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라.”
아이테르가 울면서 웃었다. 테레시아와 이오스를 수습하며 머릿속에 떠오른 루시엘을 보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미궁 세계와 함께 하는 아이라의 의지를 느꼈다.
아이테르가 노래했다.
먼 곳에 자리한 이브나일과 함께 했다.
“나 때는 이런 거 없었는데.”
남자가 말했고, 여자가 웃었다. 남자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노래했다.
“역시 너무 늦었나······.”
치유의 신이 쓰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이었으니까.
이 싸움이 끝난 이후의 시간들이 있었으니까.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이 함께 노래했다.
정화의 신이 가장 힘들 때 자신 곁에 있어준 크리스를 끌어안으며 노래했다.
레온하르트는 그 모든 노래를 들었다.
초대 용사로서,
아이라의 뜻을 이어받은 첫 번째로서 지금의 상황을 이해했다.
남자의 말대로였다.
레온 때도 지금과 같은 일은 없었다.
하지만 레온은 생각했다.
어울린다고.
이것이야말로 용사의 이야기에 끝을 장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레온은 노래했다.
음치였지만,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절망 속에 부르는 희망의 노래.
용사를 위한 찬가.
그 노래가,
모두의 마음이,
기적을 일으켰다.
* * *
깊고 깊은 밤이었다.
아침의 영광이 밝아오려면 아직도 먼, 어두운 밤이었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다.
용사를 위한 찬가가 기적을 일으켰다.
마신은 하늘이 밝아지는 것을 느꼈다.
아침이 밝은 것이 아니었다.
달이 지고 태양이 떠오른 것 역시 아니었다.
하얀 밤이었다.
하늘에 태양과 달이 함께하였다.
낮과 밤이 공존하였다.
세계가 일으킨 기적에 마신은 순간 반응하지 못 했다.
멍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낮과 밤이 함께 하는 것이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하지만 천호는 아니었다.
성검과 마검이 정신 세계 속에서 눈을 크게 떴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함께 기뻐하며 말했다.
[낮이네?]
[밤이네?]
낮과 밤이 공존했다.
공존할 수 없는 그것이 지금 함께하였다.
여자와 남자가 하늘을 보았다.
주먹을 불끈 쥔 여자가 남자를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
“내가 말했지?”
천호는 우리보다 더 강해질 거라고.
남자와 여자를 뛰어넘을 것이라고.
남자가 웃었다.
야차신왕의 화신과 태양신의 아이를, 미궁 세계의 용사를 바라보았다.
태양 아래 용신왕의 피가 깨어났다.
밤 아래 야차신왕의 피가 깨어났다.
그리고 그것들이 하나가 되었다.
도도한 천마의 지휘 아래 함께 할 수 없는 두 힘이, 세계가 일으킨 기적에 힘입어 하나가 되었다.
용사를 위한 찬가.
세계를 지키는 자를 위해 세계가 일으킨 기적.
마신이 천호를 보았다.
천호가, 미궁 세계의 용사가 마신을 마주하였다.
“인간의 신.”
마신의 신명.
마신이 스스로 버려버린, 잊고만 그의 이름.
마신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쳤다.
모형정원으로부터 무궁무진한 힘을 이끌어내려 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세계가 기적을 일으킨 지금, 모형정원의 힘은 더 이상 마신에게- 본분을 저버린 괴물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태양의 힘에 의해 증폭된 야차신왕의 반신성이 그것을 차단했다.
천호가 성검과 마검과 용검과 신검을 하나로 합쳤다.
태양의 신인인 동시에 야차신왕으로서, 그 모든 것을 초월한 세계신의 화신으로서 마신을 바라보았다.
세계가 바라고 있었다.
세계의 모두가 기원하고 있었다.
마신이 절규하듯 포효했다.
수천 년의 세월동안 수 없이 많은 이들의 운명을 희롱한 괴물이 두려움과 공포를 토하며 천호에게 돌진했다.
천호는 피하지 않았다. 마주 돌진하였다.
미트라와 함께, 루시엘과 함께 용사의 검을 펼쳤다.
그것은 여명의 검.
깊고 어두웠던 마신의 밤을 끝내고 새로운 아침을 밝힐 시작의 검.
황금빛 섬광이 마신을 갈랐다.
용사의 이야기를 완성했다.
최종장 - 던전 브레이커
[미궁 세계가 당신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 * *
한 남자가 있었다.
인간으로 태어나 수많은 업적을 쌓아 올려 영웅이 된 남자는 세계의 인정을 받아 신성을 손에 넣었다.
남자가 변하기 시작한 것이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남자 자신조차도 알지 못 했다.
남자가 인간이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후.
남자가 아직 인간다움을 가지고 있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진 후.
오랜 시간.
남자는 변했다.
최초의 인격신은 자신과 인간들을 같은 선에 두지 못 하였다.
하지만 그래도 인격신이었다.
인간성이 뒤틀리고 망가졌을지언정 인간성의 편린이 남아 있었다.
그리하여 남자는, 그는, 더 높은 곳을 지향하였다.
진정한 신이 되고자 하였다.
힘을 손에 넣었다.
모형정원으로 세계를 뒤덮어 모든 것을 뜻대로 하였다. 전능에 가까운 힘을 획득하였다.
마신.
괴물이 되고만 신.
마신은 자신의 종족을 잊었다.
자신에게 최초의 신성을 부여해준 신명조차 잊어버렸다.
하지만 미궁 세계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신명을.
그가 아직 인간다움을 유지하고 있던 시절의, 괴물이 되기 전의 이름을.
* * *
인간의 신.
인간을 보듬어 살피며 나아갈 길을 인도하는 신.
마신이 절규했다.
육신을 뒤덮고 있던 검은 불꽃이 흩어졌다. 가슴이 크게 베여 뜨거운 피가 솟구쳤다.
마신은 고통과 노여움, 두려움 속에 힘을 발했다. 모형정원과의 연결을 반신성이 차단한 상황이었지만, 그의 육신에는 이미 상당한 힘이 축적된 상태였다.
다시 검은 불꽃을 둘렀다.
붉은 안광을 빛내며 힘을 발산했다.
천호가 검을 휘둘렀다.
성검 미트라가 성스러운 빛으로 이미 신의 힘이라 할 수 없는, 탁하디 탁한 마기를 걷어냈다.
루시엘이 천호의 안에서 노래했다.
용사를 위한 찬가가 용사의 힘을 북돋았다.
마신이 절규했다.
그것은 이미 포효가 아니었다. 발악하듯 힘을 발해 반신성을 극복했다. 어떻게든 다시 한 번 모형정원과 스스로를 연결한 뒤 거친 힘을 발하였다.
지표가 요동쳤다. 마신의 등 뒤로 세계가 일어나 용사와 성소를 모두 집어삼키려 하였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용사 때문이 아니었다.
용신왕이 포효했다.
아끼고 아낀 마지막 파괴의 힘을 발했다.
수백에 달할 드래곤들이 함께 했고, 수천의 천사들이 힘을 보태었다.
마신의 형상으로 솟구쳐 오르던 지표가 뭉개지고 부서졌다. 그대로 파괴되어 폭발했다.
그리고 용사가 달렸다.
영락해 버린 괴물에게, 한때 신이라 불리었던 짐승에게 돌진했다.
인간의 신.
그가 버린 종족.
그가 버린 이름.
천호의 등 뒤에서 마치 날개가 펴지듯 마검과 용검과 신검이 솟구쳐 올랐다. 마신의 양 팔과 가슴을 베었다.
마신이 비명을 질렀다.
고통이었다.
타인의 것이 아닌, 자신의 것이었다.
죽고 싶지 않아.
죽고 싶지 않아.
마지막 순간 마신이 토한 것은 공포였다. 두려움이었다.
수십, 수백억의 운명을 희롱하던 괴물이 마지막에 토한 것은 격노도, 저주도, 포효도 아닌 공포였다.
루시엘이 그런 마신을 바라보았다.
미트라가,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이 용서를 말하는 대신 단죄를 선포했다.
천호가 성검을 휘둘렀다.
여명의 검이 마신의 목을 갈랐다.
성스러운 황금빛이 마신의 어둠을 파하였다.
빛.
광휘.
천호가 성검을 거두었다.
무너지는 마신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어 낮과 밤이 공존하는 하늘을 우러렀다.
[미궁 세계가 당신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미궁 세계가 당신에게 감사합니다.]
목소리에 웃고 말았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간파한 루시엘은 와락 울음을 터트렸다.
미트라가 미소지었다.
다시 한 번 지켜낸 세계 앞에서 성검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세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 *
모형정원이 무너졌다.
세계를 잠식하고 있던 그것이 사라져 갔다.
하지만 말끔한 소멸이 아니었다. 그대로 사라지지 않았다.
마신의 바닥을 알 수 없는 악의.
그것이 남아 있었다.
마신은 이미 사라졌지만, 마신 그 자체라 할 수 있을 모형정원에 남은 악의가 공멸을 원하였다.
마신을 거부한 세계였다.
하지만 마신은 끝까지 미궁 세계와 함께 할 생각이었다. 함께 멸망할 마음이었다.
치유의 신이 미궁 세계의 이변을 감지했다.
선신들이 다급히 주변을 둘러보았고, 먼 변방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세계를 느꼈다. 붕괴하는 세계를 목격한 이들이 재차 두려움을 토하고 있었다.
어찌해야 할 것인가.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천사들이 동요했다. 선신들이 재차 두려움을 표했다.
여자와 남자 역시 여기까지는 예상하지 못 한 터라 바로 수를 내놓지는 못 하였다.
하지만 동요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다.
성소 깊은 곳, 아이라의 제단에 몸을 기댄 이브나일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울면서 웃었고,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직 남아 있었으니까.
마신의 마지막 악의로부터 세계를 지켜낼 것이 존재했으니까.
아이테르도 같았다.
테레시아와 이오스를 끌어안은 채 황무지에 자리한 그녀는 무너지는 마신의 옥좌를 보았다.
모든 것이 흙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와중에도 두려움을 토하지 않았다.
그저 하늘을 우러렀다.
낮과 밤이 함께하는 하늘.
용사를 위한 찬가가 만들어낸 기적.
아이테르가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결코 닿을 수 없는 하늘이었지만 애타게 뻗었고, 어느 순간 만족하였다.
닿았으니까.
자신의 손을 잡아주었다는 사실을 느꼈으니까.
“아이라.”
아이테르가 울었다.
다섯 번째 여신의 이름을 읊조리며 아이처럼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라는 세계를 사랑했다.
세계는 세계를 살아가는 모두를 사랑했다.
천호가 고개를 들었다.
하늘을 보았다.
천호 역시 세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어머니.”
루시엘이 말했다.
태어나 한 번도 보지 못 하였지만, 그녀를 느꼈다. 그녀가 세계 전체와 함께 자신을 보듬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무너지는 세계.
어찌할 것인가.
마신의 악의로부터 어찌 세계를 지켜낼 것인가.
“빛의 그물.”
여자가 어느 순간 말했다.
그녀는 이계의 존재였다.
하지만 이계의 존재이기에 세계의 의지를 간파할 수 있었다.
그랬기에 여자는 감탄했다. 진정 신이라 불릴 수 있는 자에게 경의를 표하였다.
루시엘이 천호에게 말해주었다. 미트라에게 설명하였다.
마신의 악의를 막을 방법.
빛의 그물로 세계를 뒤덮는다.
외부로부터 미궁 세계를 지켜주었던 빛의 그물로 세계 전체를 지탱한다.
유도할 수 있는 것은 다섯 번째 여신이자 희망의 신인 루시엘뿐이었다.
솔직히 말해 너무나 큰 짐이었다.
세계 전체의 운명이 걸렸다고 생각하니 두렵고 무서웠다.
하지만 루시엘은 물러서지 않았다.
자신이 물러서면 나설 이가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대는 용사고, 나는 성검이며, 루시엘은 천사니까.]
처음 만났을 때 미트라가 입에 담았던 말.
그러니 세계를 구하러 나아가면 된다고 했던 말.
미트라가 다시 말했다.
이제는 성검 미트라의 귀여운 동생이라 할 수 있을 마검 미트라도 기운차게 목소리를 보탰다.
기적이 만들어낸 하늘 아래에서 다시 한 번 기적을 일으킨다.
천호가 미트라를 움켜쥔 채 숨을 길게 토했다.
미트라가 현현하여 그런 천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렸다. 황금빛 눈동자로 아직 빈자리를 바라보았다.
루시엘이 미소지었다. 희망의 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용사와 성검 앞에 나타나 자신의 손을 더하였다.
“틀림없이 잘 될 거예요.”
루시엘이 말했다.
천호는 웃었고, 미트라는 마치 마검 미트라처럼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용사와 성검과 천사.
희망의 신이 힘을 발했다.
빛의 그물이 세계를 뒤덮었다.
다시 한 번.
다섯 여신들이 마신을 몰아내었을 때와 같이, 용사 레온하르트가 마왕을 쓰러트렸을 때와 같이.
세계의 가호가 모두를 보듬었다.
기적을 일으켰다.
* * *
세계는 무너지지 않았다.
빛의 그물이 세계를 지탱하였다. 마신의 악의를 소멸시켰다.
모두가 다시 한 번 노래했다.
용사를 위한 찬가가, 생명을 위한 찬가가 세계를 뒤덮었다.
그리고 천호는 눈을 떴다.
온통 하얀 공간이었다.
루시엘과 미트라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천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라진 그녀들을 찾지도 아니하였다.
이곳이 어디인지 알았으니까.
자신이 찰나 속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까.
[미궁 세계가 당신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아름답고 청아한 목소리.
처음 시스템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잠깐 상상한 적이 있었다.
시스템 너머에 자리한 사람.
목소리를 만들어내고 있는 사람.
뒷모습이 보였다.
루시엘과 달리 검푸른 머리칼의 여인이었다.
천사처럼 하얗고 하늘하늘한 옷을 입은 그녀는 흥겹게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세계신 아이라.”
천호가 말했다.
희망의 신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눈앞의 존재를, 세계와 하나 된 미궁 세계의 진정한 신을 불러보았다.
그녀가 돌아섰다.
루시엘보다는 미트라와 닮은 여인이었다.
검푸른 머리칼과 황금빛 눈동자.
“고마워.”
아이라가 말했다.
천호는 무어라 답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입 밖에 내었다.
“저도 고마워요.”
“뭐가?”
“루시엘을 낳아줘서요. 미트라도 만들어주시고요.”
천호의 대답에 아이라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배를 잡고 웃었다. 깔깔깔 소녀처럼 웃은 그녀는 아예 바닥에 드러눕기까지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