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188화 (188/211)

“저는 남을 겁니다.”

“칼리드.”

“제가 남을 건 치유의 신께서도 알고 계시겠죠. 여기 있는 치들도 다 알 겁니다. 그러니 굳이 한 시간이나 기다릴 이유가 있을까요.”

칼리드가 푸근하게 웃었다.

그리고 다른 영웅들이 입을 열었다.

“이 와중에 어떻게 돌아가라고.”

“돌아가면 완전 쓰레기 되는 거지. 살아도 사는 게 아닐걸?”

“아아, 평생 치유의 신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겠지. 음… 그건 좀 좋은 걸지도.”

“아니, 애당초 부르지를 말든가. 여태까지 같이 싸워놓고 어떻게 그냥 갑니까. 정도 엄청 들었는데. 우리가 같이 싸운 게 몇 년인지 몰라요?”

저마다 한 마디씩을 꺼냈다. 서로를 돌아보았다.

“야 이 자식들아, 니들이 그러면 내가 어떻게 돌아간다고 말하냐.”

“돌아간다고 말하면 되지 뭘. 창피한 건 순간이야 순간.”

“그래서 넌 돌아갈 거냐?”

“아니, 너 설마 가려고? 어, 뭐… 가는 거야 네 자유니까. 음, 그래. 뭐… 살고자하는 너의 의지를 인정해줄게.”

“개새끼.”

두 사람 모두 농담이었다. 이미 서로의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아, 진짜 존나 오글거리네. 꼭 이래야만 하는 겁니까?”

“배신자도 나왔었잖아. 이 정도 과정은 거쳐야지. 그리고 치유의 신 봐라. 지금 기쁨과 민망함의 교차 속에서 어쩔 줄 몰라하잖냐. 이런 거 흔히 못 본다.”

“아무튼 내 손발 어쩔 거야.”

심층 공략대였다.

가장 늦게 합류한 자조차 3년이 넘는 시간을 치유의 신과 함께했다.

그리고 애당초 영웅들이었으니까.

영웅이라 불리울 만한 자들이었으니까.

이름조차 모르는 이들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자들이었다.

몇 년을 동고동락한 전우를 버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치유의 신이 눈시울을 붉혔다.

하지만 우는 것만음 어떻게든 견뎌낸 뒤에 천호를 돌아보았다.

영웅들에게 선택권이 있듯이, 천호에게도 선택권이 있었다.

‘아버지라면 뭐라고 하셨을까.’

치유의 신만이 아니었다.

루시엘과 미트라 역시 천호를 보았다. 이브나일과 선신들, 영웅들 모두가 천호에게 집중했다.

이 와중에 돌아간다고 하면 어떨까.

물론 그럴 마음은 없었다. 그렇기에 짧게 상상만 해보았고, 이내 숨을 삼켰다. 치유의 신의 부담을 덜어주고자 나름대로 유머를 섞어 말했다.

“아직 소원권 못 썼잖아요.”

치유의 신이 웃었다.

선신들이 안도와 웃음을 동시에 흘렸다. 칼리드가 홀로 도끼눈을 뜨는 가운데 영웅들이 낄낄거렸다.

그리고 미트라가 말했다.

[나도 하나 줄 수 있다.]

“저, 저도요.”

루시엘이 말했고, 이번에는 천호가 웃었다.

“좋아요, 받아둬서 나쁠 건 없죠.”

그런데 그렇게 대답한 순간이었다.

[엉큼한 Lv10이 되었습니다.]

[번뇌력 Lv8이 되었습니다.]

[성검 : 엉큼한 Lv10이 되었습니다.]

뜬금없이 떠오른 빛의 창에 루시엘이 눈을 깜박였고, 천호와 미트라는 서로에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내 서로 미소지었다.

“그럼 일단 해산하도록 하자. 일단 민망함부터 지우고 모이도록.”

이브나일이 작게 웃으며 말했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한 시간 뒤.

천호를 선두로 한 선신들의 무리가 모형정원 안쪽을 향해 진군을 개시했다.

남자는 분명 시선을 느꼈다.

하지만 직접적인 시선은 아니었다.

바라보고는 있지만, 정말로 눈앞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자는 감지했다.

마법적인 시선을 눈치 챘고, 마주보아 주었다. 시선의 주인처럼 훔쳐보는 것이 아니라 대놓고 보았다. 자신이 그쪽의 시선을 눈치 챘다는 사실을 명백히 드러냈다.

시선의 주인이 깜작 놀라 시선을 거두는 것 역시 감지했다. 그리고 남자가 기감을 펼쳤다. 땅을 타고 그물처럼 퍼진 기감이 이내 근방에 자리한 모든 것들을 읽어냈다.

작은 벌레들.

오가는 짐승들.

그리고 그 사이에 숨어 있던 존재들.

남자는 발걸음을 떼었다.

깃털처럼 가볍게, 하지만 쏜살과 같이.

시선의 주인은, 혼란의 신은 그런 남자의 행동을 읽을 수 없었다. 미혹의 신을 끌어안은 채 반쯤 무너진 벽에 기대 몸을 숨기고 있던 그녀는 남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마법적인 시선을 차단하였고, 즉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쪽을 봤어.’

어떻게 본 것인지, 자신이 쳐다보고 있는 것을 무슨 수로 눈치 챈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찌되었든 보았다. 그렇다면 이쪽의 위치를 찾아낼 가능성도 있었다.

혼란의 신은 대신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정신적으로 너무나 약해져 있었다.

기억해낸 과거와, 그로 말미암아 알게 된 마신의 정체가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다.

“언…니?”

때를 맞추듯 미혹의 신이 눈을 뜨며 목소리를 흘렸다.

22층에서의 싸움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하지 못 한 그녀의 몸에는 힘이 하나도 없어 팔다리가 자꾸만 늘어졌다.

육체를 가지고 현신한 신의 한계였다.

육체가 있기에 육체에 속박되었고, 고통이나 감정의 동요 등 각종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혼란의 신이 그런 미혹의 신을 고쳐 안았다.

악신이라 하여 감정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육체를 가졌기에 감정 역시 가졌고, 희노애락 역시 가지고 있었다.

혼란의 신은 미혹의 신을 아끼고 사랑했다. 자신을 언니라 부르며 졸졸졸 쫓아다니는 그녀가 무척이나 소중했다.

때문에 지키고 싶었다. 마신의 장난감이나 간식 따위가 되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되는대로 말한 것에 가까웠다.

마신을 피해 무작정 북상하기는 했지만 과연 의미가 있는 행동일지 의문이었다.

다섯 여신 가운데 넷을 잃은 선신들이었다.

용사와 성검이 있다지만, 그 강력함을 몸소 체험했지만, 그래도 마신에는 미치지 못 했다.

‘일단 도망치자.’

마신도 마신이었지만, 당장은 자신의 시선을 눈치 챈 남자로부터 벗어나야 했다.

남자를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푸른 용 군단이 날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큰 소란이 일지 않아 한 번 살펴본 것 뿐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남자와 여자.

범상치 않았다.

바라보는 게 늦어 푸른 용 군단을 어떻게 처리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악룡 슈라드포마와 호각을 이루는 고룡 칼라드파샤가 두 사람에게 패한 것만은 분명했다.

‘싸운 흔적조차 남지 않았어.’

대신의 경지에 한 발을 걸친 고룡을 대체 무슨 수로 저리 쉽게 제압한 것일까.

저들은 누구이고, 어디서 온 자들인 것일까.

설마 선신들이 불러낸 이계의 영웅들인 것일까?

“안녕.”

인사는 등 뒤에서 들려왔다.

쭈뼛하고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남자.

남자의 목소리.

혼란의 신은 대신이었다.

비록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쇠약해졌다지만 여전히 강한 신성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마치 뱀을 눈앞에 둔 개구리가 된 기분이었다.

“이 세계의 신들 가운데 하나군.”

남자가 다시 말했다. 혼란의 신은 숨을 쉬기 위해 노력했다. 숨을 쉬지 않으면 생각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육신을 처음으로 불편하게 느꼈다.

“얼굴 좀 볼 수 있을까?”

남자의 목소리는 평범했다. 딱히 협박하는 투도 아니었다.

하지만 혼란의 신은 남자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식은땀을 흘리며 돌아섰다.

흑단 같은 검은 머리칼을 길게 기른 새하얀 피부의 엘프 여인.

검은 드레스를 입은 혼란의 신을 마주한 남자는 그녀를 한 눈에 담았다. 무척이나 소중하다는 듯이 품에 꼭 안고 있는 미혹의 신을 보았다.

혼란의 신과 닮았다. 꼭 닮은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으면 누구나 자매를 떠올릴 터였다.

남자는 여자와 함께 미궁 세계 밖에서 적잖은 시간을 관찰에 소모하였고, 그렇기에 대강의 사정 정도는 알고 있었다.

눈앞의 흑발 여인은, 혼란의 신은 악신이었다.

하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절대악은 아니었다. 직전에 쓰러트린 푸른 용 군단처럼 자신들에게 위해를 가한 것도 아니었다.

‘조금 달라.’

자기 자식들을 방패막이로 내세우던 고룡과 달랐다.

악신마다 정도 차이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눈앞의 혼란의 신이 특이종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처리해야 할 적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때문에 남자는 신을 사냥하는 밤의 짐승에서 인간으로 돌아왔다. 어깨를 살짝 늘어트리며 혼란의 신에게 말했다.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

혼란의 신은 약간의 망설임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 * *

“상자 안에 여신 둘이 쪼그려 앉아서 야옹야옹 울고 있었을 리는 없고, 자꾸 뭘 주워온다?”

어느새 떠날 채비를 모두 갖춘 천사들과 영웅들, 선신들과 푸른 용 사이의 혼혈들을 등 뒤에 세운 채 여자가 말했고, 실리키엘이 잠시 주저하는가 싶더니 여자의 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악신인 혼란의 신입니다.”

20층의 주인인 그녀는 이미 천사 네트워크를 통해 얼굴이 알려져 있었다.

실리키엘을 비롯한 천사들은 경계심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여자는 그렇지 않았다.

악신이라 해도 결국엔 세계에 속한 존재였으니까.

사실 여자도 따지고 보면 파이엔의 악신이라 할 수 있었다. 일단은 파괴신인 몸이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여자에게 중요한 것은 선신이냐 악신이냐가 아니었다.

마신의 주구인지 아닌지가 중요할 뿐이었다.

“일단, 이야기 좀 들어봐.”

미혹의 신을 등에 업은 남자가 말하자 여자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의 등에 업힌 미혹의 신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던 혼란의 신에게 의념을 내쏘아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혼란의 신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달랐다.

여자는 강력한 신이었다. 이계의 존재였지만, 적어도 다섯 여신에 준하는, 그녀의 세계에서는 주신격에 속하는 강대한 신임에 분명했다.

신- 수호의지는 세계가 자신을- 세계 그 자체를 가꾸고 보살피기 위해 낳는 존재들이었다.

그렇기에 수호의지는 자신의 세계를 떠나면 그 힘이 급격히 약해지기 마련이었다.

눈앞의 여자도 그러했다. 어느 정도인지까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엄청난 제약을 받고 있음에는 분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했다. 여자에 비하면 혼란의 신 자신은 어린 아이나 다름이 없었다.

“말로 하면 기니까, 네 기억을 보여줘.”

여자의 요구에 혼란의 신은 마른 침을 삼켰다. 기억을 보여준다는 것은 곧 혼란의 신 자신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는 것과 같았다.

사실상 여자 앞에서 벌거숭이가 되라는 것과 다름없는 요구였다.

하지만 혼란의 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른침을 한 번 꿀꺽 삼킨 뒤 입을 열어 말했다.

“조건이 있다… 아니, 조건이 있습니다.”

“뭔데?”

“그쪽이 누구인지, 여기 남자는 또 누구인지 알려주세요.”

천사들과 함께하고 있지만 선신들이 불러낸 영웅들은 아닌 것 같았다.

애당초 신의 후예라면 모를까, 신 그 자체가 소환된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

혼란의 신의 요구에 여자는 피식 웃었다.

혼란의 신은 다시 마른침을 삼켰다.

조건을 내걸 처지냐며 여자가 폭력을 행사하는 상황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하지만 여자는 그냥 고개막 끄덕였다.

“그러지 뭐.”

너무나 쉽게 허락한 여자는 혼란의 신에게 손짓했다.

“내 앞에 와.”

“……네.”

혼란의 신은 다시 한 번 미혹의 신을 돌아보았고, 미혹의 신을 업고 있던 남자는 걱정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자와 마찬가지로 모든 것이 베일에 싸인 남자였지만, 어쩐지 믿음이 갔다.

“좋아, 눈을 감고 몸에 힘을 빼. 내 힘을 거부하지도 말고. 그리고 혹시나 하는 말이지만 넘보지 마라. 응?”

여자가 웃으며 말했고, 혼란의 신은 움찔했다. 일단 고개부터 끄덕인 뒤 여자의 말대로 하였다.

여자가 혼란의 신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그대로 이마를 맞대었고, 혼란의 신의 기억을 공유했다.

그리하여 알게 되었다.

신성을 얻은 최초의 인간.

그가 세운 모형정원.

인간과 마물을 가리지 않고 세계 속의 모든 것들을 희롱한 존재.

선신도 악신도 아닌, 마신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괴물.

놈이 지금 하고 있는 짓.

앞으로 하고자 하는 짓.

과거에 수도 없이 행한 일들.

그리고 몇 가지를 더 보았다.

심층에서 있었던 일들.

혼란의 신과 싸운 천호.

천호의 곁에서 함께 싸운 성검과 천사.

마침내 각성한 미궁 세계의 용사.

다섯 번째 여신의 화신.

천호에게 깃든 다섯 번째 여신의 힘.

여자가 손을 놓았다.

혼란의 신이 비틀거렸고, 여자는 다시 손을 놀려 넘어지려는 혼란의 신의 허리를 낚아챘다. 단단히 붙잡은 채 헐떡이는 그녀에게 말했다.

“싫진 않아.”

정말로 혼란의 신의 모든 것을 보았으니까.

선과 악이 혼재된 그녀의 기억 속에서 미혹의 신을 얼마나 아끼는지, 그녀에게 어떤 애착을 품고 있는지 알았으니까.

혼란의 신은 마신보다 오래된 신이었다.

비록 인격의 각성이 늦었다고는 하나, 그 신성의 근원은 마신이 신성을 얻기 훨씬 전에 탄생하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마신에게 오염되지 않았다.

그녀로부터 파생된 미혹의 신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자는 순간 장난기가 솟아 혼란의 신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당황하는 그녀에게 다시 한 번 씩 웃어준 뒤 지금 뭐하는 거냐는 얼굴로 쳐다보는 남자에게 말했다.

“좋은 소식이랑 나쁜 소식이 있어. 어느 쪽을 먼저 들을래?”

“이럴 때는 나쁜 소식부터 듣는 게 정석이지.”

“그렇긴 해.”

여자는 슬쩍 품에서 벗어나려는 혼란의 신을 더 단단히 붙잡은 뒤 말을 이었다.

“마신놈이 우리 생각보다 더 나쁜 놈인 거 같아. 끔찍하기 짝이 없는 방법으로 신성을 보충하고 있어서 힘의 회복도 우리 예상보다 훨씬 빠를 것 같고.”

“나쁜 소식 맞네.”

“응, 그리고 더 있어. 전황이 우리 생각보다 더 안 좋아.”

“어떻게?”

“다섯 여신 가운데 남은 건 이브나일뿐이야. 나머지 셋은 죽진 않았는데, 죽은 거나 다름없어. 마신에게 신성을 박탈당했거든.”

여자의 말이 끝난 순간 등 뒤에 자리하고 있던 천사들과 영웅들이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몇몇은 아예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여자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거기다 세력까지 흩어진 것 같아. 대미궁이 해체되면서 그 안에 자리하고 있던 이들이 미궁 세계 곳곳으로 흩어졌어.”

천사들과 영웅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상황이라 대강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역시 명확한 사실로 확인되는 것은 느낌이 달랐다.

남자는 쓰게 웃으며 물었다.

“더 있어?”

“일단은 이 정도.”

“다행이네. 좋은 소식은?”

“천사랑 성검이 엄청 귀엽고 예쁘고 사랑스러워.”

남자는 잠시 침묵했고, 여자는 까르르 웃으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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