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3 3. 성군이시구나! =========================
3. 성군이시구나!
세상의 어느 누가 대관식을 3번이나 겪어볼까?
2번까지는 몰라도 3번이나 왕의 자리에 올라본 사람은 아무도 없으리라.
로엘은 자신이 3번씩이나 대관식을 치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관식은 화려하기 그지없었지만 3번째쯤 되니 지루하다 못해 하품이 나올 정도였다. 지루한 대관식 이후에는 으레 그렇듯이 국내 귀족과 타 왕국의 사절단이 진귀한 선물을 가져오는 시간이 되었다.
로엘은 왕좌에 앉아 총무대신인 라이너리 백작이 불러주는 선물명단을 들어야만 했다.
“다음은 킬더 왕국에서 보낸......”
‘빙하의 목걸이.’
“빙하의 목걸이입니다. 그리고 다음은 남쪽의 케이델 공작이 보낸......”
값비싼 선물들이지만 정작 실제로 쓸 법한 건 갑옷이나 검, 마법물품들 뿐이었다. 그마저도 싸울 때나 쓰는 물건들이라서 전쟁을 하지 않으려는 로엘에겐 필요가 없었다.
로엘은 무의미한 시간이라 여겨 라이너리 백작을 물렸다.
“선물 확인은 됐으니까 죄다 창고에 넣어둬.”
“아, 네. 알겠습니다.”
라이너리 백작을 물린 로엘은 왕좌에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겼다.
‘왕이 되려고 하지 않았는데도 왕이 되어버렸어. 어디서부터 꼬인 걸까?’
그란데 백작이야 충성심이 강해서 왕위계승을 찬성했다고 쳐도 클라임 후작까지 찬성하고 나설 줄은 몰랐다. 이제 막 왕이 된 뒤라서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지만 지금쯤 자신의 저택에서 로엘을 무너뜨릴 방법을 찾고 있을 게 분명했다.
이래서 왕이 되고 싶지 않았다.
왕이 되면 적이 한가득 생기니까.
클라임 후작은 물론이고 북쪽 변방, 남쪽 변방, 동쪽 변방을 지키고 있는 3공작, 호시탐탐 빌로스 왕국을 노리고 있는 남쪽 국경 너머의 브리니아 왕국까지.
회귀 전의 경험을 이용하면 모두 정리할 수 있지만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필요했다. 다시 그 짓거리를 반복하는 건 사양하고 싶다.
그러려면 이 골치 아픈 왕위에서 벗어나야하는데 합당한 명분이 떠오르지 않았다.
‘왕위에서 물러나려면 명분이 필요해. 뭐 적당한 거 없으려나.’
대관식까지 치른 마당에 막무가내로 그만둘 순 없었다. 그렇다면 모두가 납득할 만한 명분을 만듦과 동시에 로엘이 받을 원망은 최소한으로 만들고, 남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야만 했다. 하지만 그리 형편 좋게 명분이 만들어 질 리 없지 않은가.
달리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가운데 메이아가 로엘을 찾아왔다.
“전하. 회의장에 드실 시간이세요.”
“벌써 그렇게 됐어?”
“다른 분들은 이미 모두 참석해서 기다리고 계세요.”
“지겹구만. 별로 참석하고 싶지 않은데 말이지.”
“어휴, 왕이 되신 이후에 첫 회의시잖아요. 왕자 때보다 훨씬 더 위엄을 보이셔야죠.”
“그래그래, 왕이 되었으니 할 일은 해야겠지.”
로엘은 왕좌에서 일어나 회의장으로 향했다.
얼마 전 긴급회의 때와 마찬가지로 그때와 똑같은 인물, 똑같은 배치로 모두가 앉아있었다. 왕에겐 의회의 3분의 1을 자기가 원하는 사람으로 채워 넣을 수 있는 권리가 있어서 왕이 되면 의회개편을 하는 편이었지만 로엘은 아무도 바꾸지 않았다. 의원을 바꾼다는 건 측근 정리를 해야 한다는 건데 그 또한 정치놀음이기에 귀찮아서 그대로 유지한 것이었다.
귀족들은 로엘이 들어오자 일제히 일어나선 고개를 숙였다.
“국왕 전하를 뵙습니다.”
로엘은 가볍게 손을 저어 인사를 받아주곤 상석에 앉았다.
여전히 의회장의 직책을 유지하게 된 클라임 후작이 초장부터 로엘을 띄워주었다.
“전하, 대관식을 치르고 나시니 한층 더 위엄이 돋보이십니다.”
입 발린 소리란 걸 아는 로엘이기에 단칼에 빈 소리를 잘라냈다.
“한 것도 없는데 위엄은 무슨. 왕관 하나 썼다고 없던 위엄이 생깁니까? 됐고 얼른 의제나 말하세요.”
클라임 후작은 무안한 나머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요즘 따라 로엘이 너무나 바뀌어서 속이라도 떠본답시고 빈 말을 던져본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 이상으로 매몰찬 대답이 돌아오니 이해는 이해대로 안 되고 창피는 창피대로 당하게 되었다.
‘왕이 되더니 더 건방져졌군. 기다려 봐라. 조만간 큰 코 다치게 될 거다.’
반면 반대편 의석에 앉아 있던 그란데 백작은 웃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썼다. 유려한 말솜씨로 상대를 꼼짝 못하게 만들던 예전의 로엘도 좋지만 지금처럼 시원하게 하고 싶은 말하는 로엘도 나쁘지 않았다. 항상 로엘에게 면박을 주려고 하는 클라임 후작이 역으로 당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미소가 번지려고 했다.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로 늠름해지셨군요. 저 클라임 후작을 꼼짝도 못하게 만들다니 정말 왕이 되셨다는 게 느껴집니다, 전하.’
각자의 생각이 교차하던 중에 클라임 후작이 목을 가다듬으며 의제를 꺼냈다.
“흠흠, 가장 먼저 세금에 관한 논의를 하겠습니다. 금년에는 풍년이 들어서 수확량이 작년보다 3할 증가했습니다. 밀 시세가 폭락할 우려가 있으니 각 영지에서 세금을 1할 더 걷기로 하고 그리해도 밀의 양이 남아돌면 예산을 풀어 밀을 사들이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왕위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그렇지 능력만 따지면 클라임 후작도 범재 이상은 되는 편이었다. 그의 의견에 트집 잡을 구석은 하나도 없었다.
로엘은 따로 생각할 것도 없이 클라임 후작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제 생각도 똑같으니 그리 진행하세요.”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클라임 후작의 의견은 정석에 가까웠기에 더 나은 방법은 찾기 어려웠다. 로엘이 별다른 잡음 없이 동의했으니 나머지는 물어볼 것도 없었다.
클라임 후작은 로엘이 왕이 되자마자 자신의 의견을 통하게 했다는 생각에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전하의 첫 회의 첫 안건에 큰 보탬이 되었군요. 허허, 신하된 자로서 기쁘지 그지없습니다. 그러면 내일 각 영지에 전령을 보내어 왕명을 받들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큰 보탬까지는 아니니까 빨리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시죠.”
연이은 면박에 클라임 후작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애서 웃는 얼굴을 유지하려고 애 쓰는 게 훤히 들여다보였다.
“크, 크허허. 왕이 되시더니 아주 호탕해지셨습니다. 전하의 바람을 따라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겠습니다. 서쪽 바다를 이용하는 상인들이 설탕의 수출량 한계치를 풀어달라며 관할 영주를 통해 요청을 해왔습니다. 사탕을 생산하던 무니엘 영지가 사탕사업을 접으면서 대량의 재고가 발생한 모양입니다.”
무니엘 영지의 설탕대란 사건은 로엘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무니엘 백작 가의 가주가 바뀌면서 대대로 이어오던 사탕사업을 접고 대량의 설탕을 시중에 풀어버린 사건이었다. 빌로스 왕국 서쪽지방 전체에 사탕을 공급할 정도로 규모가 큰 사업이었던지라 가지고 있던 설탕의 양이 대형 창고 10개를 가득 채울 정도였다. 거기에 올해는 풍년이라 설탕생산량이 대폭 늘어난 것도 설탕시세 폭락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로인해 가장 큰 손해를 본 이들이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상인들이었다. 작년의 판매량을 토대로 설탕을 잔뜩 수입해왔는데 갑자기 시세가 떨어져 큰 손해를 보게 된 것이었다. 손해를 조금이라도 메우려면 도로 수출을 해야 했는데 설탕은 수출제한품목인지라 팔 수 있는 양에 한계가 있어 왕궁에 청원을 올린 것이었다.
클라임 후작은 이번에도 자신의 의견을 먼저 밝혔다.
“수출한계량을 풀어주되 대형선박을 이용하고 충분한 호위병력을 갖출 경우에만 관세를 낮춰줘야 합니다. 운반비용을 아끼려고 중형선박에 과다적재 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데다 요즘 해적의 숫자가 늘었다는 보고가 끊이질 않고 있으니 말입니다.”
현재 클라임 후작은 지금까지 거론된 두 안건을 해결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로엘의 생각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중이었다.
로엘에게 있어 이 두 안건은 충분히 이용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어디에 이용하냐고?
당연히 왕위에서 물러날 명분을 만드는데 이용한다는 것 아니겠는가!
잠시 뜸을 들이던 로엘이 이내 입을 열었다.
“생각해보니까 별로 좋은 의견은 아니군요.”
“수출한계량을 풀어주는 부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대형선박 부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첫 번째 안건을 말하는 겁니다. 지금 안건은 제쳐두기로 하고 처음 안건으로 돌아가도록 하죠.”
“네? 세금 문제부터 다시 논의하잔 말씀이십니까?”
로엘은 깍지 낀 손에 턱을 당기며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세금을 1할만 올리는 게 아니라 3할까지 확 올리도록 합시다.”
세금을 대폭 상승하자는 말에 귀족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곤 국왕파 클라임 파 할 것 없이 모두가 극구 반대에 나섰다.
“아니 될 말씀이십니다! 아무리 풍년이라지만 세금을 3할이나 올린다니요.”
“3할이나 올리면 백성들 손에 남는 건 평범한 해의 수확량 때와 같습니다.”
“모두가 살림살이 하나 더 얹는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걸 세금으로 거둬버리면 원성을 사게 될 것입니다.”
모두가 학을 떼고 있었지만 로엘은 여유만만이었다.
세금을 올리면 당연히 백성들은 불만이 쌓일 수밖에 없다. 로엘은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거둔 세금으로 시세가 왕창 폭락한 설탕을 마구 사들일 셈이었다. 어차피 설탕 시세는 한 달 뒤에 갑자기 설탕도넛이 유행하게 되어 시세가 폭등할 예정이었다.
즉, 얼토당토않아 보이는 정책을 내세운 다음 왕의 중압감을 못 이겨내겠다는 명분을 만들 셈이었다. 당장은 욕을 먹겠지만 빠르게 클라임 후작에게 왕위를 넘겨준 다음 왕궁을 떠나면 설탕 시세가 오를 테니 국고는 국고대로 가득 차고, 클라임 후작은 막대한 이익을 백성에게 도로 베풀어 왕의 자리를 굳혀갈 것이며, 이미 왕위에서 물러난 로엘은 미래를 내다본 선견자로 재평가될 것이다.
로엘이 한동안만 욕을 먹으면 누구도 손해 보지 않고 왕위를 교체할 수 있었다.
로엘은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명안이라 여기며 막무가내로 세금인상을 강요했다.
“왕이 되어 첫 결정부터 신하들이 이리도 반대할 줄은 몰랐습니다! 얼마 전 긴급회의에서 모두가 충신이 되었다는 말은 거짓이었습니까?”
반대의 말을 꺼내려던 클라임 후작은 현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흘러감을 깨달았다.
‘잠깐만. 이거 굳이 반대할 필요가 없잖아? 풍년이니까 착취랄 정도의 세금인 것도 아니고 어차피 욕은 로엘이 먹을 테니까 이걸 빌미로 탄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왕이 된 직후라도 합당한 명분만 있으면 3공작 중 2명, 의회의 3분의 2가 찬성하면 국왕을 끌어내릴 수 있었다.
클라임 후작은 야욕이 새어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아내며 헛기침을 하였다.
“흠흠, 국왕 전하께서도 다 생각이 있어서 하신 말씀이시겠지요. 잘 생각해보니 풍년일 때 세금을 좀 더 걷어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드디어 제대로 원하는대로 반응해주는 클라임 후작 덕분에 로엘도 속으로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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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세금은 3할 더 올려서 받으라는 왕명이 영지 곳곳에 전해졌다.
각 영지의 영주들은 왕명에 따라 각 마을 촌장들에게 세금을 올린 사실을 전해주었다. 그러자 각 영주의 저택마다 영지 소속의 마을 촌장들이 몰려들었다.
“영주님 이게 어찌된 일이란 말입니까? 세금을 3할이나 올리시다니요.”
“마을사람들 전원이 이래저래 불만이 많습니다. 세금문제를 재고해주십시오.”
“이래서야 풍년이 풍년인 게 아닙니다. 풍년으로 더 수확한 만큼 더 가시면 이게 어찌 풍년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마을을 대표하여 온 촌장들의 탄식에 각 영지의 영주들이 할 수 있는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나라고 욕심이 생겨 세금을 올렸겠느냐. 왕명인지라 나도 어찌할 수가 없구나.”
영주의 말은 촌장에게로, 촌장에서 마을사람들에게로 전해져서 모두가 세금상승의 원인이 로엘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문제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막상 울며 겨자 먹기로 세금을 내고나니 더 황당한 소문이 왕국 전체에 퍼졌다.
‘국왕 전하께서 올해 거둔 막대한 세금으로 상인들의 설탕을 죄다 사들이고 계신다!’
서쪽 바다에서 폭락한 설탕을 수출하기 위해 대기 중이던 상인들을 왕궁으로 불러 설탕을 모두 샀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낮게 책정된 설탕 가격보다 조금 더 비싸게 사들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기껏 세금을 냈더니 엉뚱한 곳에 낭비하자 백성들의 불만이 하늘을 찌를 듯 쌓이게 되었다.
“아이고, 영특한 왕자님이 왕이 되어 기뻐했건만 왕이 되자마자 이러실 줄이야!”
“내 밀이 전부 필요 없는 설탕이 되었구나! 국왕께서 당이 필요하신가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이오!”
“왕궁 의회에 대인들이 있다면 결코 이번 일을 가만히 넘어가선 안 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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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엘의 부름을 받고 왕궁에 들린 에메랄드 상인조합의 상인들은 자신들이 가져온 설탕의 양을 알렸다.
“분부대로 선박에 실을 예정이었던 300자루의 설탕을 모두 가져왔습니다.”
왕좌에 앉아 있던 로엘은 거칠 것 없이 가격을 책정했다.
“자루 당 10골드에 모두 사들이겠다.”
시세가 자루 당 9골드인데 1골드나 더 얹어주는 것이었다.
상인들은 기쁜 나머지 입가에 웃음이 가시질 않았다. 이미 다른 상인조합의 상인들이 가격을 더 얹어서 받았다는 걸 들었지만 실제로 로엘의 말을 들으니 기쁘지 그지없었다.
“감사합니다, 전하. 선박에 실었다면 반드시를 손해를 보았을 텐데 전하께서 이리 은총을 베풀어주셔서 살았습니다.”
안 그래도 12골드에 샀던 것이 9골드까지 폭락한데다 선박으로 운반하면 비용이 더 많이 들어서 상인조합이 무너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차에 나라에서 비싸게 매입해주니 죽다 살아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로엘은 별 거 아니라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인사는 됐으니 값을 지불 받으러 가도록.”
“전하의 은총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음? 말해봐라.”
“지금 설탕을 매입하시는 자금은 세금을 올려서 마련한 걸로 아옵니다. 저의 우둔한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아 그런데 전하의 높은 뜻을 알려주시지 않으시렵니까?”
상인들 입장에서는 부도의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어 기쁜 와중에도 궁금증 때문에 버틸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떤 이유로 설탕을 사들이고 있단 말인가.
밀이라면 군량미로라도 쓸 수나 있지 설탕은 기호식품이라 따로 쓸 구석이 거의 없다.
상인들의 궁금증을 두고 로엘은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단순한 짐의 변덕일 뿐이니 그대들은 깊게 생각하지 말고 생업에 전념하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전하, 이 은혜는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상인들이 돌아간 후, 로엘은 머릿속으로 셈을 하였다.
‘벌써 상인조합 10군데가 다녀갔으니까 그들이 설탕을 팔았다는 소문을 더 널리 퍼트려주겠군. 이제 세금도 필요한 만큼만 남았으니까 클라임 후작이 의회소집을 요청하겠지?’
더 이상 설탕을 사들일 생각은 없지만 남들이 보기엔 더 사들이려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여기서 더 사들이면 내년에 쓸 예산까지 없어지게 되니 긴급의회를 요청할 게 분명하다.
긴급의회가 열리면 드디어 그 말을 꺼낼 수 있게 된다.
국왕의 중압감을 못 버티겠습니다.
이 한 마디면 클라임 후작은 좋다고 탄핵을 추진할 거다.
로엘은 드디어 이 지겨운 왕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상인들아 더욱 더 소문을 퍼트려라! 드디어 빈둥거리며 살 수 있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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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되면 산이나 숲에서 지내던 몬스터들이 먹을거리가 풍부한 마을을 종종 습격하곤 한다. 고블린이나 놀 정도의 하급 몬스터라면 모를까 오크 수준만 되어도 마을 경비대로는 막을 수가 없었다.
마을이 습격 받으면 영주가 기사단을 보내주지만 영지 외곽에 있는 마을들은 그 혜택을 받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상당히 많은 마을이 가을 때마다 몬스터의 습격을 걱정해야했다.
막 왕궁에 설탕을 팔고 남쪽으로 내려가던 상인 블린트는 어느 작은 마을을 지나치던 중 무언가를 발견했다.
“저 마을에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 너희들도 보이느냐?”
블린트에게 고용된 실버급 용병들이 손 우산을 만들며 마을 쪽을 응시했다. 마을 안에 오크 무리가 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어르신! 마을이 오크 무리에게 습격을 받고 있습니다!”
“그거 큰일이군! 얼른 가서 도와주자구나!”
“네!”
실버급 용병쯤 되면 최소 마나유저 초급, 3써클 마법사는 되기 때문에 오크 정도는 무리 없이 처리할 수 있었다.
블린트의 용병들은 즉시 마을로 달려가 마을을 습격한 오크 무리를 쫓아내주었다.
하마터면 봉변을 당할 뻔했던 마을사람들은 블린트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하였다.
“정말로 고맙습니다. 당신이 아니었으면 마을 전체가 쑥대밭이 될 뻔했습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다친 사람이 없는 게 천만다행이군요.”
“마을의 은인께 대접을 해드리고 싶으니 오늘 하루는 여기서 묵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하, 마음만 받겠습니다. 다음 주까지 리웬에 내려가서 물건을 받아야 해서 말입니다.”
“물건이라면 혹시 상인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블린트가 상인이라는 걸 알자마자 마을사람들의 눈빛이 바뀌었다. 방금까지는 마을의 은인이었다면 지금은 원망으로 가득한 눈빛이었다.
블린트는 이유를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저도 모르게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던 촌장이 금세 정신을 차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실례했습니다. 요즘 국왕 전하께서 하시는 일 때문에 상인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습니다. 물론 은인께서는 좋은 분인 걸 알고 있으니 보답을 해드리고 싶군요.”
촌장의 말을 들은 블린트는 속으로 아차 싶었다.
국왕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게 상인들에게까지 옮겨갈 줄은 몰랐다. 신용과 입소문으로 먹고 사는 상인에게 있어 지금 사태는 결코 좋지 않았다. 파산하는 걸 막은 대신 눈총 받으며 살아야 할 처지에 놓인 것이었다.
‘내가 저들에게 은인인 것처럼 국왕전하도 내게 있어 은인이지 않은가. 국왕전하께 도움이 되면서도 상인들에 대한 인식을 바꿀 방법이 없을까?’
블린트도 제법 수완 좋은 상인에 속한다.
고민 끝에 블린트는 좋은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다.
“촌장님. 사실 국왕전하께서 상인들을 도우신 것엔 모두 이유가 있습니다.”
세금을 낸 이후로 로엘을 안 좋게만 보던 마을사람들이 이유가 있다는 말에 의아해하였다.
“대체 어떤 이유가 있다는 겁니까?”
“여러분들처럼 영지 외곽에 있는 마을들은 항상 몬스터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지 않습니까? 국왕전하께선 우리 상인들에게 적극적으로 마을을 도우라 하셨습니다. 아시다시피 저희 상인들은 실력 좋은 용병들을 데리고 왕국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으니까요.”
블린트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최고의 명안이었다.
사실 로엘의 명령 같은 건 없었지만 블린트가 모든 상인조합에 건의를 하면 빌로스 왕국 내에 있는 모든 상인들이 마을외곽을 거쳐서 돌아다니게 될 것이다.
상인입장에선 발품 좀 더 팔아서 로엘에게 은혜를 갚을 수 있고, 백성들은 세금을 좀 더 낸 대신 가을을 안전하게 보낼 수 있게 된다.
중요한 건 로엘 본인도 명성을 회복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좋은(?) 방법이란 말인가.
이것이야 말로 일석삼조라 할 수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불만에 절어 있던 표정을 풀고 금세 로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오오!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그런 얘기가 오가고 있었구나!”
“괜히 세금을 많이 걷어간 게 아니었어. 모든 게 백성을 위한 지시였던 거야. 올해 가을은 몬스터 걱정 없이 지낼 수 있다고!”
“이런 속사정이 있는 줄도 모르고 국왕전하를 폄하하려 했다니. 우리는 정말 바보 같은 백성들이야.”
“전하께서야 말로 성군이시구나!”
///
“전하. 세금을 올린 이유가 있었군요. 정말 감복했습니다.”
아침 댓바람부터 부리나케 찾아와선 혼자 감탄하고 있는 그란데 백작의 행동에 로엘은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부터 무슨 소리야?”
“전하께서 가장 잘 알고계시지 않습니까. 설마 상인들을 파산에서 구해냄과 동시에 그들의 발품과 호위용병을 외진 마을의 경비로 이용하다니 정말 감탄했습니다.”
그란데 백작은 수도 남쪽의 마을에서 있었던 일을 로엘에게 보고하였다.
보고를 들은 로엘은 두통이 몰려와 관자놀이를 짚었다.
“그러니까 지금 상인들이 일부러 상행루트에 마을외곽을 집어넣으면서 몬스터 퇴치에 도움을 주고 있다 이거지?”
“네, 매년 몬스터 피해 때문에 골치가 아팠는데 이런 식으로 해결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전하라면 달리 깊은 뜻이 있으리라 여겨 세금인상에 찬성했는데 역시나 깊은 뜻이 있었군요.”
“아니 그냥 상인들이 멋대로 움직이고 있을 뿐이야. 난 아무 것도 한 게 없어.”
“하하하, 왕이 된 분이 겸손은 무슨 겸손입니까. 모두가 전하의 공임을 알고 있으니 숨기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겸손이 아니라 진짜로 내가 의도한 게 아니라니까.”
로엘이 자꾸 의도한 게 아니라고 강조하자 그란데 백작이 정색을 하였다. 이제야 말귀를 알아들었나 싶었는데 정색하며 한다는 말이.
“과연 그렇군요.”
뭔가 또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품새가 영 심상치 않았다.
로엘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은근슬쩍 질문을 날렸다.
“정말로 알아들은 거 맞아?”
“네, 전하의 충신인 제가 아니면 누가 이해하겠습니까. 전하께선 스스로 명예를 추구하지 않으며 모든 공을 백성에게 돌려주려 하시는군요. 국가를 위한 헌신적인 자세. 저도 국가에 이 한 몸 바치리라 맹세했지만 전하에 비하면 아직 멀었습니다.”
아무리 말해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그란데 백작의 태도에 로엘은 더 이상 말 꺼내기가 무서웠다. 아마 그란데 백작은 로엘이 바보흉내를 내더라도 깊은 뜻이 있을 거라며 곁에서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할 거다.
그란데 백작의 연이은 감탄과 존경의 말이 쏟아지는 가운데 로엘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
클라임 후작의 저택 서재 안.
클라임 후작은 각종 편지와 서류를 뒤적이면서 웃음을 흘렸다.
“흐흐, 이번에는 빠져나갈 틈 하나 없이 완벽하게 준비됐군.”
로엘이 설탕을 매입할 때부터 이건 긴급회의감이라 여겨 그때를 위해 밤낮 가리지 않고 준비를 해왔다. 벌써 사흘 동안 밤을 샌 탓에 클라임 후작의 눈 밑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물론 로엘도 바보는 아니니 계산 하에 이루어진 행동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설탕을 매입한 건 도가 지나치다.
그래서 클라임 후작은 생각했다.
설마 로엘이 저번에 왕위계승을 포기하겠다고 한 말이 진짜인 게 아닐까 하고.
그렇다면 클라임 후작은 얻을 수 있는 왕좌를 스스로 걷어찬 셈이 되지만 아직 기회는 남아있었다. 이번에 로엘이 일부러 국왕탄핵을 위한 명분을 만들어주지 않았던가. 그리 생각하면 모든 게 앞뒤가 맞아떨어졌다.
클라임 후작은 요 사흘간 타국의 상인조합에게 연락을 취해 매입한 설탕을 최소한의 피해로 처분할 길을 만들었고, 긴급회의가 소집될 경우에 말할 연설문까지 만들었다.
몸은 피곤하지만 왕위가 눈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피로가 싹 가시는 듯했다.
클라임 후작은 긴급회의 때 쓸 모든 자료를 통합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하구나 로엘아. 이 숙부를 위해서 그리 노력했건만 내가 알아주질 못했구나. 크하하!”
왕위를 넘겨받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 한바탕 웃고 있는데 바깥에서 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님 니베르 백작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들여보낼까요?”
“이런 아침부터 니베르 백작이 무슨 일로 왔지? 일단 들여보내라.”
잠시 후, 문이 열리면서 니베르 백작이 서재 안으로 들어왔다.
니베르 백작은 급하게 왔는지 다소 숨이 흐트러진 상태로 예를 갖추었다.
“후우, 후작님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무슨 소식 말인가? 여러 모로 바빠서 자잘한 소식은 듣지 못했네만.”
“국왕전하께서 설탕을 매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상인들의 파산을 막아주는 대신 그들의 용병으로 부족했던 가을 치안에 보탬이 되도록 지시를 했다고 합니다.”
“그런 수가 있었구나!”
누가 손해로만 보이는 설탕 매입에 숨겨진 수가 있다고 생각했겠는가.
클라임 후작으로선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대담한 수법이었다.
철썩 같이 왕위를 포기하려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는 걸 알자 사흘 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클라임 후작은 의자에 철썩 주저앉으며 한탄하듯 말했다.
“허! 내 사흘은 대체......”
왕위를 포기한다는 말은 역시 거짓말이었다.
로엘은 전력을 다해 국왕의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왕위계승 때부터 포석이 깔려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클라임 후작으로 하여금 왕위를 포기하려는 건지 지키려는 건가 헷갈리게 하려고 말이다.
이번 일로 클라임 후작은 로엘의 태도를 명확히 해둘 수 있었다.
“로엘은 절대로 왕위를 포기하지 않아. 크윽, 분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로엘이 한 수 위로군.”
“왕위를 포기하실 겁니까?”
“그럴 리가! 다만 이번 일로 로엘의 인기가 높이 치솟을 것이야. 로엘은 또 우리를 휘두르려고 이해할 수 없는 짓을 할지도 모르지. 당분간은 로엘의 신뢰를 쌓기 위해 충실히 받드는 게 좋겠어. 정말로 로엘이 방심할 때를 기다리는 거다.”
“네, 알겠습니다. 다른 귀족들에게도 그리 알려두겠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왕궁에 출석하실 겁니까?”
“오늘은 쉬고 싶으니 참석하지 않겠다.”
“네. 그럼 편안히 쉬십시오.”
니베르 백작이 나간 후, 클라임 후작은 침실로 돌아가 침대에 몸을 파묻었다. 그리곤 이불조차 덮지 않은 채 서서히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손 하나 까딱 안하고 지쳐 쓰러지게 만들다니... 정말 지독한 놈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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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후에 상인들이 왕궁을 찾아왔다.
그들은 로엘에게 줄 선물을 들고 왔다.
“전하! 전하의 은총으로 파산을 막고 그 자금으로 막대한 이익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이대로 그냥 넘어가는 건 도리가 아니다 싶어 선물을 준비해왔으니 받아주십시오!”
여러 상인조합의 대표로 온 블린트가 엎드린 채로 두 손을 내밀었다. 블린트의 손 위에는 작은 나무상자가 올려져 있었다.
블린트는 나무상자를 열어 내용물을 보여주었는데 나무상자 안에는 적, 녹, 청색의 환약 3개가 들어있었다.
용암이슬, 천년단풍의 수액, 해양석이라는 마나덩어리 물건들을 이용해서 만든 비약들로 하나하나가 30년치 마나를 담고 있는 명약이었다.
“하니온 왕국에서 공수해온 3색 비약입니다. 부디 유용하게 사용하시어 마나 익스퍼트의 길에 드시옵소서.”
가이아 대륙에선 마나라는 힘이 있어 마나를 쓰면 월등히 강한 무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마나를 사용하는 부류에는 무기에 마나를 부여하고 스스로의 육체를 강화하는 마나유저, 1클래스에서 10클래스까지 단계별로 성장하여 마법을 쓰는 마법사, 정령을 다루는 정령사 등이 있었다.
로엘은 어릴 때부터 마나의 길에 두각을 내비쳐 스무 살의 나이에 이미 마나유저 상급 수준이 되어있었다. 마나유저 상급이 어느 정도이냐면 빌로스 왕국 안에서도 100명이 채 되지 않는 숫자였다.
마나유저를 뛰어넘는 자를 마나 익스퍼트라 하는데 마나 익스퍼트쯤 되면 인간의 경지를 뛰어넘었다고 볼 수 있었다. 빌로스 왕국에서는 남쪽의 케이델 공작과 북쪽의 드리안 공작, 로엘의 측근인 그란데 백작 이 3명이 전부였다.
로엘은 3색 비약을 눈앞에 두고 생각에 잠겼다.
‘저거 먹으면 진짜로 마나 익스퍼트 될 것 같은데.’
이전 생애에서 마나 익스퍼트까지 올라본 적이 있었기에 마나만 있으면 지금도 충분히 경지를 끌어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리 되면 그란데 백작이 전쟁을 하자고 난리를 칠 게 분명했다.
로엘로선 절대로 받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대들이 각 영지의 치안에 보탬이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것만으로도 짐은 충분히 기쁘니 선물은 그대들이 도로 가져가도록 해라.”
“전하! 전하께 보답하기 위해서 하니온 왕국까지 달려가 어렵게 가져왔는데 전하가 아니면 이 물건을 누가 감히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어렵게 가져왔습니다. 정말로 말입니다.”
상인들은 반드시 로엘에게 3색 비약을 주고 싶었다.
안 그래도 로엘의 주가가 치솟고 있는 마당에 상인들이 로엘에게 보은을 했다는 소문이 나면 도리를 아는 상인들이라 하여 신용이 치솟을 게 분명했다.
힘들게 구했다는 말을 강조하니 로엘로서도 정말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후우, 그냥 받기만 하고 먹지는 말자. 받는 것 정도는 상관없겠지.’
“그대들의 마음을 생각하여 받도록 하마. 하지만 이걸로 짐과 그대들 사이에 빚은 없으니 더 이상 보은을 하려하진 말거라.”
“감사합니다 전하!”
라이너리 백작이 3색 비약이 담긴 나무상자를 전해 받았고, 상인들은 그 길로 물러났다.
라이너리 백작은 자기 일인양 기뻐해주었다.
“무려 3색 비약을 가져다주다니 사람 된 도리를 아는 상인들이로군요. 3색 비약은 당장 왕궁의원에게 보내 전하께서 드실 수 있도록 탕을 만들겠습니다.”
“창고에 넣어놔. 즉위 선물로 받은 선물 사이에 아주 깊숙이 넣어놔.”
“드시지 않는 겁니까? 무려 3색 비약입니다. 90년치 마나를 흡수하실 수 있다고요.”
“라이너리 백작.”
“네.”
“왕명이다. 창고에 넣어놔.”
왕명까지 거론된 이상 라이너리 백작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조아리며 나갔다.
로엘은 또다시 두통이 몰려와 관자놀이를 짚었다.
“하아, 내 방법이 잘못된 건가. 어떻게든 왕위에 머물게 되는군.”
이리된 이상 왕위는 유지하되 새로운 방법을 모색할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대륙 통일만 안하면 회귀할 일도 없으니까 전쟁을 하지 않는 쪽으로 생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생각에 잠겨 있던 도중 로엘은 무언가 잊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뭔가 깜빡한 것 같은데......”
잊은 것을 떠올리려고 기억을 뒤지던 중 로엘은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아 맞다! 설탕!”
다음 달엔 설탕값이 다시 오르지 않는가!
지금쯤 탄핵이 진행되고 있어야하는데 일이 꼬인 나머지 설탕값이 오를 때가 다되도록 왕위에 남아있었다.
로엘은 두통이 더욱 심해지는 걸 느끼며 왕좌에 주저앉았다.
“아고, 머리야. 설탕값 오르면 또 무슨 소리가 나올지...... 이젠 나도 모르겠다.”
시간이 흘러 설탕값이 올랐을 때.
라이너리 백작의 주도 하에 설탕을 시장에 되팔았고, 국고는 그 어느 때보다 흘러넘치게 되었다. 그리고 로엘은 미래를 예지할 줄 아는 시대의 선구자로 찬양 받음과 동시에 왕궁의원에게 가서 두통약을 처방받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