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직접 보는 건 처음이구나.”
찰나 속에 마신이 말하였다.
여자에게 의념을 전달하였다.
천사들 사이에 그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서 있었다.
어둠을 빚어 인간의 형상을 만들어놓은 것처럼 온 몸이 칠흑이었다.
두 눈만이 붉게 빛날 따름이었다.
“이제 슬슬 끝내자.”
북쪽 성벽 위.
여자가 급히 손을 뻗었다. 하지만 닿을 수 없었다. 마신은 이미 성벽 위에 있었고, 힘을 발한 상태였다.
어둠이 작렬했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그리고 직후 성벽이 사라졌다. 성벽 위에 자리하고 있던 천사들 역시 사라졌다. 영웅들과 파이엔의 장병들도, 언제나 용맹히 싸우던 신성기사단장 벨가드도 그대로 소멸하였다.
성소가 알려주었다.
요새 성벽의 20분의 1이 사라졌다. 그 위에 자리하고 있던 782명이 소멸했다.
천사들의 숫자도 1만을 넘게 헤아리니 전체로 보면 그리 많은 숫자가 아니었다.
궤멸적인 타격을 입은 것 역시 아니었다.
하지만 여자는 격노했다.
여자의 분노를 이끌어내기 위해, 천사들과 영웅들로부터 더 큰 부의 감정을 이끌어내기 위해 마신이 고의로 일부만을 파괴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참지 않았다.
주먹을 쥐었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마물들을 상대하면서도 내리지 않았던 명령을 지금 이 순간 전파하였다.
파이엔의 드래곤들이 복종했다.
이백여 마리에 달하는 드래곤들이 일시에 같은 곳을 보았다. 마신을 향해 마지막 드래곤 브레스를 내뿜었다.
무지막지한 공격이었다. 선인과 악신을 가리지 않고, 지금의 공격을 견뎌낼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마신은 긴장하지 않았다.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저 보았고, 미소지었다.
힘을 모두 회복하였으니까.
마신 자신은 지금 이 순간 명실상부한 미궁 세계의 신이었으니까.
“너희와는 달라.”
마신이 말했다.
정지한 것 같은 시간 속에서 전장에 자리한 모두에게 말해주었다.
미궁 세계의 신들은 육신을 가지고 현신한 존재들이었다.
때문에 육체에 속박되었다.
갖가지 이능을 발하고 기적을 일으켰지만, 결국 초인의 수준에 그칠 뿐이었다.
강력한 마법사.
무척이나 뛰어난 전사.
하지만 마신은 달랐다.
그는 미궁 세계의 진정한 신이었으니까.
마신이 가볍게 지면을 박찼다. 등을 성벽 밖으로 향한 채 성벽에서 뛰어내렸다.
가볍게 둥실 떠오른 것 같으면서도 단번에 십여 미터 이상을 이동했다.
본래라면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고작 십여 미터 이동하는 정도로는 드래곤 브레스의 포화를 벗어날 수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마신에게는 의미가 있는 행동이었다.
위치가 달라졌으니까.
여신의 성소 안과 성소 밖.
마물들이 목숨을 바쳐 시간을 만들어내고 있을 때 마신은 조금씩 조금씩 성소를 침식해 들어갔다.
대미궁이 미궁 세계를 침식해 들어갔던 것처럼, 성소를 야금야금 먹어치워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었다.
성벽 밖 십여 미터.
더 이상 다섯 번째 여신의 성소가 아니었다. 모형 정원의 일부였다. 때문에 마신은 성소에 서 있을 때와 달리 진정한 신의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예컨대, 지금처럼 말이다.
마신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마신에게 쏟아지던 드래곤 브레스들이 사라졌다.
성소 안쪽에서 뻗어나가던 것들은 마치 중간에 잘라낸 것처럼 성소와 모형정원 사이에서 깔끔히 끊어졌다.
어떻게.
“신이니까.”
미궁 세계의, 모형정원의 지배자니까.
천사들과 영웅들은 드래곤 브레스들이 갑자기 소멸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하지만 선신들은 달랐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 자신들과 마신이 무엇이 다른지 깨달았다.
“이길 수 없어.”
선신들 가운데 누군가가 말했다.
그리고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마신이 하얗게 웃었다.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지면을 뚫고 거대한 바위기둥이 솟구쳐 올랐다. 하늘을 찌를 것처럼 솟구쳐 오른 그것은 실로 거대했다. 길이는 수백 미터에 달할 것 같았고, 둘레 역시 수십 미터는 족히 되었다.
검은 그림자가 성소를 덮었다. 마물들과 천사들과 영웅들, 선신들은 싸움을 멈추고 마신과 바위기둥을 보았다.
그리고 마신이 다시 손을 놀렸다.
바위기둥이 요새를 향해 쏟아져 내렸다.
천천히, 하지만 분명하게.
모든 것을 파하고자.
무너진다.
쏟아져 내린다.
거대하고 거대한 그것이.
막을 엄두조차 내지 않는 거대함이.
기적은 일으킨 마신은 미소를 지었다.
스스로 일으킨 기적에 만족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역시, 과연 주신격인가.”
모두가 얼어붙은 그때 여자는 반응했으니까. 허공을 박차 오르며 다시 한 번 파괴신으로 화하더니 바위기둥을 소멸시키기 위해 파괴의 힘이 실린 드래곤 브레스를 내뿜었으니까.
황금빛 섬광이 바위기둥을 파괴했다. 파괴신의 거대한 날개가 성벽 위를 덮어 잔해들을 막아냈다.
마신이 손을 놀렸다. 지면에서 솟구쳐 오른 돌덩이들이 뾰족하게 변하더니 비수가 되어 여자를 향해 날아들었다. 동시에 지면을 가득 채우고 있던 시체들이 일어나 뭉쳐 거대한 거인들이 되었다.
“방어해! 어머님을 도와!”
치유의 신이 일갈했다. 퍼뜩 정신을 차린 질서의 신이 성벽 위의 병력들을 일깨웠다. 하늘 위의 드래곤들이 거인들을 제압하기 위해 각종 마법을 펼쳤다.
검의 신과 승리의 신이 치유의 신과 더불어 마신을 향해 돌진했다.
“어머님!”
여자가 다시 인간으로 화했다. 작아지는 것으로 돌덩이들 대부분을 회피한 뒤 허공을 박차 마신에게 돌진했다.
마신은 신이었다.
육신을 가지고 현신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궁 세계의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능의 소유자였다.
지금처럼 싸우면 이길 수 없었다.
스스로 강조하듯이 놈은 신이었으니까.
모형정원 안에서라면 전능에 가까운 힘을 휘두를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그러니 어떻게든 이쪽 방식으로 싸우게 만들어야 했다.
권능의 싸움이 아닌, 물리적인 형태의 싸움을 유도해야 했다.
여자의 손에 용검이 쥐어졌다. 즐겨 입던 화려한 드레스 대신 활동적인 용갑주를 걸친 여자는 마신에게 쏜살같은 공격을 퍼부었다.
마신이 여자를 응대했다. 시간의 흐름을 조종해 여자의 눈부시게 빠른 공격들을 평범한 공격으로 인지했다.
“과연.”
마신은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본래는 이 정도 수준이 아니라 보다 느리게, 여자가 거의 정지한 것처럼 만들 생각이었다.
하지만 여자의 신성이 그것을 방해했다.
여자의 근원이 태양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밤중에, 그것도 이계에서 이 정도 힘을 발휘한다는 것은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
마신은 여자가 마음에 들었다.
정말로 고결하고 위대하고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아이테르와 닮았다. 아니, 아이테르보다 모든 면에서 우위에 있었다.
어떻게든 꺾고 싶었다. 자신의 발치에서 애원하게 만들고 싶었다. 개처럼 땅을 기게 하고 싶었다. 여자의 고결함을 더럽히고 싶었다.
마신이 여자의 공격을 받아냈다. 첫 번째 공격이 교차한 순간 여자는 마신이 시간의 흐름을 느리게 하고 있음을 간파했다. 때문에 여자는 즉시 성소의 제어권을 포기했다. 신성의 힘을 보다 강화해 마신의 권능에 대항했다.
검과 검이 교차했다.
남자의 반려인 여자는 굉장한 검술가였다. 파이엔 전체를 대상으로 해도 여자보다 뛰어난 검술가는 겨우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반면 마신은 검술 따위 배워본 적이 없었다. 아주 먼 옛날 인간이던 시절에도 검은 사용한 적이 없는 그였다.
하지만 그는 미궁 세계의 신이었다. 그랬기에 모자란 검술을 세계의 기록으로 대체했다.
검의 신과 전쟁의 여신 이브나일의 검술.
마신은 그것을 복제했다. 자신에게 덮어씌운 뒤 여자의 검술에 대응했다.
검의 신과 승리의 신이 여자를 돕기 위해 마신에게 덤벼들었다.
하지만 둘은 여자와 달랐다.
아직 마신의 진정한 힘과 그에 대한 대응법을 알지 못 했다.
성소를 벗어나 모형정원에 들어선 순간 검의 신의 발밑이 꺼졌다. 검의 신은 순식간에 수백 미터 이상을 추락했고, 잠시 벌어졌던 땅은 그대로 입을 다물어 검의 신을 삼켜버렸다.
승리의 신은 정지해버린 시간 속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치유의 신만이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 마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간파한 그녀는 여자가 던져버린 성소의 제어권을 회수한 뒤 성소의 힘을 집중시켰다. 방어가 아닌 마신을 공격하는데 쓰기 위함이었다.
“무리야.”
너는 다섯 여신이 아니니까.
미궁 세계의 주신이 아니니까.
성소의 제어권을 가진다 한들 그 힘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없으니까.
마신의 말대로였다. 치유의 신이 애써 모은 힘은 성소 밖으로 나선 순간 너무나 간단히 흩어지고 말았다.
마신은 여자를 밀어 붙이고 있었다.
이브나일의 검술이 여자의 검술보다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단순한 이유.
여자는 지쳤다.
몇 시간이나 이어진 싸움으로 인해 너무 많은 신력과 체력을 소모했다.
마신이 늘어났다.
하나에서 둘이 되었고, 둘은 다시 넷이 되었다.
사방에서 여자를 공격해 검을 놓치게 만들었다. 어깨를 찌르고 가슴과 등을 베었다.
여자가 파괴신으로 화했다. 단숨에 덩치를 불려 마신의 분신들을 떨쳐냈다. 하지만 그 순간 마신 역시 거대해졌다. 파괴신으로 화한 여자의 목을 움켜쥐더니 그대로 땅에 패대기쳤다. 여자를 마구 짓밟는데 그치지 않고 검으로 가슴을 꿰뚫었다.
“어머님!”
치유의 신이 치유의 검을 거머쥐고 마신에게 돌진했다.
마신의 분신들이 그런 치유의 신을 향해 마주 돌진했고, 마신은 내동댕이쳐진 여자를 다시 한 번 짓밟았다.
쾅!
마신이 밟은 것은 여자의 가슴이 아닌 지면이었다. 다시 인간으로 화해 공격을 피한 여자는 이를 악물었다. 마신의 공격은 단순한 공격이 아니었다. 칼에 베인 상처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러내렸다. 회복 마법을 아무리 사용해도 상처를 회복시킬 수 없었다.
마신이 한 걸음을 내디뎠다. 다시 여자와 같은 크기가 되더니 공간을 도약했다. 여자의 앞에 당도해 거칠게 검을 찔러넣었다.
여자가 피를 토했다. 마신의 검이 여자의 부드러운 배를 갈라 등을 꿰뚫었다.
여자가 마신을 보았다. 마신이 그런 여자의 이마에 키스했다. 웃으며 검을 뽑아냈고, 여자는 다시 한 번 피를 토하며 제자리에 무너졌다.
여자는 강했다.
정말로 강했다.
하지만 이곳은 미궁 세계였다. 마신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모형정원의 안이었다.
그러니 싸움이 되지 않았다.
애당초 마신이 힘을 회복한 순간 싸움은 끝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여자는 결국 다른 세계의 신일뿐이었으니까.
마신이 다시 손을 놀렸다. 지면에서 솟구쳐 오른 촉수들이 여자의 사지를 봉했다. 여자의 신력과 체력을 동시에 빨아들였다.
마신은 뒤를 돌아보았다.
분신들이 치유의 신을 제압하고 있었다.
시체의 거인들이 성벽 위를 기어 올라가 천사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물론 이 와중에도 분투하는 자들이 있었다. 영웅적인 활약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서 마신은 더욱 기꺼워했다.
무릇 절망은 희망이 있을 때 더욱 커지는 법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순간 여자가 돌연 웃음을 흘렸다.
너무나 작고 약한 웃음소리였지만 마신은 놓치지 않았다. 여자를 돌아보았다. 여자가 마신에게 말했다.
“그래, 너 신이야.”
다른 세계의 수호의지들과는 달라.
세계를 보살필 생각 따위 조금도 없는, 그저 지배할 생각뿐인 신.
그렇기에 다른 세계의 수호의지들보다 훨씬 더 압도적인 힘을 휘두를 수 있는 신.
“하지만 넌 이미 한 번 패한 적이 있어.”
천하고 수백 년 전에.
다섯 여신들과의 싸움에서.
마신은 여자의 도발을 웃어넘겼다.
“그래, 분명히 패배했지.”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미궁 세계를 수호하는 다섯 여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아이라는 사라졌고, 아이테르와 테레시아, 이오스는 옥좌 밑에서 헐벗은 채 신음하고 있었다.
이브나일이 남아있었지만, 그녀 하나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여자가 신음을 삼켰다.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번에도 패할 거야.”
“나는 네가 정말 좋아. 절망 속에 근거 없는 희망을 가지는 것 역시 좋아하고.”
마신의 대답에 여자는 다시 한 번 웃음을 흘렸다. 한 번 더 피를 토한 뒤 헐떡였고, 흐릿한 눈으로나마 마신을 노려보았다.
마신이 그런 여자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섰다. 여자의 뺨을 쓰다듬었고, 강제로 입술을 맞추었다. 입술에 묻은 여자의 피를 핥더니 숨결이 닿을 거리에서 속삭였다.
“이 싸움이 끝나면 파이엔에 갈 거다.”
너라는 존재를 잃은 파이엔을 침공해 미궁 세계의 일부로 만들 것이다.
파이엔의 모든 존재들에게 미궁 세계의 존재들과 같은 삶을 강요할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는 다시 다른 세계로 나아갈 생각이다.”
미궁 세계로 만족하지 않는다.
파이엔으로 끝이 아니다.
먹어치우고 먹어치워 더욱 더 강대하고 위대한 존재가 되리라. 모든 세계의 존재들을 자신의 발밑에 두리라.
“미친놈.”
여자가 말했고, 마신은 다시 웃었다. 여자의 몸을 주무르며 입술을 맞추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여자가 호응했다. 혀를 놀려 마신의 혀를 받아들였다.
십여 초 남짓.
길다면 긴 시간이 지나 마신은 입술을 떼었고, 여자는 몇 번인가 기침을 토하더니 이내 킥킥 거리며 웃었다.
“키스 진짜 못하네. 연습 좀 해라.”
마신은 웃었다. 여자가 정말로 마음에 들어 다시 한 번 여자의 뺨을 쓰다듬었다.
“너는 내 노예가 될 것이다. 나는 너를 타고 파이엔을 침공할 것이다. 너는 절규하며 파이엔의 존재들을 파괴할 것이고.”
육신의 자유를 빼앗아도 정신은 온전히 놓아둘 생각이었다.
세뇌 따위 너무나 시시한 짓거리에 불과했다.
마신의 선언은 허언이 아니었다. 마신에게는 분명 파이엔을 침공할 힘이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다시 미소를 흘렸다.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리야. 다른 거 다 떠나서… 날 탈 수 있는 건 모든 세계 통틀어 오직 한 명뿐이거든. 그런데 넌 그 사람이 아니야.”
여자의 말에 마신은 순간 미간을 찌푸렸다.
여자의 말이 거슬려서만이 아니었다.
한 사람.
파이엔의 파괴신이라는, 너무나 거대한 존재인 여자에 묻혀 잊힌 존재.
마신은 여자를 안고 있던 손을 풀었다.
여흥에 빠져 있던 정신을 건져내 냉정을 되찾았다.
이브나일이 무엇을 꾸미든 의미 없는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방치해서는 안 되었다.
전투가 시작된 이래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은 용사도 신경 쓰였다.
마신이 돌아섰다.
그리고 여자가 다시 한 번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까지와 달리 진심에서 우러난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시간 끌기 힘드네, 진짜.”
시간 끌기.
마신은 여자를 돌아보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는 만족했다.
이미 시간이 되었으니까.
역겨운 키스로 충분한 시간을 만들었으니까.
여자는 촉수에 속박된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검고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장난처럼 말했다.
“밤이네?”
밤.
깊고 깊은 어둠의 시간.
치유의 신에게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던 마신의 분신들이 소멸했다. 마신이 힘을 거둔 것이 아니었다.
마신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심장을 죄어오는 것 같은 본능적인 두려움을 느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신은 신이었으니까.
신성을 가진 존재였으니까.
“소개할게, 우리 집 짐승들이야.”
여자가 입을 연 그 순간 밤의 어둠에 녹아들었던 사냥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파이엔의 용사와 미궁 세계의 용사.
두 명의 천마가 마신을 향해 돌진했다.
시간의 신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땀을 비처럼 흘렸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언제나 그랬듯이 혹사를 강요받은 그녀였다.
하지만 시간의 신의 표정은 썩 나쁘지 않았다.
힘을 쓰고 나면 거의 바로 잠드는 그녀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지금까지와 다른 힘을 쓴 것도 있지만, 잠들기 싫어 조금 억지를 부린 덕분이었다.
시간의 신을 좀 더 일찍 깨어나게 만든 존재가 보태준 힘도 있었고 말이다.
시간은 신은 잠들고 싶지 않았다.
마신이 승리한다면 깨어나자마자 끔찍한 광경을 볼 수도 있었으니까.
어쩌면 아예 영원히 깨어나지 못 할 지도 모르고.
“진짜 나쁜 놈이네.”
벽에 등을 기댄 채 숨을 고르던 시간의 신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의 신은 혼란의 신처럼 원초신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로 오래된 신이었다. 하지만 인격을 가진 시기 역시 혼란의 신과 비슷했기에 마신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 했었다.
하지만 이제 알게 되었다.
혼란의 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기존의 미궁 세계와 잘려나간 미궁 세계- 저 대미궁이 합쳐진 결과 과거를 각성하게 되었다.
마신이 미궁 세계에서 일으킨 모든 일들.
대미궁을 통해 다른 세계를 흡수하며 일으킨 일들.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그 모든 악행들 덕분에 지금과 같은 힘을 가지게 된 마신이었지만, 시간의 신은 마신과 같은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런 괴물 따위 아무리 큰 힘을 준다고 해도 사절이었다.
시간의 신은 그저 과거를 각성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과거의 기록을 알게 됨에 따라 모형정원의 의미 또한 이해하게 되었다.
마신이 특별한 이유.
미궁 세계의 다른 신들과 달리 홀로 전능에 가까운 힘을 부릴 수 있는 비결.
시간의 신은 눈을 감았다.
마신이 직접 모습을 드러낸 이유도 알 것 같았다.
절대적인 자신감.
패배의 가능성 따위 너무나 작아 신경 쓸 필요조차 없기에 보일 수 있는 행동.
오만이 아니었다.
지금의 마신에게는 그 정도의 힘이 있었다.
“하지만…….”
시간의 신은 생각했다. 자신을 깨운 존재를 생각하며 숨을 한 번 길게 토했다.
이쪽에도 승산은 있었다.
마신이 생각하지 못 했던 가능성들이 이쪽에 남아 있었다.
“신기하네.”
시간의 신이 작게 말했다. 작금의 상황을 떠나 정말로 신기했기 때문이다.
깨어나자마자 도운 일.
성소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시간의 흐름이 느려진 장소에서 마주한 존재들.
‘살짝 오글거리지만, 정말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으니까.’
신을 사냥하는 밤의 짐승.
야차신왕 쿠베라의 힘.
시간의 신은 다시 눈을 감았다.
천천히 숨을 고르며 옅은 미소를 지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