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9 2-1. 오크부족의 초대 =========================
로스트의 목소리에서 결의가 묻어나왔다.
로엘은 그의 간청을 받아들여 발언을 허락했다.
“말해봐.”
“전하의 아득한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아뢰옵건데 검은바위 부족의 오크들은 인간은 물론 동족인 오크들까지 하위종족으로 여기는 무뢰한들입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대화를 시도했다한들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을 겁니다.”
검은바위 부족의 오크가 말이 안 통한다는 건 로엘도 직접 부딪쳐 봄으로서 알게 되었다.
그러나 결과론적인 이야기가 왕명을 어겼다는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진 못한다.
로스트도 그걸 아는지 말을 이어서 계속하였다.
“더하여 왕명을 어긴 것은 마땅히 처벌 받아야 할 일이나 케이델 공작님은 선수를 치는 게 평화로 가는 지름길이라 여겨 행한 일입니다. 선왕께서 살아계실 적에 오크들에게 베푼 은혜가 얼마나 크덥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량이 부족하다며 빌로스에 송곳니를 들이댄 종족입니다. 케이델 공작님은 오크란 종족이 은혜를 모르는 종족임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행한 일이니 굽어 살펴주옵소서.”
이야기를 마친 로스트가 나머지 한 쪽 무릎을 마저 꿇으며 목을 내밀었다.
로엘은 그의 열변을 듣곤 미소를 지어보였다.
“말을 아주 잘하는군, 로스트 경. 누가 들으면 정말 평화를 위해 왕명을 어긴 줄 알겠어. 포장을 하는 건 좋지만 포장지를 잘 골랐어야지.”
케이델 공작이 왕명을 어기고 선제공격을 가한 것.
그 행동의 당초 목적은 높은 공적을 세워 왕명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증명함과 동시에 앞으로의 중앙정계 진출을 꾀하려던 것이었다.
그걸 모를 로엘이 아니었다.
이미 전생과 전전생에서 케이델 공작이 몇 번이나 써먹으려 했었던 방법이니까.
로스트는 로엘이 모든 것을 꿰뚫고 있음을 깨닫곤 급히 말을 바꾸었다.
“사실 대화를 생략하게 된 원인은 저에게 있습니다. 전하를 얕보고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하여 행한 일입니다. 지금도 잘 속여 넘길 수 있을 거라 여겼는데 역시나 잘 안 되는군요. 목을 베려면 베어보십시오.”
벌을 피할 수 없다면 최소한 자신이 모든 걸 뒤집어쓰겠다는 일념에서 하는 말이었다.
로엘은 두 무릎을 꿇고 바닥의 모래를 움켜쥐고 있는 케이델 공작에게 말을 걸었다.
“좋은 기사를 두었군. 어떻게든 주군을 살려보려고 애쓰고 있는데 그쪽은 뭐 할 말 없나?”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케이델 공작은 가까스로 입을 움직였다.
“팔 하나로는 안 되겠습니까?”
케이델 공작이 굳게 결심을 한 듯 오른팔을 내밀었다.
오른손잡이 검사가 오른팔을 내민다는 건 목숨을 내놓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팔을 잃을 바엔 목을 내놓는 게 검사란 존재이건만 케이델 공작은 지금 검을 희생하여 목숨을 구하려 했다.
“불경한 생각을 한 제가 목숨을 구걸하는 건 치졸한 일이나 제가 죽으면 제 아들들이 공작 작위를 두고 다툴 것입니다. 아들놈들의 후계자 수업이 끝날 때까지만 이 목숨을 부지하면 안 되겠습니까?”
확실히 케이델 공작의 세 아들들은 검술실력은 뛰어나나 성격이 개차반인 걸로 유명했다.
무력제일주의를 품고 있는 케이델 공작의 성격을 감안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다만 로엘에 대한 인식 변경, 목숨을 다해 자신을 지키려는 로스트의 충의가 케이델 공작의 무력제일주의를 바꿔놓았다.
반면 로스트는 결단코 케이델 공작만큼은 지키려는지 로엘이 꽂은 검날에 자신의 목을 대었다.
“안 됩니다 전하! 마나 익스퍼트가 국력에 미치는 영향력을 생각해서라도 공작님을 용서해주십시오! 제가 모든 걸 책임지겠습니다!”
“비켜라 로스트! 일개 기사가 무슨 책임을 진단 말이냐! 모든 것은 나의 불찰! 물러나거라!”
멀리서 보면 촌극에 불과할지도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진심이었다.
로엘은 피식 웃으며 땅에 꽂은 검을 뽑아 검집에 집어넣었다.
“케이델 공작. 좋은 기사를 두었군. 잘못을 알고 개선할 여지가 있다면 굳이 벌할 것도 없지. 앞으로는 더 나은 모습을 보이도록.”
“용서해주시는 겁니까?”
“방금 그렇게 말한 것 같은데? 그나저나 로스트 경은 말하는 법을 좀 더 길러야겠어. 하긴 같은 상황에서 그란데 백작이라면 벌써 검에 뛰어들었을지도.”
유연하게 상황을 풀어내는 로엘의 화술에 케이델 공작은 저도 모르게 편안함을 느꼈다.
마치 오랜 기간 케이델 공작을 상대해본 사람 같다.
케이델 공작은 단순히 그릇의 차이에서 오는 분위기라 여기며 로엘을 따라 미소를 그렸다.
“그 친구는 좀 더 생각하고 움직일 필요가 있지요.”
“지금도 너무 생각을 많이 해서 문젠데 더 생각하면 골치 아파져.”
결국 로엘이 케이델 공작을 용서하고 케이델 공작이 로엘의 그릇을 인정하면서 왕명을 어긴 것에 대한 처분은 피를 흘리지 않고 해결되었다.
때마침 더프가 다가와서 피해상황을 보고하였다.
“전하, 피해파악 끝났습니다. 철갑기마대 총 500명 중 사망자 30명, 부상자 60명, 실종 10명입니다. 부상자 중 10명은 상태가 심각하여 미리 돌려보냈습니다. 부상자 호위에 30명을 딸려 보냈으니 남은 철갑기마대 병력은 420명입니다.”
“로얄 기사단의 피해는?”
“5명이 경상을 입은 것 빼곤 모두 무사합니다.”
“조금 있으면 그란데 백작이 6천 병력을 이끌고 올 테니 그들과 합류한 후에 붉은머리 부족을 찾아가는 게 낫겠군. 그때까지 개인정비시간을 가지도록 해.”
“네.”
얼마 뒤에 도착할 그란데 백작이 올 때까지 잠시 휴식을 가지고자 하였다.
그런데 케이델 공작이 쭈뼛거리며 조심스레 로엘에게 말을 붙였다.
“저... 전하. 송구하오나 미처 말씀드리지 못한 게 있습니다.”
로엘은 이미 용서한 마당에 왜 케이델 공작이 쭈뼛거리나 싶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인데?”
“사실......”
케이델 공작이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
강가에 서있던 더프가 강 너머를 가리키며 다급한 목소리로 로엘을 불렀다.
“전하! 강 너머에서 새로운 오크들이 나타났습니다. 숫자는 대략 2000마리인 걸로 추정됩니다!”
검은바위 부족이 퇴각하여 새로 병력을 끌고 온 건가?
아직 부상자의 치료조차 끝나지 않았다.
사상자를 제외하고 남은 숫자를 추스르면 못 싸울 것도 없었지만 한 번 긴장이 풀린 상태에서 사기를 끌어올리기란 쉽지 않았다.
로엘이 집어넣었던 검을 빼내려던 찰나.
케이델 공작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하. 저들은 아군입니다.”
자세히 보니 강 너머 오크 사이에 붉은 머리카락을 지닌 오크 무리가 있는 게 보였다.
여기서 붉은머리 부족의 부락은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고, 로엘이 직접 찾아가기로 했었는데 왜 이곳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케이델 공작은 로엘의 의문을 읽곤 고개를 조아리며 설명하였다.
“사실 검은바위 부족과는 대화를 나누지 않았지만 붉은머리 부족과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무슨 대화?”
“빌로스 왕국이 불사오크를 처리할 수 있다는 게 증명되면 검은바위 부족을 제외한 모든 부족들로 하여금 빌로스 왕국을 섬기라 제안했습니다. 전하의 무위로서 검은바위 부족의 야망을 저지할 수 있다는 게 증명되었으니 신하의 예를 갖추러 온 것일 겁니다.”
“뭐? 그걸 오크들이 받아들였다고?”
“지금으로선 부끄러운 이야기이나 받아들이지 않으면 돕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었습니다. 오크들이 멸망하면 다음은 우리차례지만 순서대로 따진다면 오크 쪽이 더 급하니까요. 대신 심한 조항은 넣지 않았습니다. 단지 빌로스가 필요로 할 때 각 오크 부족들이 병력을 제공하고, 오크평원에 흉년이 찾아들면 식량을 제공한다는 것 외엔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말만 들어보면 앞으로 두 종족 간의 싸움 없이 상부상조하자는 거였지만 로엘에겐 전혀 다르게 들렸다.
검은바위 부족만 처리하면 오크병력이 로엘의 손에 떨어진다는 뜻 아닌가!
오크 부족 중 전사만 추려내기만 해도 그 숫자가 수 만에 달하며 그 숫자는 빌로스 왕국 전체 병력의 절반에 달하는 숫자다.
막 군비축소조약을 맺고 돌아왔는데 의도치 않게 군사력이 증강되게 생겼다.
심지어 더 어이없는 건 오크평원을 점령한 게 아니라서 오크병력은 공식적인 빌로스 군사병력에 포함되지 않는다.
4왕국에서 이 일을 안다 하더라도 뭐라 할 수가 없다는 거다.
의도치 않게 수 만의 강인한 전사를 얻을 처지에 놓인 로엘은 강하게 발을 구르며 케이델 공작을 다그쳤다.
“왜 그런 짓을 한 거야!”
“처음에는 전하께도 비밀로 하여 저를 위한 병력으로 삼으려 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전하의 그릇을 알았으니 전하께서 다루시는 게 빌로스를 위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축하드립니다 전하.”
“축하는 개뿔! 역시 안 되겠어! 케이델 공작 이리와! 왕명을 어겼으니 벌을 받자고!”
“흐억! 전하! 저는 진심으로 뉘우치는 뜻에서 전하께 병력을......”
타들어가는 속을 달래기 위해 냉수를 마시던 로엘은 문득 동작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지금이라면 늦지 않았어! 아직 맹세를 하지 않았고 서면으로 작성한 서약서도 없으니 지금이라면 없던 일로 할 수 있을 거야.’
기사서약, 국가 간의 조약, 종교서약 등에서 이루어지는 맹세는 구두맹세를 함과 동시에 공식적으로 발동되는 게 아니라 서면으로 작성한 후에야 발동된다. 보통은 구두맹세가 가지는 상징성이 워낙 크기 때문에 구두맹세 이후부터 양심에 따라 맹세를 지키지만 공식적으로는 서면에 양측의 도장이 찍혀야 유효성을 가지게 된다.
이번 경우 원래대로라면 케이델 공작이 글을 읽을 줄 모르는 오크들을 상대로 말로는 빌로스 왕국, 서면으로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걸로 도장을 찍었을 거다.
그런데 로엘에게 사실을 실토하면서 결정권이 로엘에게로 넘어갔고, 서면에 찍힐 도장은 국새로 바뀌었다.
서약서를 작성하고 국새로 도장을 찍으려면 수도까지 가야하니 그 사이에 오크들을 설득하면 그만이었다.
그런 로엘의 기대를 없애버릴 목소리 한 줄기가 강 너머에서 들려왔다.
“전하! 저 그란데 백작이 희소식을 들고 왔습니다!”
오크만 오는 줄 알았는데 오크 무리 옆으로 그란데 백작이 이끄는 빌로스 병력이 나타났다.
오크 무리 뒤에 있어서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란데 백작은 오크 무리와 함께 강을 건너오더니 로엘에게 말을 전했다.
“오다가 길라운을 만나 함께 오게 되었습니다. 듣자하니 이번 일로 빌로스의 백성이 되기로 했더군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할 말이 있어. 개인적으로는......”
“이런 경사스러운 일을 치일피일 미루는 건 좋지 않다 여겨 제가 임의로 서면을 작성했습니다. 작성한 서면에 오크부족 족장들의 지장을 찍어서 매를 통해 날려 보냈으니 사흘 내로 클라임 후작이 국새를 찍어둘 겁니다. 이제 구두맹세만 남았으니 맹세를 받으십시오.”
“...”
클라임 후작에게 전권을 위임했기 때문에 그가 찍은 국새는 로엘이 찍은 것과 동일한 효력을 지닌다.
물론 국왕 본인이 아니라서 국새 사용 전에 왕궁의회 3분의 2가 국새사용을 찬성해야지만 국새를 찍을 수 있다. 의회가 반대하거나 클라임 후작이 재차 고려해줬으면 하는 기대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일은 결코 벌어지지 않을 거다.
수 만의 오크병력을 얻고, 오크평원과의 분쟁을 종식시킬 수 있는 일인데 누가 반대를 하겠는가.
과연 그란데 백작이랄까.
이쯤 되면 경이롭기까지하다.
어쩜 이리 일을 하나하나 주옥 같이 처리해주는 걸까.
세간에선 그란데 백작을 두고 유능하다 할 테나 로엘에겐 애증의 존재라 할 수 있었다.
로엘은 ‘나 잘했죠?’라는 표정으로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란데 백작을 보며 두통을 느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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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크평원의 중앙지역에 위치한 킬리프 고원.
검은바위 부족은 여타 오크들과 달리 움막을 짓지 않고 고원에 얼기설기 얽힌 바위 사이에서 지내는 부족이었다.
먼 옛날 석화마안을 가진 바실리스크가 분노하여 산이 무너졌고, 그때 무너진 산의 바위가 얽히면서 지금은 고원이 생겨났다. 킬리프 고원의 바위색깔은 검은색에 가까웠는데 바실리스크의 독기가 스쳐간 영향으로 생겨난 얼룩이라 한다.
단순한 전설에 불과하지만 검은바위 부족은 그를 가벼이 여기지 않고 뱀을 먹지 않는 부족으로 유명했다.
바위로 이루어진 개미굴마냥 맞물린 바위틈마다 검은바위 오크들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지금 막 팔 혹은 다리 등의 신체 일부를 잃어버린 오크전사 몇몇이 바위지대 중앙 깊숙한 곳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들은 여러 개의 작은 바위가 큰 바위를 떠받치고 있어 동굴처럼 넓은 공간에 들어섰다.
공간의 가장 그늘진 구석에는 오크치곤 몸집이 작은 오크 한 마리가 앉아있었다.
뛰어 들어온 오크전사들은 그늘 속 족장에게 보고를 올렸다.
“디르크 족장. 즈카가 죽었습니다.”
디르크라 불린 오크는 자신의 무릎에 올라와 애완견처럼 꼬리를 떨고 있는 방울뱀을 쓰다듬었다.
그의 손길은 대수롭지 않은 일을 들은 양 부드럽기만 했다.
“빌로스 왕국의 인간에게 죽었느냐?”
“네, 케이델 공작이란 작자를 궁지까지 몰아넣었는데 새로운 마나 익스퍼트가 나타나 모든 걸 망쳤습니다. 그들이 불사의 몸을 죽이는 법을 깨달았는데 이제 어떻게 하죠?”
“큰 소리내지마라. 녀석은 이제 막 만들어져 의식이 불안정한 상태니까.”
디르크의 뒤에서 오우거에 버금가는 덩치를 가진 실루엣이 아른거렸다.
덩치 큰 불사오크의 존재가 의미하는 바를 아는 오크전사들은 화색을 띠었다.
“드디어 완성된 겁니까?”
디르크는 가느다란 팔로 바위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일어나면서 무릎 위에 놓여 있던 방울뱀이 바닥에 떨어졌고 드르크의 발이 방울뱀을 강하게 짓밟았다.
검은바위 부족이 뱀을 죽였다.
그것은 곧 그들 스스로 검은바위 부족의 일족, 나아가 오크라는 의식을 집어던졌음을 의미했다.
디르크는 자신의 뒤에서 고요한 숨소리를 내고 있는 거구 오크를 올려다보며 조소를 머금었다.
“아디의 힘은 마나 블레이드도 꺾어버릴 것이다. 고작 마나 익스퍼트 따위가 아디를 막을 수 있을 성 싶으냐. 자, 나를 위해 움직여라 아디! 만물의 영장이라 자부하는 건방진 종족을 멸하러 가자구나.”
“그르르.”
아디라 불린 거구 오크가 바위를 걷어내며 무식하게 바위지대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먼저 바위지대 바깥으로 나온 디르크는 오크전사들을 향해 팔을 뻗었다.
디르크의 손에서 검은 마나가 새어나오더니 오크전사들의 신체를 복구시켰다.
작업을 마친 디르크가 오크전사들에게 일렀다.
“모든 전사들과 포로들을 발자국 협곡에 모아라. 거기서부터 인간사냥을 시작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