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될놈될-9화 (9/219)

00009 6. 하니온의 공주 =========================

레이아는 아직 로엘을 알아보지 못할 시점이었다.

그녀가 로엘과 정식으로 만났던 건 이번 대륙회담 때였으니까.

제법 그리운 얼굴이자 로엘과는 악연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왜냐고?

전생에서도, 전전생에서도 그녀와 약혼을 했었기에.

약혼을 했지만 로엘이 대륙통일전쟁을 일으키면서 파혼이 되었었다.

물론 이번 생애에선 그녀와 이어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재미있는 성격의 소유자이긴 하다만 반려자로 삼기에는 너무 성격이 드세서 로엘의 취향은 아니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니 조금 괴롭혀 줘볼까.’

로엘은 메이아에게서 파우치를 건네받곤 칩을 테이블에 쌓으며 자리에 앉았다.

“기운 좋은 아가씨. 멀리서 온 보람을 만들어주고 싶은데 나랑 해보지 않겠어?”

테이블 맞은편에 쌓여 있는 칩 사이로 레이아의 매혹적인 미소가 엿보였다.

그녀의 눈이 빠르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로엘의 겉모습에서 평민 졸부의 느낌을 받은 그녀가 대략 7000골드쯤 되는 자신의 칩더미를 가리켰다.

“아무나 덤비라곤 했지만 정말 아무나 올 줄은 몰랐네. 이거 전부 100골드짜리인 거 보고 덤비는 거지?”

현재 로엘이 파우치에서 꺼낸 칩은 100골드짜리 10개로 1000골드밖에(?) 되지 않았다.

그걸 로엘의 전부라 여겨 판돈으로 겁을 주려는 것이었다.

로엘은 코웃음을 치며 파우치에 남아있던 칩을 모두 꺼냈다.

처음 앉을 때만 하더라도 1천골드만 쌓여 있던 칩이 다 쏟아 붓고 나니 6000골드에 육박했다.

칩을 올려 쌓은 로엘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레이아의 말을 그대로 받아쳐주었다.

“판돈을 착각한 건 아니니까 걱정 말라고. 나도 그쪽이랑 똑같은 칩이 많거든.”

로엘의 차림만 보고 평민 졸부로 여기고 있던 레이아 및 구경꾼들이 표정을 달리했다.

레이아는 로엘을 얕보고 있던 마음을 고쳐먹었다.

상대에게 충분한 화살이 있는 걸 보고도 얕볼 정도로 그녀는 어수룩한 성격이 아니었다.

“후후, 내 드레스를 보고 온 게 아니라서 좋네.”

“치마만 두른다고 다 여자인 건 아니지.”

“반응도 신선해! 너 평민 아니지? 어디 지방출신이야?”

“하니온 왕국보단 재밌는 곳에서 왔지.”

“내가 하니온 출신인 걸 잘도 알았네.”

“빌로스 왕국 사람들보고 재미없다고 나불거리는 입을 가진 사람은 하니온 왕국 출신밖에 없거든.”

“사실이잖아?”

“누가 보면 맞선자리인 줄 알겠네. 게임 시작하자고. 룰은?”

“교환포커.”

빌로스 왕국에서 1대1 포커라하면 교환포커가 일반적이었다.

먼저 각자 카드를 4장씩 먼저 받는다.

그 중 하나는 오픈을 하고 나머지 세 장 중 하나를 상대에게 건넨다.

즉, 서로 카드를 한 장씩 교환하고 시작한다는 거다.

오픈된 카드를 보고 상대의 족보를 파괴할 카드, 혹은 상대가 운을 바라고 무리하게 족보를 만들 법한 카드를 건네는 게 관건이었다.

그 다음 나머지 3장을 한 장씩 받을 때마다 배팅을 한다.

최소한 상대의 카드를 2장 알고 있는데다 자신이 건네받은 카드로 상대의 의도를 읽어내야 하기 때문에 상당히 머리를 써야 하는 게임이었다.

레이아가 딜러에게 신호를 주자 딜러가 새 카드를 화려한 손놀림으로 섞었다.

먼저 4장이 로엘과 레이아에게 번갈아 전해졌다.

로엘이 받은 카드는 스페이드A, 스페이드3, 하트A, 클로버J였다.

일단 원 페어는 갖추어졌다.

원 페어 중에서 가장 강한 스페이드A 원 페어였다.

패를 받았으니 이번에는 4장 중 한 장을 공개할 차례였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가장 붕떠있는 클로버J를 공개하는 게 정석이었다.

하지만 로엘은 레이아를 힐끗 보며 스페이드A를 공개했다.

레이아도 보통 신경줄이 굵은 건 아닌 터라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다이아8을 공개하며 입을 열었다.

“좋은 패 들어왔다고 자랑이라도 할 셈이야?”

“재미있는 걸 원하니까 재미있게 해주려고.”

“그렇게까지 자신만만하게 구니까 되러 심통 나는데? 게임 중에 한 번이라도 날 진심으로 웃게하면 원하는 걸 들어주겠어.”

“호오, 내가 널 원한다고 하면 어쩌려고?”

“안 웃을 자신이 있으니까 하는 말이야.”

“뭐 안심해. 그쪽 같은 여자는 내 타입이 아니거든.”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서로 눈을 마주치며 상대의 안색을 살피는 두 사람이었다.

둘 다 포커페이스에 능해서 표정에서 허세인지 진심인지 읽어내는 건 거의 힘들었다.

이제 교환타임이었다.

로엘은 교환할 카드를 뒤집어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내가 주는 깜짝상자야. 잘 받으라고 아가씨.’

레이아도 카드를 내밀면서 서로 카드를 교환하게 되었다.

레이아가 준 카드는 하트3이었다.

그렇다면 로엘이 준 건?

레이아는 로엘에게서 받은 카드를 자신의 손패에 넣어 확인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나 놀리는 거 맞지?’

로엘이 준 건 다름 아닌 하트A였다.

지금 손패에 있는 최강의 A원 페어를 부수고 그 중 하나를 레이아에게 건넨 것이다.

레이아가 심통 맞은 표정을 짓는 만큼 로엘의 입가는 옆으로 길게 늘어졌다.

레이아는 로엘이 심리전을 걸고 있다 여겼다.

‘날 흔들려는 작전인 게 분명해. 내 수읽기를 흐트러뜨리기 위해 첫 판을 버리려는 거군. 그렇다면 금방 끝내주겠어.’

교환타임 이후 첫 배팅시간이 찾아들었다.

선인 레이아부터 배팅을 걸었다.

레이아는 로엘의 얄팍한 작전을 부수고자 초장부터 세게 나갔다.

“500.”

레이아의 기본판돈이 100골드짜리 칩 위에 5개의 칩이 더 올라갔다.

버리는 판에 600골드를 버릴 수 있을까?

포기하려면 지금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네 흔들기따윈 통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레이아의 판단과 달리 로엘은 가볍게 콜을 외쳤다.

“콜.”

로엘의 기본판돈 위에도 500골드치 칩이 더 얹어졌다.

레이아는 로엘이 허세를 부리고 있다고 확신하였다.

‘이대로 물러나면 꼴사나우니까 남은 3장에 기대를 걸어보겠다 이거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간 금방 다 잃어버릴걸?’

첫 배팅으로 판돈이 600골드까지 올라간 마당에 다음 카드가 분배되었다.

이번에 레이아가 받은 카드는 클로버9였다.

현재 레이아의 카드는 하트A, 다이아6, 다이아8, 클로버7, 클로버9였다.

한 장만 더 붙으면 스트레이트가 되는 상황.

일부러 원 페어를 부순 로엘보다 월등히 앞서고 있었다.

얼핏 보건데 로엘의 표정은 여전히 싱글벙글 웃음만발이었다.

교환포커의 룰에 따라 이번에는 로엘이 먼저 배팅을 하였다.

허세를 위해서는 판돈을 올릴 거다.

그리 생각했는데 역시나 로엘은 판돈을 올렸다.

문제는 올린 판돈의 숫자가 이전의 2배라는 점이었다.

“더블. 받을 수 있으면 받아봐.”

600골드 위에 600골드가 더 올라가면서 총 1200골드가 되었다.

1200골드면 슬슬 레이아도 부담이 되는 액수였다.

물론 자신이 유리하다 여긴 레이아는 허세임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자신은 더 세게 나갔다.

“받고 800 더.”

2000골드면 로엘이 가진 돈의 1/3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허세로 잃기에는 너무 많은 돈이다.

이번만큼은 로엘의 허세가 걷혀지리라 확신하였다.

그러나 로엘의 대답은 단 한 글자였다.

“콜. 자, 다음 패 돌려.”

이쯤 되니 레이아는 슬슬 의심이 되기 시작했다.

자신의 판단에 대한 의심이 말이다.

‘허세치고는 너무 많이 걸어. 갑자기 좋은 패가 들어온 건가?’

다음 패가 들어왔다.

스트레이트를 완성시킬 수 있는 스페이드10이 들어왔다.

이걸로 레이아는 10스트레이트가 완성되었다.

패가 완성된 이상 배팅을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1000더. 3000골드야. 이제 지면 절반 이상 날아갈 텐데 받을 수 있을까?”

자신의 패를 보던 로엘이 처음으로 미소를 지우고 눈썹을 꿈틀거렸다.

드디어 허세가 벗겨진 거려나.

아니었다.

미소를 지운 얼굴에서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 감질나서 안 되겠네. 그냥 올인해야겠다. 난 올인. 먼저 올인 걸었으니 그쪽이 6000걸면 패 공개까지 바로 진행되겠지. 빨리빨리 하자고.”

‘올인이라니. 허세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냥 바보였잖아. 아무리 좋은 패라도 그렇지 첫 판부터 올인이라고?’

자존심 강한 레이아는 로엘의 가면을 부수고자 6000골드짜리 승부를 받아들였다.

“받아들이겠어. 딜러, 바로 끝까지 진행해.”

하루에 수 억 골드의 돈이 오가는 룰렛하우스라지만 한 판에 6000만, 합쳐서 12000골드가 걸린 승부는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 편이었다.

어느새 구경꾼들이 모여들었다.

딜러는 막중한 승부의 종지부를 찍을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어 카드뭉치를 테이블에 내려놓고 한 손으로 카드를 나누어주었다.

이 승부에 속임수따윈 일절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한 퍼포먼스였다.

레이아의 마지막 카드는 다이아K였기에 족보의 변화는 없었다.

이제 패 공개만 남았기에 레이아는 자신의 패를 펼쳐보였다.

“10스트레이트야. 그쪽은?”

모두의 시선이 로엘의 손에 집중되었다.

로엘도 지체할 것 없이 패를 펼쳐들었다.

12000골드의 승부를 만든 패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펼쳐진 건 스페이드3, 하트3 원 페어였다.

구경꾼들이 펼쳐진 패를 보곤 제 일인마냥 머리를 감싸 쥐었다.

“겨우 3 원 페어? 저걸로 승부를 걸었다고?”

“완전히 미쳤군! 저런 패를 믿고 한 판에 6000골드를 잃다니!”

역시 허세였음이 적중하여 대승부에서 이긴 레이아는 폭소를 터뜨렸다.

“호호호! 자신만만하더니 겨우 3 원 페어야? 바보네.”

6000골드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로엘의 미소는 여전했다.

로엘은 자신을 비웃고 있는 레이아를 향해 나지막이 한 마디 날렸다.

“진심으로 웃었군.”

그 말을 들은 레이아는 웃음기가 싹 가셔버렸다.

뒤이어 로엘이 한 마디 더 덧붙였다.

“빌로스 사람들은 참 재미있지?”

그 말에 레이아는 로엘의 의도를 깨달았다.

이 남자는 처음부터 이길 생각이 없었던 거다.

도중부터 레이아는 진지해진 반면에 로엘은 끝까지 재미를 관철했다.

6000골드를 잃었지만 빌로스 사람이 더 재미있는 족속이라는 걸 증명해낸 셈이다.

더불어 6000골드 정도는 잃어도 상관없을 정도의 위치에 있는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레이아는 개인으로선 승리했지만 공주로선 패배했다.

게다가 생각해보면 로엘에겐 6000골드를 회수할 방법이 있었다.

분명 게임 전에 진심으로 웃으면 원하는 걸 들어주겠다고 말했었다.

농담 삼아한 말이지만 이만큼 일이 커지면 자신이 내뱉은 말을 지켜야만 했다.

이걸 노리고 이런 바보 같은 배팅을 한 게 분명했다.

레이아는 이를 갈며 로엘을 노려보았다.

“네 말대로 진심으로 웃었어. 원하는 걸 말해. 물론 빼앗긴 돈이겠지?”

로엘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빈 파우치를 지나가던 웨이터에게 건네주며 몸을 돌렸다.

자리를 파하고 돌아가려던 로엘이 돈 말고 다른 소원을 말했다.

“다른 건 됐으니까 나랑 약혼하는 것만은 참아줘. 그게 소원이야.”

전생대로 흘러간다면 또 레이아와 약혼했다가 파혼할 가능성이 다분하니 사전에 막아둘 속셈이었다.

그녀가 약혼자로 들어와 야금야금 빌로스 왕국의 권력을 갉아먹는 걸 막느라 개고생 했던 걸 생각하면 아직도 머리가 아프다.

생각 이상의 수확을 얻은 채로 떠난 로엘과 달리 레이아는 칩더미 사이에서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약혼은 참아달라고? 무슨 소리야?”

이해할 수 없는 요구는 둘째 치고 완전히 졌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레이아는 뒤늦게 분노가 치밀어 올라 웨이터가 내미는 술잔을 낚아채어 벌컥벌컥 들이켰다.

“으으, 난 돈을 따러온 게 아니라고. 이래서야 이겼어도 이겼다고 말할 수가 없잖아.”

약이 올라 펄펄 뛰는 레이아를 말리느라 크라넬이 진땀을 빼는 사이 레이아의 목에 걸린 드라고라의 혈청이 옅은 빨간빛을 내뿜었다.

잠깐 동안 내뿜다가 빛이 다시 사그라들었기에 그 변화를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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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여관에서 나온 로엘은 메이아와 함께 마시장으로 갔다.

타고 다니던 마차를 더프에게 주었으니 케시어까지 타고 갈 말이 필요했다.

이른 아침부터 상인들이 질 좋은 말을 들이고 있는 가운데 로엘은 익숙한 얼굴과 부딪쳤다.

어제 레이아와 함께 있었던 크라넬이었다.

크라넬은 로엘을 알아보곤 예를 갖추었다.

분명 지금의 로엘은 평민복장을 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여기서 다시 뵙게 되는군요. 어제는 공주님이 폐를 끼쳤습니다. 두 분도 말을 구하러 오신 겁니까?”

크라넬의 경우 화가 난 레이아를 빨리 케시어에 데려다주려고 지친 말을 교환하기 위해 마시장에 온 것이었다.

로엘은 대꾸하다간 성가신 상황이 될 것 같아 대충 대답해주고 헤어지려 했다.

“폐라고 할 것까진 아니었으니 신경 쓸 거 없어. 그럼 우린 갈 길이 바빠서 이만.”

바쁘게 크라넬의 옆을 지나치려는데 아니나 다를까 성가실 것 같은 제안이 날아들었다.

“혹시 방향이 같다면 저희 쪽에서 태워드리겠습니다. 6000골드나 받고 그냥 보내드리긴 미안하니까요.”

로엘은 크라넬의 무뚝뚝한 얼굴에서 음흉함을 읽어냈다.

‘그래. 이 녀석도 일단은 하니온 왕궁 기사단의 단장이었지.’

어제 로엘의 태도를 보고 평범한 사람이 아닐 거라 여겨 정체를 알고자 동행을 제안한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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