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림없다!]
신검 미트라가 외쳤다.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이 마검 미트라를 휘둘러 혼란의 신의 힘을 베었다.
정신을 차린 천호가 신검과 용검을 양손에 나눠지고 지면을 박찼다.
“그대여!”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이 소리쳤다. 미소지었다. 천호와 함께 호흡을 맞춰 전진했다.
전사로 변신한 도플갱어들이 떼로 덤벼들었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로 호흡을 맞추기 시작한 용사와 성검 앞에는 무력했다.
천호와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이 돌진하며 연격을 퍼부었고, 도플갱어들은 채 접근하기도 전에 도륙이 나 흩어졌다.
실로 압도적이었다.
용사와 성검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렇기에 혼란의 신은 미궁을 유지하던 힘까지 거두었다.
어차피 대미궁의 일부였다. 힘을 거둔다 하여 바로 미궁이 무너질 일은 없었다.
소멸시킨다. 22층의 주인으로서 거대한 혼란을 일으켜 용사와 성검을 한 번에 집어삼킨다.
도플갱어들이 죽어나갔다.
천호와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이 접근해왔다.
혼란의 신이 포효했다.
비명처럼 외치며 힘을 발산했고, 보랏빛 혼란이 천호와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을 덮쳤다.
그것은 해일 같았다.
높고 거대한 파도와 같았다.
그랬기에 천호는 신검과 용검을 합쳐 한 자루 검으로 만들었다.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은 혼란을 도도하게 바라보았고, 마검을 들어올렸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지 않았다.
하지만 동시에 미소지었다. 서로가 무엇을 할지 알고 있었다.
용사의 검.
동시에 휘둘렀다.
황금빛 여명의 검과 용사의 검이 두 개의 빛이 되어 전진했다. 혼란의 신이 일으킨 혼란을 파하였다.
굉음은 없었다.
빛이 온 세상을 뒤덮었고, 다섯 여신의 힘이 흩어졌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기병의 신의 창 끝에 찔린 미혹의 신이 바닥에서 꿈틀거리며 신음을 흘렸다.
기병의 신이 천호 쪽을 돌아보았고, 초토화된 대지 위에 선 천호와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시선 끝에 혼란의 신이 쓰러져 헐떡이고 있었다.
이제 마무리만 남았다.
연속해서 큰 힘을 일으킨 혼란의 신은 바로 저항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혼자가 아니었으니까.
혼자가 아닌 것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으니까!
천호도 느꼈다.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 역시 알 수 있었다.
정신 세계 속에서 루시엘이 눈을 떴다. 정면을 주시하며 마른 침을 삼켰다.
그가 오고 있었다.
그가 올라오고 있었다.
23층과 연결된 기둥.
이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
미혹의 신도 웃었다.
저 먼 곳에서 그의 포효가 울려퍼졌다. 막강한 신력을 대미궁의 마기와 함께 쏘아 보냈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증오를 쏟아냈다. 분노를 토했다. 기쁨에 소리쳤다.
천호는 숨을 토했다. 23층과 연결된 기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일어나는 악랄하기 짝이 없는 진녹의 기운을 주시했다.
1층에서부터 시작된 악연.
마침내 서로 맞닿았다. 이제는 마주할 시간이었다.
역병신.
치유의 신의 맞수.
천호의 숙적.
그와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제28장 - 역병신
22층에 만들어진 미궁 속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밖과 달랐다.
안에서의 5분이 밖에서의 1분과 같았다.
미궁의 생성을 목격한 천호가 혼란의 신을 기습하는 데까지는 고작해야 몇 분 정도의 시간 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미궁 안에서는 반 시간도 넘는 시간이 흘러 있었다.
승리의 신은 초조함을 견디지 못 했다.
미로가 계속 변화하고 있었다. 아니, 겨우 그 정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마치 결계에라도 들어온 것처럼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 같았다.
대신인 그녀조차도 현혹하는 힘이 미궁에는 있었다.
승리의 신 자신조차도 이럴진대 다른 신들은 어떠할 것인가.
승리의 신은 무작정 달리는 것을 멈추고 다른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 * *
폭력의 신이 격투의 신을 밀어붙였다.
처음에는 대등했던 대결이 점차 일방적인 싸움으로 변해갔다.
격투의 신은 분명 강했다. 중급 신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력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미궁 안이었다.
미궁의 마기가 격투의 신의 다리를 붙잡았다. 그의 힘을 조금이나마 꺾어 놓았고, 감각을 뒤틀었다.
물론 그것만이 이유가 아니었다.
훨씬 더 단순하고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폭력의 신은 대신이었다.
동시에 그는 무척이나 오래된 신이었다.
굳이 계보를 논한다면 격투의 신이 폭력의 신의 계보에 속할 정도로 강하고 오래된, 많은 것들을 포괄하는 원초의 신이었다.
폭력의 신이 주먹을 내질렀다.
그 어떤 기교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주먹이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막아내기 어려웠다. 격투의 신은 필사적으로 기술을 펼쳐 폭력의 신의 주먹을 흘려보냈다.
폭력의 신의 주먹이 허공을 격타했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대기를 뒤흔들었다.
격투의 신이 휘청거렸다.
폭력의 신이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방금보다 조금 더 빠르고 강한 공격이었다.
격투의 신은 필사적으로 손을 놀렸고, 이번에는 흘려내지 못 했다.
폭력의 신의 주먹이 격투의 신의 가슴을 강타했다.
* * *
검의 신은 선전하고 있었다.
벌써 열 개도 넘는 방을 오가며 천사들과 영웅들을 구조했다.
자연 그녀를 따르는 무리의 규모 역시 커져 한 방에 모두 함께 들어가지 못 할 지경이 되었다.
검의 신은 숨을 헐떡이며 검을 늘어트렸다. 그녀의 검고 푸른 검에 붉은 피가 잔뜩 엉겨 있었다.
검의 신의 검은 그녀의 분신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검신에 엉킨 피에 절로 눈살을 찌푸린 그녀는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피투성이인 것은 검의 신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검고 짧은 단발은 물론이고 미궁 세계 최고의 검사라고 생각하기는 어려운 작고 가냘픈 몸에도 피가 잔뜩이었다.
검의 신 앞에는 이름 모를 소악신이 쓰러져 있었다. 놈이 죽으며 쏟아낸 피가 검의 신뿐만 아니라 지면과 천장까지 뒤덮고 있었다.
영웅들과 천사들이 검의 신에게 다가섰다. 검의 신은 그들을 위해 다시 한 번 표정을 고쳤다.
치유의 신이 늘 그러했던 것처럼 어떻게든 웃는 얼굴을 보여주고자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었다.
검의 신은 돌연 고개를 돌렸다.
반사적으로 어느 한 방향을 노려보았다.
미궁 안이었다.
지독한 마기가 소용돌이쳐 감각조차 흐트러지는 공간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알 수 있었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누가 모습을 드러냈는지.
검의 신의 얼굴에 조급함이 번졌다.
그녀는 검을 휘둘렀다. 예리한 검기로 검을 뒤덮은 핏덩이들을 모두 사른 뒤 지면을 박찼다.
서둘러야 했다.
조금이라도 상황을 호전시켜야 했다.
‘치유의 신.’
검의 신은 이를 악물었다. 불안과 두려움을 씹어삼켰다.
* * *
군대의 신은 선전하고 있었다.
노력의 신뿐만 아니라 우정의 신과도 합류한 그는 천사들과 영웅들을 규합했다.
“질서의 신이 멀지 않은 곳에 있어.”
보급의 신이 말했다.
그녀는 언제 어느 곳에 있든 아군의 위치를 항상 잘 찾아내고는 했다.
정신없이 연전을 이어간 탓인지 보급의 신의 모습도 엉망진창이었다. 멋지게 틀어 올렸던 붉은 머리칼은 아무렇게나 산발한 상태였고, 항상 단정하게 차려 입었던 군복 역시 여기저기가 흐트러져 있었다.
“왜?”
“아무 것도 아니다.”
보급의 신의 물음에 적당히 답한 군대의 신은 시선을 멀리했다.
병력을 규합하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는 승리할 수 없었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은 다음 단계를 위한 준비라 할 수 있었다.
다음 단계.
하지만 불명확했다. 미궁이 대체 어느 정도 규모로 성립되었는지, 얼마나 넓은 땅을 집어삼켰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격을 위해 정의의 성채를 나갔던 용사.
그가 밖에 있다면, 이 미궁을 만들어낸 혼란의 신을 꺾어준다면.
“오라버니.”
창병의 신이 말했다.
퍼뜩 고개를 든 군대의 신의 눈에 같은 곳을 보고 있는 보급의 신과 노력의 신, 우정의 신이 보였다.
어째서.
군대의 신도 알 수 있었다.
미궁 밖.
22층 전체가 진감하고 있었다.
* * *
역병신이 웃었다.
마침내 기둥의 계단을 모두 오른 그가 22층에 모습을 드러냈다.
25층의 지배자인 그는 악신들 가운데서도 무척이나 오래된 고신이었다.
그 역시 폭력의 신이나 혼란의 신과 마찬가지로 원초의 신이라 할 수 있었다.
원초의 신.
육신을 얻어 강림하기 전의 그는, 인격신으로서 재탄생하기 전의 그는 실로 초월적인 존재였다.
재앙 그 자체와 다름이 없었으니 말이다.
역병신은 잠시 눈을 감고 몸을 떨었다.
22층이었다.
그가 지배하는 25층이 아니었다.
하지만 가슴을 충만히 채우는 마기가 있었다.
저층이 아닌 심층이었고, 그렇기에 원 없이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용사.”
그리고 천사.
죽음조차 자비라 느끼게 해주마.
태어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주마.
역병신이 발걸음을 내디뎠다. 기둥 속 계단을 지나기 위해 축소시켰던 몸을 본래의 것으로 되돌렸다.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역병신의 덩치가 커졌다.
다섯 걸음을 내디뎠을 때는 그 키가 5미터에 달했다.
더 커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역병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억센 손으로 질병의 낫을 움켜쥐었다.
검은 쥐.
진녹의 기운.
숨결과 함께 흩어지는 온갖 종류의 역병들.
“간다.”
선언했다. 그것으로 기적을 역사했다.
쾅!
지면을 박찼다. 공간을 가로질러 단숨에 질주했다.
기병의 신이 그 돌진을 느꼈다. 옷장용 위에 타고 있던 정화의 신과 음악의 신, 회화의 신 역시 보았다.
역병신이 오고 있었다.
진녹의 역병이 거대한 안개 무리가 되어 역병신의 뒤를 따랐다.
천호도 보았다.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이 마검을 늘어트린 채 숨을 삼켰고, 정신 세계 속에서 루시엘이 모아 쥔 두 손을 가늘게 떨었다.
“내가 막겠다!”
정화의 신이 소리쳤다.
정적을 깨트리며 신력을 발했다. 천호가 주고 간 장비를 조작해 옷장용을 움직였다.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이 겁먹은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크리스가 말리듯이 정화의 신의 어깨를 붙잡았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옷장용이 포효했다.
커다란 날갯짓으로 대기를 밀어냈다. 이쪽을 향해 돌진해오는 역병신을 향해 마주 돌진하며 용의 숨결을 내뿜었다.
콰가가가가강!
빛의 기둥.
환상의 수맥을 올곧이 이은 자들만이 사용가능한 일자왕의 권능!
역병신이 그것을 보았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빛기둥을 혼란의 신처럼 막지 않았다. 그렇다고 피하려하지도 않았다.
낫을 휘둘렀다.
진녹의 기운으로 공간을 갈랐다.
빛의 기둥을 정면에서 베어 흩어지게 만들었다.
콰강!
흩어진 빛기둥이 지면을 긁었다. 땅을 파헤치다 폭발했고, 하늘과 땅이 울리는 가운데 역병신이 지면을 박찼다. 무시무시한 각력으로 옷장용과의 거리를 영으로 만들었다.
옷장용의 머리 앞.
높이 도약한 역병신이 정면을 보았다.
정화의 신과 음악의 신, 회화의 신을 보았다.
정화의 신이 반사적으로 두 팔을 벌렸다. 조금이라도 몸을 크게 해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을, 크리스를 가리고자 하였다.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역병신이 그런 정화의 신의 모습에 웃었다.
의식을 집중하지 않으면 어느새 놓치고 마는, 그리할 수밖에 없는 그를 보며 기뻐했다.
정화의 신이 치유의 신의 막내 동생임을 간파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을, 크리스를 지켜보겠다고 몸부림치는 그의 앞에서 두 여신과 여기사를 찢어발기면 어떠할까, 어떤 반응을 보여줄까 기대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보다 근본적인 이유.
직접 대면한 순간 정화의 신의 은신 능력의 비밀을 간파했기에 지을 수 있는 미소.
“너의 존재가 우리를 긍정한다.”
역병신이 말했다.
정화의 신은 이해하지 못 했지만 상관없었다. 흡족하게 웃은 그가 다시 한 번 낫을 휘둘렀다.
옷장용과 더불어 정화의 신을 두 쪽 내기 위함이었다.
빨랐다.
정화의 신은 역병신이 낫을 휘둘렀다는 사실 자체를 간파하지 못 했다.
옷장용이 잘려나갔다.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정화의 신은 베이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역병신이 휘두른 낫의 궤적을 벗어났다.
피한 것이 아니었다.
역병신이 낫을 휘두른 그 순간 옷장용이 분리한 덕분에 일어난 일이었다.
옷장용 흩어졌다.
열두기의 캐리어들 가운데 반수 가량이 역병신의 낫의 궤적에 휘말려 부서졌지만 아직 남은 것들이 있었다.
그것들 가운데 정화의 신과 음악의 신, 회화의 신을 태운 하나를 제외한 모두가 역병신에게 돌진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혼란의 신의 움직였다. 모두의 시선이 역병신에게 쏠린 틈을 타 권능을 발휘했다.
용사를 공격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블링크를 펼친 그녀는 미혹의 신의 곁에 안착했고, 기병의 신이 놀라 시선을 내린 그때 다시 한 번 권능을 발했다. 미혹의 신과 함께 안개가 되어 기병의 신의 랜스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폭발이 일어났다.
역병신이 막대한 진녹의 기운을 터트려 캐리어들을 밀어냈다. 그대로 허공을 박차 마치 유성처럼 지상에 강림했다.
쿵!
지면이 뒤흔들렸다.
진녹의 기운이 뒤따라 하늘과 땅을 물들였다.
역병신의 두 눈이 붉게 빛났다.
붉게 녹슨 갑옷을 입은 그가 질병의 낫을 늘어트렸다.
“반갑구나.”
역병신이 말했다. 그는 자신의 등 뒤에서 몸을 추스르는 혼란의 신을 돌아보지 않았다.
미혹의 신에게도 관심이 없었다.
오직 천호만을 주시하였다.
천호는 농담으로 응수하는 대신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저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저릿저릿 했다.
4층에서 마주했던 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라크슈미의 남매들인 붉은 용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그들 위에 올라탄 기병의 신의 정예병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시 역병신이 나타난 것뿐인데 주변의 마기가 몇 배는 짙어진 것 같았다. 숨을 쉬는 것조차 힘겨웠다.
역병신은 강하고 오래된 신이었다.
하지만 지금 보이고 있는 힘은 비정상적으로 강했다.
어째서.
무엇 때문에.
기병의 신은 깨달았다. 역병신 뒤에 자리한, 미혹의 신을 끌어안고 앉은 혼란의 신을 보았다.
역병신이 23층에 도달한 그때.
혼란의 신은 넘겨주었다.
너무나 가볍게 포기하였다.
22층의 지배권을.
22층의 지배자이기에 발휘할 수 있는 힘을.
혼란의 신이 우아하게 웃었다.
역병신은 기병의 신을 보지 않았다.
22층의 지배자로서 선언했다.
“시작하자.”
역병신이 지면을 박찼다.
진녹의 기운을 폭발시켰다.
동시에 천호 또한 움직였다. 태양의 신인으로서의 힘을 폭발시키며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과 함께 돌진했다.
질병의 낫과 성검이 거칠게 충돌했다.
육체를 가지고 현현한 인격신들은 크게 보아 초인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저 빠르고 강한 것만이 아니었다. 육체의 강함을 초월한 힘을 신들은 가지고 있었다.
역병신이 발을 구른 그 순간 역병신의 권능이 발휘되었다. 발구름을 중심으로 진녹의 기운이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질병이었다.
수십, 수백 개의 역병들이 동시에 하늘과 땅을 뒤덮었다. 땅은 순식간에 황폐화되었고, 대기는 오염되었다.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그저 닿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녹아내릴 만치 강력한 독이었다.
신들의 권능에 맞설 것은 마찬가지로 권능뿐이었다.
천호가 마주 발을 구른 순간 정신 세계 속에서 루시엘이 두 손을 모아 기도했다. 여덟 장의 날개를 활짝 펼치며 치유의 신의 힘을 발하였다.
본래라면 부족했다.
눈앞에 있는 것은 역병신 본인이었으니, 치유의 신의 힘을 불러내는 것 정도로는 맞설 수 없었다.
더욱이 치유의 신은 지금 무척이나 쇠약해져 23층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 루시엘이 이끌어내고 있는 치유의 힘 자체는 치유의 신이 아닌, 미궁 세계에 기록된 치유의 힘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치유의 신의 상태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루시엘은 그것을 다섯 여신의 힘으로 충당했다.
이브나일의 신기에 어려 있던 다섯 여신의 힘이 치유의 힘을 증폭시켜 역병의 힘을 상쇄했다.
진녹의 기운과 선홍의 기운이 한 발 앞서 충동했다. 부딪혀 폭발하는 대신 서로에게 녹아들었고, 그로 말미암아 권능의 무풍지대가 만들어졌다.
쾅!
역병신이 발을 강하게 구르며 낮을 휘둘렀다. 땅을 훑듯이 뻗어나간 그것을 천호와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이 공중으로 도약해 피했다.
낫의 길이는 키가 5미터에 달하는 역병의 신보다도 훨씬 길었다. 때문에 공격 범위가 실로 무지막지하였다.
“하!”
역병신이 도약한 천호와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을 향해 입을 벌렸다. 역병의 숨결이 권능의 무풍지대 속에서 힘차게 뻗어나갔다.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이 마검을 휘둘렀다.
검압으로 역병의 숨결을 갈랐고, 지면에 발을 디딘 천호가 다시 한 번 대지를 밀어냈다. 쏜살과 같이 나아가 용검과 신검을 하나로 합친 용신검 미트라를 휘둘렀다.
닿지 않았다.
몸을 뒤로 크게 튕겨 공격을 피한 역병신이 재차 낫을 휘둘렀다. 연이어 비어있던 왼손을 크게 흔드니, 역병신의 전신으로부터 온갖 날벌레들이 날아올랐다. 역병을 전파하는 그것들이 천호와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천호는 침착하게 대응했다. 용신검을 크게 휘두르며 미트라의 성수를 분사했다. 날벌레들의경로 위에 성수가 흩뿌려지니 날개가 젖은 놈들이 천호에게 닿지 못 했다.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이 그 사이를 파고들었다. 검의 신과 호각을 이룬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아름답고 날카로운 일검을 휘둘러 역병신의 허리를 베었다.
피가 튀지 않았다. 대신이라도 되듯 역병신의 허리에 난 긴 상처로부터 진녹의 빛이 뿜어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