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184화 (184/211)

“아름다운 영애가 기행을 펼치니 더 유명해진 것도 있지만.”

이브나일의 목소리에서는 테레시아에 대한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드러났다.

천호도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이브나일은 사실상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모두에게 공개하고 있었다.

테레시아는 제멋대로 굴었다. 구두가 불편하다며 맨발로 걸어 다니는 일도 있었고, 드레스가 불편하다며 반쯤 헐벗은 복장으로 연회장에 나타나기도 하였다.

나비를 따라다니다 연못에 빠진 일은 특히 유명했다. 그때 테레시아의 나이는 다섯 살이 아닌 열다섯 살이었다.

많은 사람들리 테레시아를 뒤에서 욕하였다. 공작가의 수치라며 깎아 내리는 이들도 많았다.

하지만 테레시아를 사랑하는 이들 또한 많았다.

공작가의 사람들은 가문의 주인인 공작부터 시작하여 허드렛일을 하는 하인까지도 모두 테레시아를 아끼고 사랑했다.

“사랑받는 재능이라고 해야 하나? 그렇게 밖에 표현을 못 하겠네.”

딱딱한 성격의 이오스는 물론이고 명문가의 영애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 하던 자신조차도 테레시아는 사랑하고 말았으니까.

“아이테르는 가수였어. 엄청나게 유명한. 전대륙이 그녀의 이름을 알 정도로.”

아이테르는 평민 출신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압도적인 아름다움과 카리스마뿐만 아니라 신의 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목소리와 노래솜씨를 타고났다.

물론 주어진 재능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의 재능을 화려하게 꽃피우기 위해 누구보다 더 노력하였다.

항상 마탑에 틀어박혀 연구만 하던 이오스도 아이테르의 이름은 알았다.

테레시아는 아이테르의 팬이었고, 어디 가서 한 번도 말하지 않았지만 이브나일도 사실 그러했다. 아이테르를 처음 마주한 순간 떠올린 생각은 ‘완전 예뻐! 사인 받고 싶어!’였으니 말이다.

“아이라는··· 다섯 번째 여신은 우리 중에 제일 평범했어. 그녀는 도서관 사서였거든.”

도서관 사서를 폄하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다른 넷에 비해 평범한 것은 사실이었다.

기사단 내에서도 손에 꼽히는 검의 천재.

젊은 나이에 학계를 몇 번이나 뒤흔든, 지혜의 여신의 화신과도 같은 존재.

대륙 제일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만인의 사랑을 받는 영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천재 가수.

“하지만 그녀는 특별했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어느새 그녀가 모두의 리더가 되어 있었다.

딱히 그녀가 술수를 부린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그리 되었다.

“우리는··· 신이 아니었어.”

저마다의 재능을 지닌 뛰어난 인재들이었지만 결국엔 인간.

신과는 아직 거리가 먼 존재.

“당시의 미궁 세계는 이계의 존재나 물건들을 종종 끌어들였어. 우리 다섯 사람은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를··· 어떤 이끌림에 따라 미궁 세계에 표류하게 된 표류자들이었어.”

어딘지 모를 완전히 낯선 세계.

처음에는 살아남기에 급급했다. 미궁 세계의 환경은 결코 우호적이지 않았다.

“이름 그대로 미궁이었거든.”

미궁 세계의 모습은 지금과 전혀 달랐다.

세계는 미궁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층층이 나눠져 있을 뿐, 사실상 여러 세계를 쌓아올린 탑과 같은 형태의 대미궁이 아니었다.

곳곳에 함정과 괴물이 있고, 어디로 이어져있는지 알 수 없는 갈림길이 끝없이 이어져 있는 진정한 의미의 미궁이었다.

“그러다 만나게 되었어.”

미궁 세계의 주민들을. 미궁 속에서 학대받으며 살아가는, 사실상 사육당하고 있던 인간들을.

“다들 오지랖이 넓었거든. 특히 아이테르와 아이라는 더욱 더.”

사람들을 도왔다.

눈앞에서 고통 받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하나의 세력을 이루었고, 점차 세를 불려나갔다.

미궁 세계가 그런 다섯을 지켜보았다.

인간들이 다섯 여인들을 추앙하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는··· 미궁 세계의 신이 되어 있었어.”

대신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미약한 신성.

사실상 신이라기보다는 천사에 가까운 존재.

미궁 세계의 선택과 인간들의 신앙과도 같은 믿음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솔직히 즐거웠어.”

원시인이나 다름없던 사람들에게 문명을 전파하는 것이, 지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가혹함 속에서 살아가던 그들의 삶을 조금씩 개선시키는 것이.

사람들은 더 이상 서로를 잡아먹지 않았다.

미워하고 배신하는 대신 사랑하고 협력하였다.

마물들에게 무력하게 죽어나가는 대신 맞서 싸워 스스로를 지켜내었다.

보람 있는 일이었다.

항상 울며 슬퍼하던 이들이 환하게 웃는 모습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소중했다.

하지만 신성을 얻고, 그 힘이 강해짐에 따라 알게 되었다.

마신의 존재를.

미궁 세계의 진실을.

“모형정원··· 이오스는 그렇게 말했어. 미궁 세계는 마신의 모형정원이라고.”

미궁 세계의 모든 것들은 마신의 장난감이었다.

그가 만든 미궁 속에서 인간들은 가축으로서 사육 당했다. 울부짖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으로 부의 감정을 양산해내는 가축 말이다.

마물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것들 역시 마물의 장난감이자 가축이기는 매한가지였다.

마신은 다섯 여신의 존재를 알았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다섯 여신과 같은 존재들은 미궁 세계의 기나긴 역사 속에서 벌써 수십 번이 넘게 등장한, 일반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경우였기 때문이다.

“희망이 있어야 절망이 있는 법이니까.”

그저 지옥만이 계속된다면 인간은 절망하지 않는다. 아예 절망이란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게 되니 말이다.

그래서 마신은 때때로 독을 풀었다.

사육되는 인간들이 희망의 단맛을 맛보게 하였다.

미궁 세계에 가끔씩 소환되는 표류자들이 그 역할을 하였다.

마땅한 표류자가 없을 때는 마신 스스로의 분신을 풀어 인간들을 선도하게 하였다.

희망을 주고 부순다.

모든 것을 뜻대로 할 수 있는 모형정원 안에서 인간과 마물을 가리지 않고,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들을 재미삼아 희롱한다.

그런 역사가 수천 년이나 반복되었다.

셀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인간들이 마신에 의해 희생당했다.

그래서 싸움을 시작했다.

사실 이러한 싸움 자체가 마신의 바람임을 알고 있음에도, 압도적인 힘을 가진 마신에게 저항하였다.

본래라면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과거의 선례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마신이 승리했어야 할 싸움이었다.

하지만 최후에 승리한 것은 다섯 여신이었다.

“기적에 기적이 더해진 결과였어.”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많은 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천호는 저들 하나하나가 미궁 세계의 영웅들임을 깨달았다.

다섯 여신과 함께 싸운 인간들.

미궁 세계가 기억하는 그들의 이야기.

하지만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우리는 마신을 제거하지 못 했어.”

마지막 싸움에서 다섯 여신은 마신의 제거가 아닌 추방을 선택했다.

마신을 모형세계와 함께- 대미궁과 함께 미궁 세계에서 몰아낸다.

하지만 그나마도 무리였다.

결국에는 실패하고 말 일이었고, 실제로 마신의 역공에 다섯 여신은 패배 직전으로까지 몰렸다.

“기적을 일으킨 건··· 아이라였어.”

아이라가 스스로를 희생했다.

그녀는 미궁 세계가 되었다. 미궁 세계와 하나 되어 세계의 힘으로 마신을 추방하였다.

하지만 그 대가는 결코 작지 않았다.

주신이라고는 하나 결국엔 세계에 속한 존재였다. 세계 전체에 비하면 너무나 작은 존재였다.

아이라가 아니라 이브나일 자신이었다면 어떠했을까.

솔직히 자신할 수 없었다. 아이라처럼 힘을 발하기는커녕 세계에 녹아든 그 순간 자아를 잃고 소멸하였으리라.

아이라는 미궁 세계에 녹아들었다.

세계와 하나 된 그녀는 존재를 잃었고, 세계로부터 지워졌다.

근본이 다른 세계에 있는 다섯 여신을 제하고는 아무도 그녀를 기억하지 못 했다.

그녀의 역할이 워낙 컸기에 다섯 번째 여신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는 모두의 기억에 남았지만 다섯 번째 여신이 누구인지, 그녀가 무엇을 하였는지, 그녀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깨끗이 잊히고 말았다.

물론 다섯 여신은 그런 상황을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아이라의 존재를 모두에게 다시 알려주었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사람들은 금방 다시 아이라의 존재를 잊었다. 다섯 여신들이 무진 애를 썼음에도 불구하고 남은 것은 이름조차 모르는 여신을 모시는, 비밀 결사와 같은 교단 하나가 전부였다.

“하지만 아이라는 우리를 버리지 않았어.”

마신이 추방된 이후.

빛의 그물이 미궁 세계를 뒤덮었다.

외부에서의 침입을 막고, 미궁 세계 자체가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아이라였다.

미궁 세계와 하나 된 그녀가 다섯 여신을, 세계의 모두를 지키기 위해 펼친 힘이었다.

모두를 위해 희생하였고, 그 대가로 인해 모두에게 잊히고 만 후에도.

그녀는 미궁 세계를 가호했다. 미궁 세계의 모두를 사랑했다.

“우리는 재건을 시작했어.”

마신의 모형정원이 전부였던 세계였다.

마신과 모형정원이 사라진 세계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

다섯 여신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였다. 미궁 세계를 다른 평범한 세계들처럼 새로이 가꾸어나갔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 마신이 돌아왔다.

여러 세계를 침략하고 포식하며 힘을 불린 그는 이전보다 더 강해져 있었다. 다섯 여신 역시 미궁 세계의 온전한 주신으로서 힘을 길러왔지만 마신의 힘에는 미치지 못 하였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편법을 생각했다.

마신을 제거하는 대신 다시 한 번 추방하고자 하였다.

다섯 여신이 시간을 번다.

그 사이에 대미궁을 공략해 마신과 대미궁을 모두 미궁 세계에서 추방한다.

실패했다.

마신은 미궁 세계에 온전히 강림해 다시 신으로서의 힘과 지위를 되찾았다. 아직 절반뿐이었지만 세계는 다시 마신의 모형정원이 되었다.

이제는 이길 수 없다.

다섯 여신 가운데 넷이 사라졌다. 이브나일 자신의 힘만으로는 마신에게 저항하는 것조차 힘겨웠다.

그렇기에 이브나일은 절망했다.

그것이 마신의 바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깊은 절망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아이라가 다시 한 번 희망을 주었으니까.

세계로부터 잊힌 후에도 그녀는 여전히 미궁 세계와 모두를 사랑하고 있었으니까.

“아직 용사가 있어, 성검이 있어.”

미궁 세계의 결전 존재가.

다섯 여신의 힘 모두를 다루기 위한 최강의 성검이.

그리고 마지막 하나.

모든 희망을 완성할 존재가.

“루시엘.”

이브나일의 이야기를 듣는 모두의 머릿속에 루시엘의 모습이 떠올랐다. 루시엘 본인이 깜짝 놀라 당황하는 가운데, 이브나일이 처연하면서도 아름다운 미소를 그렸다.

“이제는 나도 알겠어. 아이라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째서 자신의 아이를 우리에게 맡기지 않고, 세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태어나게 한 것인지.”

아이테르가 치유의 신을 남기고, 그녀에게 희망을 건 것과 비슷했다.

루시엘은 다섯 여신처럼 이계의 존재가 아니었다. 온전히 이 세계의 존재였다.

그것도 천 년하고 수백 년의 세월에 거쳐. 아이라의 아주 작은 파편들이 모이고 모인 끝에 태어난.

“잊힌 신인 아이라의 신성과 신위를 이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너뿐이야.”

그리고 그리된다면, 그리할 수 있다면.

이브나일은 천천히 눈을 떴다. 이야기를 듣던 이들 모두가 그러하였다.

이브나일이 천호와 루시엘을 보았다.

천호가 미트라와 루시엘을 보았고, 루시엘이 천호를 바라보았다.

용사와 성검과 천사- 아니, 다섯 번째 여신.

미궁 세계에 남겨진 최후의 희망이었다.

제32장 - 상봉

불침번을 서고 있던 아이테르는 고개를 들었다.

밤하늘이 어두웠다. 별 하나 없이 온통 새카만 밤이었다.

언제나 그러했듯이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두운 법이었다.

아이테르는 잠시 어둠을 즐겼다.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지평을 보았다.

미궁 세계에 표류한 지 벌써 십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아이테르 자신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다.

미궁 세계는 그녀에게 신성을 부여하였다. 지금의 그녀는 미궁 세계의 인간들을 가호하는 다섯 여신들 가운데 하나였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아이테르의 노래에는 힘이 있었다.

미궁 세계에 건너오기 전부터 가지고 있던 이능이었다. 사람들의 용기를 북돋게 하고, 평소 발휘하지 못 하던 힘을 일깨우는 각성의 노래와 듣는 이를 깊은 잠에 빠트리는 숙면의 노래 등등, 소위 마곡이라 불리는 것들이었다.

그 힘이 미궁 세계에 와서는 더 강해졌다.

미궁 세계는 신비한 곳이었다.

세계 전체를 뒤덮고 있는 거대한 미궁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마물들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미궁 세계는 시련을 극복한 이에게 보상을 내렸다.

이능을 가지고 있다고는 하나, 결국 인간인 아이테르 자신이 신성을 손에 넣은 것도 결국엔 미궁 세계의 신비 덕분이었다.

[미궁 세계가 당신의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이따금씩 들려오는 목소리.

물론 이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미궁 세계에 거하는 인간들이 바치는 순수한 신앙의 힘을 빼놓을 수 없었다.

아이테르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새로운 거주지를 찾기 위해 나선 탐색대원들이 모닥불을 중심으로 모여 웅크린 채 잠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다섯 여신 가운데 하나인 이브나일 역시 있었다.

왕국의 검희라고까지 불린 검의 천재.

소문만 들었을 때는 좀 더 똑부러진, 이야기 속에 나오는 기사님 같은 존재일 거라 생각했는데.

하지만 아니었다. 검의 천재라는 사실을 떼어놓고 보면, 이브나일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은 그녀가 신성을 손에 넣은 지금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도 그렇고.’

아이테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신성이 있고, 이능이 있고… 여러 가지가 더해졌지만 본질만 놓고 보자면 대륙의 가희라 불리던 시절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브나일도 마찬가지였겠지.’

아이테르 자신이 왕국의 검희에게 환상을 품은 것처럼, 그녀 역시 대륙의 가희에게 환상을 품었으리라.

아이테르는 다시 지평을 보았다.

자존심 세고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지만 한편으로는 누군가에게 응석도 부리고 싶어 하는 어디서나 찾아볼 수 있는 보통 사람.

‘시간이 흐르면, 이야기 속의 우리는 진짜 우리랑 많이 달라질 거야.’

사람들이 마음대로 자신들의 상상을 덧붙여 나갈 테니까.

인간인 아이테르가 아니라, 다섯 여신들 가운데 하나인 태양의 여신 아이테르를 기억할 테니까.

대륙의 가희 아이테르와 진짜 아이테르 사이에 사실은 큰 차이가 존재하는 것처럼.

다섯 번째 여신 아이라의 말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말은 늘 그랬듯이 정답에 가까우리라.

‘그리고 어쩌면, 긴 시간이 지나면… 우리는 그렇게 달라진, 이야기 속의 우리와 닮아갈지도 몰라.’

더 이상 인간이 아니었으니까.

신이 되었으니까.

신으로서 모든 것을 대할 테니까.

‘하지만 취하지 말자. 자신을 잃지 말자.’

아이라가 덧붙인 말이었다.

신성을 손에 넣었다 해서, 인간들에게 여신이라 추앙받는다 해서,

‘괴물이 되지는 말자.’

인격신이 나오는 여러 신화 속의 신들처럼은 되지 말자.

인간들을 도구처럼 다루는, 그들의 목숨을 그저 숫자로만 인식하는 괴물이 되지는 말자.

신성을 손에 넣어도 인간인 우리를 유지하자.

사실, 굳이 그래야 할 이유는 없었다.

다섯 여신은 정말로 신이 되었으니까. 신이 신처럼 행동하고 생각하는 것이 무에 문제란 말인가.

하지만 아이테르는 아이라의 말을 옳게 여겼다.

아이라의 말마따나 아무리 신이라 한들, 자유롭게 생각하고 사랑하고 아파하며 즐겁게 웃을 수 있는 인간들을 도구 취급하는 것은 그저 괴물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사실, 변할 여유도 없지만.”

아이테르는 피식 웃었다.

대륙의 가희답게 가까이하기 어려운 도도함으로 무장한 그녀였지만, 지금처럼 아무도 보지 않는 어둠 속에서는 장난스러운 미소도 그릴 줄 알았다.

스스로 말했듯이 여유가 없었다.

신이 되었지만, 나름대로 인간들의 터전을 닦을 수 있었지만, 미궁 세계는 여전히 험난하기만 했다.

마물들은 계속해서 몰려왔고, 각종 재난과 재해가 인간들을 위협했다.

마치 미궁 세계 자체가 인간들을 적대하는 것만 같았다.

‘마신.’

신성을 손에 넣음에 따라 알게 된 존재였다.

아직 명확히 어떤 존재인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진 존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인간들을 향한 모든 악의의 너머에는 그가 존재하고 있었다.

아이테르는 잠시 눈을 감고 미궁 세계에 처음 왔을 당시를 떠올려 보았다.

십년이 넘게 흘렀건만 그때 본 인간들의 참상이 지금도 선명했다.

먹을 것이 없어 자기 아이를 잡아먹던 어미.

썩은 사과 한 알을 차지하고자 주저 없이 살인을 하던 아이들.

가난과 기아만이 아니었다.

온갖 저주와 악의가 하루도 그치지 않고 인간들을 유린하였다.

아이테르는 생각을 멈추었다.

자꾸만 떠오르는, 훨씬 더 심각한 기억들을 의식의 수면 아래에 가라앉힌 뒤 지평을 바라보았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아이테르는 여명이 좋았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마신의 악의로 가득한 미궁 세계에조차 광명이 이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마신.’

언젠가는 대적해야 할 존재.

아이테르는 어깨를 늘어트렸다. 짧은 시간이지만 모든 것을 잊고 그저 여명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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