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될놈될-22화 (22/219)

00022 9. 로엘 쟁탈전 =========================

어느새 너무 과열되어 있음을 자각한 두 여자가 로엘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열이 식어 다소곳이 앉았다.

시끄러웠던 소리가 가라앉음과 동시에 로엘이 진지한 투로 말을 꺼냈다.

“둘 다 내가 뭔가 주면 좋아할 치즈남이라 생각하는 거야?”

사랑 없이 돈만으로 이성을 만나는 걸 두고 치즈남 치즈녀라 부른다.

원래는 평민들의 은어지만 지금 로엘이 느끼는 불쾌함을 드러내기엔 이만한 단어가 없었다.

레이아와 엘로나는 자신들이 너무 심했음을 깨닫고 어깨를 늘어뜨렸다.

“미안.”

“죄송해요.”

“정략결혼을 할 생각은 없어. 그러니까 둘 다 돌아가. 그리고 엘로나 여왕.”

“네.”

“오늘 일은 없었던 걸로 할 테니 마음에 두지 말고 군비축소를 통과시키는데 전념해줘. 아직 표결은 부쳐지지 않았어. 소문이 아지스와 파이오르에게 억제력을 가하고 있으니까 회의가 끝날 때까진 약혼자 행세 부탁해.”

“알겠어요.”

“내가 할 말은 이게 끝이야.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록 해.”

두 여자는 지아비를 따르는 아녀자처럼 고분고분 몸을 일으켜 돌아갔다.

그녀들이 돌아가면서 숙소에 평온함이 찾아들었다.

로엘은 회담 때보다 더한 피로감을 느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이걸로 정리된 거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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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로스 왕국의 숙소 2층 끝에 마련된 드리안 공작의 방.

방 안에선 레리가 드리안 공작에게 방금 있었던 일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었다.

드리안 공작은 저도 모르게 사실대로 고했다는 말을 전하며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역시 끝까지 잡아뗄 걸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드는군.”

“아니요. 잘하신 겁니다. 전하께서 전부 알고 계시는데 잡아뗐다면 3공작 중 가장 먼저 척살되었겠죠.”

“나름대로 입단속은 철저히 했다고 생각했거늘.”

“생각 이상으로 로엘 전하의 정보력이 막강하다는 것이겠죠. 오늘 타 왕국들의 군사시설을 파악한 지도는 솔직히 제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물건이었습니다.”

“게다가 레이아 공주의 의중까지 파악하고 계셨다네.”

“그 정도... 였습니까.”

“어찌하는 게 좋겠나?”

레리도 어디 가서 충분히 책사로 대접 받을만한 인물이었다.

평민 출신만 아니었다면 벌써 빌로스 왕국 정계의 중심에 서있었을 거다.

그런 그가 출세하기 위해선 공작급 이상의 인물을 뒤에서 조종하여 수면 아래에서 정권을 쥐고 흔드는 방법밖에 없었다. 3공작 중 굳이 드리안 공작을 택한 건 드리안 공작이 다혈질임에도 불구하고 책사의 조언에 귀를 기울인다는 점과 개인무력으로는 빌로스 3대 마나 익스퍼트 중 최고이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이번에 로엘이 여행한답시고 무리에서 이탈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얕본 감이 있었다.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애가 왕이 되었구나하고 말이다.

그래서 드리안 공작을 부추겨 로엘의 환심을 사고 중앙정계진출을 위한 교두보로 삼으려 했다.

허나 뚜껑을 열어보니 완전히 반대였다.

뭐든지 알고 뭐든지 이룰 수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행동할 수 있는 것이었다.

레리는 로엘이 정치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상당한 경지에 이른 자라는 걸 직감했다.

“솔직히 말하면 방법이 보이지 않는군요. 제가 보기엔 완벽한 성군이십니다. 공작님께서 중앙정계를 손에 넣으려면 평화를 해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암계밖에 없다고 말하려는 건가?”

“네. 그마저도 통할지 모르겠습니다. 전하 본인께서 마나 익스퍼트이시니 말입니다.”

“자네가 말한대로 완벽한 성군이라는 말 이외에는 수식어가 없군. 그렇다는 나는 어찌해야겠는가?”

“마음으로 충성을 다하십시오.”

“중앙정계를 포기하란 말인가?”

“아닙니다. 충성을 다하시되 진득하게 기다리셔야 합니다. 정공법밖에 없는 걸 안 이상 공을 세울 기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레리의 판단은 지극히 옳았다.

드리안 공작의 말에 의하면 로엘이 ‘제대로 하면 기꺼이 정권을 내주겠어.’라고 했다 하였다.

내준다는 건 가진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젊은 나이, 짧은 국왕 경력이건만 벌써 빌로스 정계를 꽉 쥐고 있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즉, 드리안 공작이 해야 할 건 수작을 부려서 중앙정계를 ‘장악’하는 게 아니라 로엘에게 인정  받아 중앙정계를 ‘위임’ 받는 것이었다.

그를 위한 최선의 방법은 충성임을 이 뛰어난 책사는 단번에 알아차린 것이다.

드리안 공작은 레리의 조언을 어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자네의 말이니 그게 정답이겠지. 알겠네. 좀 더 진득하게 행동하는 편이 좋겠군.”

“영지에 있을 때처럼 자연스럽게 행동하시면 위엄은 저절로 따라올 것입니다.”

“알겠네. 오늘은 너무 늦었군. 이만 자리를 끝내도록 하지.”

“네, 편안히 주무시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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쾅!

오밤중에 거세게 문 닫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잠자리에 들려던 울크는 이불을 들추다말고 복도로 나왔다.

레이아를 따라 빌로스 왕국의 숙소로 갔던 크라넬이 복도에 서있었다.

울크는 레이아가 문을 세게 닫으며 방에 들어갔음을 깨닫곤 크라넬에게 말을 붙였다.

“잘 안 됐나보군.”

크라넬이 가볍게 목례를 하며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고했다.

“공주님이 들어가신지 얼마 되지 않아 엘로나 여왕님이 들어가시더군요.”

“뭐? 엘로나 여왕이?”

“네. 안에서 로엘 국왕을 두고 언쟁을 벌이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왠진 모르겠지만 돌아오시는 길에 자꾸만 내가 왜... 내가 왜...라고 하시는데 아무래도 이불 차실만한 발언을 하신 것 같습니다.”

크라넬의 예상과 다르게 레이아의 방 안에선 무언가 때리는 소리가 났다.

베개 때리는 소리로 추정되었다.

울크는 어깨를 으쓱이며 흐뭇하게 웃었다.

“이불이 아니라 베개인 모양이군.”

“어찌 됐든 공주님 본인에게 마음이 생긴 것만은 분명하겠죠. 얼핏 복도에 로엘 국왕이 치즈남 운운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엘로나 국왕과 무언가 주는 경쟁을 펼치다가 한 소리 들은 모양입니다.”

“흐음, 원한다면 군사요충지 영지 2개는 줄 의향이 있었는데 말이지. 로엘 국왕은 물질적인 것으로 흔들릴 남자가 아니라는 거군. 하긴 그 정도에 흔들릴 남자였다면 우리 레이아의 눈에 들 리 없었겠지.”

“매력 대결로 간다면 공주님이 엘로나 여왕을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어허, 우리 레이아가 서른 줄의 노처녀보다 못하단 소리인가?”

“지금은 팔불출보다 객관적인 상황판단이 우선입니다. 공주님은 분명 하니온 최고의 미녀이시지만 엘로나 여왕은 대륙 최고의 미녀입니다. 아름다운 나무를 볼 때 나무를 베어 나이테를 확인하진 않지요.”

울크로선 팔을 안으로 굽히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걸려 있는 게 너무 컸다.

레이아의 시집과 로엘이라는 초신성을 얻기 위해선 이번 대륙회담이 끝나기 전에 승부를 봐야했다.

안타깝지만 울크가 봐도 엘로나의 아름다움은 레이아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나마 활로가 있다면 엘로나도 로엘에게 거절을 당했다는 점이었다.

“엘로나 여왕도 물질적인 것으로 꾀려다가 스스로 점수를 깎아먹었지. 아직 레이아에게도 파고들 틈은 있다고 보네.”

“물론입니다. 일단 한 가지 레이아 공주님이 앞서는 것이 있습니다. 로엘 국왕에게 사적으로 다가갈 명분이 남아있다는 겁니다.”

“그런 명분이 있었나?”

“못 들으셨습니까? 오는 길에 레이아 공주님께서 암살자에게 당할 뻔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로엘 국왕이 공주님을 구해주셨죠. 생명의 은인이니 보답한다는 명목으로 다시 자리를 가질 수 있습니다.”

“뭐? 어느 누가 감히 하니온의 공주이자 짐을 딸을 해하려 했단 말인가!”

“쉿! 목소리가 너무 크십니다. 일단 그들은 로엘 국왕이 자기 수하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문제를 언급하면 레이아 공주님만 곤란해집니다. 중요한 건 생명의 은인이라는 명분이 있다는 것이지요.”

레이아가 습격당했다는 말에 광분할 뻔한 울크지만 무사히 넘어간 일로 로엘과 마찰을 빚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크라넬의 말마따나 명분이 있다는 건 매우 컸다.

그것은 곧 사적인 자리를 마련할 수 있다는 거고 지금까지의 이미지를 씻어낼 기회가 남아있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울크는 목을 가다듬으며 레이아를 밀어줄 준비를 하라 명했다.

“흠흠, 이왕이면 내일 승부를 보는 게 좋겠군. 일단 케시어에 있는 모든 옷가게에 들러 레이아에게 어울릴만한 옷을 모조리 사오도록 하게. 장신구도 마찬가지일세.”

“알겠습니다. 그리고 킬더 왕국의 동향을 놓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기사들은 물론 데리고 온 모든 시종들에게 명령을 내려놓게.”

“네. 모든 것은 공주님을 위해서.”

“그리고 내 편안한 노후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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