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148화 (148/211)

[음, 여러모로 그녀가 적격이긴 하지.]

크리스는 천호와 마찬가지로 호세사천왕을 쓸 수 있었다.

어머니의 변신 물약은 단순히 모습만 바꿔 주는 것이 아니라 그 기질이나 힘조차도 어느 정도 변화시키니, 직접 싸우지 않는 한 크리스의 변신이 들통날 일은 없었다.

[어떤 의미로는 오늘 활약한 게 다행일 수도 있다. 적들도 이제 그대를 저격하기보다는 정면에서 힘 싸움을 할 생각을 할 터이니 말이다.]

천호는 오늘 놈들의 노림수를 격파했다. 그냥 격파한 것도 아니고, 이쪽에 사실상 약점이 없다는 사실을 강하게 드러내기까지 했다.

“잘될 거야. 다들 너무 걱정하지 마.”

“맞아, 맞아. 잘될 거야.”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이 근거 없는 낙관론을 밀어붙였지만, 워낙에 발랄한 두 여신이 그렇게 말하니 정말 잘될 것만 같았다.

“용사님, 틀림없이 잘될 거예요.”

루시엘이 천호의 손을 꼬옥 붙잡으며 그리 말했다. 진짜 천사인 루시엘까지 이렇게 나서니 이제 부정할 마음 자체가 사라진 천호였다.

“네, 루시엘. 틀림없이 잘될 거예요.”

마주 웃은 천호는 다시 군대의 신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예정대로 오늘 새벽에 일을 시작하겠습니다.”

“음, 잘 부탁한다. 짧은 시간이지만 푹 쉬었으면 한다.”

변신 물약은 두 병.

유지 시간은 중간에 주문을 외워 끊지 않는다면 정확히 120시간.

한 병은 크리스가 마실 예정이었고, 다른 한 병은 천호 자신이 마실 예정이었으니 앞으로 닷새 내에 이브나일의 신기를 확보해야만 했다.

“마물로 변신이라니 기대돼.”

“맞아, 맞아. 어떤 마물이 될지 기대돼.”

말은 이렇게 하고 있었지만 이미 정해 둔 마물이 있었다.

현재 시각은 오후 다섯 시.

출발은 새벽 두 시였으니 아홉 시간 남짓이 남은 셈이었다.

“새삼스럽지만 잘 부탁할게요. 다들 작전 시작할 때까지 푹 쉬고요.”

“응응.”

“목욕물 잘 부탁할게.”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이 답했고, 루시엘이 다시 한 번 천호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나도 있다, 나도.”

정화의 신이 뚱한 얼굴로 말하자 음악의 신이 눈을 깜박였다.

“아, 맞다. 정화의 신도 같이 가기로 했지?”

“그냥 정화의 신이 혼자 갔다 오면 아무도 눈치 못 채는 게 아닐까?”

회화의 신의 농담에 정화의 신의 눈빛이 싸늘해졌지만, 천호는 속으로 그럴싸한 이야기라 생각했다.

“아무튼 이상일세. 짧은 시간이나마 편히 쉬게나.”

군대의 신이 회의를 파하자 천호는 모두와 함께 막사를 나왔다.

저 멀리 서산 너머로 해가 지고 있었고, 보랏빛 황혼이 하늘을 물들였다.

낮과 밤의 사이.

낮도 밤도 아닌 시간.

“일단 라구엘이랑 마키나 불러서 밥이나 먹죠.”

천호가 말했고, 모두가 환호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러 밤.

정신세계 속에서 천호는 미트라를 마주했다.

단순한 이유였다.

오늘 흡수한 역병신의 마검.

그로 인한 큰 변화.

[준비되었다.]

다소 긴장한 듯, 딱딱한 표정을 지은 미트라가 빛의 창을 펼쳤다.

마검을 흡수함에 따라 얻게 된 스킬을 바라보았다.

제21장 - 격돌

남자는 지평을 바라보았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여명.

남자의 시간과 여자의 시간 사이.

아그작 소리가 나게 사과를 베어 문 남자는 그대로 돌아서서 한 층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가운데가 원형으로 뻥 뚫려 있는 터라 아래층에서 의식을 펼치고 있는 여자와 그 수하들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무슨 의식인지는 잘 몰랐지만 아무튼 파이엔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필요한 의식이라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잠시 옛날 생각을 해 보았다.

겉모습만 보면 30대 초반인 남자였지만, 실제 연령은 쉰을 훌쩍 넘어 예순을 바라보았다.

남자가 처음 파이엔에 온 것은 파릇파릇한 십대 시절.

지금으로부터 근 삼십 년 전의 이야기였다.

남자는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여자를 바라보았다.

의식을 진행 중인 여자는 너무나 성스럽고 아름다워 자신이 아는 그 여자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시 아그작 사과를 베어 문 남자는 삼십 년 전을 떠올렸다.

파이엔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남자가 본 것은 여자가 아니었다.

낯선 숲에 떨어져서 엄청 헤매고 돌아다녔으니까.

아마 크리스를 만나지 못 했다면 조난당해 죽었을 터였다.

야차신왕의 피가 흐르긴 했지만 파이엔에 막 왔을 당시에는 각성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으니 말이다.

밤 한정이긴 해도 파이엔의 용신왕조차 꺾을 수 있는 지금과 달리 삼십 년 전에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십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까.

남자는 심만 남은 사과를 삼매진화로 불태우며 턱을 괴었다. 난간에 몸을 기댄 채 생각을 이어 갔다.

아들 녀석에는 용사 소환이니 뭐니 떠들어 댔지만 사실 남자를 파이엔에 부른 것은 성왕국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남자를 부른 것은 파이엔이라 불리는 이 세계 그 자체였다.

여자는 말했다.

세계는, 세상은 자아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지만 보호 본능은 가지고 있다.

굳이 따지자면 동물보다는 식물과 비슷할 거다.

파이엔이 남자를 불렀다.

여자의 말마따나 자아가 없는 파이엔인 터라 자세한 설명은 듣지 못 했다.

이계에서 온 마왕군의 침공을 막아 내기 위해 자신을 부른 것이 아닐까 막연히 추측할 뿐, 진짜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다.

남자가 파이엔에 왔을 때 여자는 잠들어 있었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처럼 탑의 최상층, 자기 침대에 누워 깨어나지 못했다.

남자와 여자에게 있어서는 행운이었다.

여자가 잠에서 깨어날 수 있는 상태였다면, 여자가 이계의 마왕을 무찔렀을 테니까.

이런 소리 저런 소리 늘어놓으며 자기 손으로 부수니 어쩌니 했지만 여자는 결국 파이엔의 용신왕이었다. 이계에서 온 마왕군을 내버려 둘 성격도 아니었고 말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파이엔에서 이계의 마왕을 무찌르기 위해 남자를 불렀을 당시의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남자는 잠시 태양의 탑에 잠든 여자를 깨우던 순간을 떠올려 보았다.

여자가 눈을 떴을 때.

태양 같은 황금빛 눈으로 남자 자신을 바라보았을 때.

“최종 보스 등장이었지.”

로맨틱한 구석은 없었다. 잠에서 깨어난 여자는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황혼이 다가오던 무렵이라, 밤이 가까운 시간이라 살았지, 정오였으면 100% 남자의 사망으로 끝났으리라.

“아무튼 파이엔.”

남자는 다시 이야기를 되돌렸다.

파이엔이 남자 자신을 불렀다.

그렇다면 아들의 경우는 어떠할까.

미궁 세계가 아들을 부른 것일까?

“미궁 세계.”

남자는 소리 내어 말해 보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위화감이 들었다.

“미궁 세계.”

다시 말해 보았다.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무어라 정확히 말은 못 하겠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무엇일까. 대체 무엇인 것일까.

“미궁 세계.”

세 번째로 말했을 때 남자는 난간에 기대고 있던 몸을 벼락처럼 일으켜 세웠다. 저도 모르게 탄성을 토했다.

“아!”

밑에서 의식을 진행 중이던 여자의 부하들 가운데 일부가 이쪽을 노려보았다.

남자는 그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눈을 감았다. 시각을 차단하는 것으로 집중력을 끌어올린 뒤 기억을 더듬었다.

미궁 세계.

분명 들어 본 기억이 있었다.

그야말로 스치듯, 지나가며 들은 수준의 기억이었지만 남자의 머리는 그 몸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아득히 초월했다. 뇌리에 남은 기억이라면 얼마든지 끄집어낼 수 있었다.

어디서 들은 것일까.

누가 미궁 세계를 입에 담은 것일까.

“마왕.”

남자가 부지불식간에 답을 토했다.

마왕이었다.

최종 결전을 펼치기 직전에 혼잣말 하듯이 작게 중얼거렸었다.

“결국 미궁 세계는 찾지 못했군.”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미궁 세계.

이계에서 온 마왕이 찾고 있던 세상.

세상은 저마다의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처럼 세상도 ‘동명 이계’가 존재할 수도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미궁 세계라는 이름이 흔할 것 같지는 않았다.

마왕은 어째서 미궁 세계를 찾은 것일까.

이계의 마왕과 미궁 세계 사이에는 어떤 연관점이 있는 것일까.

마왕은 미궁 세계를 찾으면 무엇을 하려 한 것일까.

그리고 아들.

아들은 어째서 미궁 세계에 소환된 것일까.

무언가가 있었다.

서로 별개의 사건처럼 보였지만,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 존재하는 것 같았다.

의식은 아직 한창 진행 중이었다.

때문에 남자는 여자를 부르는 대신 신속의 스칸다를 펼쳤다. 훌쩍 태양의 탑을 떠나 성왕국으로 향했다.

“또 부활할지 모르니 가둬 두자.”

여자가 했던 말.

그래서 성왕국 지하에 봉인해 둔 이계의 마왕들 가운데 하나.

여자는 역시 언제나 옳았다.

남자는 성왕국을 향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 * *

미트라는 여전히 십대 중후반 소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역병신의 마검을 흡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완전체에는 도달하지 못 한 모양이었다.

“레온 선배랑 싸우던 당시의 힘은 다 회복한 거죠?”

[그렇다. 솔직히 이제는 그때보다 살짝 더 강한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트라가 미간을 좁히며 답하자 천호는 따라서 미간을 좁혔다.

“그때는 지금이랑 모습이 달랐다는 거죠?”

[그것도 그렇다. 지금보다 좀 더…… 흠흠, 성숙한 모습이었다.]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

미트라의 말대로였다. 그녀는 이십대 초중반 정도로 보이는, 작금의 파릇파릇한 소녀 미트라와 달리 무척이나 성숙한 여인이었으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좋은 생각이요.”

적당히 얼버무린 천호는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떻게 보면 앞으로도 더 강해질 여지가 있다는 거니 좋지 않을까요.”

[흠,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뭐든지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천호는 다시 한 번 어깨를 으쓱인 뒤 말했다.

“그래도 레벨은 많이 올랐네요.”

[음, 그건 확실하다.]

미트라가 뿌듯한 얼굴로 빛의 창을 펼쳤다.

마검승화의 레벨이 두 단계나 올라 6이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마검과 관련된 스킬들은 전부 레벨이 올랐다.

“성검 스킬도 몇 개는 올랐네요.”

[분신이랑 귀환, 비행 같은 것들이 올랐다. 아무래도 내 기본 기량 자체가 높아진 모양이다.]

미트라가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뭐랄까, 예전에는 그래도 좀 진중함을 유지하던 와중에 때때로 빈틈을 보였다면, 지금은 그냥 항시 빈틈투성이인 그녀였다.

[왜 그러나?]

“아뇨, 보기 좋다고요.”

[흠흠, 그런가?]

미트라가 부끄럽다는 듯, 하지만 기쁘다는 듯 눈웃음을 지었다.

천호는 작게 웃은 뒤 빛의 창 상단을 보았다. 이전에는 없던 새로운 스킬이 있었다.

“비활성화네요.”

[음, 하지만 마검이 되면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마검이 되면요?”

[그래, 뭐랄까…… 마검 전용 스킬이라고 해야 할까…….]

미트라가 자신 없다는 투로 작게 말하자 천호는 다시 스킬 창을 살펴보았다.

네모진 상자 안에 그려진 그림.

해가 뜬 하늘을 노도처럼 밀려온 장막이 뒤덮고 있었다.

의미하는 바는 하나.

역병신이 보여 주었던 이적.

“미트라, 마검으로 잠시 변해 볼 수 있어요?”

[으음, 마검으로 말인가?]

미트라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 미적거리자 천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미트라?”

[알겠다. 지금 변신하겠다.]

거기까지 말한 미트라는 눈을 감고 의식을 집중했다. 그러자 이내 검붉은 빛이 미트라를 뒤덮었고, 예의 마검 미트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후우, 미적거리기는.]

변신하자마자 코웃음을 친 마검 미트라는 히죽 웃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천호는 저도 모르게 물었다.

“미트라.”

[응?]

“이중인격 아닌 거 맞아요?”

성검과 마검은 이중인격이 아니다.

성격이 크게 변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동일한 자아를 공유하는 같은 인물이다.

[응, 이중인격 아니야. 몸뿐만 아니라 기억도 공유하니까. 성검도 마검도 둘 다 나야.]

“음.”

그냥 미트라가 이중인격의 의미를 잘 모르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미트라의 말이 틀린 것 같지도 않았다.

미트라가 계속해서 말했다.

[마검이 되면 많이 솔직해지니까. 성검일 때의 나는 그게 좀 부담스러운 것 같아. 바보같이.]

“흠.”

[왜?]

“분신을 응용해서 성검 미트라랑 마검 미트라를 공존시키면 어떨까 해서요.”

[더블 으앙이 듣고 싶어서?]

“음, 그건 중대 사항이죠.”

마검 미트라가 다시 까르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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