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5 5. 케시어로 가는 길 =========================
5. 케시어로 가는 길
5왕국의 국왕이 모이는 대륙회담이 보름 뒤로 다가왔다.
대륙회담은 5왕궁의 중심에 있는 대륙 유일의 중립지대 케시어에서 열린다.
케시어는 각국의 종교로 선정되어 있는 브리튼 교의 대신전이 있는 곳으로 브리튼 교가 직접 관리하는 땅이기도 했다.
평화와 자비의 신을 모시는 브리튼 교의 땅인 만큼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케시어 안에서 만큼은 무력다툼을 해선 안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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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엘의 개인 집무실 바깥.
궁녀는 물론 경비병과 신하들에 이르기까지 로엘의 집무실을 지날 때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로엘이 며칠 째 계속 집무실에 틀어박혀 대륙회담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밤낮 가리지 않고 일하는 로엘을 보고 모두가 존경의 마음을 품었다.
“전하께서 정말 열심히 하시는군. 오늘로 일주일 째였나?”
“대륙회담이 눈앞에 오니 기합이 들어가신 거겠지. 뭐니뭐니해도 5왕국의 지도자가 모두 모이는 자리니까.”
“열심히 하시는 건 좋은데 쉬엄쉬엄 했으면 좋겠어. 얼마 전에 마나폭주로 쓰러지셨을 땐 정말 놀랐다고.”
“동감이야. 그때는 차라리 내가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라니까. 너무 훌륭한 왕을 둬서 걱정하기는 처음이야.”
왕궁 곳곳에서 로엘에 대한 존경과 걱정이 섞인 목소리가 오갔다.
그러던 차에 라이너리 백작이 서류를 한 아름 안고 로엘의 집무실에 들어갔다.
“전하, 추가보고를 정리한 자료입니다.”
책상에 서류가 산더미처럼 쌓인 가운데 로엘이 서류를 하나하나 읽고 있었다.
로엘은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입을 열었다.
“아까 가져온 서류 옆에 쌓아둬.”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타 왕국에 대한 정황을 파악해서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리셨을 땐 적잖이 놀랐습니다.”
“대륙회담에서 압도적으로 의견을 통과시키려면 정보량이 관건이니까.”
며칠 전, 로엘은 측근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4왕국에 많은 수의 스파이를 파견하여 각 영지의 상태를 보고하라는 명령이었다.
이전에 파견해둔 스파이에 더하여 기존 스파이의 3배에 달하는 인력을 대륙 곳곳에 파견했다.
스파이를 파견한지 얼마 되지 않아 보고가 한가득 올라오기 시작했고, 그걸 일일이 확인하는 중이었다.
모든 건 대륙회담에서 군비축소를 통과시키기 위한 준비였다.
‘이번 대륙회담에서 군비축소조약을 맺느냐 마느냐가 내 3번째 삶을 결정하겠지.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 해.’
대륙회담의 회의는 굉장히 공격적이다.
정확한 자료와 토론 시나리오를 짜서 다른 왕국의 국왕의 의견을 눌러버려야 한다.
그를 위해서 로엘은 잠자는 시간도 줄여가며 그토록 싫어하는 서류검토를 자진해서 하고 있었다.
서류를 검토하던 로엘이 문득 고개를 들어 라이너리 백작을 보았다.
라이너리 백작은 로엘이 서류검토 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보고 있는 중이었다.
그 모습을 본 로엘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이는군.’
스파이 파견을 전쟁준비로 착각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로엘의 짐작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라이너리 백작은 완전히 전쟁준비를 하는 걸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전쟁을 위해서 정보를 수집하시는 중이군. 보고서는 필사해뒀으니 대신들과 3공작 분들에게도 보내둬야겠어.’
로엘은 오해를 감안하여 확실하게 말해두기로 마음먹었다.
“라이너리 백작.”
“예.”
“난 전쟁을 일으킬 생각 없어.”
“알고 있습니다. 늘 그 말씀을 하셨지요.”
“진심이야. 내가 한 말에 그 어떠한 의도도 없어. 그러니 혼자 멋대로 착각하지 말아줬으면 해. 덤으로 그란데 백작의 호들갑도 어떻게 좀 해줘.”
평소에도 자주 하는 말이긴 하다만 전혀 전해지지 않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진심이라는 걸 드러내기 위해 마나를 내뿜어 라이너리 백작에 압박감을 주었다.
라이너리 백작은 위압감에 짓눌리며 생각에 잠겼다.
‘전쟁을 하지 않으시겠다고? 왜 자꾸 그런 소리를 하시는... 아! 그렇군!’
라이너리 백작의 표정이 밝아지더니 마나의 압박을 견뎌내며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전하. 소신은 방해가 되지 않게 이만 물러나보겠습니다.”
대답을 들은 로엘은 압박을 풀며 라이너리 백작을 내보냈다.
라이너리 백작이 나간 후, 로엘은 서류더미 사이에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분명 안 전해졌을 거야. 어우, 진짜 내 신하들은 왜 하나 같이 충성심이 높은 건지 원.”
신하들이 너무 충성심이 깊어 고민하는 국왕은 로엘뿐일 거다.
국왕 집무실에서 나온 라이너리 백작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로엘의 예상대로 멋대로 착각 중이었다.
‘우리가 스파이를 보내는 것처럼 다른 나라도 스파이를 곳곳에 심어놨겠지. 전하는 최대한 은밀하게 준비하시려는 걸 거야. 그란데 백작을 어떻게 해달라는 말도 이해가 되는군. 전하의 오른팔인 만큼 스파이가 많이 붙었을 테니까.’
로엘이 기밀유지에 힘쓰고 있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라이너리 백작은 자신도 은밀하게 움직일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란데 백작뿐만 아니라 로엘에게도 알리지 않고 군량을 모으기로 결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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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대륙회담까지 일주일이 남게 되었다.
테헤란에서 케시아까지는 마차로 나흘 정도 걸리는 편이었다.
로엘의 이동을 위해 두 달 전부터 특별훈련을 거친 로얄 기사단이 호위를 맡았고, 늠름한 백마와 금박 무늬를 입힌 하얀 마차가 준비되었다.
그 외에 로엘을 보좌하기 위해 따라가는 사람은 궁녀 메이아뿐이었다.
로엘이 마차에 오르기 전.
그란데 백작이 안절부절 못하며 로엘에게 간청했다.
“전하! 제발 대신들을 대동해주십시오. 궁녀의 숫자도 좀 더 늘려야 합니다.”
“거절하겠어. 메이아 한 명으로도 충분해.”
“각국의 국왕이 모이는 자리입니다. 나라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좀 더 구색을 갖춰주십시오.”
“그란데 백작은 내가 구색을 갖춰야만 위엄이 드러나는 물렁한 인간으로 보이나 보지?”
로엘의 한 마디에 그란데 백작이 머리라도 맞은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요. 전하께선 어떤 상황에서도 위엄이 넘치는 분이십니다.”
“알면 됐어. 전권은 숙부님께 위임했으니 전력으로 보좌해주도록 해.”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전하께서는 분명 위엄 넘치신 분이지만... 그렇지만......”
“그럼 갔다올게.”
그란데 백작이 멍하니 있는 틈을 타서 로엘은 냉큼 마차에 올라탔다.
그와 동시에 로엘을 배웅하는 왕궁악단의 팡파레가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빠바방!
“전하! 하다못해 저라도! 저라도 동행을 허락해주시오, 전하~.”
누가 국왕바라기 아니라고 사실 로엘을 따라가고 싶어서 간청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란데 백작의 간절한 외침은 팡파레에 의해 파묻혀 전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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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엘을 태운 마차는 왕궁에서 벗어나 테헤란 시내를 가로질렀다.
로엘의 지지율이 하도 높다 보니 거리마다 백성들이 줄지어 서서 꽃잎을 흩뿌렸다.
“국왕 전하 만세!”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전하!”
로얄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이동하는 마차 안에서 메이아가 입을 열었다.
“제가 생각해도 전하의 행차치고는 많이 초라한 것 같아요.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너희는 일일이 이유를 따져야 직성이 풀리냐?”
“네?”
“이유 같은 거 없어. 다른 녀석들을 동행하면 쓸데없는 짓을 해대서 귀찮으니까 놔두고 온 거야.”
로엘이 군비축소를 주장하려한다는 걸 알면 그란데 백작이나 라이너리 백작이 왜곡하여 받아들일 게 분명했다.
로엘의 뜻을 제멋대로 해석해서 멋대로 행동할 게 뻔한데 뭐 하러 데려가겠는가.
덤으로 케시어에 가는 동안 느긋한 기분을 맛보고 싶었다.
무리가 커지면 시끄러워진다는 것도 행차 규모를 줄인 이유 중 하나였다.
테헤란을 벗어나자마자 한적한 들판이 펼쳐졌다.
로엘은 마차 창문 너머로 펼쳐진 들판을 한가로이 바라보며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후음~, 모처럼 왕궁을 벗어났는데 바로 케시어로 가긴 아깝네. 관광지에 들렸다 가자.”
“저기... 중요한 회담을 하러 가는 거 아니었나요? 준비도 엄청 많이 하시던데.”
“그거 일부러 빡세게 한 거야. 준비를 마쳐둬야 가는 동안 놀 수 있으니까.”
“그래도 노는 건 좀......”
“나만 노는 게 아니라 너도 놀아야 해.”
“네? 저도요?”
“당연하잖아. 항상 날 챙기느라 고생하잖아. 포상휴가 받은 셈치고 같이 돌아다니자.”
평소에는 로엘에게 엄한 메이아지만 이번만큼은 마음이 흔들렸다.
‘같이 돌아다니자니. 나랑 둘이서 돌아다니려고 일부러 다른 분들을 떨어뜨린 거려나.’
메이아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대답을 하였다.
“어, 어쩔 수 없네요. 고생하셨으니까 이번만 특별히 허락하는 거예요.”
“하하, 역시 좋아할 줄 알았어.”
“딱히 좋아하진 않았거든요? 어쩔 수 없이 어울려 드리는 거라고요.”
“하여간 솔직하지 못한 건 바뀌지가 않는구만. 머릿속에 예쁜 말 회로라곤 조금도 없다니까.”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던 로엘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로얄 기사단장에게 행선지를 바꾸라 명하였다.
로얄 기사단장 더프는 의아해하면서도 로엘의 명령에 따라 북동쪽이 아닌 북쪽 길을 택했다.
로엘을 태운 마차는 과일과 초콜릿으로 유명한 드리안 공작령으로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