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0 7. 바보 삼형제를 얻다 =========================
7. 바보 삼형제를 얻다.
정체가 들켜도 상관은 없지만 일부러 알려줄 필요도 없었다.
무엇보다 함께 가면 어제의 일로 뿔이 난 레이아와 함께 가야한다.
즐거운 여행길에 먹구름이 끼어들게 분명했다.
“제안은 고맙지만 얻어 타고 다닐 정도로 절박하진 않아.”
여기서 크라넬이 더 권한다면 로엘을 절박한 사람으로 여기는 게 되어버린다.
자존심은 세우되 더 이상 권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전하였다.
로엘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크라넬은 더 이상 권하지 않고 좋은 여행되라는 말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그런데 로엘이 말을 고르는 내내 크라넬이 은근슬쩍 로엘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메이아가 말을 보는 척하면 계속 따라오는 크라넬을 보곤 걱정스레 귓속말을 속삭였다.
“계속 따라오는데 어쩌죠?”
“놔둬. 또 권하면 또 거절하지 뭐. 내 얼굴 보고도 날 못 알아봤으니 내 정체를 알고 따라오는 건 아닐 거야.”
“전... 아니 오라버니 얼굴이 워낙 바뀌어서 그렇죠.”
“어떻게 바뀌었는데?”
“그야 뭐......”
로엘은 메이아가 말꼬리를 흐리는 걸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설명하기 어려워서 그렇겠거니 하고 넘어갔다.
태연하게 말을 고르던 중 괜찮은 말 한 마리가 눈에 들어왔다.
갈기털에 윤기는 없었지만 허벅지가 탄탄하고 투레질에 힘이 있는 말이었다.
로엘은 말을 소유한 상인에게 말을 붙였다.
“말이 제법 튼실한 걸?”
“하하, 손님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그 유명한 케이델 공작 가의 철갑기마대에서 기르던 말입니다. 나이가 들어서 내놓은 걸 데려왔는데 아직도 현역 못지않게 힘이 좋습니다.”
“가격은 얼마나 하지?”
가격을 물었는데 상인은 가격을 말하는 대신 로엘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무언가를 떠올린 듯 손뼉을 쳤다.
“아! 어제 룰렛하우스에서 교환포커 치신 분이시군요!”
상인도 어제 교환포커를 치던 장소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상인은 어제의 일을 회상하며 껄껄 웃었다.
“하하, 어제는 정말 속이 다 시원하더군요. 빌로스의 명예를 위해 6000골드를 던지다니 정말 감동했습니다. 당신 같은 분에게 돈을 받을 순 없죠. 그냥 타고 가십시오.”
“공짜로 준다고? 괜찮겠어?”
“물론 저도 상인이니 마냥 손해를 보진 않습니다. 임대로 내드릴 테니 목적지에 도착한 다음 라벤더 상단에 반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디로 가실 예정이십니까?”
“케시어까지 가려고 해.”
“케시어에도 라벤더 상단의 지부가 있으니 문제없겠군요. 거기서 반납해주시면 제 이름으로 장부에 말 값이 올라갈 테니 걱정 말고 편히 쓰십시오.”
“흐음, 임대형식이면 차용증을 써야할 텐데. 내가 지금 신분을 밝히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차용증이라면 어제 보여준 의기로 대신하겠습니다. 6000골드를 서슴없이 쓰시는 분이 80골드짜리 말을 훔치시진 않겠죠.”
어차피 써버리고 올 돈을 썼을 뿐인데 의외의 수확이 생겼다.
원래는 말을 산 이후에 남은 돈으로 여행을 하다가 돈이 떨어지면 다시 팔 생각이었다. 그 후에 케시어로 가려했는데 일이 이리 되었으니 편히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상인이 말에 2인용 안장을 채워주더니 고삐를 로엘에게 넘겼다.
“당신이 가는 길에 브리튼의 가호가 깃들길 바라겠습니다.”
“빈말이길 바래. 지금도 너무 과분할 정도로 사랑 받아서 문제거든. 잘 생각해보니 괴롭힘에 가까운 사랑이려나.”
“하하, 저도 언제 한 번 그런 말을 해보고 싶군요.”
로엘은 훌쩍 뛰어 말에 올라탄 후 메이아를 끌어올려주었다.
안장 뒤쪽에 메이아가 자리를 잡자마자 고삐를 당겼다.
“이랴!”
“푸히힝!”
검은색 털을 가진 늙은 말이 기세 좋게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새 로엘을 따라다니던 크라넬은 사라지고 없었다.
로엘은 제풀에 떨어져 나간 것이라 여기며 깊게 생각하지 않고 북쪽을 향해 말을 몰았다.
다음 목적지는 고르디 시에서 케시어로 가는 길목에 있는 안개의 도시 포이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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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 출발시간입니다.”
레이아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상태로 대답했다.
베개에 얼굴이 파묻혀 있기에 목소리가 솜에 잠긴 듯 새어나와 혀 짧은 목소리처럼 되었다.
“기차나. 오후에 추바 하꺼야.”
어젯밤 의문의 사내에게 한 방 먹은 이후부터 계속 이 상태였다.
하니온 왕궁의 내노라하는 대신들도 꼼짝 못하게 만들던 그녀가 도박장에서 만난 평민차림의 사내에게 호되게 당했으니 기운이 없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빌로스 왕국에게 한 방 먹인 공주의 이야기가 시인들에 의해 읊어지길 원했으나 그게 무산되어버렸다.
레이아는 이 여행에서 흥미를 잃은지 오래였다.
속 편하게 놀러온 레이아와 달리 크라넬은 그녀를 케시어까지 데려가야 할 의무가 있었다.
명색이 대륙회담에 참가하기 위해 시작한 여행이니 모양뿐인 목적이라도 완수할 필요가 있었다.
크라넬은 밍기적거리는 레이아의 의욕을 돋우기 위해 마시장에서 얻은 정보를 꺼내들었다.
“어제 마주쳤던 그 사내도 케시어로 간다 합니다.”
크라넬의 말에 레이아가 벌떡 일어나며 부스스한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게 정말이야?”
“마시장에서 직접 들은 이야기입니다. 상인에게 케시어로 간다고 말하는 걸 제 귀로 들었습니다.”
“이 시기에 케시어로 간다면 그 역시 대륙회담과 연관이 있는 인물이라는 거겠지.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어. 그 자는 보통 인물이 아니야.”
“빌로스 정계에 속한 자일까요?”
“그럴 가능성이 높아. 따라가자. 왜 빌로스 정계에 속한 자가 평민 차림으로 따로 움직이는지 알아봐야겠어.”
진짜 목적은 따라가서 화풀이를 할 수 있을 법한 약점을 잡는 것이겠지만 크라넬은 굳이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
레이아 일행이 고급 여관에서 출발하였다.
은장식으로 꾸며진 검은 마차가 하니온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고르디 시를 벗어났다.
고르디 시 외곽의 어느 나무 위에서 레이아 일행의 움직임을 주시하는 세 남자가 있었다.
세 남자 중 가장 덩치가 큰 사내가 입을 열었다.
“셋째야. 웨이터에게 제대로 된 독을 건네준 게 맞느냐?”
세 남자 중 송충이처럼 눈썹이 짙은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몇 번이고 확인하고 건네줬습니다. 웨이터가 독을 탄 술을 공주에게 넘겨준 걸 형님들도 보셨잖습니까.”
“네 말대로라면 공주는 지금 푸르뎅뎅한 풋사과가 돼서 누워있어야 하는데 전혀 아니지 않느냐.”
“글쎄요. 사과가 익어버린 건 아닐까요? 그럴 계절이잖아요.”
“지금 사과 얘기를 하는 게 아니야. 그녀가 케시어에 들어가면 암살할 기회가 없다고. 우린 이번 의뢰를 꼭 성공시켜야 한단 말이다. 우리에겐 돈이 필요해.”
가만히 듣고 있던 대머리 사내가 입을 열었다.
“형님 어제 초콜릿 바른 사과를 10개나 먹었잖아요. 자꾸 돈 없다고 하시는데 그 돈은 어디서 났어요?”
“너흰 저녁을 먹었고 나는 저녁을 먹는 대신 그 돈으로 단 음식을 사먹었을 뿐이야. 요즘 자꾸 당 떨어지는 게 느껴지더라고.”
“이번 임무 성공하면 받는 돈으로 초콜릿 사과 몇 개를 살 수 있을까요?”
“그게 지금 중요해?”
“저도 먹고 싶어서요. 저 오늘 점심 대신 초콜릿 사과 먹어도 될까요?”
“바보 같은 놈! 지금 당장 공주를 따라가야 해. 근데 셋째는 왜 자꾸 몸을 들썩이는 거냐?”
“다리에 감각이 없어서요. 앞으로 숨을 때 높고 좁은 곳 말고 낮고 넓은 곳에 숨읍시다.”
“안 돼. 암살자는 언제나 그늘에 있어야 하는 법이야. 됐으니까 슬슬 쫓아가자.”
“잠시만요. 다리에 피 좀 돌게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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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타고 이동하던 로엘과 메이아는 점심시간 즈음 어느 계곡 가에서 휴식시간을 가졌다.
푹신한 이끼를 방석 삼아 바위 위에 깔곤 고르디 시에서 포장해온 셰퍼드 파이를 베어 물었다.
우물우물.
계곡 사이로 불어오는 가을바람은 로엘을 배려해주기 위함인지 땀을 식히기 좋은 강도로 불어왔다.
바닥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맑은 물 아래로 돌을 더듬는 가재와 송사리 떼가 보였다. 끝이 노랗게 물든 잡초들이 식곤증을 느끼는 듯 위아래로 꾸벅거리는 중이었고, 셰퍼드 파이의 기름기가 입술 주변에 묻으면서 기분 좋게 번들거렸다.
“쉬쉬! 안 돼. 너희한테 줄 거 없으니까 올 생각하지마.”
메이아가 나뭇가지 위에서 부스러기를 노리는 까마귀들과 눈싸움을 하는 사이 로엘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노는 것도 좋지만 이번 여행의 최종 골인지점은 군비축소조약을 통과시키는 것이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킬더 왕국 여왕이랑 손을 잡는다 치면 적은 하니온, 브리니아, 겐크인가. 겐크 왕국은 킬더 왕국을 노리고 있으니까 죽자사자 반대하고 나서겠지. 이맘때 즈음에 겐크 왕국에서 골렘 연구를 시작했으니까 그걸 꺼내면 찍소리도 못할 거야. 나머지 하니온이랑 브리니아의 아저씨들은 말을 잘하는 편은 아니니까 대응도 못하게 바로 치고 나가면 되겠군.’
겐크 왕국의 골렘연구에 대한 자료는 이전에 파견한 스파이들이 대량으로 물어왔다.
다만 걱정되는 게 있다면 레이아였다.
전생에서도 전전생에서도 레이아와의 혼담이 시작된 곳은 이번 대륙회담이었다. 2번 다 로엘이 킬더 왕국의 군비축소조약을 가볍게 찍어 누르는 걸 본 하니온 국왕이 감탄하여 레이아를 소개해준 거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딸아이를 염가판매하듯 내보내려고 그리 열을 내며 붙여준 게 아닌가 싶다.
‘이번 생에는 미리 약속을 걸어뒀으니 괜찮...을 리 없군.’
여태껏 로엘이 하기 싫다고 그리 발버둥을 쳐도 결국 이루어지고 말았었다.
왕위등극 과정에서도 그랬는데 약혼이라고 안 그러겠는가.
계곡 너머에서 레이아 일행이 나타나더니 로엘을 향해 곧장 오고 있었다.
케시어로 가려면 그냥 길을 따라 쭈욱 가면 되는데 굳이 계곡 쪽으로 이어지는 길로 빠져나오는 중이었다.
명백히 로엘을 노리고 오는 것이었다.
로엘은 점점 선명해지는 마차바퀴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어쩔 수 없구만. 아예 엉겨 붙기 싫을 정도로 괴롭히는 수밖에.”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약속 하나로는 운명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어제 그렇게 혼났는데도 로엘을 따라온 것만 봐도 티격태격대다가 결국 약혼으로 이어질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아예 남자로서 최악인 모습을 보여주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로엘은 남은 파이 조각을 한꺼번에 삼키며 메이아에게 양해를 구했다.
“메이아. 얼마간 무뢰한 흉내 좀 낼 테니까 알아서 보조를 맞춰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