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6 2-3. 나의 새침때기 =========================
2-3. 나의 새침때기
국경을 넘어 빌로스 왕국에 들어온 레이아는 순탄하게 이동하다가 케이델 공작령 앞에서 발이 멈췄다.
케이델 공작령으로 들어가는 길목 중 하나인 어느 고개를 넘어가던 중 이상한 남자가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유녀로군. 이름을 알려주지 않겠나?”
단발에 가까운 곱슬머리를 지닌 청년이 한 말이었다.
귀족 가의 자제인 듯 고급스러운 옷차림에 병사들을 대동하고 있었다. 가슴보호대와 화살통, 골무를 끼고 있는데다 병사들이 사냥개에 목줄을 채워 따르는 모습에서 사슴사냥을 나온 귀족 자제임을 알 수 있었다.
사냥하러 나왔으면 사냥하러 갈 것이지 지나가던 레이아를 보고 갑자기 앞길을 막아서는 게 아닌가.
현재 레이아는 고급 옷감으로 만들었지만 겉보기엔 수수한 옷을 입고 있어서 얼핏 보면 평민 같기도 했다. 함께 있는 사람도 크라넬뿐이라 삼촌조카가 여행 중인 걸로 오해하기 쉬웠다.
뒤늦게 레이아의 가출을 깨달은 울크가 병사를 풀었기 때문에 몰래 빠져나오느라 인원도 크라넬 한 명, 복장도 평민에 가까운 복장을 해야만 했다.
차림과 동행의 숫자, 비공식 방문이라는 요소가 맞물려 상대는 완전히 레이아를 평민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이런 갑자기 말을 걸어서 겁먹었나 보군. 무서워 말거라. 나는 케이델 공작 가의 케이델 폰 드레이라고 한다. 그대가 마음에 들어 초대를 하고 있는 것이니 어려워 말아라.”
그러고 보니 케이델 공작 가의 셋째 아들은 어린아이를 좋아하는 변태라 들은 적이 있다.
물론 여기서 좋아한다는 의미는 성적인 의미다.
드리안 공작의 막내딸을 건드리려다가 큰 문제가 일어난 적도 있다하는데 질리지 않고 지나가던 레이아에게 접근한 것이었다.
다른 걸 떠나서 유녀라 불린 게 레이아의 심기를 자극했다.
여기까지 왔으니 울크의 추격도 없겠다 레이아는 숨길 것 없이 위엄을 드러냈다.
“어이, 케이델 공작 가의 셋째. 변태적 취향을 드러낼 상대를 잘못 골랐어. 난 하니온 루 레이아. 내 낭군을 보러 먼 길을 왔으니 손님으로서 대접할게 아니라면 내게 손대지마라.”
레이아의 당당한 발언에도 불구하고 드레이는 농담을 듣는 양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재미있는 아이구나. 하니온의 공주가 수행원도 없이 이 먼 곳까지 올 리가 있느냐. 어디서 나의 소문을 잘못 알아듣고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데 무서워하지 말 거라.”
“참고로 난 21살이고 네 이야기는 드리안 공작 가와의 일로도 충분하니 그만 집적대고 길을 열도록 해.”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레이아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드레이의 표정이 변했다.
방금까지 온화하게 웃던 얼굴이 짜증에 물들었다.
“이 내가 잘 대해주겠다는데 끝까지 거짓말을 하는군. 여봐라! 귀족에게 거짓말을 지껄이는 저 여자를 당장 내 앞으로 끌고 와라!”
“예!”
병사들이 명을 받고 다가왔지만 레이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를 지켜야 할 입장인 크라넬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병사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던 레이아가 드레이의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너 말이야. 기고만장하게 구는 건 좋은데 뒤를 보는 게 좋을 걸?”
“무슨 소리... 크헉!”
드레이가 몸을 뒤로 돌린 순간 보인 것은 누군가의 신발 밑창이었다.
가슴을 걷어차인 드레이는 망치에 치인 마리오네트마냥 요란하게 널브러졌다.
가슴보호대를 착용했건만 그를 무시하고 차인 통증이 스며들어 숨이 턱턱 막혔다.
드레이는 거친 숨을 토해내며 역정을 내려 했다.
그러나 그를 걷어찬 이는 말에 올라탄 미청년으로 그도 익히 봐서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드레이를 걷어찬 청년, 로엘이 하찮은 것을 보는 것처럼 한심하단 눈빛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너 내 여자한테 무슨 짓하려 했냐?”
로엘이 말하는 건 당연히 레이아였다.
드레이는 로엘과 레이아를 번갈아 쳐다보며 할 말을 잃었다.
레이아가 했던 말이 전부 사실이었던 것이다.
지금 그는 미래의 왕비에게 추근댄 것도 모자라 힘으로 구속하려 했다.
사과하면 될 것을 드레이의 꼬인 심정이 괜한 변명을 토해내게 만들었다.
“왕비인 줄 몰랐습......”
그러나 그 변명조차 끝까지 꺼내지 못했다.
로엘을 뒤따르던 케이델 공작이 말에서 뛰어내려 혼이 담긴 주먹으로 드레이의 얼굴을 후려쳤기 때문이다.
“이 멍청한 녀석! 사죄는 못할 망정 어디서 변명질이더냐!”
투퍽!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드레이의 얼굴이 크게 휘청거리더니 게거품을 물고 기절하고 말았다.
케이델 공작은 대차게 무릎을 꿇으며 검을 뽑아 자신의 팔에 가져다 대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전하! 왕비님! 제 자식이 모자란 놈이라 무례를 범했으니 부디 제 한 쪽 팔로만......”
왕비란 칭호가 듣기 좋았는지 레이아가 즐겁게 웃으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로엘이 탄 말 옆에 나란히 섰다.
“호호, 아직은 공주로 충분해요. 분명 케이델 공작이셨죠? 공작께서 무릎 꿇으실 일이 아니니 일어나세요.”
“오오, 역시 전하께서 고르신 분답게 자비로우시군요. 제가 철저히 교육시켜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로엘은 레이아의 겨드랑이 밑으로 손을 넣어 그녀를 번쩍 안아든 후 자신의 말안장 앞에 앉혔다. 그리곤 레이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케이델 공작에게 말하길.
“우린 예정대로 테헤란에 복귀하겠어. 이쯤에서 헤어지자고.”
“벌써 가시려 합니까? 지금 공작령 내에 환영 퍼레이드와 악단, 승전 파티를 열어 전하를 대접하라 일렀습니다. 며칠만 더 있다 가시지요.”
“승전 파티라면 평원에서 실컷 했으니까 그걸로 충분해. 그것보다 앞으로 오크평원과의 교류, 후계자 양성을 어떻게 해낼지 기대하겠어. 테헤란에 좋은 소식만 들리길 바라지.”
“전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신은 명을 받을 뿐이옵니다. 부디 무사히 왕궁에 복귀하소서.”
로엘에게 작별의 예를 올린 케이델 공작은 기절한 그레이를 짐짝마냥 말에 걸치며 로엘을 전송했다.
로엘은 로얄 기사단과 수도군을 이끌고 북동쪽 길을 타며 테헤란으로 향했다.
더불어 크라넬에게 말 한 필을 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로엘의 앞에 앉아 있던 레이아는 계속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케이델 공작이 왕비라 불러준 것도 있지만 로엘이 말한 ‘내 여자’라는 울림이 너무나도 좋았다.
그녀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엘이 그녀의 머리에서 손을 떼며 물었다.
“근데 넌 왜 여기 있냐? 하니온에서 한창 바쁜 거 아니었어?”
“어떻게 된 거냐면......”
레이아는 로엘과의 결혼이 확정된 이후 울크가 어떻게 지내는지, 그래서 레이아가 어떤 기분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말해주었다.
사정을 들은 로엘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울크 국왕께서 큰 실수를 하셨구만. 기쁜 건 알겠지만 조금은 절제하셨어야지.”
“그렇지?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래서 기왕 나온 김에 날 만나러 여기까지 와준 거야?”
로엘이 일부러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레이아의 머리에 턱을 비볐다.
레이아는 왠지 지는 기분이 들어 심통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 거 아니거든. 오크평원에서 고전하고 있으면 지혜나 빌려줄까 해서 온 거라고. 그러니까 감사하도록 해.”
“하지만 이미 토벌은 끝났는 걸?”
“네가 너무 빨리 끝낸 거야. 하여간 쓸데없이 수완만 좋아가지고.”
“어쨌든 날 만나러 온 건 맞네. 사실 울크 국왕의 일은 핑계고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거 아냐?”
언제나처럼 로엘의 페이스에 휘말린 레이아는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말 갈기털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기고만장해 하지마, 심술쟁이야! 딱히 졌다고 생각 안하거든?”
“이야, 네가 얼마나 꼬맹이 같았으면 그레이가 유녀로 착각했을까? 이걸로 네가 진짜 애처럼 보인다는 게 증명된 셈이네.”
“흥, 웃기고 있네. 망토를 둘러서 그렇지 제대로 입었다면 그딴 착각은 하지 않았을 걸?”
“왜?”
“왜라니. 당연히 몸매 때문에......”
“몸매 어디?”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들켰네.”
소곤거리듯 투닥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는 기사들은 저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투닥거림이 한 차례 멈춘 순간 레이아가 너무 로엘의 페이스에 휘말렸다 싶어 화제를 바꾸었다.
“그보다 오는 길에 음유시인들이 네가 마나 마스터라고 떠들고 다니던데 사실이야?”
“음? 벌써 소문이 그렇게 퍼졌나. 그거 때문에 머리 아파. 겐크 왕국과 브리니아 왕국이 위협을 느끼고 이상한 짓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말이야.”
로엘은 소문이 퍼지게 된 일화를 레이아에게 말해주었다.
이야기를 들고 있던 레이아가 심드렁하게 해결책을 내놓았다.
“그거라면 오히려 소문을 더 풍성하게 퍼뜨리면 해결될 일 아니야? 땅을 갈랐느니 구름이 베였느니 하는 일화까지 덧붙이면 오히려 음유시인들이 허풍 떠는 거라고 생각할 텐데.”
소문을 막는 게 불가능하다면 더욱 키우면 된다.
사람들은 어느 정도 현실적인 소문에 대해선 금방 믿지만 너무 허황된 이야기는 헛소문이라 여긴다.
로엘은 명안이라 여겨 저도 모르게 감탄했다.
“오, 그 방법을 취하면 되겠구나. 머리 좋은데?”
“훗, 내가 괜히 하니온 왕궁을 꽉 잡고 있던 게 아니라고. 대신 소문의 근원지는 그란데 백작이니까 그란데 백작이 허풍쟁이로 여겨질 텐데 그래도 괜찮겠어?”
현재 그란데 백작은 한참 뒤에서 로엘을 더욱 더 찬양하기 위해 계획을 짜고 있었다.
로엘은 한 치의 고민조차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로 조금은 반성하라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