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4 7. 바보 삼형제를 얻다 =========================
“빌로스 국왕.”
“날 놀리려드는구나. 내가 아무리 바보라도 그딴 말장난에 당황할 것 같으냐?”
“본인이 바보라는 자각은 있나보네.”
“이놈이!”
놀림당하고 있다 여긴 첫째가 관자놀이 핏줄을 씰룩이며 도끼를 상하좌우사선으로 불규칙하게 그었다. 덩치답지 않게 굉장히 민첩한 움직임을 보이면서 그의 도끼가 마치 9개로 늘어난 듯했다.
첫째는 자신의 특기인 전방위 절단기술을 발휘하며 다음 단계를 계획하고 있었다.
‘저 녀석이 들어왔다는 건 둘째와 셋째가 당했다는 거겠지. 아우들을 버리고 갈 순 없어. 이 기술로 놈을 한 차례 밀어낸 후 일단 복도로 나가야겠군. 부디 아직 죽지 않았기를......’
크라넬도 이 기술에 밀려 한두 걸음 뒤로 물러났을 정도이니 같은 마나 익스퍼트라면 로엘 역시 밀려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첫째의 예상은 보기 좋게 깨졌다.
로엘은 전방에서 압박해 들어오는 도끼의 폭풍을 심드렁하게 쳐다보더니 검을 가로로 그었다.
채앵!
검날이 마침 사선으로 그어지던 도끼의 측면을 가격하면서 밀어내는 힘에 의해 도끼가 옆으로 튕겨져 나갔다.
로엘의 힘이 강한 것도 있지만 가격하는 지점이 워낙 절묘하여 첫째가 대응조차 하지 못했다.
검에 의해 튕겨져 나간 도끼는 곡예를 하듯 회전하며 날아가다가 부질없이 벽에 박혔다.
첫째가 벽에 박힌 자신의 도끼를 멍하니 보는 사이 그의 목에 검이 드리워졌다.
로엘은 마나의 푸른빛으로 인해 푸른턱이 된 첫째를 보며 싱긋 웃었다.
“항복하면 세 명 다 살려줄게. 어쩔래?”
로엘의 말에 둘째와 셋째가 살아있음을 깨달은 첫째가 눈을 감았다.
분명 쉐도우 길드의 방침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의뢰를 완수하는 거였지만 첫째에겐 아우들의 목숨이 더 소중했다.
길드의 방침을 깨는 일이지만 첫째는 길드보다 아우들의 목숨을 우선시하였다.
“항복하겠다. 살려준다는 약속 잊지 말아다오.”
“내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이리하여 한밤중의 습격사건은 로엘이 개입되자마자 손쉽게 정리되고 말았다.
로엘의 지시에 의해 바보 삼형제는 포박당한 채로 로엘의 방에 무릎을 꿇게 되었다. 상황을 정리한 로엘은 늦게서야 레이아를 살폈다.
“어이, 다친 곳은 없어?”
레이아에게서 대답은 없었다.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리니 신기한 광경을 목격할 수 있었다.
여태껏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당당하게 굴거나 기세 좋게 펄펄 뛰던 그녀가 크라넬 뒤에 서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로엘은 그녀가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레이아 입장에선 당연한 반응이었다.
지금 레이아는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말 왕이었잖아. 사실대로 말했는데 나란 여자는 놀리는 거냐고 그렇게 매도했단 말이야? 으아! 부끄러워! 부끄러워 죽겠어!’
현재 빌로스 왕국에 마나 익스퍼트는 총 4명이다.
그 중에서 최근에 마나 익스퍼트가 된데다 이리도 젊은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로엘의 검에 맺혀 있던 마나 블레이드가 로엘이 정말로 빌로스 국왕임을 증명한 셈이었다.
여기 오면서 대놓고 자신의 정체를 밝혔는데 마구 매도한데다 국왕에게 국왕모욕죄를 물었으니 창피도 이런 창피가 없다.
로엘이 국왕인 걸 알고나니 여태까지의 행동이 모두 이해가 되었다.
국왕이니까 당연히 케시어로 가고 있는 거고, 여행 기분으로 따로 행동하고 있다면 평민차림으로 위장해도 이상하지 않고, 자기 왕국의 명예를 위해 거금 정도는 기꺼이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게 당연했다.
총명함의 표본이라 불리던 자신이 둘째가라면 서러울 바보짓을 했으니 부끄러울 수밖에.
로엘은 부끄러워하는 그녀를 보곤 피식 웃었다.
“무례를 물을 생각은 없으니까 겁먹을 거 없어. 여태까지 하던대로 해.”
하란다고 금방 뻔뻔하게 굴 수야 있겠는가.
레이아는 헛기침을 하며 예를 갖추었다.
“음음, 하니온 루 레이아가 빌로스의 국왕을 뵙습니다.”
“하던대로 하라니까.”
“여태까지의 무례를 용서해주옵소서.”
“거참 말 안 듣네. 성격 나쁜 꼬맹이인 거 다 아는데 예의 차린다고 퍽이나 예뻐 보이겠다.”
꼬맹이라는 단어에 레이아는 만회해보려던 생각이 싹 달아났다.
안 그래도 다른 여자들보다 키가 작은 게 콤플렉스인데 그 부분을 건드린 것이다.
레이아는 로엘의 성격을 파악하곤 금세 원래 성격으로 복귀하였다.
“꼬맹이라고 하지마! 나이는 너보다 내가 한 살 더 많다고!”
“이제야 원래 모습으로 돌아갔네. 이야, 좋은 구경했어. 말괄량이 공주가 부끄러워할 줄도 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어?”
“역시 여태까지 계속 놀리던 거지? 내가 믿지 않을 거 알고 일부러 정체를 숨기지 않았던 거 맞지? 어차피 케시어에 도착하면 밝혀질 테니까 의심하는 거 보면서 속으로 비웃었지?”
“정답이라고 말하고 싶기는 한데 꼭 스스로 확인사살을 해야겠냐?”
“크아! 너 정말 싫어! 빌로스 국왕은 최악이야!”
“오호, 그거 왕족모욕죄 아닌가? 하니온 왕국은 왕족모욕죄에 엄하다고 한 게 누구더라.”
한 마디 할 때마다 수세에 몰리는 걸 느낀 레이아는 결국 울먹이면서 문밖을 향해 뛰쳐나갔다.
“시끄러워 심술쟁이야!”
크라넬은 레이아가 뛰쳐나가는 걸 얼빠진 표정으로 보고 있다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순리대로 따지면 레이아의 무례를 대신 사과해야 옳은데 로엘이 너무 상쾌한 표정을 짓고 있어서 사과하기도 애매했다.
처세술에 능한 크라넬답게 화제를 바꾸는 쪽을 택했다.
“이들 암살자들은 어찌 하는 게 좋겠습니까?”
로엘은 크라넬에게 물러나란 손짓을 하였다.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돌아가서 쉬도록 해.”
크라넬로선 로엘의 안전을 위해 남겠다는 말조차 할 수 없었다.
마나 익스퍼트의 실력을 가진 로엘을 지키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오만임을 알기에.
마나 익스퍼트에도 급이 있는데 크라넬이 보기엔 같은 마나 익스퍼트라도 로엘이 훨씬 강한 것 같았다.
크라넬은 로엘의 명령에 따라 방 문을 닫고 복도로 나서며 저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다.
“허, 어린 왕이 성군이니 검의 귀재니 소문만 무성하다 여겼는데 오히려 소문보다 더한 괴물이었구나. 빌로스의 정상에 괴물이 있었어.”
크라넬이 나가면서 방에는 로엘과 바보 삼형제만 남았다.
로엘은 포박되어 있는 바보 삼형제 중 가장 덩치가 큰 첫째에게 말을 붙였다.
“배후가 누구야?”
상투적인 질문에 첫째가 대답을 꺼냈다.
“의뢰인이 누군지는 우리도 모른다.”
“거짓말하면 뒤끝이 안 좋을 텐데?”
“고문해도 소용없을 거다. 정말로 모르니까. 의뢰를 한 자는 로브를 덮어써서 얼굴을 볼 수 없었어. 선금으로 500골드를 내놓았으니 의뢰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지.”
“하긴 오는 의뢰 막지 않는다는 쉐도우 길드답구만. 돈만 주면 의뢰인의 정체따윈 궁금해 할 필요도 없겠지.”
로엘의 중얼거림에 첫째를 비롯한 바보 삼형제가 놀란 기색을 띠었다.
아직 쉐도우 길드의 쉐자도 꺼내지 않았는데 이미 그들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에 놀란 것이었다.
첫째는 아까 전에 레이아가 로엘의 정체를 언급한 것을 떠올렸다.
“국왕이라 그런지 아는 게 많군.”
“국왕이라서 아는 게 아니라 누가 멋대로 내 태엽을 되감고 있어서 아는 것일 뿐이야.”
“무슨 소리지?”
“너흰 알 필요 없어. 그보다 말이 많이 짧다?”
로엘은 첫째의 주무기인 도끼를 꺼내들었다.
육체적인 위해를 가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도끼를 집어든 로엘은 씨익 웃으면서 남은 손으로 자신의 검을 들어올렸다. 로엘의 검에 마나가 덧씌워졌고, 마나 블레이드가 도끼날에 닿을 듯 말 듯 가깝게 대어졌다.
마나 블레이드는 무쇠도 잘라버릴 정도로 강력하다.
제아무리 장인의 담금질로 만들어진 도끼일지라도 마나 블레이드 앞에선 삶은 토마토나 마찬가지였다.
모름지기 무기를 다루는 자라면 무기를 자신의 분신처럼 아낀다.
심지어 기사 중에선 본인의 무기를 명예가 형상화된 것이라 여겨 못 쓰게 되면 예를 갖춰 장례식까지 치러주는 자가 있을 정도다.
바보 삼형제 역시 무기를 자신의 분신처럼 아끼는 부류였다.
첫째는 단두대 아래에 놓은 아이를 보는 양 헛숨을 들이켰다.
“허억! 차라리 내 목을 베어라! 내게 치욕을 줄 셈이더냐!”
“여전히 말이 짧구만.”
“베지 말아주세요.”
“옳지. 처음부터 그렇게 나왔어야지. 본제로 돌아가서 배후는 됐으니까 의뢰내용이나 말해봐. 정말 레이아 암살의뢰였어?”
“그렇다... 아니 그렇습니다. 레이아 공주가 케시어에 도착하기 전에 암살해달라며 의뢰를 넣어왔습니다.”
“선금은 500골드나 받았고?”
“네.”
“그런데 실패했네?”
“...”
첫째는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질문 자체가 자존심에 상처가 갈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긍정하면 무슨 의뢰든 성공시킨다는 쉐도우 길드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게 되고, 부정하면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소인배가 되어버린다.
흔히들 청부업자를 돈에 명예를 판 자들이라 하지만 사실 명예를 중시하는 자만이 청부업자가 될 수 있다. 명예를 모르는 자는 의뢰인의 정체를 지키긴커녕 선금만 받고 도망가기 일쑤니까.
첫째의 침묵은 삼형제가 명예를 아는 자란 걸 증명하는 행동이었다.
로엘은 첫째의 도끼를 도로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의자에 앉았다.
“쉐도우 길드가 무너진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 이제 와서 되살리려는 이유가 뭐야?”
“개인적인 사정입니다.”
“그래도 말해.”
첫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신을 포함한 세 형제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읊었다.
“저희 삼 형제는 겐크 왕국출신으로 어릴 적 고아원에서 지냈었습니다. 친형제는 아니었지만 친형제 이상으로 사이가 좋았었죠. 그런데 제가 15살 되던 해에 고아원 사정이 어려워졌습니다. 고아원 원장은 남몰래 아이들을 한 명씩 노예로 팔기 시작했고 곧 저희 차례가 돌아왔죠.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맡아줄 사람을 찾았다고만 했으니까요. 노예로 팔려가던 중에 한 사내가 저희를 구해줬습니다. 그 분은 저희가 갈 곳이 없음을 알고 거두어주셨고 자신이 쉐도우 길드를 재창설하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저희는 은혜를 갚기 위해 10년간 그 분 밑에서 수련하며 실력을 키웠죠.”
“그래서 거액이 걸린 의뢰를 받아들인 거군. 첫 의뢰치고는 너무 난이도가 높은 걸?”
첫 의뢰라는 걸 말하지도 않았는데 로엘이 거기까지 알고 있자 첫째의 표정이 다시 한 번 놀라움에 물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