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만 기다리렴.”
“네.”
반사적으로 답한 레티샤 왕녀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무시무시한 용들이 하늘을 뒤덮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무섭지 않았다. 그저 여자가 무엇을 보여줄지 기대될 따름이었다.
보호막을 나온 여자가 남자를 향해 걸었다.
그 순간 영웅들 가운데 하나가 다시 외쳤다.
“온다!”
드래곤 브레스.
푸른 용 서른 마리와 거대한 고룡 하나가 동시에 입을 벌렸다.
그리고 여자 또한 입을 벌렸다.
도도하게 명령했다.
“조아려라.”
그것은 단순한 말이 아니었다.
언령이었다.
강대한 권능이 실린 용신의 명령이었다.
푸른 용들은 저항하지 못 했다. 환상의 수맥을 올곧이 잇지 못 한 고룡 따위가 어찌할 수 있는 명령이 아니었다.
콰가가가가가강!
브레스가 지상을 뒤덮으며 난 소리가 아니었다.
푸른 용 서른 마리가 동시에 추락해 바닥과 충돌하며 난 소리였다. 잠시 버티는 듯한 고룡이었지만, 정말 잠시뿐이었다. 여자가 시선을 주니 더는 버티지 못 하고 지상에 추락했다.
푸른 용들이 머리를 조아렸다.
자신들도 이유를 몰랐지만 그리했다.
아니, 이유라면 있었다.
여자가 명령했다.
여자가 머리를 조아리라 말했다.
실리키엘은 이제 더 이상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레티샤 왕녀는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남자가 여자를 보았다.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통하네?”
“통하지.”
모든 세계의 용들은 다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환상의 수맥을 이어받고 있으니까.
강대한 용신왕의 권능은 파이엔뿐만 아니라 미궁 세계에서도 그대로 통용되었다.
“일단 뜨자. 계속 몰려올 것 같으니. 애들도 좀 먹이고. 다들 지치고 굶주린 것 같아.”
여자의 말에 대답하듯 루실리아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여자는 다정하게 웃었고, 루실리아는 얼굴을 붉혔다.
남자와 여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친근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들 편이라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실제로 구해주기도 했고 말이다.
남자는 여전히 머리를 조아린 채 꼼짝도 못 하는 푸른 용들과 주변의 황무지, 저 먼 곳에서 솟아오르고 있는 미궁들을 한 번씩 돌아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보호막 안에 자리한 루실리아와 실리키엘에게 다가서며 말했다.
“좋아, 그럼 작업을 시작해 볼까?”
작업.
루실리아와 실리키엘은 반사적으로 눈을 빛냈다.
그리고 깨달았다.
눈앞의 남자와 여자가 누구인지.
어째서 이렇게까지 강한 것인지.
루실리아는 자기 가슴에 손을 올려보았다. 마구마구 두근거렸다. 그리고 그건 실리키엘 역시 마찬가지였다.
“맛있을 거야.”
보호막을 거둔 남자가 말했고, 천사들과 영웅들은 작업과 맛있다 사이의 간극 때문에 의아해했지만 루실리아와 실리키엘은 아니었다.
익숙한 얼굴로 익숙한 대답을 내놓았다.
“네에♥”
이번에는 남자가 놀랐고, 여자 또한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잠시 뒤 작업이 시작되었다.
원조의 작업이었다.
“꺼억.”
“꺽.”
“끄억.”
아공간 주머니 안.
직경 30미터쯤 되는 공간 안에서 천사들과 영웅들이 저마다의 배를 붙잡고 쓰러졌다.
“과, 과연 원조…….”
실리키엘은 드러누운 채 감탄했다. 워낙 급하게 쫓기느라 지치고 굶주린 것도 있었지만, 요리 자체의 파괴력이 너무 강력했다.
그야말로 손을 멈출 수 없는 맛이라고 해야 할까?
“후욱, 후욱, 후…… 햄보케♥.”
루실리아는 숨도 제대로 못 쉬는 와중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극락에라도 다녀온 얼굴이었다.
실리키엘은 생각했다.
‘용호상박.’
13층에서 요리의 신과 만나 요리 실력이 일취월장한 천호였지만, 그렇다하여 아버지를 초월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제야 따라잡았다고 해야 할까?
‘그래도…… 용사님 솜씨도 더 느셨겠지?’
천사 네트워크에 갱신된 정보에 따르면 심층에 들어가신 이후 여러 가지 의미로 더 강해지신 것 같다니까.
요리 실력도 파워 업 하셨을 게 분명했다.
아무튼 그러했다.
혼자 고개를 끄덕인 실리키엘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행복한 얼굴로 부른 배를 쓰다듬고 있는 천사들과 영웅들 너머, 용사의 어머니인 여자가 저층의 주민인 루키아 여왕과 쿠르트 왕, 레티샤 왕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놓고 엿듣지는 않은 터라 내용까지는 자세히 몰랐지만, 아무래도 용사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다.
“음음, 용사님이 우리 도시를 구해주셨습니다. 우리 락 드워프들과 용사님은 목숨을 걸고 전장에 함께 선 전우라고 할까요? 핫핫핫.”
덩치는 작지만 목소리는 큰 쿠르트 왕이었다.
사실 실리키엘이 그나마 용사 이야기라는 걸 짐작한 건 거의 다 쿠르트 왕 덕분이었다.
루키아 여왕과 레티샤 왕녀도 자신들이 겪은 이야기들을 나름대로 열심히 설명하는 것 같았다.
특히 레티샤 왕녀는 열과 성을 다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는데, 인형처럼 작고 예쁜 소녀가 얼굴까지 붉혀가며 열변을 토하니 무슨 이야기를 하든 열심히 들어주고 싶었다.
“그래, 잘 들었다. 이야기해줘서 고마워.”
여자가 다정하게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자 레티샤 왕녀가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열과 성을 다한 이유의 팔할은 용사가 아니라 여자 때문인 것 같았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쁩니다.”
용사 이야기의 열렬한 신봉자인 루키아 여왕이 그리 말하자 여자는 다시 미소지었다. 귀여워 죽겠다는 듯 레티샤 왕녀의 뺨을 꼬집어준 뒤 다시 말했다.
“그럼 일단 쉬고 있으렴. 다들 배도 꺼트려야 하니 이동은 한 시간 후란다.”
“네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뺨을 꼬집혀본 레티샤 왕녀가 이번에도 황홀한 표정으로 답했다.
여자는 누나인 레티샤 왕녀처럼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유그 왕자의 머리도 한 번 쓰다듬어 준 뒤 쿠르트 왕에게 눈짓했다. 목소리가 커서 그렇지 눈치는 빠른 쿠르트 왕이 루키아 여왕에게 눈짓으로 신호했고, 루키아 여왕은 황홀함에 젖어있는 레티샤 왕녀와 유그 왕자를 데리고 물러섰다.
그리고 여자의 시선이 실리키엘에게 닿았다.
“잠시,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니?”
아까부터 계속 하대를 하고 있는 여자였지만 불쾌함은 조금도 없었다.
그냥 하대받는 게 너무나 당연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원조 용사의 작업에 뭔가 약이라도 들어있었는지 실리키엘은 너무나 당연히 답했다.
“네에♥”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에게 쪼르르 달려가는 실리키엘을 보며 부럽다고 생각하는 영웅들과 천사들까지 있을 지경이었다.
“아유, 예쁘다.”
여자는 열심히 달려온 실리키엘의 머리를 쓰다듬더니 뺨까지 한 번 꼬집어주었다.
완전 애 취급이었지만 실리키엘은 레티샤 왕녀가 그러했던 것처럼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더 해주세요, 더.’
없는 꼬리 대신 날개를 파닥파닥 거렸지만 거기까지였다.
여자는 실리키엘의 짐작대로 용사에 대한 것들을 물었다.
레티샤 왕녀 일행이 알고 있는 것은 3층에서 4층 사이에 있었던 일들뿐.
중층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 하는 그들이었다.
“제가 중층에서 있었던 일들을 말씀드릴게요! 8층부터 14층까지 함께한걸요.”
실리키엘이 서로 발표하겠다고 다투는 아이들처럼 손을 번쩍 들며 말했다.
얼굴 한 가득 진심에서 우러난 기쁨이 가득했다.
사실, 여자의 힘이었다.
여자가 무언가 사악한 마법을 사용한 것은 아니었다.
실리키엘과 레티샤 왕녀의 정신을 조작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런 이끌림.
타고난 유혹자 인슬레이버의 아종.
도와주고 싶다.
잘해주고 싶다.
여자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
물론 모든 존재에게 통용되는 힘은 아니었다. 강대한 존재나, 강력한 정신력을 가진 이들은 여자의 타고난 힘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남자처럼 말이다.
어찌되었든 여자는 타고난 힘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크게 보면 사람들이 귀여운 것에 약한 것과 대동소이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타고난 능력을 썩힐 필요도, 죄악시할 필요도 없었다.
“그럼, 부탁할게.”
“네에!”
실리키엘은 레티샤 왕녀가 그러했던 것처럼 열과 성을 다해 8층에서 14층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다.
천호와의 첫 만남.
이후 있었던 겨울왕과의 싸움.
최초의 대장간을 찾기 위한 여정.
최초의 대장간의 수호자인 마키나와의 결투.
13층에서 있었던 요리의 신과의 기연.
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리키엘의 이야기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며 머릿속에서 이야기를 구체화시켰다.
천호의 성장과정.
미궁 세계에 온 이후 폭발적으로 강해진 천호.
‘예언대로네.’
처음엔 원망도 꽤 한 예언이었는데, 이제는 그냥 믿고 싶었다.
“그리고… 심층에 내려가신 이후의 이야기는 천사 네트워크를 통해 대강이나마 접하긴 했어요. 이것도 말씀드릴까요?”
말씀드리게 해주세요.
실리키엘의 간절한 표정을 보며 여자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할게.”
“네에!”
그리고 다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직접 본 것이 아니라 천사 네트워크에 올라온 간략한 기록만 본 탓에 이야기의 디테일이 떨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중요한 것들은 대강 다 들어있었다.
15층에서 있었던 저주의 신과의 싸움.
그 싸움에서 천호는 옷장을 소환했고, 여자가 천호를 위해 준비한 용검을 손에 넣었다. 뿐만 아니라 미궁 세계의 주신격인 다섯 여신 가운데 하나인 전쟁의 여신 이브나일의 신기를 얻어 다섯 여신의 힘까지 쓸 수 있게 되었다.
17층.
심층에서 있었던 첫 싸움.
악룡 슈라드포마의 격퇴.
19층.
악몽의 신과의 전투.
22층.
혼란의 신과 역병신의 격퇴.
온전한 용사로서의 각성.
‘예상대로야.’
천호는 야차신왕과 태양의 신인인 모두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남자의 예상대로 양쪽 모두 완성된 상태가 아니었다.
‘예상 밖도 있어.’
성검 미트라와의 합체.
그로인해 사용할 수 있게 된 다섯 여신의 힘.
파이엔의 파괴신인 여자는 알 수 있었다.
이 세계의 용사는 특별했다. 남자처럼 용사다운 업적을 세웠기에 용사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용사’라는 직위 자체에 특별한 힘이 있었다.
미궁 세계.
업적을 세우면 그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는 세계.
업적을 쌓아 올리다보면 신성조차 얻을 수 있는 세계.
“고마워, 큰 도움이 되었어.”
“정말요?”
“정말이란다.”
여자는 진심으로 기뻐하는 실리키엘의 뺨을 쓰다듬어준 뒤 내친김에 이마에 키스까지 해주었다.
너무 좋아 어쩔 줄 몰라하는 실리키엘을 돌려보낸 뒤 아공간 주머니 밖으로 나갔다.
“이야기는 좀 들었어?”
남자가 여자에게 한 말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에게 한 말이었다.
아공간 주머니 밖.
수풀로 가려진 장소에 푸른 머리칼을 가진 이들이 단체로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인간, 엘프, 드워프 등등 여러 종류가 있었지만, 사실 전부 푸른 용들의 변신체였다.
남자는 엘프 여인의 형상을 한 푸른 용과 마주 앉아 있었다.
이번에 포획(?)한 푸른 용들 가운데서 딱 중간쯤에 속하는 아이.
푸른 용들을 이끌고 온 고룡의 손녀로, 선신들의 피가 흐르는 아이였다.
남자가 여자를 보며 말했다.
“어, 대강은.”
악신인 고룡은 제거했다.
용들을 상대로는 거의 무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여자의 용언이었지만, 그래도 신성을 가진 이계의 용을 완벽하게 수하로 부릴 정도는 아니었다. 눈앞에서 제압하는 것은 가능했지만, 마음까지 돌리는 것은 무리라고 해야 할까.
그래서 남자와 여자는 고룡을 제거했다.
남긴 것은 선신들의 피가 흘러 회유가 가능한 자들뿐이었다.
애당초 적이었고, 이쪽을 죽이려고 한 자들이었다. 뒤통수 맞을 일 따위 키우지 않는다는 것이 남자와 여자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여자가 천호에 대한 이야기를 수집하는 동안 남자는 미궁 세계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마신과 악신.
그리고 그들 입장에서 본 용사의 이야기.
“좋아, 그럼 교환하자.”
“잠깐, 그 전에 쟤들도 좀 먹이고.”
남자가 그리 말하며 아공간 주머니 안쪽을 돌아보자, 여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일어나.”
명하자 인간형 생물로 변신해 있던 푸른 용 열 마리가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
“안에 먹을 거 있으니까 들어가서 먹어. 안 잡아먹을 테니까 좀 편히들 쉬고.”
“넷!”
천사들과 달리 딱딱하고 절도있는 대답이었다.
푸른 용들이 아공간 안쪽으로 우르르 들어가자 여자는 남자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평소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금슬 좋은 부부였지만, 지금은 담소를 나눌 때가 아니었다.
손을 잡은 순간 여자가 마법을 사용했다. 서로의 기억을 교환했고, 가속화된 사고 속에서 정보를 검토하였다.
“역시 이뤘네. 역시 불완전하고.”
남자가 대뜸 말했다.
야차신왕에 대한 것이었다.
“생각보다 더 고약한 놈이야. 만만치 않겠어.”
여자도 대뜸 말했다.
마신과 미궁 세계에 관한 이야기였다.
직접 강림하기 전에 빛의 그물을 돌파하고자 미궁 세계를 진득히 관찰한 여자였다. 그렇기에 푸른 용 군단의 이야기만으로도 대강의 상황과 미궁 세계의 구조를 거의 완벽히 파악할 수 있었다.
여자는 파괴신이었지만, 어찌되었든 파이엔의 신- 수호의지 가운데 하나였다.
수호의지는 세계의 주인이 아니었다.
세계를 가꾸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보살피는 존재들이었다.
파괴신인 여자조차도 평소에는 용들을 가호하고 보살피는 용신왕으로서 존재했다.
그런데 마신은 아니었다.
놈은 세계의 주인이 되었다.
가꾸고 보살펴야 할 세계의 주민들을 자신의 양식과 노리개로 삼았다.
그 결과 마신은 평범한 수호의지는 얻을 수 없는 힘을 손에 넣었다.
세계 속을 살아가는 이들의 신앙 없이도 무지막지한 신력을 다룰 수 있었다.
다행히 지금은 지친 상태 같았다.
미궁 세계 전체를 놈의 성소로 만드는 ‘모형정원’ 역시 불완전한 상태였다.
하지만 결국 시간문제일 뿐이었다.
놈은 빠르게 힘을 회복하고 있었고. 미궁 세계 역시 다시금 모형정원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줘. 제약받고 있는 거…… 어느 정도야?”
파이엔의 신인 여자는 다른 세계에 가면 그 힘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남자의 물음에 여자는 입술을 한 번 깨물더니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