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194화 (194/211)

“루시엘이 승격 의식을 치를 동안 성소를 지켜내야 해요!”

“그래, 일단 확인 차 묻지만 의식에 너랑 성검 며느… 아니, 성검 양은 필요 없지?”

“네? 어, 네.”

[서, 성검 며느리…….]

성검 미트라와 마검 미트라가 몸을 베베 꼬며 부끄러워했고, 처음 보는 미트라의 모습에 레온은 당황했다.

그리고 남자는 ‘역시 둘 다인가…….’라는 말을 작게 중얼거린 뒤 다시 천호를 보며 말했다.

“좋아, 그럼 넌 나랑 성소에 틀어박힌다. 방어는 네 엄마랑 여기 신들에게 맡기는 수밖에 없다.”

“아버지?”

되물은 그때였다. 이브나일이 다섯 여신의 힘을 발해 숨겨져 있던 다섯 번째 여신 아이라의 성소를 일깨웠다.

우선적으로 지면이 흔들렸다. 그리고 이내 세계가, 마신의 모형정원 일부가 깨져나갔다.

“아이라!”

이브나일이 소리쳤다. 그리고 그에 호응하듯 깨져나간 틈바구니에서 황금빛이 일었다. 하얗고 거대한 요새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러 개의 성곽을 갖춘 이동 요새.

한 번에 수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그것은 직경이 수백 미터에 달하는 거대함을 자랑했다.

이브나일이 다시 한 번 힘을 발하자 요새 자체로부터 신성한 힘이 방출되었다. 오랜 옛날 아이라가 저장해두었던 그녀의 신성이었다.

성소를 중심으로 주변에 자리한 모형정원이 뒤틀렸다. 마신이 세운 인공물이 사라지고 미궁 세계 본래의 모습을 드러냈다.

“입성하라!”

치유의 신이 명령했고, 군대의 신이 뿔피리를 불었다. 파이엔의 용군단이 다시 한 번 브레스를 내뿜어 성소 주변의 마물들을 일소하였다.

“서둘러!”

“방어대형을 갖춰라!”

이미 이브나일을 통해 요새에 대해 파악해두고 있던 선신들이 앞장서서 천사들과 영웅들을 지휘했다. 순식간에 요새 곳곳에 자리를 잡아 방어 대형을 갖췄다.

천호도 모두와 함께 성소 안에 들어섰다.

신의 모시는 신전이라기보다는 전투 요새 그 자체인 그 곳에서 일단 멈춘 뒤 루시엘을 불러냈다.

“용사님. 그리고 아, 아버님.”

합체를 푼 루시엘이 천호와 남자에게 각기 인사했다.

다급한 와중이었지만 남자는 루시엘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스스로를 소개한 뒤 말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단다. 만나서 정말 반갑구나.”

“네, 아버님.”

루시엘이 환한 미소를 지었고, 남자는 저도 모르게 루시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시엘이 너무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으, 으음. 나도 밖으로 나갈까?]

미트라가 작게 중얼거린 그때였다. 치유의 신과 이브나일이 도착했고, 남자는 이브나일에게 말했다.

“천호의 아비 되는 사람입니다.”

“어… 음. 나는… 아니, 저는 미궁세계의 다섯 여신 가운데 하나인 이브나일입니다. 조력에 감사합니다.”

“곤경에 처한 이를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남자는 씩 웃었고, 이브나일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혔다. 단순한 말이었지만, 웃으며 저리 말하는 남자의 모습과 말이 너무나 가슴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이모님.”

“아, 그래. 음음. 이계의 조력자시여.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기에 정식으로 예를 표하지 못 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금방 정신줄을 잡은 이브나일이 예를 표하며 말하자 남자는 이번에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다급한 상황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버님, 그럼 일단 루시엘을 데리고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천호, 성소를 부탁한다.”

아직 버벅이는 미트라와 루시엘과 달리 너무나 자연스럽게 아버님이라 말한 치유의 신은 천호에게 눈짓한 뒤 루시엘과 이브나일을 데리고 성소 중앙으로 향했다.

“아버지.”

“그래, 아들아. 부러워 죽겠구나.”

“네?”

반사적으로 되물은 천호는 이내 ‘아!’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약간은 부끄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가만히 눈치를 살피던 마검 미트라가 정신 세계 속에서 성검 미트라의 등짝을 때렸고, 용검과 신검도 성검에게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지금이었다.

지금이 아니면 인사할 틈조차 만들기 어려웠다.

“아, 아버님. 인사드립니다. 성검 미트라입니다.”

실체화한 미트라가 남자에게 꾸벅 배꼽 인사를 하였다.

남자는 갑자기 나타난 미트라를 보며 잠시 당황하더니 이내 루시엘을 대했을 때처럼 환한 미소를 지었다.

“반갑습니다.”

“네, 저도… 아, 아버님? 왜 저한테 존대를…….”

루시엘에게는 그냥 반말을 했었는데 왜.

미트라의 물음에 남자는 약간 어설픈 얼굴이 되어 말했다.

“그… 일단 저보다 연상이시니…….”

이제 십대 중반인 루시엘과 달리 미트라는 수백 년 이상을 살아온 성검이었으니까.

가만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천호가 ‘그것도 그렇네요.’하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어쩐지 모를 위기감을 느낀 미트라가 급히 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 아뇨! 실제로 활동한 시기는 몇 십년 밖에 안 됩니다. 대부분 자고 있었어요!”

[마, 맞아! 그냥 자고 있었다고! 나이로 치면 안 돼!]

마검 미트라도 목소리를 보탰다.

용검 역시 정신 세계 속에서 소리쳤다.

[활동한 시기는 레온이 늙을 때까지니까…… 육십년 정도 밖에 안 돼!]

[맞아, 맞아! 겨우 육십 살이야! 수백 살 아니야!]

용검의 말에 마검이 동조했고, 신검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내저었다. 방금 발언은 어떻게 봐도 실책이었다.

“어… 음, 그래도 저보다 연상이시라…….”

“유, 육십살.”

남자는 어설프게 웃었고, 천호는 새삼 다가온 미트라의 나이에 눈을 껌벅였다.

그리고 성검 미트라는,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은 마검과 용검의 자폭에 피탄되어 어쩔 줄을 몰라했다.

[[으앙!]]

마검과 용검이 울었고, 성검도 따라 으앙 삼중주를 하려는 그때, 다행히 이성이 남아있던 신검이 말했다.

[아무튼 서두르도록 하자. 지금 이 순간에도 밖에서는 싸움이 이어지고 있을 터이니.]

신검의 말대로였다.

천호는 으앙을 터트리기 일보직전인 미트라를 일단 다시 정신세계로 돌려보낸 뒤 남자를 보았다.

“아버지, 저도 성소에 남아야 한다는 건 무슨 말씀이시죠?”

“밖에서 시간을 버는 동안 너도 해야 할 일이 있다.”

“해야 할 일이요?”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생긴 것은 투박한 요새 같지만 온통 새하얀 성소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천호에게 설명했다.

“기본적으로 신들은 다른 세계에 가면 힘이 저하된다. 애당초 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자신의 세계에게 힘을 받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홈그라운드 보정이 엄청 세게 들어간다는 거죠?”

“그래, 때문에 네 엄마는 지금 제대로 된 힘을 낼 수 없다. 평소의 30% 정도가 한계인 상황이다.”

[저, 저게요? 저게 30%라고요?!]

마검 미트라가 깜짝 놀라 소리쳤고, 천호 역시 무어라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당황한 얼굴이 되었다.

남자는 계속해서 말했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네 엄마 정도는 아니지만, 평소의 70% 정도밖에 힘을 쓸 수 없다.”

남자는 파이엔 태생의 신은 아니었지만, 파이엔에서의 업적으로 말미암아 파이엔의 신성을 일부 가지게 되었다.

때문에 남자 역시 크게 보면 파이엔의 신이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굳이 설명하지 않았지만, 사실 여자의 제약은 좀 더 심했다. 여자는 파괴신의 힘을 제대로 사용할 수 없었다.

물론 강림 직후 내쏜 드래곤 브레스에는 분명 파괴신의 힘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불완전했다. 파이엔에서처럼 자유롭게 쓸 수 없었다.

여자가 굳이 무리를 해가며 파괴신의 힘을 사용한 것은 일종의 허세였다.

마신이 여자의 전력을 과대평가하게 만든다.

함부로 움직이지 못 하게 한다.

조금이라도 더 고민하게 만들어 잠깐의 시간이라도 더 만들어낸다.

상대가 이쪽을 얕볼 때만 이점이 생기는 것이 아니었다. 이쪽을 과대평가함에 따라 만들어지는 이점 역시 존재했다.

“네 엄마는 확신하고 있다. 미궁 세계에서 가장 강한 것은 마신이다. 파이엔이 아닌 이곳에서는 나도 네 엄마도 마신을 이길 수 없다.”

남자의 단언에 마검 미트라가 숨을 삼켰다.

천호 역시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네가 있다. 미궁 세계에서 용사로 각성한 네가, 미궁 세계에서 신성을 키워온 네가 있다.”

남자와 여자는 마신을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천호가 함께한다면.

그리고 이브나일의 계획이 성공한다면.

“너는 아직 약하다. 70%의 힘밖에 쓰지 못 하는 나보다도 약해. 하지만 강해질 수 있다. 시간이 촉박한 만큼 부작용이 뒤따를 방법을 사용해야하지만, 너는 지금보다 강해질 수 있어.”

루시엘이 다섯 번째 여신으로 승격하는 동안 천호 역시 강해진다.

강해져야만 한다.

하지만 어떻게.

천호는 순간 깨달았다. 저도 모르게 입밖에 내었다.

“야차신왕.”

천호도 알았다.

천호의 야차신왕은 불완전했다.

온전히 야차신왕의 힘을 이끌어낼 수 없었다.

“그래, 야차신왕. 나는 널 진정한 야차신왕의 화신으로 승격시킬 거다.”

남자의 말에 마검 미트라가 다시 마른침을 삼켰다. 성검 미트라가 물었다.

[아버님, 야차신왕에도 승격 의식 같은 것이 있는 건가요?]

약간은 어색한 말투로 묻자 남자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본래 이렇다 할 의식은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부터 하려는 일은 의식에 가깝긴 합니다.”

[저… 그, 그냥 말을 편히 하셔도…….]

미트라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음, 알겠다. 아무튼 나는 천호에게 결여된 것을 채워줄 생각이다.”

지금의 천호에게 부족한 것.

진정한 야차신왕이 되지 못 하는 이유.

“천호야, 내가 너한테 가르친 것들 기억 하냐?”

“네, 아버지.”

달 세뇨 왕국검법을 시작으로 하여 호세사천왕까지.

아버지께 배운 수많은 기예들.

“그중에 아직 하나 제대로 사용하지 못 하는 것이 있지?”

여명의 검을 습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히 깨우치지 못 한 것.

제대로 사용하지 못 해 부분적으로만 응용하고 있는 것.

“아.”

천호는 목소리를 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의 말을 이해했으니까.

무엇이 부족한지 알았으니까.

두 번째 캐리어들이 왔을 때 아버지는 호세사천왕의 비급을 보내주셨다.

이제 내공을 사용할 수 있을 터이니 혼자서 익혀보라고.

호세사천왕.

야차신왕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

하지만 천호가 배운 무공은 호세사천왕만이 아니었다.

비록 기초라고는 하나 함께 배운 무공이 있었다.

“천마신공.”

남자가 말했다.

남자가 천호에게 천마신공의 기초를 가르친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순수한 야차가 아닌, 인간의 피가 섞인 남자와 천호가 진정한 야차신왕의 화신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천마신공이 필요했으니까.

시간이 없었다.

밖에서는 여전히 싸움이 계속되고 있었다.

마신은 지금 이 순간에도 힘을 회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수련을, 시작하자.”

삼라만상 모든 것을 발아래 두는 천마의 힘을 손에 넣기 위해.

그로 말미암아 진정한 야차신왕의 화신으로 거듭나기 위해.

천호가 숨을 토했다.

남자가 웃으며 야차신왕의 힘을 거두었다.

17대 천마로서 천마의 힘을 발하였다.

제35장 - 승격

[미궁 세계가 당신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 * *

다섯 번째 여신 아이라의 성소는 애당초 신전이 아닌 요새로 설계된 곳이었다.

요새에 들어선 순간 여자는 알 수 있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평범한 요새가 아니었다.

‘정말 성소구나.’

태양의 탑은 여자의 성소였다. 때문에 여자는 태양의 탑에서는 평소 이상으로 강한 힘을 사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밖에서는 할 수 없거나 힘든 일조차 해낼 수 있었다.

이 성소 또한 그러했다.

더욱이 특권의 대상이 되는 이들의 범위가 참으로 넓었다.

하늘과 땅 곳곳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여자와 달리 태양의 탑의 드래곤들은 드래곤 형태일 때만 진정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수백에 달하는 드래곤들이 성곽과 하늘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니, 요새 전체가 드래곤들에게 뒤덮이다시피 하였다.

“용신왕이시여, 저희는 어찌하나이까.”

성왕국에서 온 장병들을 이끄는 신성기사단장 벨가드와 대마법사 에스멜란다가 공손히 예를 갖추며 물었다.

벨가드는 덩치가 무척이나 큰 거한으로, 성왕국에서는 남자 다음으로 강한 완력을 가진 자로 유명했다.

대머리였지만 멋진 수염을 가지고 있었고, 인성 역시 좋았기에 여자도 제법 마음에 들어하는 자였다.

하지만 옆에 자리한 에스멜란다는 아니었다.

여자의 몸으로, 그것도 이십대 후반의 젊은 나이로 대마법사의 경지에 오른 그녀는 소위 말하는 천재였다.

여자도 그건 인정했다. 인간들 중에서는 정말 손에 꼽을 마법의 천재이기는 했다.

말 좋아하는 호사가들이 그녀가 10년만 일찍 태어났다면 마왕전쟁- 남자가 마왕을 쓰러트린 전쟁의 기간이 훨씬 짧아졌을 거라 떠드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냥 우리 자기가 태양의 탑을 조금만 더 일찍 들어왔으면 되었을 텐데.’

그럼 여자 자신과도 훨씬 더 일찍 만났을 터이고, 여자의 도움을 받아 마왕전쟁도 더 빨리 끝냈을 테니까.

‘아니지, 미숙했을 당시의 자기면 나한테 그냥 죽었으려나.’

잠시 딴생각을 한 여자는 이내 고개를 가로젓고 다시 벨가드와 에스멜란다를 보았다.

여자가 벨가드와 달리 에스멜란다를 꺼려하는 이유는 단순했다.

에스멜란다는 남자를 좋아했다.

성왕국의 인간들치고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 자는 극히 드물었지만, 그치들이 전부 몸매 좋은 금발 미녀인 것은 아니었으니까.

물론 에스멜란다가 아무리 예뻐 봐야 자타공인 파이엔 제일의 미녀인 여자에는 미치지 못 하였지만, 그래도 신경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최고급 스포츠 카만 타던 사람도 가끔은 평범한 차를 몰고 싶어지지 않던가.

‘뭐, 진짜로 그럴 리는 없겠지만.’

여자에게 있어 남자가 유일무이한 반려이듯, 남자에게 있어서도 여자는 유일무이한 반려였으니까.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야.’

물론 여자는 용신왕이자 파괴신이며 다 큰 아들을 둔 어머니였기에 대놓고 싫은 티를 내지는 않았다.

“벨가드, 에스멜란다. 그대들도 선신들의 명을 따르라. 선신들의 성향상 그럴 리가 없지만, 혹여 그대들을 너무 방패막이로 세우려 한다면 거부하고 즉각 내게 전해라.”

거기까지 말한 여자는 품에서 작은 브로치 두 개를 꺼내 벨가드와 에스멜란다에게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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