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이계에 소환되기 쉬운 체질이라도 있는 거예요?”
“응.”
“네?”
“아니, 네 엄마가 그러더라고. 세상간 이동에 따른 저항감은 사람마다 다른데 우리집안 사람들은 그 저항감이 거의 없는 수준이라더라.”
“진짜 체질이라고요?”
“그러니까 대대로 용사가 나온 거겠지?”
어깨를 으쓱인 남자는 천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무튼 이야기가 좀 샜는데, 시간도 없으니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마. 아, 그리고.”
잠시 말을 끊은 남자는 다시 천호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말했다.
“성검 며느리··· 아니, 그러니까 성검양은 계속 검 상태인 거냐?”
“네? 그··· 아뇨, 사람형태로 실체화 할 수 있어요.”
[할 수 있습니다, 아버님. 실체화 할까요?]
미트라의 물음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하지.”
[네에♥]
대답한 것은 마검 미트라였다.
성소에 들어간 이후 다시 성검과 합체한 용검이나 신검과 달리 밖에 나와있던 그녀는 아예 자기가 실체화를 하려고 했지만 무리였다.
본체답게 성검은 얼른 마검과 합체한 뒤 실체화를 실행했다.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
다섯 번째 여신 아이라의 모습을 본 딴 미궁 세계 최강의 성검.
숨을 길게 토한 미트라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남자를 마주하였고, 남자는 헉하고 숨을 삼켰다.
“아버지?”
“아, 아니. 그냥. 너무 예뻐서.”
남자의 말에 미트라는 흐뭇함과 부끄러움을 함께 느꼈고, 천호는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와, 이 정도면 진짜 네 엄마랑 맞대결도 가능할 것 같다.”
“미트라가 좀 더 예쁘지 않을까요?”
“그, 그대여.”
얼굴이 빨개진 미트라가 고개를 푹 숙이자 남자는 하-하고 숨을 토했다.
“네 엄마한테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구나. 뭐, 우리 자기는 그게 또 매력이지만.”
“아버지?”
남자는 더 말을 받는 대신 유쾌하게 웃었다.
애당초 긴장을 풀기 위해 조금 농담을 하긴 했지만, 여유가 그렇게 있는 상황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성검양을 부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보고 싶어서인데, 보길 잘했네. 정말 예쁘구나. 천호한테 너무 아깝다.”
“아버지.”
“아, 아버님.”
남자는 다시 낄낄 웃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지금부터 하려는 일에는 성검양의 기운이 천호에게서 빠지는 쪽이 더 나을 것 같아서였는데··· 안 되는군. 이미 성검양과는 영혼까지 이어 붙어진 상황이구나. 일심동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야.”
실체화 된 상태로 천호와 나란히 서 있으니 보다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천호와 미트라는 하나였다. 더 이상 둘이 될 수 없었다.
“아마 신검합일 때문일 거예요.”
“신검합일?”
“네, 말 그대로··· 미트라와 하나가 되었거든요. 그렇죠?”
천호가 미트라를 돌아보며 말을 맺자 미트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님. 신검합일을 통해 하나가 되었기에 강제로 갈라놓지 않는 한 천호와 저의 영혼의 결속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더욱이··· 제가 용검 또한 흡수했으니까요.”
“과연. 용검이 보이지 않는 건 그래서였나.”
남자는 납득했다. 미트라의 말마따나 강제로 끊어놓지 않는 한 둘의 연결 상태를 해제할 수는 없었다.
“좋아, 별 수 없지. 그럼 이대로 진행한다.”
결정을 내린 남자는 숨을 한 번 크게 삼키더니 잠시 끊어졌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어찌되었든 네 고조부께서는 용사셨다. 그리고 고조부가 가신 세계는 쉽게 말해 무림이었지.”
“구파일방 나오는요?”
“비슷하면서 달라. 파이엔이나 미궁 세계가 판타지 세계지만 반지의 제왕 세계랑 똑같은 건 아닌 것처럼. 음··· 굳이 따지면 기환 무협의 세계라 할 수 있겠구나.”
“기환 무협요?”
“무협인데 판타지 같은 곳. 엘프 대신에 장이족이 나오고, 오크나 트롤 대신에 수인들이 나오고··· 신선이나 선녀들 나오는 뭐 그런 거.”
“음··· 알겠습니다. 대강 이해가 가네요.”
“그래, 아무튼 증조부께서는 그곳에 가셨고, 우역곡절 끝에 천마가 되셨단다.”
우역곡절 사이에 참으로 많은 이야기가 들어 있을 것 같았지만, 지금 궁금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잠깐, 천마요? 용사가 아니라? 하다 못 해 정파의 무림맹주도 아니고요?”
“오, 무협지도 꽤 열심히 읽었나 보구나.”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뭐, 기환 무협의 세계라 했잖니. 고조부의 적은 인간이 아니라 미쳐버린 무신이었단다. 그리고 고조부께서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으셨어. 그쪽으로 넘어가자마자 마교에 붙잡혀서 실험체가 되셨으니까.”
“나중이 꼭 이야기해주세요.”
“그래, 아무튼 고조부께서는 역천의 힘을 가진 천마로 등극하신 후 미쳐버린 무신을 쓰러트려 세계를 구하셨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신성을 가진 선녀분과 백년가약을 맺고 자식을 보셨지. 그게 바로 네 증조부시고.”
“그럼 천마신공은 고조부께서 물려주신 거다?”
“그래, 호세사천왕은 고조모께서 물려주신 거고.”
“호세사천왕을요?”
여기서 갑자기 호세사천왕이 나올 줄이야.
천호가 당황해서 눈을 깜박이자 남자가 바로 설명했다.
“호세사천왕은 이계의 신족인 팔부신중이 보유한 절세무공들 가운데 하나다. 네 고조모께서는 야차신왕 쿠베라의 피를 이으신 야차신족이셨고, 후일 일족 가운데 야차신왕의 피를 강하게 이은··· 격세유전으로 태어난 존재가 나타날 때를 대비하시기 위해 호세사천왕의 비급을 우리 집안에 남기셨지.”
“그리고 저와 아버지가 태어났군요.”
“그래, 너와 나 모두 격세유전으로 야차신왕의 피를 강하게 이은 존재들이다.”
여기까지 말한 남자는 잠시 숨을 골랐고, 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이 나와 어버버 하고 있던 미트라는 천호의 주머니에서 물통을 꺼내 남자에게 내밀었다.
“아버님, 여기.”
“오, 고마워요. 얼굴만 아니라 진짜 다 예쁘고 착하네요.”
“아, 아닙니다.”
원색적인 칭찬에 미트라가 몸을 비비 꼬았고, 천호는 어쩐지 모를 반발심에 미트라의 허리를 안으며 말했다.
“아무튼 천마신공과 호세사천왕의 시작은 고조부님이시군요.”
“그런 셈이지. 일단 내 이야기를 좀 더 하자면··· 나는 파이엔에 갈 때 호세사천왕만 가지고 갔다. 천마신공은 파이엔에서의 일이 다 끝나고··· 네 엄마 데리고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갔을 때야 존재를 알게 되었지.”
“어, 파이엔에서 익히신 게 아니었어요?”
“어, 다녀와서 익힌 거다. 내 이야기 중에 천마신공에 관한 이야기는 없었잖냐.”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남자가 지구에 돌아와서 보낸 세월만 십년이 훌쩍 넘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남자이니, 그 정도 시간이면 천마신공을 익혀 천마가 되는 것도 가능할 것 같았다.
“어, 잠깐. 지구에서는 무공 익히기 힘든 거 아니었어요?”
지구에는 기나 마나와 같은 무형의 힘이 부족하다.
천호 자신이 무공을 제대로 배우지 못 한 이유.
천호의 지적에 남자는 어색하게 웃더니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뭔가 타이밍이 지금은 아닌 것 같지만··· 솔직히 말하지. 다 뻥이었다.”
“네?!”
“뻥이었어. 지구에서도 충분히 수련 가능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르치지 않은 건 이유가 있어서니까 지금은 일단 넘어가자. 들어오는 길에 치유의 신한테 부탁해서 시간의 흐름이 느리게 흐르도록 조치하긴 했지만 그래도 시간은 아끼는 게 좋잖니.”
성소에 통제권을 가진 이브나일과 치유의 신은 다른 곳에서는 하기 힘든 여러 가지 일들을 행할 수 있었다.
그중 하나로 시간의 흐름이 느려지는 것을 미리 부탁해둔 남자였다.
“후, 좋아요. 일단 넘어가죠. 대신 나중에 제대로 설명해주셔야 해요.”
“그래, 꼭 그러마.”
미안하다는 듯 어색하게 웃은 남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변명 같지만, 일단 천마신공을 지구에서 익히진 않았다. 미라 누··· 네 고조모 되시는 분이랑 같이 아예 고조부님을 뵈러 갔으니까.”
“무협 세계에 다녀오셨다고요?”
“너 태어나기 전에 잠깐. 아무튼 그곳에서 고조부님을 뵈었고, 정식으로 천마신공을 배워 17대 천마가 되었다.”
“세상에.”
“모두 진짜란다. 일단 네 엄마는 파이엔의 파괴신이고, 네 아내는 성검이잖니.”
“아, 아직 결혼은 안 했어요.”
“겨, 결혼······.”
천호와 미트라가 다시 당혹 속에 빠져들자 남자는 짝짝 박수를 쳐 주의를 집중시켰다.
“어찌되었든 배경 설명은 이 정도로 하자꾸나. 나는 17대 천마고, 지금부터 너를 18대 천마로 만들 거다.”
“18대 천마······.”
“너도 천마신공을 어느 정도 써봐서 알겠지만, 천마신공의 특징은 힘을 구분하지 않는다는 거다. 삼라만상 모든 것을 도도히 내려다보는 천마의 힘으로 합일시키지.”
야차신왕의 피를 이었고, 격세유전으로 말미암아 그 피의 순도가 높다한들 결국 인간과의 혼혈이었다.
남자와 천호가 온전한 야차신왕의 화신으로 거듭나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했다.
“천마신공의 힘으로 야차신왕의 피를 지배하면 온전한 야차신왕의 화신으로 거듭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너는 나보다 더 수월할 거다. 더 강력한 야차신왕의 화신이 될 수도 있고.”
“제가요?”
“그래, 넌 평범한 인간과의 혼혈이 아니니까. 네 몸에는 네 엄마의··· 파이엔의 용신왕이자 파괴신인 고귀하고 위대한 존재의 피가 흐르고 있다.”
단순히 흐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천호는 여자의 피를 각성했다.
태양의 신인이 그 증거였다.
“더욱이 미궁 세계에서 쌓아 올린 신성의 힘 역시 있지. 천마신공의 힘으로 그 모든 것들을 아우른다면 넌 나 이상의 존재가 될 수 있다.”
애당초 남자가 천호에게 온갖 것들을 다 가르친 것은 천마신공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천호가 가진 용사로서의 특징- 여명의 검이 천호가 가진 모든 기예들을 하나로 아우르는 것 역시 남자의 교육과 어린 시절 몸에 주입된 천마신공의 영향이었다.
“이미 알지도 모르겠지만, 넌 이미 천마신공을 익히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조금씩 네 몸에 각인을 시켰으니 말이다.”
천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천마신공의 기예들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천마신공 자체는 분명 천호 자신의 안에 있었다. 미궁 세계의 시스템 덕분에 얼렁뚱땅이긴 해도 레벨도 꽤 높아진 상태였고 말이다.
“하지만 내공조차 쌓지 않은 어린 시절의 네가 천마의 힘을 감당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때문에 나는 천마신공을 네게 각인시킨 뒤 힘의 통로를 모두 닫아 네 몸을 보호했다.”
그리고 이제 때가 되었다.
천호는 천마신공의 힘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다.
“지금부터 문을 연다. 그로 말미암아 용솟음치는 힘을 네가 통제할 수 있다면··· 너는 비로소 천마신공의 진정한 힘을 부릴 수 있게 될 거다. 물론 이런 날치기 수법으로는 온전한 천마라 할 수 없지만, 야차신왕으로 거듭나는 정도는 가능할 거다.”
천마신공의 여섯 가지 기예는 나중에 시간을 들여 습득한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삼라만상의 힘을 아우르는 천마신공의 특성뿐이었다.
“너와 성검양이 분리될 수 없다면 아예 완벽하게 합치는 쪽이 나을 거다. 성검양, 불러놓고 미안하지만 다시 천호와 하나가 되어줄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아버님. 신검합일을 하겠습니다.”
바로 답한 미트라가 천호를 돌아보았고, 천호는 미트라와 이마를 맞대었다. 성검 궁극기 신검합일을 통해 미트라와 온전한 하나가 되었다.
그로 인해 탄생하는 것은 다섯 번째 여신의 화신.
“과연··· 이것이 신검합일인가.”
남자는 납득했다. 합체한 순간 천호의 격 자체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럼 바로 시작하자. 상의를 벗고 가부좌를 취해라.”
“네, 아버지.”
아머드 상태를 해제한 천호는 가부좌를 취했고, 남자는 그런 천호의 등 뒤에 자리했다.
“집중해라. 의식을 잃지 마라. 지금부터 문을 개방하겠다.”
천호는 대답하는 대신 미트라와 의식을 모았다. 정신 세계 속에서 온전한 하나가 되어 집중했다.
“일문.”
남자가 천호의 등에 손을 뻗었다.
18대 천마의 강림을 위한 개문의식을 시작했다.
천호와 남자의 대화가 진행되고 있을 때 이브나일과 치유의 신, 루시엘은 성소의 중심부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제단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이라의 성소는 마신과의 최종결전을 대비해 만들어진 요새였지만, 최중심부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치유의 신의 성소와 마찬가지로 다소 빈 곳이 많기는 했지만, 제대로 신전다운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아니, 그보다는 도서관 같아…….’
입구까지만 해도 거의 날아서 이동한 이브나일이었지만 막상 도착하고 나니 두 발로 걷기 시작했다.
루시엘 역시 따라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1층에서 보았던 제국의 황실 도서관이 자꾸만 생각났다.
벽면 가득 자리한 책장들과 빼곡히 꽂혀 있는 수많은 서적들.
“아이라는 도서관 사서였으니까.”
이브나일이 루시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그리움이 섞인 목소리였다.
도서관 사서 아이라.
가수 아이테르.
대귀족의 영애 테레시아.
학자 이오스.
근위 기사 이브나일.
다섯 여신들의 본래 직업.
이계라고는 하나 그녀들 모두가 본래는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들.
‘이렇게 가만히 앉아 도서관을 바라보다보면 이런 생각이 들거든. 아, 하나도 변한 것이 없구나. 나는 여전히 나구나.’
이계의 여신이 되었어도.
마신으로부터 미궁 세계의 생명들을 지키기 위한 전쟁의 최전선에 선다 할지라도.
나라는 존재는 크게 변하지 않았구나.
알맹이는 그대로구나.
아이라는 신이 되어 타락하는 것을 몹시 경계했다.
처음에는 그런 아이라의 태도를 너무 예민하다고 생각한 이브나일이었지만, 마신의 존재와 그가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알게 된 이후 아이라의 생각에 공감하게 되었다.
인격을 가진 인격신이 인간성을 잃는다면.
세상을 살아가는 생명들 하나하나를 사랑하고 존중하는 대신 그저 숫자로만 대하기 시작한다면.
차라리 인격신이 존재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세상 모두를 장난감으로 여기는 인격신이 얼마나 끔찍해질 수 있는지는 마신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건 신이 아닌 괴물- 그저 재앙에 불과했다.
“내 방은 기사 기숙사와 거의 흡사하게 꾸며져 있단다. 그래서 테레시아한테 자주 핀잔을 들었어. 잠자는 곳까지 이렇게 딱딱하고 귀엽지 않게 해둘 필요가 있느냐고.”
성소의 중앙 제단까지의 거리는 그리 길지 않았다. 때문에 이야기하며 걸을 수 있는 시간 역시 짧았지만 이브나일은 다섯 여신들의 이야기를 하였다.
아이라의 딸이라 할 수 있을 루시엘에게, 아이테르의 딸인 치유의 신에게 조금이나마 다섯 여신들의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나는 그 딱딱한 기숙사가 좋았어. 친구들도 있었고… 흠흠, 나름 동경하던 선배도 있었거든. 물론 꼴 보기 싫은 녀석들도 있었지만 말이야.”
이브나일은 소녀처럼 웃었다.
그녀는 예전 기사 기숙사에 있던 시절에도 그랬다. 기사답게 늘 근엄한 표정과 분위기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갑옷 속에는 귀엽고 발랄한 소녀가 숨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