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될놈될-19화 (19/219)

00019 8. 제발 시킨 것만 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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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엘이 엘로나에게 가있는 동안 레리는 하니온 왕국의 숙소로 가서 울크와 대면 중이었다.

울크는 레리의 말을 듣곤 입이 귀에 걸렸다.

“빌로스 국왕이 레이아를 원한다고 했나?”

“직접적으로 말씀하시진 않으셨지만 레이아 공주께 마음이 있으신 건 확실한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지요. 전하는 이미 혼담이 오갈 나이가 되셨고 인물 또한 출중합니다. 레이아 공주님께서는 대륙에 손꼽히는 미인이신데다 능력 또한 여느 남성보다 뛰어나니 전하의 배필로 레이아 공주님만한 이가 없지요. 전하께서 괜히 이곳에 오기 전에 고르디에 들린 것이 아닙니다.”

레리의 말만 듣고 보면 로엘이 일부러 레이아를 만나기 위해 고르디로 간 것처럼 들린다.

울크로선 로엘이 레이아를 받아주면 만세를 부를 입장이지만 마냥 좋아하기엔 몇 가지 걸리는 점이 있었다.

“자네 말대로 된다면 좋겠으나 내가 듣기론 로엘 국왕과 레이아 사이에 약혼 얘기는 금지인 걸로 약속이 되어 있는 것 같더군. 자네의 말과는 정반대인데 그 부분은 어떻게 설명할 건가?”

로엘과 레이아 사이에 약속이 오간 것을 몰랐던 레리지만 능숙하게 임기응변으로 대처했다.

“로엘 전하께선 남녀관계에 한해 부끄러움이 많으십니다. 나름대로 무언가 전하려 했는데 어긋난 것이겠지요.”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군. 사내아이가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 심술부리는 것과 같은 부류라 생각하면 모든 게 맞아떨어지는군.”

“바로 그것일 겁니다. 만인을 다스리시는 분답게 사람을 헤아리는 능력이 뛰어나시군요.”

“그건 그렇고 드리안 공작의 책사 3인방 중 한 명인 그대가 홀로 찾아온 건 따로 용건이 있어서겠지?”

“정확히 말하면 레이아 공주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레리가 줄곧 울크의 옆에 앉아있었던 레이아를 바라보았다.

레이아는 차분하게 얘기를 듣고 있다가 심드렁한 투로 대답했다.

“할 말이 뻔히 예상되네. 내가 빌로스 왕궁으로 들어가게 되면 따로 세력을 만들 테니 나를 돕겠다 이거지?”

“역시 총명하신 레이아 공주님다우시군요. 드리안 공작 가는 레이아 공주님이 빌로스 왕국의 정권을 장악할 수 있게 모든 지원을 할 의향이 있습니다.”

“빌로스 북쪽의 패권으론 만족 못하나봐?”

“드리안 공작님은 세상이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큰 그릇이십니다.”

“내가 보기엔 당신도 만만치 않은데?”

레리의 속내를 꿰뚫어보는 듯 레이아가 고개를 살짝 들며 내려다보는 자세를 취했다.

레리는 대답 대신 레이아와 눈을 마주쳤다.

잠깐뿐이지만 레리의 눈빛에 야심이 일렁였다.

그러나 이내 곧 레리는 평온한 미청년의 인상으로 돌아왔다.

“일개 단순한 책사일 뿐입니다. 높이 사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드리안 공작의 제안은 좀 더 고려해보겠어요. 그대의 말대로 정말 로엘 국왕이 혼담을 청해오면 그때 대답을 드리도록 하죠.”

“좋은 대답 기대하겠습니다.”

대답을 미룬다는 건 레이아 쪽에서 결정권을 가지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으나 레리는 개의치 않고 고개를 꾸벅이며 물러났다.

그녀가 고자세를 유지하는 것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는 듯이.

레이아를 밀어주겠다고 했지만 종국에는 드리안 공작이 우위에 설 계책까지 준비해뒀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레리가 나감과 동시에 그와 교대하듯 크라넬이 방 안으로 들어와 말을 전했다.

“전하, 방금 킬더 측 숙소에 들렀다 왔는데 심상치 않은 소문을 들었습니다.”

“말해보거라.”

“로엘 국왕과 엘로나 여왕은 이미 결혼이 확정된 사이라 합니다.”

“그게 정말인가?”

“로즈기사단의 카넨이 말한 것이니 틀림없습니다.”

레리와 소문.

상반된 정보가 들어오면서 울크는 고민에 빠졌다.

레리와의 대화를 생각하면 레리의 말이 맞는 것 같고, 그렇다고 단순한 소문으로 치부하기에는 정보의 출처가 너무나도 정확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올곧기로 소문난 로즈기사단의 카넨의 입에서 나온 정보니까 말이다.

고민하는 울크와 달리 레이아는 금방 진상을 파악한 듯 씨익 웃었다.

“뭐야 그런 거였나.”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느냐?”

“일단 한 가지 확실한 건 빌로스는 군비축소조약에 찬성하는 입장이라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서야 벌써부터 엘로나 여왕과 접촉할 이유가 없죠.”

“흐음, 의외로군. 로엘 국왕이 마나 익스퍼트가 된 것 때문에 전쟁준비를 시작할 것 같았는데 말이지.”

“그건 둘째 치고 결혼 소문은 헛소문일 가능성이 높아요. 두 사람이 결혼하면 두 나라가 연방국가로 합쳐지겠죠. 편법으로 강대국이 되어 군비축소조약을 강요할 생각인 게 분명해요.”

“헛소문이라고 믿는 이유라도 있느냐?”

“정말로 엘로나 여왕과 결혼할 거라면 레리가 절 찾아올 이유가 없죠. 킬더 왕국과 빌로스 왕국이 협력관계 하에 헛소문을 퍼뜨린 거고 실제 혼담은 저랑 진행시켜서 최종적으로 찬성표 3표를 확정시킬 생각인 것 같아요.”

표면적으론 로엘과 엘로나가 결혼하는 것처럼 소문을 퍼트리고, 수면 아래에선 로엘과 레이아의 혼담이 오가는 형태라 확신했다.

브리니아 왕국과 겐크 왕국의 입장에선 로엘과 엘로나가 한 패인데다 하니온 왕국이 그들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일 거다.

빌로스, 하니온, 킬더가 협력하면 브리니아와 겐크는 지도상으로 고립되어버린다.

역으로 그들이 군비축소를 통과시켜야 하는 입장이 되어버리는 거다.

울크로선 어찌 됐든 레이아만 시집보낼 수 있으면 만만세였다.

울크에게 있어 대륙회담의 최종 목표는 레이아를 떠넘길(?) 사윗감을 찾는 것이었으니까.

군비축소가 통과되든 말든 평균 수준의 군사력을 지니고 있는 하니온 왕국은 딱히 타격받을 게 없었다.

그래서 은근슬쩍 레이아의 속을 떠보았다.

“로엘 국왕이 싫다고 했었는데 여전히 같은 마음이더냐?”

“당연히 싫죠. 그 심술쟁이한테 줄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다고요.”

“끄응, 그 싫은 걸 어떻게 할 순 없겠느냐?”

“그 사람은 싫지만 혼담은 적극적으로 밀고나갈 거예요. 그 사람 왕비로 들어가서 내부에서 빌로스 왕궁을 장악해버려야죠. 저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이 나올 때까지 괴롭힐 거예요. 내일 첫 회담이 끝나고 나면 로엘 국왕과 접촉해야겠네요. 철저하게 몸단장을 해야겠어요.”

레이아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궁녀를 불렀다. 그리곤 몸에 꽃향기를 씌우기 위해 목욕 준비와 매력을 돋워줄 옷을 고르라고 부산을 떨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첫 데이트를 나가는 소녀 같기도 했다.

울크는 말과 행동이 다른 레이아의 모습을 보며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사내아이 쪽은 우리 레이아일지도 모르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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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회담은 시작도 안 했건만 각종 소문과 밀회가 난무하는 가운데 대륙회담 첫날밤이 지나갔다.

다음 날 오전.

5명의 국왕은 대신전 안의 대형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둘러앉았다.

상석에는 대접하는 입장이자 진행자 역할인 교주 갈레오리가 앉아 회담의 시작을 알렸다.

“지금부터 56회 대륙회담을 시작하겠습니다. 안건은 어제 킬더 왕국의 엘로나 여왕님이 말씀하신대로 5왕국의 군비축소 안건입니다. 엘로나 여왕님, 안건의 취지를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로엘과 울크의 사이에 앉은 엘로나가 가벼운 헛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으음, 현재 각국의 인구가 늘어나면서 군사력이 나날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군사력 증강으로 인한 국경지대의 충돌 역시 그에 비례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죠. 전쟁의 불씨로 발전하기 전에 군비축소를 감행하고 잉여분의 재정을 각국의 백성들에게 돌려줌으로서 황금시대의 평화를 재현하고 싶습니다.”

대신전 회의장은 벽이 없는 개방된 공간이라 기둥 사이마다 군중들이 견학하고 있었다.

그들은 평화를 원하는 엘로나의 주장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론은 엘로나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으나 곧바로 반박이 이어졌다.

아지스가 손을 살짝 들며 반박의견을 꺼냈다.

“엘로나 여왕이 얼마나 평화를 사랑하는지 알겠군. 하지만 군비축소는 오히려 대륙의 평화를 해칠 뿐이라고 생각하네.”

“어째서죠?”

“킬더 왕국을 제외한 4왕국은 항상 몬스터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다네. 특히 우리 겐크 왕국은 프로즌 필드와 맞닿아 있어서 지금도 병사가 모자랄 지경이지. 그런 우리에게 군비축소는 죽으라는 거나 마찬가지라네.”

어제 로엘이 언급했던 반박의견이 그대로 튀어나왔다.

미리 경험하지 않았다면 표정이 흐트러졌을 거다.

엘로나는 예상대로의 반박이 날아들자마자 로엘을 힐끗 보았다.

로엘은 바통을 넘겨받듯 자연스럽게 손을 살짝 들어 발언권을 차지했다.

“방금 아지스 국왕의 발언은 조금 의아하게 들리는군.”

엘로나를 공격하려다가 문득 로엘이 치고나오자 아지스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로엘의 책략에 당했다고 여기고 있는 아지스인지라 로엘을 매우 불편하게 여기고 있었다.

“내 말의 어디가 의아하게 들린다는 거지?”

“겐크 왕국은 충분히 몬스터를 막아내고 있는 걸로 알고 있어. 그런데도 매년 막대한 예산을 군력증강에 쓰고 있지. 병력을 조금씩 킬더 왕국 국경으로 옮기고 있던데 이건 명백한 전쟁준비 아닌가?”

“근거 없는 의심은 삼가줬으면 하는군.”

“근거라면 있어.”

로엘이 군중 사이를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경쾌한 손가락 튕김과 함께 더프가 커다란 두루마리를 들고 나타났다.

로엘이 스파이 숫자를 늘리면서까지 알아내고자 했던 정보.

그 모든 정보가 집합되어 있는 두루마리였다.

더프가 대형 테이블에 두루마리를 굴리자 두루마리가 펼쳐지면서 대륙지도가 드러났다.

그와 동시에 로엘의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로엘은 킬더 왕국과 겐크 왕국의 국경 근처에 있는 긴 산줄기를 짚었다.

겐크 왕국의 영토에 속하는 에메랄드 산맥이라는 곳으로 산세가 험하고 강풍 부는 협곡이 많은 곳이었다.

지도의 에메랄드 산맥에는 성벽 기호가 빽빽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 숫자만 하더라도 20개였다.

로엘은 에메랄드 산맥에 지어진 성벽들을 짚으면서 공격적으로 말했다.

“에메랄드 산맥에 불필요한 성벽이 너무 많아. 성벽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병력을 파견하고 있던데 파악된 숫자만 1만이더라고. 1만이면 전쟁에서 선봉 역할을 하기엔 충분하지. 이래도 전쟁의사가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지스는 갑자기 정보량으로 치고 나오는 로엘의 공격에 인상을 찌푸렸다.

자국의 군사정보가 유출되었다는 건 자국의 관계자가 정보를 유출했거나, 타 국가의 스파이가 대량으로 들어왔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마치 속살을 엿보인 것 같아 불쾌함을 지울 수 없었다.

“로엘 국왕. 이 정보의 출처를 묻고 싶군. 어디서 이만한 정보를 얻었는가?”

아지스의 질문에 타 왕국들의 왕들도 동감하듯 로엘을 쳐다보았다.

지도에는 겐크 왕국뿐만 아니라 하니온, 킬더, 브리니아의 군사시설이 8할 정도 표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자국의 군사시설을 7할만 공개하는 걸 감안했을 때 비밀시설의 일부분이 파헤쳐진 셈이었다.

로엘은 경계심 가득한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연하게 자신의 수단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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