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211화 (211/211)

* * *

파이엔에 오고 일 년이 조금 더 지났을 때 남자는 처음으로 동료라는 것을 얻었다.

물론 그 전에도 함께 싸운 자들은 제법 많았지만, 그건 그냥 싸움 한 번 같이 한 사이 정도에 불과했다.

게임으로 치자면 공개방에서 두어 판 게임 같이한 게 전부인 사람들이랄까.

동료.

서로의 등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들.

신뢰라는 감정을 키울 수 있는 사람들.

남자의 첫 동료는 엘프였다.

그것도 남자가 아니라 여자 엘프였고, 굳이 첨언하자면 엄청나게 예뻤다.

이름은 크리스 폰 크리사오르.

직업은 성기사.

‘흑흑, 들러붙길 잘했어.’

남자와 크리스의 첫 만남은 어찌보면 운명적이라 할 수 있었다.

무사수행 중이던 크리스가 참여한 몬스터 토벌에 모험가들이 스무 명 가량 참가했는데, 남자는 그 스무 명 가운데 하나였다.

사실 남자는 딱히 크리스에게 껄떡대거나 들러붙지 않았다.

밝히긴 해도 소심한 남자인 터라 그냥 들키지 않을 정도로 쳐다보는 것이 전부였다. 먼저 말을 걸거나 함께 모험을 하자고 제의하는 일 같은 건 상상도 하지 못-하지는 않고 열심히 상상만 하였다.

‘아이는 둘만 낳읍시다.’

상상 속에서는 이미 크리스와 이렇고 저런 일들을 거쳐 결혼까지 한 남자였다.

하지만 다행히 남자는 현실과 망상을 구분할 줄 알았다.

때문에 남자는 여전히 크리스를 열심히 쳐다만 보았지 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그런 남자와 크리스가 동료가 된 이유는 처음 말한 것처럼 운명적인 사건 때문이었다.

“살아남은 건 그대와 나뿐인가.”

예상보다 몬스터들의 숫자가 많았다.

알선 업자가 싼 값에 부려먹으려고 사기를 쳤든가, 역시나 돈을 아끼기 위해 사전 조사를 게을리 했거나, 몬스터들이 인간들을 엿 먹이기 위해 함정을 쳤든가- 어느 쪽이든 사건은 일어났고, 그 결과 살아남은 것은 남자와 크리스뿐이었다.

온 몸에 몬스터들의 피를 뒤집어 쓴 채 헐떡이는 크리스를 보며 남자는 생각했다.

‘예쁘다.’

이 와중에도 예쁘다니 대체 얼마나 예쁜 거야.

약간의 정신적 도피였다.

지난 일 년간 제법 수라장들을 돌파해온 남자였지만 이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 싸움은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하여 고맙다.”

“네?”

크리스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남자가 되물었지만 크리스는 얼굴을 한 번 붉히더니 이내 흥 소리를 내며 다른 말을 하였다.

“듣지 못 했다면 되었다. 아무튼··· 어서 돌아가자. 피 냄새를 맡고 짐승들이 몰려올 수도 있으니.”

“어, 네. 서두르죠.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남자는 정말로 앞장서서 나아갔고, 그런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크리스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지켜주어 고맙다.’

결정적인 순간 남자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크리스 자신은 죽었을 테니까.

‘은혜를 갚을 때까지는 함께 다녀야겠어.’

성기사가, 더욱이 엘프인 자신이 은혜를 잊어서는 아니 되었으니까.

“오늘의 싸움은 나쁘지 않았다.”

“네? 이렇게 많이 죽었는데요?”

“아,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그대와 내가 서로의 등을 지켜준 싸움이······.”

“덕분에 살았습니다. 정말 감사해요.”

“그, 그런가? 흠흠. 나도 감사한다. 그래서 말인데······.”

크리스는 한 동안 함께 다니자는 말을 돌려돌려 말했고, 한참을 이해하지 못 해 말을 함께 돌리던 남자는 크리스가 살짝 화를 냈을 즈음에서야 그녀의 진의를 이해했다.

“동료가 되자고요?”

“그렇다! 함께 다니자 이 말이다!”

“저야 좋죠!”

‘흑흑, 이제야 겨우 판타지다워졌네.’

사나이의 눈물을 흘린 남자는 크리스를 꽉 끌어안았고, 크리스는 남자의 품 안에서 버둥거리는 대신 얼굴을 붉혔다.

파이엔에 오고 일 년.

남자는 엘프 성기사 크리스 폰 크리사오르와 동료가 되었다.

* * *

남자는 크리스와 많은 모험을 함께 했다.

그리고 너무나 당연하게도 크리스를 좋아하게 되었다.

첫 사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영희 좋아한 건 그냥 좋아한 거니까.’

남중 남고를 나온 남자에게 여자를 좋아한 경험은 초등학교 때뿐이었고, 초등학교 4학년의 좋아함은 그냥 좋아함이지 첫사랑이라 하기 애매했으니까.

크리스는 정말로 좋은 동료였다.

단순히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마음까지 예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남자가 크리스를 만났을 때는 이미 파이엔에 온 지 일 년이 넘었을 때였지만, 남자는 파이엔에 제대로 적응한 것이 아니었다. 남자가 진정 파이엔에 적응하기 시작한 것은 크리스를 만난 후였다.

“그것도 모르는가?”

“하, 그대는 정말 상식이 부족하군.”

“나니까 알려주는 거다.”

항상 틱틱 쏘듯이 말했지만 크리스는 정말로 상냥했다.

남자의 무지를 타박하면서도 하나부터 열까지 정성들여 설명해주었으니 말이다.

‘어쩌면 나한테 제법 호감이 있는 건 아닐까? 아니, 아니겠지. 그냥 설명을 좋아하는 거겠지.’

그렇지 않으면 매번 그렇게 틱틱 쏘아대지는 않을 테니까.

만화나 소설에서야 매력적인 츤데레였지만, 현실에서는 그냥 틱틱대는 여자일뿐이라는 사실을 그때의 남자나 크리스는 아직 알지 못 했다.

어찌되었든 크리스 덕분에 파이엔에 본격적으로 적응하기 시작한 남자는 어느 순간 변하기 시작했다.

성격이나 외모, 행동거지가 바뀌었다는 것이 아니었다.

무의 재능이 꽃을 피웠다.

남자는 무서운 속도로 강해졌다.

처음에는 크리스가 훨씬 더 강했지만, 함께 다니기 시작한지 반 년쯤 되었을 때는 남자가 크리스와 호각을 이루었고, 일 년쯤 지났을 때는 그냥 남자가 더 강했다.

‘이러면 은혜를 갚을 수가 없잖아!’

은혜를 갚기는커녕 위험한 싸움이 있을 때마다 갚아야 할 은혜가 늘어났으니까.

‘안 돼, 이대로는 안 돼.’

크리스는 조급함을 느꼈다.

사실 은혜 갚기만 문제인 것이 아니었다.

크리스는 남자가 좋았다.

자신의 감정이 사랑이라는 사실까지는 깨닫지 못 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남자와 계속 함께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 정도는 자각하고 있었다.

남자가 좋은 이유는 외모 때문이 아니었다.

인간들 중에서는 제법 잘생긴 편에 속하는 남자였지만 아쉽게도(?) 크리스는 엘프였다. 남자보다 잘생긴 남자들 사이에서 나고 자란 그녀인 터라 남자의 외모에 크게 끌리지는 않았다.

크리스는 남자의 행동과 마음씀씀이가 좋았다.

‘용사니까요.’

손해 보는 일을 할 때마다, 손해를 감수하며 누군가를 도울 때마다 남자가 변명처럼 덧붙이는 말.

그게 뭐냐며 틱틱 거리긴 했지만 그런 남자가 좋은 크리스였다.

남자같은 남자는 정말로 처음이었으니까.

물론 남자라고 무턱대고 남을 돕는 것은 아니었다. 이해득실을 아예 따지지 않는 것도 아니었고.

하지만 그렇기에 더 좋은 것도 있었다.

현실 감각 없이, 그저 남을 돕는 자신에게 취해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는 것은 정신병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남자는 언제나 선을 지켰다.

그리고 그랬기에 크리스는 남자가 진정 선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더욱 명확히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대로는 아니되었다.

실력 차가 자꾸만 벌어지니 함께 다니고 싶어도 다닐 수가 없었다.

“가르침을··· 청해도 될까?”

결국 크리스는 남자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처음에는 무척 부끄러웠지만, 이내 스스로의 결정을 칭찬했다.

남자와 함께 하는 시간이 훨씬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실력도 늘었고.’

호세사천왕.

크리스가 남자에게 배운 무공의 이름이었다.

* * *

서로 좋아하지만, 옆에서 보면 누구나 알 정도로 서로에게 반해있지만 막상 당사자들은 그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 하는 답답한 상황.

크리스와 남자는 결국 끝까지 함께할 수 없었다.

남자와 크리스의 실력 차가 나날이 벌어진 탓이었다.

‘배워보니 알겠어.’

남자는 괴물이었다.

크리스 자신도 제법 재능이 있는 편이었지만, 천재까지는 아니더라도 수재 소리 듣는 검사였지만 남자는 아예 수준이 달랐다.

천재.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존재.

조급함을 느낀 크리스는 평소보다 더 틱틱거렸고, 결국 스스로 먼저 헤어지자는 말을 입에 담고 말았다.

“지금의 나로서는 그대와 함께 할 수 없다.”

실력을 더 기른 뒤에 찾아가겠다.

그대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다. 단순히 보호받기만 하는 존재이고 싶지 않다.

나름 열렬한 감정을 담아 말했지만 남자는 다른 생각을 했다.

‘흑흑, 조금만 더 친절하게 가르쳐줄걸.’

크리스가 워낙 잘 배우다보니 너무 빡세게 가르친 게 잘못이었다.

조금만 더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면, 조금만 더 여유를 가졌다면!

물론 그래봐야 변할 것은 없었지만 남자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용사라고 떠든 게 문제였나.’

사실 남자 스스로 생각해도 민망한 멘트이기는 했으니까.

어찌되었든 그렇게 크리스는 남자의 곁을 떠났다.

하지만 남자의 모험은 끝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세계를 주유하였고, 많은 이들과 만나고 또 헤어졌다.

남자의 선함에 이끌린 것은 크리스만이 아니었다.

남자는 어느새 세계의 빛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마왕군이라는 어둠 속을 헤매던 이들이 남자의 곁에 모여들었다.

어둠 속에 신음하던 이들이 남자에게서 희망을 느꼈다.

용사.

남자는 그렇게 불리기 시작했다.

수많은 이들이 남자를 따랐고, 수많은 이들이 남자에게 경애를 표했다.

그리고 어느 날 남자는 탑에 올랐다.

태양의 탑.

전설처럼 전해지지만 분명히 실존하는 용신왕의 탑.

도움을 얻기 위해서였다.

마왕군이 이미 세계의 절반을 정복한 상태이거늘, 이 와중에도 인간들은 하나로 뭉치지 못 했다.

서로 가진 힘을 모두 합치기능커녕 언제나 여력을 남겼다.

마왕군을 물리친 이후를 생각해야 했으니까.

마왕군에게 자신을 지킬 힘을 조금은 남겨두어야 했으니까.

남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는 없었으니까.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니 결국 모두의 힘을 모으는 것은 불가능했다.

연계는 어설펐고, 이기든 지든 언제나 불협화음이 발생했다.

결국 남자는 생각했다.

‘이대로는 마왕군에게 이길 수 없어.’

소설이나 만화처럼 용사 일행만으로 마왕군의 본진에 쳐들어가 마왕을 쓰러트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애당초 저게 가능했으면 전쟁이고 뭐고 할 필요가 없었다.

용사 일행만으로 마왕군 전체에 대적할 수 있다는 소리였으니 말이다.

결국 세력전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힘이 필요했다.

용신왕의 전설.

태양의 탑에 거하는 잠자는 마신.

‘태양의 탑 최상층에 오르는 자, 태양의 신의 선택을 받을 지어니.’

파이엔에 오랜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승 가운데 하나였다.

세계의 명운이 걸린 와중에 전설에 의존하는 것이 다소 우스워보일 수도 있었지만, 남자는 진지했다.

‘어차피 판타지잖아.’

전설에 의존하는 게 뭐가 나빠!

그랬기에 남자는 태양의 탑을 찾았고, 마침내 태양의 탑을 등반하기 시작했다.

태양의 탑에 거하는 수많은 마물들이 남자의 앞을 가로막았다.

용신왕에게 충성하는 드래곤들이 자신들의 왕을 뵙고자 하는 남자를 시험하였다.

그리고 남자는 모든 시련을 극복하였다.

끝까지 앞을 막아서는 실버 드래곤마저 격파한 뒤 최상층에 올랐다.

그리고 생각했다.

‘예쁘다.’

엄청나게.

진짜 진짜 엄청나게.

옥좌 위에는 금발의 여인이 앉아 있었다.

태양처럼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그녀는 무척이나 흥미롭다는 눈으로 남자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여인과- 여자와 눈이 마주친 남자는 다시 한 번 생각했다.

‘진짜 예쁘다.’

어쩌면 저렇게 예쁠 수 있을까.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몸매도 환상적이었다. 남자들의- 아니, 인간들의 판타지를 그대로 구현시켜놓은 존재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았다.

‘하아, 진짜 예쁘다.’

저런 사람이랑 결혼하는 건 대체 누구일까.

대체 얼마나 잘나면 저런 사람과 나란히 설 수 있는 것일까.

너무 예뻐서 크리스 때처럼 망상조차 하기 힘들었고, 덕분에 남자는 여자의 말에 한 박자 늦게나마 반응할 수 있었다.

“···무엇이지?”

“네?”

“이유가 무엇이지?”

이계의 존재인 남자가 파이엔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이유.

여자는 그저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는 많은 것들을 꿰뚫어 보았다.

남자가 이미 파이엔에서 지구로 돌아갈 방법을 찾았다는 사실조차도 간파했다.

어째서.

남자는 어째서 파이엔을 위해 목숨을 거는가.

“용사니까요.”

“뭐?”

“용사니까요.”

“뭐라고?”

“용사···니까요.”

‘으아아아! 이게 뭐야! 이게 뭐냐고!’

바보 같은 말을 반복하며 남자는 속으로 절규했다.

용사니까요.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다른 말을 할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바보처럼 보였겠지?’

하··· 저렇게 아름다운 용신왕에게 바보취급 당하며 경멸의 시선을 받는다니-

‘음, 그것도 나름 좋을지도.’

남자의 망상력이 다시 발휘되려는 순간이었다.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나는 네가 마음에 든다.”

여자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런 여자를 보며 남자는 생각했다.

‘웃으니까 더 예뻐!’

대체 어디까지 예쁠 생각인 걸까.

‘아아, 부럽다.’

어디의 누구일지는 모르지만 저런 여자와 결혼할 남자가 세상 어딘가에 있기는 있을 테니까.

만나면 질투의 칼을 가슴에 박아줘야지. 변명도 하지 못 하게 마구 연타해야지.

망상에 도가 튼 남자였지만, 사실 제법 때와 장소를 가려가며 망상을 하는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망상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할 만큼 여자는 아름답고 매력적이며 치명적이었다.

“나는 네가 마음에 든다. 싫지 않다. 그렇기에 기회를 주도록 하겠다.”

여자가 말했다.

그리고 남자는 가슴의 설레임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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