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161화 (161/211)

[맛있어!]

마검 미트라가 환희에 차 외쳤다. 옆에서 손을 잡고 있던 루시엘이 흠칫했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아니, 옆에 루시엘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한 것 같았다.

천호도 비슷한 쾌감을 느꼈다. 신을 사냥하는 짐승으로서 허기를 채웠다.

하지만 마검 미트라처럼 정신줄을 놓지는 않았다. 그대로 정면을 노려보았다. 기둥 안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인간 형태의 붉은 용 군단이 그런 천호의 시선에 반응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기둥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천호는 야차신왕과 용살의 힘을 동시에 발했다. 여전히 선신들에게 포박된 슈라드포마에게 완전한 죽음을 선사하며 그대로 정면을 주시하였다.

여기까지도 준비가 되어 있었으니까.

다음 수 역시 정해져 있었으니까.

“카-라-하!”

기병의 신이 호쾌하게 외치며 돌진했다.

카마엘과 무토와 카를로스가 그 뒤를 따랐고, 16층의 강자들 역시 그러했다.

기둥 속에서는 강력한 마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거대한 드래곤의 형태로 변신하는 것 역시 무리였다.

그렇기에 붉은 용 군단은 무력했다.

물론 인간의 형태로도 제법 강맹한 힘을 자랑하는 그들이었지만, 상대가 나빴다. 전투 계열 선신들과 영웅들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다.

‘아들아, 쪽수에 장사 없는 법이다.’

드래곤들을 압도한 빛의 포격.

언제나처럼 옳은 아버지의 말씀.

[이겼어요.]

루시엘이 새삼스럽게 말했고, 마검 미트라가 기분 좋게 웃었다. 천호의 등 뒤에서 천사들이 환호했다.

악룡 슈라드포마와 붉은 용 군단을 상대로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헤헤, 헤헤헤.]

마검 미트라가 아이처럼 기분 좋게 웃었다. 모습은 온전한 성인이었지만, 그 본성이 어디가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루시엘이 그런 마검 미트라의 머리를 어설프게 웃으며 쓰다듬었고, 천호는 마검이 되어 변한 붉은빛 보석을 쓰다듬었다.

[히든 퀘스트 ‘붉은 용 군단 격퇴’를 완수했습니다.]

[칭호 : 드래곤 슬레이어 Lv1을 획득합니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히든 퀘스트 보상 : 용의 정수]

[당신의 놀라운 이야기를 미궁 세계가 기억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줄줄이 올라오는 빛의 창을 잠시 바라본 천호는 용검을 늘어트린 채 작게 미소지었다.

언제나처럼 다음을 생각했다.

16층의 보스 격파.

그리고 지금 위치한 곳은 17층.

다음에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 * *

“항복합니다.”

“항복합니다.”

간절한 목소리에 기병의 신은 창을 멈췄다.

“뭐라고?”

반사적으로 되물은 기병의 신은 면갑을 들어 올린 뒤 목소리의 주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붉은 용 군단 소속인 이름 모를 여인은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다시 말했다.

“항복합니다.”

그녀의 등 뒤에는 스무 명쯤 되는 남녀가 있었는데, 개중에는 어린 소년이나 소녀도 끼어있었다.

기병의 신의 시선이 닿자 다들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서로 뭉쳐 있는데다가 계단의 단차까지 있어 동작들이 어색했다.

기병의 신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도 기둥 다른 곳에서는 전투가 한창이었다. 아래쪽은 물론이고 위쪽에서도 말이다.

‘시간을 끌려는 건가?’

위쪽에 자리한 자들이 도망칠 수 있도록.

기병의 신의 의심은 타당했다. 이유는 선신들과 악신들의 관계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 악신들과 싸워온 기병의 신이었지만 포로를 잡은 적은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했고, 그나마도 적의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심문용으로 붙잡은 것이 다였다.

마물들은 기본적으로 항복을 하지 않았다.

항복을 하는 경우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항복하는 척 하다 공격하기 위해서였고, 다른 하나는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거짓 항복 밖에 없는 이유도 단순했다.

선신들과 악신들은 서로의 존속을 건 싸움을 하고 있었으니까.

애당초 서로 섞일 수 없는 관계였으니까.

여인의 항복 때문에 시간을 지체했다. 경험상 눈앞의 항복은 거짓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병의 신은 일단 창을 멈추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진짜인가?’

기존의 거짓 항복들과는 느낌이 달랐다.

여인에게서는 제법 진정성이 느껴졌다.

그리고 기병의 신은 선신이었다. 기본적으로 선량한 존재이다 보니 이런 식으로 나오면 일단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이 있었다면 기사도의 화신이니 어쩔 수 없다며 낄낄 거렸겠지만 다행히 이 자리에 둘은 없었다.

덕분에 신으로서의 위엄을 유지할 수 있게 된 기병의 신은 눈을 가늘게 떴다.

머리를 조아린 여인이, 붉은 머리칼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저의 어머니는 직공의 신입니다. 뒤에 있는 아이들도 대부분 선신들과의 혼혈입니다.”

기병의 신이 눈을 부릅떴다.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직공의 신?”

“네, 그러합니다. 거짓이 아닙니다.”

여인이 나름 침착하게 말했지만, 오랜 시간 억눌러 온 것이 분명한 간절함과 깊은 감정이 묻어났다.

기병의 신은 직공의 신을 알았다.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에게는 조카 뻘에 해당하는 여신으로, 항마전쟁 와중에 실종된 여러 선신들 가운데 하나였다.

‘거짓말이 아니야.’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집중해서 보았기 때문인지 이내 간파할 수 있었다.

여인에게서 선신들의 자취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선신들의 자손이 분명했다.

“뒤에도?”

“네, 여러 여신들의 자손들입니다.”

여인의 말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머리를 조아린 이들이 저마다 어머니의 신위를 입에 담았다.

거의 대부분이 항마전쟁 와중에 실종된 여신들이었다.

기병의 신은 이를 악물었다.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것 같은 분노를 간신히 억제했다.

슈라드포마는 이미 죽었다. 이미 소멸했다. 용사가 놈을 쓰러트렸다.

“지금 어디에 있지?”

“…돌아가셨습니다.”

여인의 대답이 조금 느렸다. 하지만 기병의 신은 그녀를 타박하지 않았다. 목소리에 어린 물기를 모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병의 신은 숨을 길게 쉬었다.

기둥 안에 자리한 붉은 용 군단 모두가 선신들의 자손들은 아니었다.

피가 섞인 자들 가운데도 슈라드포마의 영향이 강해 악신에 가까운 자들이 더 많았다.

눈앞에 자리한 이십여 명은 얼마 안 되는 예외.

기병의 신은 마음을 정했다. 살짝 머뭇거리며 이쪽으로 다가서는 카마엘에게 눈짓으로 명령한 뒤 여인에게 다가섰다.

“이름이 무엇이지?”

여인이 고개를 들었다. 직공의 신을 닮은 얼굴로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 * *

17층의 전투- 정확히는 기둥 속에서의 전투가 완전히 마무리 되었다.

붉은 용 군단은 사실상 궤멸하였다. 도망친 이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슈라드포마까지 죽은 지금 놈들이 독립된 군단으로서 재기할 가능성은 무척이나 낮았다.

“아, 뭔가 허무하다.”

붉은 용 군단과 몇 년 동안 싸워온 보급의 신이 어깨를 늘어트리며 말했다.

그토록 자신을 괴롭혀온 이들이 이리 쉽게 궤멸할 줄이야.

사실 머리로는 납득하고 있었다.

전장과 상황 자체가 평소와는 너무 달랐으니까.

붉은 용 군단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대부분이 용의 형태조차 취하지 못 하였으니까.

“뭐, 잘 된 거겠지.”

어찌되었든 16층의 주인인 슈라드포마는 죽었고 그의 붉은 용 군단은 와해되었다. 선신들의 대승이니 불만을 가지는 것도 우스웠다.

때문에 보급의 신은 새로운 문젯거리인 라크슈미와 그녀의 남매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받아주자.”

“응응, 불쌍한 애들이잖아.”

“오라버니, 부탁드려요.”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에 이어 기병의 신까지 청원을 하니 딱딱한 군대의 신도 평소처럼 단호하게 나갈 수가 없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붉은 용 군단 소속이었고, 지금까지 선신들의 군대와 싸워왔다. 라크슈미의 경우 제법 강해 그녀에게 죽은 천사들의 숫자만 수백을 헤아렸다.

물론 슈라드포마의 강압이 있었지만, 전쟁터에서 벌어진 일들이었지만.

“조건이 있다.”

복종의 인을 새긴다. 목걸이를 채운다.

최심층을 향한 랜스 차징을 시작한 지금, 포로들을 따로 관리할 여유 따위 없었다. 죽이지 않는다면 목줄을 채운 뒤 이쪽의 전력으로 쓰는 게 최선이었다.

“따르겠습니다.”

애당초 여기까지 각오했는지 라크슈미는 즉답했다. 그녀의 등뒤에 숨듯이 자리한 남매들은 순간 힉하고 숨을 삼켰지만, 라크슈미의 결정이라 그런지, 혹은 자신들의 처지를 깨달은 것인지 이내 순종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가만히 바라보던 천호는 속으로 생각했다.

‘용이다.’

진짜 용. 변신도 할 수 있는.

날아다니고, 브레스도 뿜는, 몸길이가 십여 미터에 달하는 진짜배기 붉은 용.

더욱이 앞으로 이쪽과 함께 싸운다고 했다.

기병의 신이 제법 진지한 어조로 기승이나 용기병에 대해 이야기했다.

‘아아, 아아아.’

용기병이라니.

이 얼마나 멋진 울림이란 말인가.

[그대여?]

성검 미트라가 기묘한 낌새를 눈치라도 챘는지 미심쩍은 목소리로 불렀지만 천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머릿속에서 아버지의 이야기가 재생되기 시작한 천호였다.

‘나도 이것저것 꽤 타고 다녔단다.’

말도 타고, 와이번도 타고, 용도 타고.

‘그 중에서 역시 제일은 용이었지.’

특히 최고는 용신왕이었다며, 딱 한 번뿐이었지만 용신왕과 함께 했던 전장을 언급하실 때마다 아버지의 얼굴에는 참으로 큰 환희가 어려 있었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그럴 때마다 어머니께서 아버지 등짝을 후려치셨다.

아무튼 용이었다.

용기병이었다.

이제 천호 자신에게도 용기병 루트가 열리고 만 것이다.

천호는 이글이글 불타는 눈으로 라크슈미를 바라보았고, 라크슈미는 흠칫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호의 바라보는 기술이 워낙 좋아 인기척 자체는 느꼈지만 어디서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는 감지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으으음.]

정신 세계 속에서 미트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천호의 ‘엉큼한’ 경험치가 계속 올랐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잠깐 와봐라 그대여.]

전투 뒷정리 중이었으니, 잠깐은 괜찮을 터였다.

미트라는 천호를 반쯤 강제로 정신 세계에 불러냈다.

덕분에 갑자기 픽하고 쓰러진 천호였지만, 어차피 밖에는 루시엘이 있으니 알아서 잘 처리해주리라.

[그대여, 솔직히 말해봐라.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것인가.]

미트라의 시선이 제법 날카로웠다. 때문에 천호는 숨김없이 자신의 야망을 털어놓았다.

[용기병?]

“네, 용기병.”

용을 타고 싸우는 기병.

모든 남자의 로망.

[남…자의 로망?]

“네, 전용 탈것은- 그것도 멋진 탈것은 남자의 로망이니까요.”

천호가 주먹을 불끈 쥐며 강조했다. 만화나 영화 속의 에이스 파일럿들은 다들 전용기를 갖고 있지 않던가.

성검 미트라는 미간을 좁혔고, 평소보다 훨씬 애 같은, 그리고 흥분하고 있는 천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나보다는 마검이 낫겠군.]

“네?”

미트라는 대답하는 대신 스스로 힘을 발해 마검으로 변신했다.

[야! 이 미친놈아! 전용 탈것?! 그게 너한테 왜 필요해!]

대뜸 욕부터 날린 마검 미트라는 뿔을 곧이 세운 채 천호에게 바짝 다가섰다. 반사적으로 물러서는 천호의 가슴을 뿔로 쿡쿡 찌르며 말을 이었다.

[너 혼자서 날 수 있잖아. 애당초 날 수 있는 애가 탈 것이 왜 필요한데?]

그랬다.

천호는 이미 자력으로 날 수 있었다. 비행의 신의 날개가 있는데 굳이 탈것을 탈 이유가 없었다.

[그냥 너 혼자 날아다니는 쪽이 훨씬 더 효율적일걸?]

마검 미트라의 뿔처럼 날카로운 팩트였다.

저도 모르게 신음을 삼킨 천호는 열심히 머리를 굴려보았지만 마땅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그치만 기병의 신은…….”

[걘 타는 쪽이 더 빠르잖아. 자력으로 날면 엄청 느리더만. 방금도 말했지만 넌 타는 쪽이 오히려 더 느릴걸?]

이번에도 맞는 말이었다. 천호는 어머니께 등짝을 맞은 아버지처럼 어깨를 늘어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에 키득 웃은 마검 미트라는 다시 천호의 가슴을 뿔로 쿡쿡 찌르며 말했다.

[그리고 타려면 날 타면 되잖아.]

“미트라를 어떻게 타요.”

[분신 있잖아, 분신. 분신으로 커다란 날 만들어서 타고 다니면 되잖아. 검신 위에.]

무슨 말을 하는지는 대강 알 것 같았다.

커다란 대검을 만든 뒤 검신 위에 올라타면 비행 스킬이 있는 미트라니 타고 날아다니는 것이 가능하리라.

하지만 효율이 나빴다. 뭔가 용을 탈 때와 달리 그리 멋지지도 않을 것 같았고.

굳이 타야한다면 차라리 방패를 타리라.

“그냥 날개로 날아다닐게요.”

[그래, 잘 생각했어.]

뜻대로 되어 만족했는지 마검 미트라가 허리춤에 양손을 올리며 히죽 웃었다.

[아무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라크슈미와 그녀의 남매들이 합류한 것은 이래저래 반길만한 일이었지만 앞으로의 행보에 있어 그렇게까지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15층의 전력 전부를 이끌고 16층에 내려왔고, 다시 16층의 전력까지 전부 합쳐 17층에 내려왔다.

그리고 간단한 낚시로 붉은 용 군단을 궤멸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다음 행보는 어찌할 것인가.

이대로 17층에 자리한 정의의 성채와 합류한 뒤 무엇을 할 것인가.

마검 미트라의 물음에 천호는 늘어트렸던 어깨를 바로 했다. 호기심으로 눈을 반짝이는 마검 미트라와 눈을 맞춘 뒤 답해주었다.

“이렇게요.”

[이렇게?]

“이렇게.”

천호의 손가락이 마검 미트라의 이마를 쿡하고 찔렀다.

* * *

저주의 신이 소멸했다.

15층에 자리한 부덕의 요새가 무너졌다.

악룡 슈라드포마가 죽었다. 그의 붉은 용 군단 역시 궤멸했다. 부덕의 성채는 건재했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선신들이 마냥 유리한 것은 아니었다.

치유의 신이 거하고 있던 정의의 성채가 무너졌다. 기록적인 대패에 병력이 반토막 나고 말았다.

치유의 신의 부관 격이었던 최강의 영웅 칼리드가 남은 병력을 수습해 22층으로 도주하긴 했지만, 상황이 좋지 못 했다. 더욱이 치유의 신은 여전히 23층 어딘가를 헤매고 있는 판국이었다.

역병신은 23층과 22층을 잇는 기둥을 점령했다.

치유의 신이 22층으로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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