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1 7. 바보 삼형제를 얻다 =========================
별안간 무뢰한 흉내를 낸다는 말에 메이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뢰한 흉내가 정확히 어떤 흉내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유는 알 것 같았다.
메이아 역시 멀리서 다가오고 있는 레이아 일행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하니온 왕국의 공주님 때문에 그러시는 거구나. 그런데 왜 공주님을 꺼려하시는 거지?’
빌로스 왕국 사람들에게 재미없다고 말한 것 때문에 꺼려할 리는 없다.
메이아가 아는 로엘은 그렇게 쪼잔한 사람이 아니다.
뭔가 레이아를 꺼려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긴한데 거기까진 알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이아 일행이 계곡에 도착했다.
로엘은 입가의 기름기를 계곡물로 씻어내며 선두에 서있던 크라넬에게 비꼬듯 말을 건넸다.
“하니온 왕국의 크라넬 경에게 스토킹 취미가 있다는 게 알려지면 제법 좋은 가십거리가 되겠어.”
“폐가 될 이유를 가지고 쫓아다닌다면 스토킹이 되겠죠.”
“폐가 되지 않을 이유가 있단 말이야?”
“공주님께서 당신께 용건이 있다고 하십니다.”
마차를 호위하던 기사 한 명이 말에서 내려 마차의 문을 열었다.
마차에서 레이아가 치마 끝자락을 잡은 채로 내려왔다.
레이아는 가벼운 목례로 형식뿐인 예를 갖추더니 시종에게 명령을 내렸다.
“주머니를 드려.”
“네.”
시종이 로엘을 향해 쪼르르 달려와 묵직한 가죽주머니 하나를 주었다.
가죽주머니 안에는 상당량의 골드와 라벤더 상단의 어음이 들어있었다.
대략 6000골드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레이아가 지금 행위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그 돈을 돌려주고 싶어서 쫓아온 거야. 일부러 져줬잖아. 이런 식으로 얻은 돈을 쓰고 싶진 않아. 게다가 내가 너무 무례했어. 사과의 의미로 대접하고 싶은데 동행하지 않겠어?”
역시나 레이아랄까.
제법 머리를 굴렸다.
돈을 돌려준다는 핑계로 쫓아온 행위를 정당화하여 자신과 크라넬의 명예를 지켰고, 사과란 명분을 이용해 인간적으로 고위치를 점하면서 자연스럽게 동행을 권하였다.
여기서 로엘이 거절하면 로엘만 매정한 놈이 되어버린다.
아마 목적은 로엘의 정체일 거다.
반대로 생각하면 로엘의 정체 하나 알자고 6000골드를 돌려준 셈이다.
레이아는 로엘과의 동행이 6000골드 이상의 가치를 가졌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로엘이 레이아를 골리는데 6000골드가 아깝지 않다고 여긴 것처럼.
모름지기 왕족이란 그런 존재들이었다.
레이아는 멀뚱히 서있는 로엘을 보며 속으로 웃는 중이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완벽한 작전이었기에.
‘후후, 거절하지 못하겠지? 네 정체를 알아내고 말겠어.’
반면에 로엘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중이었다.
레이아의 작전에 말려들어서 그런 게 아니라 레이아가 한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런 거 안 줘도 동행해줄 생각이었는데......’
한 번 뿌리쳤는데도 또 달려왔으니 이젠 귀찮아서 그냥 동행해줄 생각이었다.
정체따윈 케시어에 도착하면 바로 밝혀질 거고 말이다.
레이아가 공들여서 이런 짓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을 그것도 모르고 6000골드니 사과니 하며 혼자 열 내는 것이었다.
로엘은 메이아가 들고 있는 보따리에 돈주머니를 넣으며 말을 향해 터벅터벅 걸었다.
“그렇게까지 고개 숙이고 나오는데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어차피 내가 케시어로 간다는 걸 알고 따라온 거지? 그럼 바로 출발하자고. 쉴 만큼 쉬었거든.”
로엘이 안절부절하며 핑계거리를 대지 않을까 생각하던 레이아는 순간 얼이 빠졌다.
‘뭐지? 아침까진 동행하지 않으려 했다며? 내가 뭐 때문에 저자세로 나갔는데 이리 쉽게 받아들여도 되는 거야?’
부딪칠수록 속을 알 수 없는 로엘의 행동에 레이아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왠지 목적은 이루었는데 여전히 로엘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나고 있는 기분일까.
분명 일부러 저러는 걸 거라고 확신하며 다시 마차에 오르는 레이아였다.
그리하여 로엘은 레이아 일행과 함께 케시어로 가게 되었다.
느긋한 여행길을 방해하였으니 이참에 레이아가 들러붙지 못하도록 정 떨어질 때까지 무뢰한 이미지를 심어줄 것이다.
여행길을 방해한 화풀이로 괴롭히는 건 덤이다.
정말로.
잘 닦여진 능선길을 마차와 말을 타고 넘어가자 넓은 강 두 개가 나왔다.
너비만 하더라도 1km에 달하는 두 강은 빌로스 북부를 가로지르는 게네크 강줄기인데 안개도시 포이그는 두 강의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강을 끼고 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습도가 높아 안개가 자주 끼었고 그 때문에 안개의 도시란 별명이 붙은 것이었다.
포이그로 들어가려면 두 개의 강에 세워진 기다란 다리를 건너야했다.
원래 고르디에서 포이그로 가려면 북서쪽으로 크게 돌아서 들어가야 했는데 50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바로 들어갈 수 있는 두 개의 다리가 건설되었다.
로엘과 레이아 일행은 포이그의 남쪽 다리에서 통행료를 내고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다리 위에는 전방을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안개가 껴있었다.
말끼리 서로 부딪치는 걸 막기 위해 우측통행을 하였다.
한창 다리를 건너는데 마차 창문이 열리면서 레이아가 마차 옆에서 말을 몰던 로엘에게 말을 붙였다.
“거기. 이름 정도는 알려줘. 품위 없이 야, 거기, 이봐라고만 할 수 없잖아.”
“로엘.”
“로엘? 좋은 이름이네.”
“딱히 좋은 이름까진 아니지.”
“이 나라 국왕이랑 같은 이름이잖아. 백성들에게 존경받는 성군과 같은 이름이니까 좋은 이름일 수밖에 없지.”
“같은 이름이 아니라 내가 로엘 본인이야.”
“아하, 본인이었구나.”
1초, 2초, 3초......
가식적으로 웃고 있던 레이아가 별안간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로엘을 쳐다보았다.
“국왕 본인이라고?”
그녀의 외침에 마차가 멈춰서고 하니온 왕국 기사단 전원이 말고삐를 강하게 당겼다.
레이아는 히죽거리며 웃고 있는 로엘을 보더니 눈매를 날카롭게 세우며 화를 냈다.
“이 작자가 지금 감히 국왕을 사칭해? 정체를 숨기고 싶으면 그럴 듯한 이름을 대던가. 무례가 하늘을 찌르는 무뢰한이구나.”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이리저리 빙빙 돌려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했는데 분노가 돌아왔다.
왠지 느낌상 이럴 것 같았다.
언제는 로엘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주는 사람이 있던가.
복장도 복장이지만 너무 태연하게 말한 것이 되러 의심을 불러 일으켰다.
로엘은 딱히 거짓말 할 생각도 없고 대접 받으려고 으스댈 생각도 없었다.
있는 그대로 행동할 뿐.
이제는 있는대로 받아들여달라고 발버둥치는 것도 질렸다.
“쯧쯧, 사과한다는 사람이 그리 화를 내면 쓰나.”
“이 작자가 지금 자기가 무슨 짓을 한 줄고 모르고 감히... 하니온 왕국 같았으면 바로 사형이었어.”
“우와, 하니온 왕국 정말 인정사정 안 봐주네. 그러니까 재미없는 나라라고 소문났지. 빌로스 왕국에선 블랙조크 정도는 애교로 봐주거든.”
“어서 그쪽이 누구인지 말해!”
“빌로스 왕국 국왕 엘리오스 킨 로엘.”
“으으, 놀리는 거지? 지금 나 놀리는 거지?”
사실만 말하고 있는데 레이아 혼자 제 분에 못 이겨 마차 창틀을 마구 두드리고 있었다.
뒤에서 보고 있던 메이아는 어이가 없어 홀로 혀를 내둘렀다.
‘무뢰한 흉내가 이걸 말씀하시는 거였어?’
흉내랄 게 뭐있나.
로엘은 사실대로 말하고 있는데 레이아 혼자 멋대로 무뢰한이라고 단정 짓고 있을 뿐이지 않은가.
메이아보고 보조를 맞추라는 건 괜히 정체 숨길 필요 없으니까 궁녀 본연의 모습으로 있으라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벽보고 화를 내듯 혼자 발끈하던 레이아가 메이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 너! 제대로 정체를 말해. 설마 넌 왕을 모시는 궁녀라고 하진 않겠지?”
거짓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메이아는 사실대로 고했다.
“전하를 모시는 궁녀입니다. 어릴 때부터 모셔왔지요.”
“쌍으로 뻔뻔하네. 궁녀라면 궁녀 3대 원칙 정도는 알고 있지? 한 번 말해봐.”
“글쎄요. 빌로스 왕궁에선 그런 걸 강요하진 않아서 잘 모르겠네요. 굳이 말하자면 아침밥은 억지로라도 먹여라, 수련할 때 정도는 쉬게 놔둬라, 10시 이후엔 그란데 백작을 돌려보내라 정도이려나요.”
3대 원칙 중 수련할 때 쉬게 놔두라는 말이 섞여 있었다.
로엘은 그녀가 알면서도 봐주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어쩐지 수련할 때마다 웃으면서 딴 일하러 가더라니. 쟤 은근히 무섭네.’
로엘이야 사정을 아니 다른 의미로 몸서리를 치고 있었지만 레이아는 놀리고 있는 거라 여겼다.
그렇다고 그녀가 로엘을 벌할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공주의 신분이라지만 어디까지나 타국 사람이고 빌로스 왕국이 왕족모욕에 관대하다는데 타국 사람인 자기가 벌을 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레이아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여겨 마차 창문을 닫고 속으로 분을 삭였다.
‘내가 바보인줄 알아? 빌로스 왕의 초상화 정도는 본 적이 있다고. 초상화인 걸 감안해도 저 자보단 훨씬 못난 얼굴이었어. 분명히 빌로스 왕국의 귀족인 것 같은데 누구지? 왜 평민차림으로 돌아다니는지 알아내고야 말겠어.’
처음에는 대륙회담에 도움이 될까 해서 정체를 캐내려 했지만 이제는 그저 오기만 남게 되었다.
케시어에 도착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가능성이 높지만 로엘의 입을 통해 들어야만 성이 풀릴 것 같았다.
분을 삭이던 레이아는 문득 고르디에서 로엘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약혼만은 참아달라고? 난 아직 한 번도 혼담을 받아들인 적 없는 여자란 말이야. 자기한테 빠질 거라고 생각해서 한 말인가? 흥! 그런 일이 있을 것 같아?’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여기며 로엘을 자의식과잉이라고 생각하는 레이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