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192화 (192/211)

“크하하하하하!”

폭력의 신이 광소를 터트렸다. 황소의 머리를 가진 미노타우로스인 그는 이명 그대로 무자비한 폭력을 치유의 신에게 쏟아부었다.

치유의 신은 치유의 검 수백 자루로 벽을 만들어 폭력의 신의 공격을 막아냈다.

폭력의 신이 주먹을 한 번 내지를 때마다 치유의 검 수십 자루가 부서지고 파괴되었다.

폭력의 신이 신성을 발했다. 치유의 신 역시 급히 신성을 발해 폭력의 신의 신성에 맞섰다.

두 대신의 신성이 충돌하니, 그 여파로 어마어마한 힘의 급류가 생겨나 주변을 휩쓸었다.

폭력의 신은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치유의 신은 아니었다. 급히 손을 놀려 힘의 급류가 천사들에게 향하는 것을 막았다. 오직 마물들만을 향하도록 급류를 비틀었다.

“쓸데없는!”

폭력의 신이 급류를 조작하는 치유의 신을 덮쳤다. 주먹과 발을 모두 사용해 폭풍같은 연격을 퍼부어대니, 치유의 신도 더 이상 힘의 급류를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노옴!”

치유의 신이 노성을 토하며 폭력의 신에 맞섰다. 다섯 여신을 제한다면 최강을 논해도 좋을 치유의 신이었다. 비록 육체에 있어서는 폭력의 신의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막강한 신력으로 그 차이를 메꾸었다.

폭력의 신과 치유의 신이 정면에서 난타전을 펼쳤다.

폭력의 신은 치유의 신의 공격을 몸으로 받아냈고, 치유의 신은 필사적으로 폭력의 신의 공격을 흘리고 막아냈다.

검의 신과 살인의 신의 싸움도 비슷했다. 어느 한 쪽도 쉬이 우위를 점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검의 신은 미궁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검사였다.

살인의 신은 미궁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도살자였다.

검과 검이 교차할 때마다 피가 튀었다. 양측 모두 서로의 공격을 완벽하게 막아내지 못 했다.

신성의 충돌로 인한 폭풍이 곳곳에서 일었다.

능욕의 신이 승리의 신과 싸웠다.

비탄의 신이 질서의 신을 방해했고, 고통의 신이 아직 대신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 한 선신들을 급습했다.

멸망의 신이 심층의 소악신 수십을 이끌고 천호와 레온의 앞을 가로막았다. 목표는 이기는 것이 아니었다. 천호와 레온이 다른 선신들을 돕지 못 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악신들의 노림수는 어긋나지 않았다.

이미 마물들을 상대로 상당한 힘을 소모한 선신들은 지친 상태로 악신들에 맞서야만 했다.

싸움이 한층 더 격렬해졌다.

마신의 주박에 걸린 마물들은 비명과 울부짖음을 토하면서도 돌진을 멈추지 않았다. 자신들이 신성의 폭풍에 휩쓸려 죽을 거란 사실을 알면서도 멈추지 못 했다. 마신이 그것을 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싸움이 한층 더 격화되었다.

동시에 선신들의 진군이 멈추었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 했다.

천사들의 진영 한복판에 자리한 이브나일은 땀을 비처럼 흘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급변하는 전황 전체를 신의 시야 속에 담으며 생각했다.

시간이 필요했다.

아주 잠깐이라도 좋았다.

주변에 가득 메운 마물들을 일소할 수 있다면.

잠시라도 마물들을 막아낼 벽을 세울 수 있다면.

아이라의 성소에 닿을 수 있었다. 작금의 상황을 일거에 역전할 수는 없었지만, 훨씬 더 좋은 상황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아이라의 성소는 그저 성소가 아니었으니까. 아이라가 남긴 최후의 요새였으니까.

하지만 무리였다.

당장에는 방법이 없었다.

더 이상 지원군이 없었다. 설사 있다 해도 지원군을 모으고 기다릴 시간 따위 없었다. 애당초 불완전한 병력을 이끌고 돌입한 이유부터가 시간 때문이지 않던가.

역시 무리였다.

이브나일 자신이 모든 것을 망치고 말았다.

하지만 이브나일은 주저앉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다시 한 번 힘을 발했다.

아직 영웅들이 싸우고 있었으니까.

천사들이 싸우고 있었으니까.

과거의 용사와 현재의 용사가 포기하지 않았으니까.

‘아이라.’

힘을 쥐어짜내며 이브나일은 기도했다.

기원하고 소망했다.

그리고 그 간절함에 응답하는 이가 있었다.

* * *

에이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저 끝도 없이 회복 마법을 반복할 뿐이었다.

비명과 울부짖음, 포효에 귀가 멀 것만 같았다.

라구엘도 다르지 않았다. 순백의 날개를 가진 천사들 사이에서 홀로 검은 날개를 가진 그녀는 마물들의 시신들을 되살리고 또 되살렸다. 마력과 체력 모두가 바닥나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런 라구엘과 에이젤의 곁을 지키며 창을 휘두르던 아우라엘이 어느 순간 뒤를 돌아보았다. 정확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본능이라 해도 좋을 이끌림.

그렇기에 아우라엘은 볼 수 있었다.

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지만, 자신의 눈을 의심했지만, 바로 인정했다. 라구엘의 어깨를 흔들어 자신과 같은 곳을 보게 하였다.

라구엘이 입을 벌렸다.

뒤늦게 돌아본 에이젤이 그렇지 않아도 큰 눈을 정말로 크게 떴다. 한창 싸우던 와중임에도 불구하고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오르며 환호했다.

삼인방의 행동에 주변에 있던 천사들과 영웅들도 반사적으로 하늘을 보았다. 심지어는 마물들도 그리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삼인방이 어찌하여 저리 흥분하는지.

왜 환희에 차 울부짖는지.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삼인방의 행동을 이해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녀들과 똑같이 행동하는 자들이 있었다.

마물들을 상대로 여섯 자루의 검을 동시에 휘두르던 마키나가 포효했다.

최초의 대장간 앞에서 보았던 그때의 광경을, 악신들과 마물들에게 포위되어 끝이라 생각했을 때 순간 마주하였던 기적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크리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뺨을 발갛게 물들이며 기뻐했다.

정화의 신이 멍하니 바라보았고,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이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에이젤이 그러했던 것처럼 폴짝폴짝 뛰며 기뻐했다.

군대의 신이 웃었다.

바로 곁에 있던 보급의 신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당황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저 웃고 또 웃었다.

“진짜 오네.”

기병의 신이 말했다.

멸망의 신의 공격을 막아낸 대가로 라크슈미와 함께 뒤로 크게 밀려난 그녀는 거친 숨을 토했다. 턱선을 따라 흐르는 선혈을 닦아내며 미소지었다.

능욕의 신과 대적하던 승리의 신은 눈을 깜박였다.

살인의 신과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하늘을 돌아본 검의 신 역시 무엇인지 몰라 미간을 좁히며 약간이자만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하지만 치유의 신은 아니었다.

폭력의 신과 한 대씩 주고받은 결과 바닥에 처박힌 그녀는 그대로 하늘을 보았다. 멀리서 몸을 일으켜 세우는 폭력의 신을 주시하는 대신 조금은 멍한 목소리를 흘렸다.

“아아, 저거구나.”

직접 육안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그간 루시엘의 눈을 통해 참으로 여러 번 마주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치유의 신은 천호와 함께 했던 이들처럼 환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천호도 보았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웃음을 터트렸다.

미트라도 그랬다.

루시엘도 같았다.

성검과 마검과 용검과 신검이 천사와 함께 소리쳤다.

[[[[[어머님!]]]]]

이브나일도 보았다.

마신도 보았다.

어두운 밤하늘 너머.

황금빛 캐리어들이 날아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옥좌 위에 앉아 전장을 굽어보던 마신은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떴다.

절망 속에서 기도하던 이브나일 역시 당혹으로 눈을 깜박였다.

하늘을 가르는 황금빛 캐리어들.

단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미궁 세계의 주신인 마신과 이브나일은 느낄 수 있었다. 직감할 수 있었다.

저 캐리어들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저 캐리어들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

마신은 이브나일을 보았다.

이브나일은 마신의 시선을 느꼈다.

그리고 동시에 깨달았다.

양쪽 모두 생각지 못 한 것이었다.

어느 쪽도 고려치 않은 상정외의 전력이었다.

그렇기에 예측하기 어려웠다.

작금의 전장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어떠한 변수를 만들어낼 것인지.

마신과 이브나일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황금빛 캐리어들 사이로- 아니, 황금빛 캐리어들을 거느린 채, 진짜가 오고 있었다.

* * *

군대의 신은 계속해서 웃었다. 폐부 끝에서부터 끌어올린 통쾌한 웃음이었다.

계속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던 보급의 신도 결국엔 깨달았다. 저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이해했다.

“아아, 아아아!”

심층에서 이야기했던 것.

당장은 기대할 수 없는 전력.

하지만 갈망했던 전력.

“왔구나, 정말로.”

보급의 신도 군대의 신을 따라 웃었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했다.

용사의 부모님이 정말로 화를 내면 어떡하지?

설마 지금 화를 내지는 않겠지?

보급의 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찌되었든 좋았다. 황금빛 캐리어들을 향해 손을 뻗었고, 그것들 사이에 자리한 이에게 환호성을 보냈다.

군대의 신도 그리하였다.

하늘과 땅이 모두 알 수 있도록 있는 힘껏 뿔피리를 불었다.

* * *

“이해할 수 없어.”

캐리어의 등장과 천사들의 환호로 인해 순간 정지한 전장 속에서 살인의 신이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살인의 신과 대적하고 있던 검의 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선신들에게 의외의 원군이 왔다.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로 환호할 일인지에 관해서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분명 강력한 기운이었다.

하지만 기껏해야 대신 하나에서 둘.

황금빛으로 빛나는 상자들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십여 개에 불과했다. 반면 지금도 계속 모여들고 있는 마물들의 숫자는 수십만을 우습게 헤아렸다.

겨우 저것으로 무엇이 변한다는 것일까.

과연 저것의 등장이 이토록 환호할 일인 것일까.

검의 신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그녀 또한 심층에서 용사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사실 그렇게까지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지금.

검의 신은 생각했다.

대신에 준하는 힘을 가진 존재가 둘.

전황 전체를 뒤엎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도움 자체는 되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선신들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하늘의 은혜였다.

때문에 검의 신은 잡스런 생각들을 버렸다. 그저 전력이 늘어났다는 사실에 감사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살인의 신과 검의 신이 다시 싸움을 재개하기 위해 서로를 마주한 순간.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다시 하늘을 돌아보았다.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멍한 목소리를 흘렸다.

그리고 둘은 이번에도 동시에 깨달았다.

자신들이 완전히 잘못 생각했다는 사실을.

“맙소사.”

검의 신이 저도 모르게 말했고, 살인의 신은 마른침을 삼켰다.

* * *

가장 먼저 깨달은 것은 승리의 신이었다.

아니, 깨달았다기보다는 직감했다는 것이 옳았다.

승리의 신은 이름 그대로 승리의 신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번 전투가 더 없이 절망적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승리의 빛이 너무나 작았다.

어둠 속에 파묻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황금빛 캐리어들이 하늘 너머에서 등장한 순간.

어둠 속에서 승리의 빛이 일기 시작했다.

아직은 작았다.

여전히 어둠이 더 짙고 강했다.

하지만 더 이상 칠흑이 아니었다.

빛이 있었다.

그리고 그 빛은 점점 더 강해져 갔다.

어느 순간 승리의 신이 포효했다.

그리고 하늘로부터 응답이 돌아왔다.

시작을 알린 것은 밤의 짐승이었다.

* * *

남자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가볍게, 아무런 소리도 없이.

남자는 숨을 토했다.

신을 사냥하는 밤의 짐승- 야차신왕의 화신으로 화한 그는 인지할 수 있었다.

전장의 모습.

전장을 가득 채운 마물들.

그들 사이에서 신음하는 천사들과 선신들.

그들을 에워싼 수많은 신성들.

그리고 저 너머에서 오만하게 바라보는 마신의 시선.

남자는 공간을 가로질렀다.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하늘에서 지상으로 소리 없이 강림한 그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이브나일의 곁을 지나며 그녀에게 미소지었고, 이브나일이 멍한 얼굴로 남자를 보았다.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찰나 속에서 여러 천사들과 영웅들의 얼굴을 보았다.

한창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가장 자리로 나아갔고, 그곳에서 마침내 마주하였다.

남자는 다시 미소지었다.

가속화된 의식 속에서, 정지한 것 같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천호를 보았다.

천호도 남자를 보았다.

눈 한 번 깜박할 사이인 그때 신기하게도 남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잘 자랐네.”

머릿속에서 울렸다.

목소리를 귀를 통해 듣지 않고 그 뜻 자체를 인지했다.

남자는 천호만 보지 않았다.

천호 안에 자리한 성검과 천사를, 마검과 용검과 신검을 보았다.

“부러운 놈.”

진심을 담아 말한 남자는 천호의 곁에 서 있던 미궁세계의 전대 용사에게 짧게 눈인사를 건넨 뒤 계속해서 걸었다.

찰나가 지났다.

남자는 천호가 자리한 곳을 지나, 수많은 마물들 사이를 가로질러 치유의 신이 누워있는 장소에 당도했다.

치유의 신이 바닥에 처박힌 채 남자를 보았다.

남자 역시 치유의 신을 보았다.

폭력의 신이 남자를 보았지만, 남자는 폭력의 신을 돌아보지 않았다.

다시 찰나가 지났다.

그리고 남자가 지나온 길을 따라 수많은 선들이 생겨났다.

호세사천왕 바이슈라바나의 장.

참월.

갈라졌다.

남자가 지나온 길에 자리하고 있던 마물들 수백의 몸이 일시에 동강나 바닥에 쓰러졌다.

중층과 심층을 가리지 않았다.

마물들 따위 남자의 검을 견뎌낼 수 없었다.

남자는 치유의 신에게 손을 뻗었다.

치유의 신을 지면에 처박은 장본인인 폭력의 신이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치유의 신이 저도 모르게 웃었다.

천호를 닮았지만 조금 다른 남자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가, 감사합니다. 아버님.”

본래는 좀 더 의젓하게 답할 생각이었는데 막상 입을 여니 저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목소리고 수줍었고 말이다.

그리고 이런 치유의 신의 모습에 남자는 순간 미간을 좁히더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서, 설마 그쪽도?”

무엇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이야기할 틈은 없었다. 폭력의 신이 노성과 함께 주먹을 당겼고, 남자가 용검을 휘둘렀다. 검막을 펼쳐 폭력의 신이 권압으로 발생시킨 충격파를 완벽하게 막아냈다.

폭력의 신이 눈을 부릅떴다.

남자는 그런 폭력의 신을 보는 대신 치유의 신을 일으켜 세웠다. 순간 비틀거리는 그녀의 허리를 안아 지탱한 뒤 말했다.

“시작합니다.”

“네?”

치유의 신이 되묻자 남자는 그저 웃었다. 분노를 폭발시키는 폭력의 신은 아랑곳 않고 하늘을 가리켰다.

멀리서 날아오던 캐리어들이 이제는 머리 위에 당도했다.

그리고 그 순간 치유의 신은 알 수 있었다.

남자와 여자가 진짜 하려고 하는 것.

“맙… 소사.”

치유의 신이 말했고, 남자는 빙긋 웃었다. 여자가 무어라 하기 전에 치유의 신의 허리를 놓아준 뒤 정면을 보았다.

“시작하자.”

여자에게 말했고, 여자가 응답했다.

* * *

여자는 신중한 성격이었다.

때문에 그녀는 미궁 세계를 발견하자마자 발을 들이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충분한 시간을 들여 미궁 세계를 관찰하였다.

미궁 세계를 뒤덮고 있는 빛의 그물.

미궁 세계 자체의 특성.

여자는 마신의 존재를 깨달았다.

천호가 어떤 상황에 처하였는지, 앞으로 어떤 싸움을 해야 하는지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여자는 결론을 내렸다.

자신과 남자만으로는 부족하다.

파이엔이 아닌 곳에서는 힘이 제약되는 자신과 남자 단 둘이 미궁 세계에 가봤자 상황을 역전시킬 수는 없다.

그러니 준비를 하자.

역전할 수 있도록.

상황을 뒤엎을 수 있도록.

쾅! 쾅! 쾅! 쾅!

굉음과 함께 캐리어들이 지상에 강림했다. 그리고 그것은 공격이 아니었다.

12개의 캐리어들 사이로 빛의 길이 이어졌다. 12개의 캐리어들로부터 빛의 기둥이 솟구쳐 올라 하늘을 찔렀다.

직경 1킬로미터가 훌쩍 넘는 그것 안에는 선신들과 천사들이 모두 들어갔다.

하늘 높은 곳에 도도히 선 여자는 지상을 굽어보았다.

이브나일과 시선을 맞추었고, 미궁 세계의 주신인 그녀에게 파이엔의 파괴신으로서 인사했다.

이브나일이 반사적으로 눈인사를 받았다.

엉거주춤 묵례하는 그녀에게 우아한 미소를 건넨 여자는 다시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보았다.

마신의 시선이 느껴졌다.

놈이 눈을 부릅뜬 채 이쪽을 노려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자는 가볍게 손을 들었다. 지구에서 배운 그대로 가운데 손가락을 세우며 우아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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