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0 8. 제발 시킨 것만 해라 =========================
“각국에 스파이를 파견했어. 평소의 몇 배를 투입했지. 하도 잘들 숨겨놔서 전부 알아내진 못했지만 말이야.”
암묵적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군사스파이를 파견한 걸 알고 있지만 그걸 대놓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어찌된 게 이 로엘이란 작자는 당당하게 다른 국가의 몇 배나 되는 스파이를 투입했다고 밝히고 있지 않은가.
아지스는 참다못해 분노를 터뜨리며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쳤다.
탕!
“로엘 국왕! 지금 우리랑 장난하자는 건가!”
“화를 내기 전에 지도를 잘 보는 게 좋을 텐데? 빌로스의 군사시설도 표시해뒀다고. 물론 그쪽들처럼 쩨쩨하게 숨기지 않고 10할 전부 표기해뒀어.”
“미쳤군! 그대는 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 건가!”
“머리가 나쁘구만. 그쪽은 몬스터 방어를 위해 군사력 증강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어. 그런데 에메랄드 산맥에 있는 20개의 성벽과 1만의 병력은 어떻게 설명할 거지?”
스파이 파견발언 때문에 분노를 터뜨렸던 아지스가 순간 말문이 막혀 표정을 달리했다.
냉정함을 유지하고 있었으면 차분하게 대응했을 텐데 도발했다가 갑자기 본제로 돌아가면서 치고 들어온 탓에 대응이 늦어지고 말았다.
로엘은 3초 정도 기다려주다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에메랄드 산맥의 몬스터는 그린 드래곤의 명령 때문에 사람을 습격하지 못해. 몬스터 방어란 이유는 먹히지 않지. 그렇다면 역시 킬더 왕국을 노리고 있다는 거잖아?”
아지스가 대답하지 못하는 사이 이미 에메랄드 산맥의 성벽들은 전쟁의 전초기지 용도라는 게 확정되어버렸다.
로엘의 능숙한 화술은 테이블뿐만 아니라 대신전 전체를 휘어잡았고, 견학하던 군중들의 뇌리에 겐크 왕국은 킬더 왕국을 치려했다는 사실이 심어졌다.
에메랄드 산맥의 성벽을 언급할수록 불리해진다는 걸 깨달은 아지스는 분을 삭이며 입을 다물었다.
대신 마찬가지로 군비축소에 반대하는 입장인 파이오르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빌로스 왕국은 군비축소에 찬성하는 입장인가?”
빌로스 왕국의 숙적인 브리니아 왕국.
그 브리니아 왕국의 국왕인 파이오르는 음침한 인물이었다.
항상 무표정인데다 속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전생과 전전생의 대륙통일 때도 제법 고생했었다. 그의 최대 무기는 임기응변으로 최악의 상황에서도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게 특기였다. 그 때문에 전생과 전전생에서 로엘은 힘으로 브리니아 왕국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지만 파이오르만큼은 종적을 감추어 끝내 잡지 못했었다.
로엘은 대륙회담의 최대 적을 파이오르로 상정하고 있었다.
“찬성하는 입장이야. 무슨 문제라도?”
“찬성하는 입장이라면 한 가지 묻고 싶군. 군비축소는 어떻게 실행시킬 거지? 군사예산을 제한한다는 정책은 무용지물이라는 걸 알 텐데?”
역시 파이오르랄까.
군비축소조약의 최대 약점을 찌르고 있었다.
군사예산을 제한한다 하더라도 우회하여 군비를 늘릴 방법은 얼마든지 존재했다. 예를 들면 상업의 부흥을 위해 상인들을 크게 지원해주고, 상인들이 그 차액만큼 군사물품을 저렴하게 제공하면 군비는 줄어들었는데 군사력은 증강하는 형태가 된다.
편법이 즐비하기 때문에 무용지물이라는 거다.
하지만 로엘은 이미 그 부분까지 전부 생각해둔 후였다.
“확실히 예산 제한은 의미가 없지. 그러니까 성벽의 규모제한을 제시하고 싶어.”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게.”
“한 곳에 성벽을 건설하면 반경 20km 안에는 새로운 성벽을 건설하지 말 것. 그리고 성벽의 규모에 따라 병사의 숫자를 제한할 것.”
“그거라면 성벽 규모보다 인구비례가 나을 텐데?”
“은근슬쩍 수작 부리지마. 인구수 같은 건 얼마든지 뻥튀기할 수 있는 거잖아?”
“수작인 건 인정하지. 그렇다면 이미 20km 안에 겹치도록 건설된 성벽은 어떻게 할 건가? 그리고 몬스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겹치도록 지어진 성벽도 있을 텐데 그 부분은 어떻게 할 거지?”
“이미 지어진 성벽에 한해서 고유성벽이란 하위항목을 만들면 그만이야. 브리튼 사제 5명, 각국에서 한 명씩 전문가를 뽑아 군비축소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위원회에게 고유성벽 판정을 받은 성벽은 20km 안에 겹쳐져 있어도 유지할 수 있는 권한을 얻게 되는 거지.”
“위원회는 조사단 권한까지 부여 받는 건가?”
“그게 낫지 않겠어?”
“준비 많이 했군.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네.”
한참 동안 로엘과 공방전을 펼치던 파이오르가 턱을 괴며 무덤덤하게 질문을 날렸다.
“엘로나 여왕과 결혼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인가?”
로엘은 자연스럽게 엘로나의 드러난 어깨에 손을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조만간 청첩장을 돌릴 예정이야.”
어깨에 손을 올리는 건 예정에 없던 일인지라 엘로나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녀의 부끄러워하는 반응이 오히려 신빙성을 더해주어서 소문이 사실인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파이오르는 소리 없이 긴 숨을 내뿜으며 눈을 깊게 감았다.
그가 잠깐의 고민 끝에 눈을 뜨며 말했다.
“브리니아 왕국은 군비축소에 찬성하도록 하겠네.”
회의를 하던 인물들은 물론 군중들까지 크게 술렁거렸다.
군비축소를 받아들이는 것 자체는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보다 브리니아 왕국이 빌로스 왕국의 의견을 받아들였다는 게 컸다.
빌로스 왕국이 까마귀를 검은색이라 하면 사실여부를 떠나서 흰색이라고 우기는 게 브리니아 왕국이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정도로 두 왕국의 사이는 나빴다.
그런 상황에서 파이오르가 로엘의 의견을 받아들였으니 모두가 놀라도 이상할 게 없었다.
로엘 역시 의외라 여겼다.
“좀 더 반대할 줄 알았는데 의외인 걸?”
“승부는 이미 오래 전에 났었지. 군사시설을 전부 공개한 건 공개해도 이길 자신이 있다는 뜻이니까. 아마 두 왕국의 혼담이 자신감의 근원이겠지.”
파이오르가 빠른 인정을 하고 난 후에 태세를 재정비한 아지스가 반격에 나섰지만 모조리 로엘에게 격파 당했다.
첫 회담은 휴식과 재개를 반복하며 저녁까지 이어졌다.
회담은 하루에 한 번, 앞으로 2번의 회의가 남아있지만 첫 회의부터 이미 결판이 난 것처럼 보였다.
56회차 대륙회담은 로엘의 독무대가 되었다.
첫 회담이 끝나면서 각 왕국의 국왕들은 각자의 숙소로 뿔뿔이 흩어졌다.
각 국왕들의 표정은 제각각 달랐다.
그 중에 아지스만이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직 그는 반대의견을 고수할 생각인 것 같았다.
첫 회담 이후 대신전에서 나온 엘로나는 카넨의 호위를 받으며 숙소로 돌아왔다.
엘로나는 줄곧 숨을 죽이고 있었는지 방에 들어서자마자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후우.”
“여왕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요. 너무 긴장해서 조금 현기증이 난 것일 뿐이에요.”
“무리도 아니죠. 로엘 국왕과 파이오르 국왕이 대화할 땐 저도 손에 땀을 쥐었으니까요. 그는 괴물이에요.”
“지금은 든든한 아군이죠.”
“지금은이라는 게 걱정되는군요. 로엘 국왕의 빌로스 왕국은 조만간 대륙 최강국이 될 게 분명합니다.”
군비축소조약이 통과된다 하더라도 킬더 왕국이 최약체인 건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아지스가 로엘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걸 보고나니 겐트 왕국이 딱히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로엘이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그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대륙의 판세가 달라질 게 분명했다.
엘로나는 무의식중에 어깨를 어루만졌다.
아직 로엘이 남긴 여운이 남아있었다.
회의에서 보인 로엘의 모습을 통해 앞으로 킬더 왕국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 보였다.
“현재 상황을 이용해야겠어요.”
“현재 상황이라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결혼 소문이요. 나를 주고 킬더 왕국의 안녕을 얻어내겠어요.”
서른 줄에 들어선 엘로나에게 배필이 없다는 것은 킬더 왕국 전체의 고민거리나 마찬가지였다.
오랫동안 엘로나의 결심을 기다려온 카넨은 그녀의 결심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현명한 판단이십니다. 왕국의 모두가 기뻐할 겁니다.”
“좀 더 적극적으로 그와 접촉할 필요가 있어요. 그를 만나러 갈 테니 새 드레스를 꺼내오도록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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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로 돌아온 로엘을 기다리는 건 드리안 공작의 호탕한 웃음소리였다.
드리안 공작은 언제 준비했는지 굵은 뿌리가 담긴 술병을 들고 오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대단하십니다, 전하. 브리니아 국왕이 꼬리를 말 때는 정말 속이 다 시원해지더군요.”
“입 발린 말은 됐어. 그 술은 또 뭐야?”
기세를 타고 아첨을 하려던 드리안 공작이 주춤하면서 들고 있는 술병의 마개를 열었다.
단지 마개를 열었을 뿐인데 알싸한 향이 흘러나왔다.
알싸한 향 사이사이에 나무냄새와 흙냄새가 섞여 있었다.
드리안 공작은 술병 안에 들어 있는 뿌리를 살짝 돌려 침전물을 섞곤 로엘의 잔에 채워주었다.
“만드라고라로 담근 술입니다. 30년짜리지요. 회의가 잘 풀렸을 때를 축하하기 위해 가져왔습니다.”
“잘 안 풀렸으면 어쩔 생각이었어?”
“그때는 속풀이용으로 마실 생각이었죠.”
로엘의 잔이 황금빛에 가까운 액체로 가득 찼고, 이어서 로엘이 술병을 건네받아 드리안 공작의 잔을 채워주었다.
두 사람은 잔을 부딪치며 단번에 잔을 비웠다.
숲 속의 향기가 그대로 몸 안에 흘러들면서 명치 부근이 따뜻하게 데워졌다.
로엘은 두 번째 잔을 채우며 직설적으로 한 마디 날렸다.
“드리안 공작, 정권장악을 노리고 있다면 좀 더 직설적으로 행동하는 게 좋을 거야.”
“크흠, 저는 항상 왕실의 안녕과 왕국의 평화를 기원하고 있을 뿐입니다.”
“훗, 그런 태도가 문제라는 거지. 뭐 열심히 해서 정권을 가지러 와. 제대로 한다면 기꺼이 정권을 내주겠어.”
여전히 왕위 따윈 언제든지 넘겨도 좋다고 생각하는 로엘인지라 가감 없이 충고를 해주었다.
반면 드리안 공작은 겉으론 웃고 있어도 속으론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정권을 탐내고 있다는 걸 알고 계셨던 건가. 그런데도 날 옆에 두고 정권을 탈취하러 오라고 하시다니. 설마 지금까지 전하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었던 건가?’
3공작을 언제든지 잘라낼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둔 게 아니라면 로엘의 자신감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어쩌면 로엘은 이미 3공작을 칠 준비를 마쳤고 내칠 명분을 기다리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오늘 겐크 왕국의 국왕이 수모를 당한 걸 본 직후인지라 자신이 그 꼴이 된다 생각하니 저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드리안 공작은 반역죄로 몰락하게 될 자신의 가문을 상상하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전하. 한때의 욕심으로 전하의 명예를 해치려한 저를 벌하여 주옵소서.”
“갑자기 뭐야?”
“전하의 역량이 저의 인지를 한참 뛰어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레이아 공주를 밀어 중앙정권을 차지한다는 발칙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로엘이 3공작을 정리하려 한다고 판단한 드리안 공작은 레이아와 접촉한 이야기를 술술 토해냈다.
아무 생각 없이 술을 즐기고 있던 로엘은 레리를 통해 레이아에게 어떤 말을 전했는지 듣곤 머리를 감싸쥐었다.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한 거야! 제발 시킨 것만 해라고! 맹세까지 했잖아!”
“저는 맹세대로 가만히 있었고 레리를 움직이는 건 괜찮을 거라 여겨서......”
“받아들이면 왕궁에서 세력 만들려고 할 여자를 내가 왜 받아들이겠냐고!”
“허억! 레이아 공주의 생각까지 예견하고 계셨던 겁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라... 어휴, 또 꼬인다 꼬여.”
잘 풀린다고 생각했더니 이상한 곳에서 꼬여버렸다.
이러면 레이아가 착각을 할 거 아닌가.
로엘이 레이아를 원한다고 말이다.
로엘은 두통 때문에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검지를 꾸욱꾸욱 눌렀다.
그런데 아직 사태는 끝난 게 아니었다.
바깥에서 더프가 로엘의 두통을 더욱 심하게 만들 소식을 들고 왔다.
똑똑
“전하. 레이아 공주께서 전하를 뵙고자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