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올린 뒤 나를 떠올리면 내게 목소리가 전해질 것이다.”
“오오… 오오오…… 가, 감사합니다. 평생 간직… 아니, 가보로 삼아 대대로 물려주겠습니다.”
벨가드가 극히 감동한 얼굴로 브로치를 받아들었다. 두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한 것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았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벨가드는 성왕국의 신성기사단장이었으니까.
비록 인간의 신은 아니라고는 하나 여자는 성왕국의 사람들에게 있어 이미 신앙의 대상이었다.
용신왕이 자신들의 용사의 반려가 되어 이것저것 신경을 써주는데 어찌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용신왕이 직접 물건을 하사하셨다. 그것도 자신의 이름을 직접 호명하시며.
감동한 것은 에스멜란다도 마찬가지였다.
여자의 생각대로 남자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에스멜란다였지만, 그녀는 사실 남자보다는 여자를 더 좋아했다. 파이엔 최강의 존재인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여인인 여자를 동경하고 사모했다.
때문에 에스멜란다 역시 무척이나 격한 반응을 보였다. 얼굴은 물론이고 온몸을 발갛게 붉힌 채 숨을 헐떡이며 브로치를 받아들었다.
“가, 감사합니다. 영광입니다. 저, 정말로…….”
에스멜란다는 아예 그냥 울었다. 그 모습을 보며 여자는 생각했다.
‘나도 모르게 겁을 줬나?’
여자가 제대로 노려보면 그것만으로 윽하고 쓰러져 죽는 것이 파이엔의 인간들이었으니까.
‘그래, 앞으로는 잘해주자.’
오르지 못 할 나무라도 쳐다는 볼 수 있는 법이었으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의 자애로움에 살짝 감탄한 여자는 무릎 꿇고 앉아 감동하고 있는 에스멜란다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에스멜란다는 너무나 큰 자극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부, 부럽다.’
벨가드가 그리 생각하며 머리를 슬쩍 내밀었지만 여자는 에스멜란다가 부들부들 떠는 모습에 얼른 손을 거둔 뒤 말했다.
“놈들의 공격에 잠시 공백이 생겼지만 이내 다시 몰아칠 거다. 서둘러 대형을 갖추어라.”
“알겠습니다.”
“명을 따르겠습니다.”
벨가드와 에스멜란다가 얼른 답한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자는 그대로 손을 흔들어 둘을 보내려 했지만 눈물범벅이 된 에스멜란다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으음, 힘내라. 죽지들 말고. 아무리 마왕군의 원흉과 싸우는 거라지만 이계까지 와서 죽을 순 없잔니. 나의 축복이 그대들과 함께 하기를.”
조금 두서없이 말하다 축복을 내렸다. 검지와 중지를 입술 위에 얹었다가 휘두르는, 간접이라고 하기도 뭐한 원거리 키스였다.
하지만 용신왕의 것이었고, 벨가드와 에스멜란다는 심장이 아픈 사람처럼 가슴을 부여잡으며 감동했다.
그리고 실제로 상당한 효과가 있어 두 사람 모두 힘과 마력 모두가 증대되었다.
“아무튼 이제 가렴.”
““네에♥””
벨가드와 에스멜란다가 천사들과 비슷한 대답을 하며 물러갔다.
‘음, 어쩌면 나 때문일지도.’
태호를 만난 천사들이 보이는 반응은 대체로 여자를 둘러싼 존재들이 보이는 반응과 비슷했으니까.
어찌되었든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었다. 여자는 새로운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 돌아섰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계의 신성이시여. 저는 승리의 신입니다.”
이브나일과 치유의 신은 승격 의식을 위해 루시엘을 데리고 성소 가장 깊은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질서의 신은 요새 장악에 한창 힘을 쏟고 있었다.
검의 신은 살인의 신과의 싸움에서 생긴 상처를 수습하고 있었다.
때문에 소거법상 미궁 세계의 대표가 되어 여자에게 인사할 자는 승리의 신뿐이었다.
“반갑습니다. 파이엔의 용신왕이자 파괴신입니다.”
여자는 말했고, 마지막에 가서는 웃고 말았다. 진지한 자리였지만 스스로가 생각해도 너무나 어색한 자기소개들이었기 때문이다.
여자가 웃자 본래 격식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승리의 신 역시 따라 웃었다.
“우리 애가 신세 좀 졌죠?”
여자가 웃으며 말하자 승리의 신은 움찔하더니 바짝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군대의 신과 보급의 신에게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였다.
이렇게 도와주러 오긴 했지만, 여자의 입장에서 자신들은 아들을 납치한 뒤 부려먹은 천하의 불한당들일 뿐이었으니까.
“그… 죄, 죄송합니다. 세계의 위기가 닥쳐와서… 그, 미궁 세계 자체가 영웅을…….”
승리의 신이 나름 열심히 변명을 입에 담았지만 말 그대로 변명일뿐이었다.
얼굴이 빨개진 채 어찌어찌 말을 잇는 승리의 신의 모습을 가만히 감상하던 여자는 피식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괜찮아요.”
“네?”
“괜찮다고요.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지만.”
“감사… 네?!”
승리의 신이 다시 놀라 눈을 깜박였다.
아니, 괜찮다며. 그런데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다니. 대,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승리의 신이 바짝 긴장한 채로 여자를 보았고, 여자는 속으로 생각했다.
‘진짜 순둥이들이네.’
왜 선신들인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밖에서 미궁 세계를 관찰한 여자는 어째서 선신들이 이러한지 또한 이해할 수 있었다.
“정산은 나중에 할 테니 걱정하지 마요. 일단 눈앞의 적부터 막아야지. 안 그래?”
“네, 네에.”
나름 선신들 중에서는 한성질하는 승리의 신이었지만 이상하게 여자 앞에서는 기를 펼 수가 없었다.
애당초 잘못한 일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묘하게 여자의 말을 그대로 따르고 싶었다.
‘어, 언니라고 부르고 싶다.’
생전 처음 느끼는 묘한 충동 속에서 승리의 신은 간신히 자신을 억눌렀다. 여자가 은근슬쩍 말을 놓았지만 그것 역시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 현재 저희들의 계획은…….”
“응, 우리 천사 며느리… 그러니까 루시엘을 다섯 번째 여신으로 승격시켜서 마신에게 맞설 생각인 거지?”
“그, 그걸 어떻게?”
“설명하면 길어. 아무튼 어떤 계획인지는 알고 있어.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만… 어쩌면 하루 가까이 시간이 걸릴 지도 모릅니다.”
“주신을 하나 새로 만드는 거니 하루도 짧다고 할 수 있지만… 쉽진 않겠네.”
그리 말한 여자는 입술을 깨물었지만 잠깐뿐이었다. 어차피 천호가 천마신공의 진정한 힘을 깨우쳐 온전한 야차신왕의 화신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도 시간은 필요했다.
“버텨보자. 나도 최선을 다할 테니까.”
“네, 네에.”
“귀엽네. 예쁘기도 하고.”
“네?”
“너 귀엽다고.”
여자가 까르르 웃자 승리의 신이 얼굴을 붉힌 채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리고 그런 승리의 신의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노력의 신과 우정의 신은 생각했다.
‘누님이 왜 저러지?’
‘누님이 이상해졌어.’
하지만 여유부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여자는 승리의 신의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마신 놈이 지금 공격하지 않는 건 숨고르기를 위해서야. 이제 곧 다시 물밀 듯이 밀려오겠지. 제대로 방어해보자. 알겠지?”
“어, 으… 네에.”
승리의 신이 부끄러워하며 답했다. 여자는 그런 승리의 신을 가만히 살펴보다가 기회라는 듯이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도 소개시켜줄 녀석들이 좀 있는데 말이야.”
“소개요?”
“어, 본래 너희랑 싸우던 애라 바로 부르기 좀 그래서. 그치만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잖아? 그리고 마신과의 싸움에는 확실히 도움이 될 거야. 전향도 확실히 했고.”
여자의 설명을 가만히 듣던 승리의 신은 눈을 깜박였다.
대신들 가운데서는 다소 생각이 짧은 편인 승리의 신이었지만, 대강 예상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악신이?!”
“응, 악신이야. 완전한 악신은 아니지만. 아무튼 이제 나오렴, 혼란아.”
여자가 손을 흔들자 허공이 열렸고, 그 안에서 혼란의 신과 미혹의 신이 걸어나왔다.
혼란의 신은 잔뜩 굳은 표정을 지은 채 긴장하고 있었고, 미혹의 신은 혼란의 신의 등 뒤에 숨어 털을 바짝 세운 고양이처럼 주변을 경계했다.
“쟤도 예쁘고 귀여워. 마신 놈이 어떤 놈인지 여기 있는 누구보다 제일 잘 알고 있고. 그러니까 이번 싸움에서만큼은 서로 의심하거나 미워하지 말고 힘을 합치자. 알겠지?”
타이르듯 말하자 얼결에 고개를 끄덕인 승리의 신은 혼란의 신과 미혹의 신을 보았고, 혼란의 신과 미혹의 신 역시 승리의 신을 보았다.
여자가 말했다.
“시간 없으니까. 빨리하자. 악수들하고.”
여자가 말하자 혼란의 신과 승리의 신이 반사적으로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얼굴들이었지만 일단 악수를 하였다.
“포옹도 해.”
여자의 추가 요구 역시 따랐다. 승리의 신과 혼란의 신은 서로를 포옹하며 진한 혼란을 느꼈다.
“미혹이도.”
“으, 네.”
미혹의 신 역시 승리의 신과 악수와 포옹을 나누었다.
여자의 말에 참으로 순종적인 선신과 악신들이었다.
“좋아, 그럼 일단 나도 너희 쪽의 지시를 따를게. 사령탑이 여러 개면 어떤 군대는 제대로 굴러가질 않을 테니까.”
“저, 정말인가요?”
“응, 정말이야. 그래서 너희 지휘자는 누구야? 이브나일은 못 나설 것 같고, 이대로 네가 지휘해?”
“아, 아뇨. 저는 아닙니다. 이제 곧 치유의 신이 올 겁니다.”
루시엘의 승격 의식에 필요한 것은 이브나일이지 치유의 신이 아니었으니까.
“흠, 좋아. 그럼 일단 이대로 방어진형을 굳히도록 하자. 네 말대로면 치유의 신도 곧 올테니, 우리쪽의 계획은 그때 이야기하도록 할게.”
“언니… 아, 아니. 용신왕님 측의 계획이요?”
“그래, 우리 쪽의 계획. 그리고 우리 쪽의 전력.”
여자의 등장은 화려했다.
태양의 탑에 거하는 여자의 수하들과 성왕국의 장병들의 등장 역시 너무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남자의 인상은 더욱 흐려졌다.
폭력의 신을 단숨에 제압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활약은커녕 존재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는 알았다.
마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 정말로 필요한 것은 남자였다.
신을 사냥하는 밤의 짐승.
마신 역시 신이었다. 신성을 지닌 존재였다.
‘두 마리면 어떻게든 되겠지.’
천호.
미궁 세계의 용사이자 태양의 신인이며 동시에 야차신왕의 화신.
루시엘만이 아니었다.
천호 역시 필요했다.
천호가 18대 천마로 등극하기 위한 시간 역시 벌어야만 했다.
“슬슬 오는 거 같네.”
여자가 시선을 멀리했다.
저만치 멀리서 새로운 마물들의 해일이 밀려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마신은 물량으로 이쪽을 지치게 할 요량인 것 같았다.
승리의 신이 마른침을 삼켰다.
혼란의 신과 미혹의 신 역시 조금이지만 두려움을 드러냈다.
여자는 그런 여신들의 어깨를 안았다. 씩 웃으며 말하였다.
“걱정하지 마, 멋진 모습을 보여줄게.”
여자가 윙크했고, 혼란의 신과 승리의 신과 미혹의 신은 뺨을 붉혔다.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며 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에♥”
여자는 다시 웃었다. 위풍당당하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 * *
같은 시각, 성소의 외곽이 아닌 깊은 곳.
남자와 천호는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17대 천마.
남자가 밝힌 또 하나의 정체에 천호는 당황하기보다는 납득했다.
‘천마신공을 사용하시니까.’
천마니까 천마신공을 사용한다.
너무나 단순 명쾌한 명제였다.
천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쓰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도 궁금했을 거다. 무림도 아니고 판타지 세상 간 사람이 왜 뜬금없이 천마신공을 가르쳤는지.”
남자의 말에 천호는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그러했으니까.
‘사실 뜬금없기는 호세사천왕도 마찬가지지만.’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 무림인이 등장한 적은 없었다.
아버지는 어디서 천마신공과 호세사천왕을 익히신 걸까.
그리고 천마신공이 야차신왕의 진정한 화신으로 거듭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어째서일까.
“아들아, 예전에 내가 한 이야기 기억하냐?”
“무슨 이야기요?”
“우리 집안엔 용사의 피가 흐른다.”
천호는 눈을 깜박였다.
새삼스럽게 무슨 이야기를 하냐는 얼굴이 되어 남자를 보았고, 남자는 바로 답하는 대신 그저 천호를 응시하였다.
그렇게 몇 초.
천호는 깨달았다. 저도 모르게 소리를 쳤다.
“서, 설마?!”
“그래, 나뿐만이 아니다.”
아버지의 선조.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용사의 피.
“자, 잠깐만요. 그럼 우리 집안에 용사가 나랑 아버지만이 아니라고요?”
“응.”
“설마 할아버지?”
“아니, 할아버지는 아니셨고, 고조할아버지.”
“고조할아버지요?”
“응, 나한테는 증조할아버지가 되시는 그분.”
고조부도 용사셨다.
천호는 잠시 멍한 얼굴이 되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다시 물음을 일었다.
“저기, 말인즉 고조할아버지도 이계에 소환되셨다는 건가요? 용사로서?”
“어··· 이계에 다녀오시긴 했는데, 정식으로 용사로서 소환된 건 너뿐이다. 나도 사실 우연찮게 날아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용사가 된 경우니까. 이야, 이렇게 말하고 보니 네가 엘리트처럼 느껴진다. 뭔가 정식 루트를 제대로 밟은 느낌?”
“아니, 아니. 잠깐만요.”
천호는 다시 고개를 내저었다. 천사들과 선신들 앞에서는 언제나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며 냉정 침착한 모습을 보이던 천호였지만, 상대는 아버지였다. 감추고 자시고 할 것은 조금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