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1 9. 로엘 쟁탈전 =========================
9. 로엘 쟁탈전
레이아가 찾아왔다는 소식에 로엘은 드리안 공작을 물렸다.
한창 로엘에게 혼나고 있던 드리안 공작은 다소 어두워진 표정으로 물러났다.
그가 나간지 얼마 되지 않아 레이아가 방 안에 들어왔다.
그녀는 치맛자락 중간을 살짝 잡으며 가식적으로 인사를 올렸다.
“하니온의 공주 하니온 루 레이아가 엘리오크 킨 로엘 전하를 뵙습니다.”
“인사치례는 됐어. 찾아온 이유나 말해.”
박대에 가까운 반응에 레이아가 양 허리페 손을 올리며 뾰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보는 눈, 듣는 귀가 있으니까 형식상 예의 차려준 것일 뿐이야. 장단 좀 맞춰주면 어디 덧나나.”
“그런 거 없으니까 편히 말해. 어떤 간 큰 놈이 마나 익스퍼트한테 스파이를 붙여놓겠어?”
로엘이 마음만 먹으면 숙소 전체에 있는 기척을 모두 감지할 수 있다.
기척을 감지하는 게 너무 피곤한 일이라 그러지 않는 것일 뿐이다.
적어도 방 주변에 수상한 사람이 없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레이아는 아까 드리안 공작이 앉았던 자리에 앉으며 탁자 위에 놓인 술병을 바라보았다.
“어? 이거 만드라고라 술이잖아. 의외로 애주가네.”
“드리안 공작이 가져온 거야. 근데 보기만 해도 아는 거냐?”
“나도 자칭 애주가니까.”
“쬐끄만 게 술이나 좋아하고 잘하는 짓이다.”
“꼬맹이라고 하지 말랬잖아!”
저도 모르게 냉정함을 잃고 버럭 소리를 질러버린 레이아였다.
‘아차, 이러려던 게 아닌데... 으으, 왜 이 녀석이랑 말을 섞을 때마다 이리 화나는 거지?’
빌로스의 숙소 앞에 도착할 때만 하더라도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갈지 전부 생각해뒀었는데 로엘과 마주친 순간 싹 다 날아가고 말았다.
레이아는 무릎에 손을 올리며 앉은 자세를 다소곳하게 바꾸었다. 그리곤 긴 숨을 내쉬어 냉정함을 되찾은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찾아온 건 다른 게 아니라 혼담 얘기 때문이야.”
“그거라면 이미 드리안 공작에게 들었어. 너랑 내가 결혼하게 되면 널 밀어주겠다고 했다며?”
냉정함을 되찾은지 몇 초나 지났다고 다시 우르르 무너졌다.
레이아는 파도에 무너진 모래성을 보는 아이마냥 발을 동동 굴렀다.
“아! 짜증나! 되는 게 하나도 없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아무튼 내가 고르디에서 약혼만은 참아달라고 소원까지 써서 말했는데 그새 또 오해해서 찾아온 거냐?”
“오해 같은 거 안 했거든?”
“오해 안 했으면 왜 왔는데? 진심으로 나랑 결혼하고 싶어서 찾아왔을 린 없을 테고.”
되돌아보니 지금 이 상황은 레이아가 결혼을 진행시키러 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레이아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구애하러 온 모양새가 되어버려서 크게 얼굴을 붉혔다.
촛불의 불빛이 얼굴빛을 덮어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레이아는 어색하게 콧방귀를 뀌며 로엘의 말을 부정했다.
“흥, 너 같은 심술쟁이랑 결혼하고 싶을 리 없잖아. 빌로스 왕국 정권을 장악하려 했을 뿐이라고.”
“당당하게 말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말이지. 뭐 너한테는 일절 감정 없고 결혼할 생각도 없으니까 돌아가서 울크에게도 그리 전해.”
“나만한 미인이 밤늦게 찾아와줬는데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야.”
“뭐야 역시 마음 있는 거냐?”
“전혀! 용건이 의미가 없어졌으니까 이만 돌아갈래.”
“호위 붙여줄까?”
“필요 없어!”
호되게 당하기만 한 레이아는 씩씩거리며 바깥으로 나가려 했다.
그런데 바깥에서 더프가 새로운 손님의 방문을 알려왔다.
“전하. 엘로나 여왕께서 찾아오셨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들여보내. 마침 얘기가 끝난 참이니까.”
이 밤중에 엘로나가 찾아온 이유가 뭘까.
대륙회담 건이라면 내일 만나서 얘기해도 된다.
굳이 밤중에 찾아올 이유라면 하나밖에 없었다.
전생과 전전생에서 로엘의 장악력을 보고 감탄한 울크가 레이아를 넘겨주었듯이 이번에는 엘로나가 같은 생각을 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전생과 전전생에선 로엘이 엘로나를 공격했기 때문에 대륙회담 이후로 두 사람의 사이가 나빠졌지만 지금은 그 반대의 상황이니 먼저 다가와도 이상할 게 없었다.
이번 생애만큼은 정략결혼을 할 생각이 없기에 엘로나에게 확실히 말해둘 생각이었다.
안 그러면 또 귀찮은 사태가 발생할 것 같으니까.
그런데 로엘의 눈에 나가려다 말고 가만히 서있는 레이아가 보였다.
로엘은 파리를 쫓듯 손을 휘휘 저었다.
“나간다며? 얼른 가.”
레이아는 로엘을 차갑게 째려보면서 원래 앉았던 자리에 도로 앉았다.
“안 가. 아직 용건 안 끝났어.”
“용건 있으면 얼른 말해. 다른 손님 찾아왔잖아.”
“내가 먼저 왔다고. 돌려보낼 거면 늦게 온 손님을 돌려보내야지.”
“그러니까 용건을 말해. 들어준다니까.”
레이아로선 지금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레이아도 바보는 아닌지라 엘로나가 왜 찾아왔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엘로나가 로엘에게 어떤 제안을 하든 알 바 아니지만 로엘의 반응이 자꾸만 짜증을 돋웠다. 레이아는 들어오자마자 귀찮다는 듯 심드렁하게 대하더니 엘로나가 오니까 곧장 반기는 기색을 띠었다.
적어도 레이아에겐 그렇게 보였다.
자신이 서른 넘은 아줌마보다 못하다는 게 그녀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레이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엘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용건 없는 거지?”
“...라고.”
“응?”
“빌로스 정권 같은 거 됐으니까 나랑 지내보기나 하자고!”
발끈하며 폭탄발언을 내뱉은 레이아였다.
로엘은 멍하니 레이아를 쳐다보다가 손뼉을 쳤다.
짝짝
“와 연기력 장난 아니네. 누가 보면 진짜로 마음 있는 줄 알겠어.”
“연기 아니야! 너 지금 엘로나 여왕이 왜 온지 알고 있지? 지금 나보다 서른줄 넘은 아줌마가 좋다고 하는 거야?”
어차피 냉정함따윈 잃은지 오래였다.
지금 그녀에겐 빌로스 정권이니 로엘을 괴롭히니 하는 걸 떠나서 여자의 자존심과 자각하지 못한 의문의 감정만이 남아있었다.
로엘도 사태가 이리 흘러갈 줄은 꿈에도 몰랐다.
저 성격 나쁜 여자가 저리 나올 줄이야.
적절한 대답을 위해 빠르게 머리를 굴렸으나 대답보다 방 문이 열리는 게 먼저였다.
경첩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더니 엘로나가 들어왔다.
엘로나는 문 너머에서 레이아의 외침을 들었는지 공격적인 눈빛을 띠고 있었다.
“레이아 공주. 밖에서 아주 재미있는 소리를 들었는데 제대로 설명해주시겠어요?”
레이아도 한 성격 하는지라 지지 않고 대응했다.
“말 그대로랍니다. 누구라도 며칠 동안 방치된 빵보단 갓구운 빵을 좋아하잖아요?”
“어머, 편식하시면서 지내셨나보네요. 21살이 아니라 11살이라 해도 믿겠어요.”
“작다고 무시하지마세요. 비율로 따지면 지지 않는다고요.”
“같은 비율이면 큰 쪽이 더 좋다는 건 정돈 알고 계신 텐데요. 딱히 용건이 없으면 이만 돌아 가주실래요? 타 왕국 공주가 밤에 국왕의 처소에 들린 게 알려지면 안 좋은 소문이 돌 거예요.”
“상관없어요. 오늘이 지나면 우리 둘 사이에 혼담이 오갈 테니까요.”
“헛된 희망을 품고 계시네요. 회의에서 저랑 혼담이 오간다는 소리를 못 들으셨나요?”
“그거 전부 거짓말인 거 알고 있어요.”
서로 한 마디도 밀리지 않고 대치하다보니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가운데에 끼인 로엘은 어떻게 말려야 하나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레이아의 폭탄발언도 그렇고 엘로나가 이토록 사납게 나올 줄 몰랐기에 어느 한쪽 편을 들기 애매했다.
그러던 차에 엘로나가 들어오면서 열린 문틈으로 메이아의 얼굴이 보였다.
로엘은 메이아에게 눈빛으로 도움을 청했다.
‘메이아! 지금 당장 다과라도 가져와!’
과자라도 내오면 그 틈을 타서 분위기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 뒤에 로엘이 재정비를 하여 두 사람을 중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메이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로엘을 쳐다보다가 조용히 문을 닫았다.
문을 닫는 메이아의 모습은 마치 호랑이와 사자 사이에 끼인 사슴을 보는 독수리를 연상케 하였다.
어느덧 서로를 노려보던 레이아와 엘로나는 각자 빈 의자에 앉아 로엘을 공략하려 들었다.
먼저 레이아가 로엘에게 강요하듯 제안을 제시했다.
“나랑 결혼하면 옆에서 많은 조언을 해줄 수 있어. 내가 하니온 왕궁을 꽉 잡은 여자라는 거 알고 있지?”
“저랑 결혼하면 정식으로 빌로스와 킬더가 연방국가가 되겠죠. 회담용 허상의 강대국이 아닌 진짜 강대국을 만들어 나가도록 해요. 반면에 레이아 공주와 결혼해서 얻는 거라곤 하니온 왕국이 장인의 나라가 된다는 것뿐이죠.”
“사위한테 씨암탉 잡아준다는 말 알고 있지? 브리니아 왕국을 압박할 수 있게 군사요충지 영지 두 개를 빌로스에 양도해줄 걸?”
“고작 영지 두 개가 국가를 통째로 합치는 것보다 나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킬더 왕국은 약해서 합치면 오히려 짐만 될걸요?”
“빌로스의 남자비율과 킬더의 여자비율을 섞으면 10년 내로 인구가 급증하게 될 거랍니다. 하니온이 줄 수 있는 게 그것뿐이면 얼른 돌아가서 곰인형이나 안고 자도록 하세요.”
영지를 주니, 나라를 주니, 병사를 주니......
로엘 하나를 얻으려고 두 여자가 왕국 의회의 의중따윈 묻지도 않고 판돈을 올려가기 시작했다.
로엘은 머리가 지끈거림을 느끼며 결국 검지로 탁자를 강하게 두드렸다.
톡톡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