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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놈될-23화 (23/219)

00023 9. 로엘 쟁탈전 =========================

숙소로 돌아온 엘로나는 탁자에 기대듯 앉아 손으로 얼굴을 폭 감쌌다.

“내가 그런 실수를 할 줄이야.”

돌아오는 길에 방 안에서 벌어진 사태를 들은 카넨이 엘로나의 뒤에 서며 냉혹하게 한 마디 날렸다.

“여왕님의 행동은 명백한 실수였습니다.”

“꼭 확인사살을 해야겠나요?”

“위로를 바라십니까?”

카넨이 평소에 보이지 않는 매서운 눈빛으로 쳐다보자 엘로나가 주춤하며 잘못을 인정했다.

“그래요. 내 잘못이죠. 물질적으로 접근하려 하다니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죠.”

“그래서 여태껏 의회에서 파티에 참가해 귀족들과 대화를 해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귀족들은 남편 흉밖에 보지 않는 걸요.”

여자비율이 높은 킬더 왕국답게 여자가 작위를 이어받은 가문이 상당히 많았다.

그래서 한 번 왕궁연회를 열면 여귀족들끼리의 대화가 많이 오갔다.

여귀족들의 남편은 대부분 데릴사위가 많아 기를 못 펴고 살기 때문에 좋은 소리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남자 경험이 없어 대화에 끼여 봤자 듣는 것밖에 할 게 없어 평소에는 갖은 이유를 대어 피하는 경우가 많은 엘로나였다.

카넨은 이번 일을 도화선 삼아 엘로나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유감없이 꺼내었다.

“여귀족들은 남자를 쥐고 사는 방법을 압니다.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어두는 것만으로도 많은 도움이 되었을 텐데 귀찮다는 이유로 피해왔던 게 누구죠?”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

“일단 로엘 국왕은 외모나 물질적인 것으로 사랑을 가늠하는 인물은 아닌 것 같네요. 레이아 공주나 여왕님이나 실점을 한 건 똑같으니 승산은 우리에게 있어요.”

“글쎄요. 듣자하니 여기 오기 전에 레이아 공주와 함께 행동했던 것 같더라고요. 이미 허물  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이 같았어요.”

“시작도 전에 주눅 들면 안 된다고요. 지금 여왕님 나이가 몇인지나 알고 그리 여유 부리시는 거예요?”

“여유 부리는 게 아니라......”

엘로나가 말꼬리를 흐리자 카넨이 손가락 세 개를 펼쳐보이며 열변을 토했다.

“서른이에요 서른! 아무리 관리를 잘했어도 로엘 국왕과 무려 10살 차이예요. 도둑년 소리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라고요.”

“저기 카넨? 일단은 저 여왕인데요. 도둑년이란 표현은 좀......”

“여왕이기 이전에 여자이기도 하죠. 결혼에 있어선 제가 선배고요. 여왕님이 레이아 공주보다 앞서는 건 약혼자 행세를 하고 있다는 점뿐이에요. 내일 사람을 사서 바람잡이 역할을 시킬 테니 현재 상황을 최대한 이용해서 기정사실을 만드세요.”

엘로나의 결혼하는 게 킬더 왕국의 염원이기도 하기에 카넨이 열변을 토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킬더 왕궁의회가 들었다면 더욱 극성을 피웠을 거다.

카넨은 입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할 말이 많았지만 잠을 늦게 자면 피부가 거칠어진다는 이유로 내일 할 일만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물론 카넨의 의견을 듣는 동안 엘로나의 표정이 수십 번도 더 바뀐 건 두 말할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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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케시어 전역의 옷가게와 장신구 가게가 유례없는 수익을 올렸다는 소식을 필두로 대륙회담 두 번째 날이 시작되었다.

견학하러 오는 케시어 백성과 각국의 귀족들은 이미 회담 결과가 정해진 것처럼 대화를 나누었다.

“어제 브리니아 국왕이 안건을 찬성한다고 돌아선 게 컸었지.”

“그래도 만장일치여야만 가결이 되잖아. 겐크 왕국 국왕은 끝까지 반대할 심산이던데 과연 설득할 수 있을까?”

“반대하다간 또 로엘 국왕의 언변에 호되게 당하겠지. 게다가 이 상황에서 계속 반대하면 전쟁하겠다고 선언하는 거나 다름없는데 브리튼 교가 과연 가만히 있을까? 최악의 경우엔 회담 이후에 브리튼 교가 아지스 국왕을 소환할지도 모른다고.”

기본적으로 브리튼 교는 평화를 추구하는 종교다 보니 전쟁에 매우 부정적인 편이다.

평화를 논하려고 만든 자리인 대륙회담에서 대놓고 전쟁을 말한다는 건 브리튼 교의 대신전 안에서 브리튼 교의 교리를 부정하는 격이었다.

브리튼 교도 명분만 있다면 나라끼리의 전쟁에 크게 간섭하진 않지만 이번 경우엔 명분 없이 일단 전쟁준비부터 하는 격이라 종교재회에 소환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군중 모두 이 상황을 만든 게 로엘임을 의심치 않았다.

회담시간이 다가오면서 각국의 국왕들이 하나둘 자리에 착석하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군중 사이에 의아한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로엘과 엘로나의 혼담이 사실은 회담에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거짓소문이다!

심지어 출처도 상당히 신빙성 있는 곳에서 나왔다.

“들었어? 사실은 로엘 국왕과 엘로나 여왕 사이에 오가던 혼담이 거짓이라는데?”

“어젯밤에 로즈기사단이 대신전에 야식을 구하러 오면서 무심코 말해버린 모양이야. 카넨 단장이 있었다니까 정말일지도.”

“근데 처음 혼담 소문의 출처도 카넨 단장이잖아. 뭔가 이상한데?”

“아무튼 거짓일 가능성도 있다는 거야.”

군중들의 웅성거림은 회담을 벌이는 탁자에도 닿았다.

죽을상으로 탁자에 앉았던 아지스는 의외의 곳에서 돌파구가 생겼음을 직감하고 회담 시작과 동시에 소문을 들먹였다.

“로엘 국왕, 엘로나 여왕. 두 사람간의 혼담이 회담을 위한 가짜 혼담이라는 소문이 들리는데 그냥 흘려들을 수 없더군. 진실을 말해줄 것을 요구하네.”

로엘은 갑자기 소문이 돈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태연하게 대응했다.

“소문은 소문일 뿐 우리 사이는 여전해.”

“말로는 얼마든지 그리 말할 수 있지. 두 사람이 약혼관계라는 걸 증명해보게나.”

“반지라도 보여주고 싶지만 아직 정식으로 식을 올린 게 아니라서 말이야.”

“그렇다면 믿을 수 없군. 설마 우리를 압박하기 위해 거짓으로 흘린 소문인 건 아니겠지?”

로엘이 대답하기도 전에 기다렸다는 듯 엘로나가 일어나더니 로엘의 옷을 잡고 입술에 입술을 겹쳤다.

다소 서툴고 밀어붙이는 식의 키스 이후, 엘로나는 잘 먹었다는 듯 개운한 표정을 지으며 아지스를 당당히 쏘아붙였다.

“이것 이상으로 명백한 증거는 없죠. 됐나요?”

엘로나의 당당한 애정행각에 장내가 찬물을 뿌린 듯 조용해졌다.

약점이라 여겨 공격하려던 아지스는 물론 입술을 빼앗긴 로엘과 보고 있던 군중들까지.

군중 사이에 있던 레이아가 경악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건 말할 필요도 없었다.

다소 헤프닝이 있었지만 갈레오리 교주가 자연스럽게 사태를 수습했다.

“아지스 국왕. 의문은 해결되셨는지요?”

갈레오리 교주의 질문으로 인해 회담의 분위기가 본래 궤도로 복귀하였다.

아지스는 헛기침을 하며 괜한 것을 물은 사람처럼 무안해하였다.

“크흠, 두말할 것 없는 사이구려.”

청초함의 표본이라 불리우는 엘로나가 대중 앞에서 애정행각을 선보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당한 로엘 본인이 가장 당황스러웠지만 아지스가 주춤한 틈을 여지없이 이용하였다.

“설마 내 말이 거짓말이라 여겨 우리 사이를 의심한 거였나?”

“의심이라기 보단 확실히 해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물어본 걸세.”

“난 분명 어제 혼담이 오가고 있다 말했어. 그런데 굳이 물어본 건 빌로스의 국왕인 내가, 그리고 킬더 왕국의 여왕인 엘로나가 거짓말을 했다 여긴 거지. 두 왕국의 왕을 거짓말쟁이라 여겨 놓고 발뺌할 생각이야?”

바꾸어 말하면 두 왕의 명예를 깎아내리려 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제 파이오르가 날린 질문이 ‘확실히 해둔다.’라는 거고 오늘 아지스가 날린 질문은 ‘의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소문을 이용하려다가 아지스 본인이 무뢰한으로 낙인찍히게 생겼다.

아지스는 완전히 궁지에 몰려 하는 수 없이 저자세를 취하고 말았다.

“의심한 건 사과하지. 미안하게 됐네.”

“알았으면 됐어. 그러면 바로 어제에 이어서 회담을 시작해보자고.”

기어코 사과를 받아낸 것도 모자라 그대로 회담을 시작하여 주도권을 잡아내는 로엘이었다. 그 때문에 아지스는 준비해온 모든 것을 꺼내보지도 못하고 주도권을 빼앗긴 채 밀리는 형국이 되었다.

능숙하게 주도권을 잡는 로엘을 보며 엘로나는 내심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 남자는 진짜배기야. 이 상황까지 이용한다는 게 말이 돼?’

간밤에 카넨이 일부러 헛소문을 퍼뜨린 후 아지스나 파이오르가 진상을 요구하면 공개 스킨십으로 기정사실을 만든다. 그 후에는 대륙 전역에 기정사실이 알려질 테니 로엘은 빼도 박도 못하고 엘로나를 받아들여야 한다.

여기까지가 엘로나의 계획이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조금 정도는 당황할 텐데 로엘은 흔들림 한 점 없이 회담을 진행하고 있었다.

알면 알수록 점점 탐이 나는 남자였다.

이미 4왕국이 찬성으로 돌아선데다 엘로나의 돌발행동과 로엘의 화술에 휘말린 아지스는 오래 버티지 못하고 백기를 들었다.

“더 이상 반박할 말이 없군. 겐크 왕국도 군비축소에 찬성하겠네.”

회담 장소에 모인 모두가 이미 첫날 때 결과를 짐작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라는 듯 수긍하였다.

모든 국가가 군비축소에 찬성한다고 선언했기에 투표를 할 것도 없이 군비축소조약이 통과되었다.

절차대로라면 내일 정식으로 투표를 해야 하는 게 맞지만 모두가 구두로 찬성을 했는데 반대표가 나오면 상당히 골치 아파지기에 투표를 생략한 것이었다. 실수로라도 반대표가 한 표라도 나오게 되면 그 한 명이 누구인지 언쟁이 펼쳐지면서 5국왕 모두의 명예가 훼손되기 때문이었다.

갈레오리는 정식으로 군비축소조약의 통과를 선언하기 앞서 재차 국왕들의 의사를 확인하였다.

“5왕국의 명예를 위해 투표를 생략하고 군비축소조약을 구두선언으로 통과시키려 합니다. 5왕국의 국왕들은 이에 동의하십니까?”

다섯 명의 국왕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갈레오리는 군중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빛의 정령을 담은 투명석 망치를 세 번 두드렸다.

“다섯 명의 국왕이 만장일치로 찬성함에 따라 군비축소조약, 성비규모제한 및 군비축소위원회 및 하위항목 20조 223항이 통과되었음을 선포합니다.”

탕! 탕! 탕!

둘째 날 회의가 정오에 끝나면서 56회 대륙회담은 본래 일정의 절반만에 끝난 셈이 되었다.

원래 셋째 날에 투표가 끝난 후 파티가 열리기로 했었는데 일정이 빨리 끝난 만큼 둘째 날 오후부터 열리게 되었다.

빨리 끝난 만큼 둘째 날에 뒷풀이까지 모두 소화하기로 하고 셋째 날 아침에 각자 본인의 왕국으로 돌아가는 식으로 일정이 당겨졌다.

회담기간이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게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닌지라 브리튼 교에서 능숙하게 대처하였다. 참고로 가장 빨리 끝난 회담은 20회 회담으로 당시에 존재하던 테이크 왕국이 ‘브리튼 교에 매년 일정량의 기부금을 주자’라는 안건을 꺼냈다가 당시 교주가 어마무시하게 압박을 주어 3시간만에 전원찬성으로 회담이 끝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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