혼이 확정된 상대와 사랑을 나누는 건 허락되어 있었다.
실제로 브리튼 교의 교리에서도 ‘달밤에 그림자가 겹치는 걸 부끄럽게 여기지 마라. 그 의도에 사랑이 담겨 있다면 그보다 성스러운 것은 없으니.’라는 구절이 있고 말이다.
서로의 이해가 일치한 두 익스퍼트는 각자 작전수행을 위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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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택에 들어선 로엘과 레이아는 임모벨 남작이 마련한 티테이블에 앉아 티타임을 가졌다.
임모벨 남작은 로엘의 입에서 직접 무용담을 듣고 싶어 했다.
“소문에 의하면 마나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셨다던데 대단하십니다. 정말로 검짓 한 번에 땅이 갈라질 위력을 발할 수 있는 겁니까?”
레이아의 제안을 듣고 더프로 하여금 곧장 소문을 퍼뜨리라 했는데 벌써 임모벨 영지까지 닿은 모양이었다.
로엘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겨우 참아내며 덤덤하게 말했다.
“그거 헛소문이야. 임모벨 남작도 그란데 백작의 과도한 충성심은 잘 알고 있지?”
“역시 그런 거였습니까? 갈수록 더 극성이군요. 그래도 너무 부담스럽게 여기진 마십시오. 그란데 백작 같은 인물이 있기에 전하께서도 마음 편히 앞으로 나아가실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창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임모벨 남작이 문득 발코니 안쪽을 보더니 몸을 일으켰다.
“전하, 처리할 일이 생겨 잠시만 자리를 비우겠습니다. 두 분이서 느긋한 시간 보내고 계십시오.”
인사를 올리고 저택 안으로 들어선 임모벨 남작은 복도를 지나 모퉁이 너머로 이동했다.
모퉁이 너머에는 그란데 백작이 서있었다.
그가 몰래 손짓을 하기에 핑계를 대고 나온 것이었다.
두 사람은 각자 가문을 이어받기 전에 로얄 기사단 소속이었다.
당시에 마나유저 상급이었던 그란데 백작이 단장, 그때나 지금이나 마나유저 중급인 임모벨 남작이 단원으로 함께 일했던 사이였다.
상당히 친한 관계라 할 수 있었다.
임모벨 남작은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그란데 백작의 표정에서 뭔가 꾸미고 있음을 직감했다.
“무슨 일로 부르신 겁니까?”
“같은 기사단 출신끼리 오랜만에 만났는데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게나.”
“딱딱하게 굴지 않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백작님과 연관되면 항상 귀찮은 일이 발생하니까요.”
“너무 똑부러지게 말하는 거 아닌가?”
“제 유일한 장점이기도 하죠.”
“이번 일은 자네도 솔깃할 걸세. 실은......”
그란데 백작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임모벨 남작은 시시각각 표정을 달리하였다. 종국에도 임모벨 남작도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라면 힘껏 도와야 마땅하죠. 필요한 건 전부 준비해두겠습니다.”
“알아줄 줄 알았네. 힘 써주게나.”
그란데 백작이 요구한 것을 들어주기 위해 움직이려던 임모벨 남작은 문득 로엘과의 대화를 떠올리곤 한 마디 날렸다.
“이번 일은 둘째 치고 전하에 대한 일을 너무 부풀리진 마십시오. 그러다가 엄청 고생하실 겁니다.”
한 마디 날린 임모벨 남작은 반대편 모퉁이로 걸어갔고, 홀로 남은 그란데 백작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풀려? 고생? 무슨 소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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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이라. 마계이란 곳이 워낙 괴이한 곳이니 환생 같은 일이 벌어져도 이상한 건 아니지.”
로엘은 디르크를 죽인 후 나온 구슬과 디르크가 한 말에 대해 레이아에게 상담을 청했다.
그녀라면 입이 무겁기도 하고 두뇌도 뛰어난데다 ‘그나마’ 다른 사람보단 오해가 적은 사람인지라 말한 것이었다.
물론 말한 것은 디르크가 환생자였다는 얘기뿐이고 로엘 본인이 회귀자란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레이아는 로엘에게서 건네받은 검은 구슬을 살피다가 로엘에게 돌려주었다.
“나도 처음 보는 물건이야. 마법 관련 물품 아닐까?”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긴 한데 알 방법이 있어야지. 무슨 물건인지 모르니 함부로 버릴 수도 없고 이대로 가지고 있어도 되나 싶기도 하고.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 중이야.”
“차라리 마탑에 의뢰를 넣어보는 건 어때? 마탑의 괴짜들이라면 알지도 모르잖아.”
심장에 원을 그려 마나를 순환시킨 후 공식 맞춰 마나를 배열하여 이능의 힘을 발휘하는 자들.
그들을 두고 마법사라 부른다.
마법사는 마나유저보다 훨씬 숫자가 적은 편이었다. 거기에 대부분이 연구에 미쳐 있어 세상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마법사들이 모여 만든 사설연구단체가 바로 마탑이었는데 마법사를 동경하는 초보 마법사부터,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이라는 7써클 마법사 등 다양한 마법들이 지내는 곳이었다.
물론 마법이라는 게 대량사살능력을 가진 마법도 많은지라 한때 각 나라에서 마법사들을 섭외하려고 어마어마한 물량공세를 펼친 적도 있었지만 전부 거절당한 이력이 있었다. 그저 연구를 위해 세상을 돌아다닐 필요가 있다 느낀 몇몇 마법사들만 용병생활을 하며 세상을 떠돌 뿐이었다.
그들을 마탑 바깥으로 데리고 나오는 건 힘들지만 의뢰를 넣는 정도라면 가능하다.
로엘은 검은 구슬을 허리춤에 달린 천주머니에 넣었다.
“나중에 마탑에 의뢰를 넣어봐야겠군. 그나저나 넌 앞으로 계속 빌로스에 머물 거야?”
“어차피 내년이면 빌로스에서 살 테니까 1년 미리 당겼다고 생각하지 뭐.”
“정확하게 말하면 빌로스에 머문다기 보단 내 옆에 머무는 게 되겠군.”
“흥, 놀리려고 일부러 정정한 거지? 누가 계속 당할까보냐.”
“오, 조금은 성장했네. 지금 발언은 15살에 가까웠어.”
“21살이라니까! 잠깐 15살에 가까웠다면 이전엔 날 몇 살로 여기고 있던 거야?”
“으음, 14살?”
“성장은 개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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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엘과 즐거운(?) 티타임을 보낸 레이아는 쉬기 위해 로엘과 갈라졌다.
어느 방에서 쉬어야할지 몰라 아무나 붙잡고 길을 물으려는데 이상하게도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저택 중앙홀로 나가려고 걸음을 옮기고 있는데 마침 반대편에서 오던 크라넬과 마주쳤다.
크라넬은 가벼운 목례 이후 질문을 던졌다.
“공주님, 로엘 전하와 둘이서 계셨습니까?”
“응, 임모벨 남작은 중간에 일이 있어 빠졌거든. 둘이서 차 마셨지.”
“무슨 얘기를 나누셨습니까?”
“평소랑 똑같지 뭐. 세상 돌아가는 얘기하고, 투닥거리고 다시 세상 돌아가는 일 꺼내고.”
레이아의 말을 듣는 동안 크라넬의 표정이 점점 더 무거워졌다.
레이아는 뭔가 잘못된 말을 꺼냈나 싶어 의아함을 표했다.
“나 무슨 잘못된 말이라도 했어?”
“본인의 문제조차 모르다니 심각하군요. 어릴 때부터 정치에만 관심을 두셨기 때문이겠지만 이건 너무 심합니다.”
“뭐가 심하다는 건데?”
“로엘 전하가 보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 걸 제가 모를 줄 압니까? 그런 거면 기회가 있을 때 뭐라도 하셔야죠. 결혼 확정됐다고 너무 여유롭게 생각하시는데 언제 어떤 계기로 변할지 모르는 게 남녀관계입니다. 기회가 될 때마다 돌격하셔야죠.”
“까불고 있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언제부터 내 앞에서 목소리를 높이게 됐어, 크라넬?”
평소와 같은 잔소리라 여겨 특유의 위엄 서린 목소리로 물리려 했으나 다음에 이어지는 크라넬의 말이 레이아의 마음을 움직였다.
“잊었습니까? 엘로나 여왕께선 이미 입맞춤을 하셨습니다.”
레이아는 위엄을 끌어올리다 말고 크라넬을 따라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맞아. 그랬었지. 그 아줌마는 했는데 난 아직 아무 것도 못했어.”
“한 거라곤 어린애 들어 올리듯 안아 올린 것뿐이죠. 그걸로 만족하십니까?”
“전혀!”
괜히 레이아의 호위를 자처하고 있는 게 아니다.
하니온 왕궁에서 레이아의 성격을 제일 잘 아는 사람답게 레이아의 승부욕을 자극하는 방법 역시 잘 알고 있는 크라넬이었다.
크라넬은 의욕을 불태우는 레이아를 보며 저택 홀에 서있는 우아한 중년 여인을 가리켰다.
“공주님이 그리 생각하실 거라 여겨 도움을 주실 분을 불렀습니다.”
바닥에 끌릴 정도로 긴 드레스를 입은 중년 여인이 레이아 앞까지 다가와 치맛자락을 살짝 잡아 올렸다.
“인사드립니다, 공주님. 임모벨 남작의 부인 루이엔이라 합니다.”
“참가로 루이엔 부인은 결혼 30년 차임에도 불구하고 기술이 매우 뛰어나여 남편과 금슬이 좋다 합니다. 공주님께 부족한 것을 많이 알려드릴 겁니다.”
“기술이라면......”
더 이상은 함부로 입에 담기 힘든지 크라넬은 정중히 물러났다.
크라넬을 대신하여 루이엔이 온화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주로 밤에 쓰는 기술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