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해야 해?]
천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마검 미트라의 회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마검 미트라와 역병의 마검의 검신을 교차시켰다.
매개체를 통해 힘을 강림시키려 한다면 그 매개체를 제거한다.
힘의 강림 자체를 무효로 만든다.
역병신의 당혹감이 느껴졌다.
마검 미트라가 고통 섞인 신음을 토하며 빛을 발했다.
[우으윽!]
역병의 마검을 먹어 치운다.
그 힘을 미트라의 것으로 한다.
[미친! 이 무슨?!]
역병의 신이 노성을 토했지만 별수 없었다. 여긴 중층이었고, 놈은 심층에 있었다.
힘을 강림시킬 매개체인 역병신의 마검 자체가 사라지는 판국이니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끄아!]
마검 미트라가 정신세계 속에서 양 어깨를 끌어안았다. 비명처럼 외치며 마지막 힘을 발했다.
역병신의 마검이 빛이 되어 사라졌다.
역병의 기운이 거짓말처럼 증발했다.
[하아!]
정신세계 속에서 마검 미트라가 주저앉았다. 전신이 땀투성이가 된 채 헐떡였다.
하지만 성과가 있었다.
마검 미트라는 전신에 차오르는 힘을 느꼈다. 마검승화의 레벨이 단숨에 치솟았다.
그뿐만 아니라 새로운 스킬 역시 생성되었다.
마검 미트라는 정신세계 속에서 아예 드러누워 버렸다.
연신 헐떡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팔베개…….]
[팔베개 해 줘야 해…….]
고생했으니 상을 받아야 한다.
천호는 작게 웃었다. 마검 미트라의 붉은 보석을 쓰다듬으며 약속했다.
“높다높다도 해 드릴게요.”
[흐흥.]
마검 미트라가 애써 흥흥거렸고, 천호는 늑대 쪽을 돌아보았다. 예상대로 군대의 신이 늑대를 도륙하고 있었다.
아직 소악신들이 몇인가 더 남아 있었다.
전투는 이제 막 시작했기에 적의 병력도 건재했다.
하지만 천호는 승리를 확신했다. 그리고 그 확신에 힘을 더해 주듯, 저 멀리서부터 카마엘의 전투 함성이 들려왔다.
소악신들이 박살 나는 광경을 목격한 마물들은 감히 천호에게 달려들지 못 했다.
천호는 그런 마물들에게 직접 돌진하는 대신 하늘을 우러렀다.
억지로 불러낸 밤이 돌아가고 있었다.
밤의 장막에 잠시 가리었던 푸른 하늘이 드러나며 태양의 눈부심이 전장을 뒤덮었다.
야차신왕의 힘이 사라졌다.
밤의 끝에서 짐승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때문에 천호는 마검 미트라를 다시 성검 미트라로 변신시켰다. 허리춤에서 꺼낸 체력 회복의 물약과 마력 회복의 물약을 연속해서 마셨다.
“부탁해요, 미트라.”
[으응?]
“마검 미트라처럼.”
천호의 요구에 미트라는 얼굴을 붉혔다. 역병의 마검을 흡수하느라 힘든 것과는 별개로 끙끙 앓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응, 낮이야.]
낮.
물약을 통해 회복시킨 체력과 마력.
태양의 신인이 다시 한 번 강림했다.
“카-스트로!”
카마엘이 자기 키보다도 더 큰 검을 힘차게 휘두르며 포효했다.
강력한 힘이 담긴 말은 그 자체로 마법이었다.
카마엘의 적들이 움찔하며 멈춰 섰다.
카마엘의 공격이 보다 강화되었다.
크게 휘둘러 내려찍은 검이 지면과 적과 군대를 갈랐다. 키가 5미터는 됨직한 거인이 일도양단되어 무너졌다.
“카오!”
카마엘이 다시 외쳤다. 거인을 베고도 그 기세가 죽지 않은 검기가 쭉쭉 뻗어 나가는 와중에 지른 승리의 포효였다. 이번에는 검을 횡으로 휘둘러 새로운 검기를 더했다.
기존의 검기와 더해지니, 십자 형태가 된 검기가 마물들을 갈랐다.
쾅!
카마엘이 검으로 땅을 찍으며 낸 소리였다.
이번에는 딱히 공격이 아니었다.
방금 일격으로 이미 눈앞의 적들은 모조리 박살이 났기 때문이다.
저 멀리 도망치는 놈들이 있었지만, 어느 정도는 살려서 보내야 했다.
이번 싸움의 결과를 부덕의 성채 놈들에게 전해야 했으니 말이다.
“카야!”
여섯 장 날개 모두를 쫙 펼치며 기운차게 외치자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승이구려.”
카마엘과 반대 방향에서 적진을 급습했던 무토였다.
합장을 한 채 언제나처럼 엷은 미소를 지은 그의 전신에서는 뜨거운 열이 발산되고 있었다.
잘은 모르지만 용사처럼 태양과 관련된 힘을 다룬다는 모양이었다.
‘양의…… 뭐였더라.’
예전에 한 번 들었던 무토의 무공 이름을 떠올리기 위해 노력하던 카마엘은 이내 그만두었다.
약간 늦긴 했지만 무토의 말에 맞장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대승인 것 같아.”
카마엘은 무토와 함께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물의 군대는 개박살이 났고, 선신들의 군대는 건재했으니 대승이 분명했다.
“뭐, 언제나처럼 지휘가 좋았으니까.”
어느새 다가온 카를로스가 마상용 창을 어깨에 얹으며 말했다.
카마엘과 무토와 마찬가지로 전술 병기 취급을 받는 그였지만, 앞의 둘과 달리 그는 기병대를 이끄는 몸이었다.
카마엘과 무토에게 내려진 명령은 기본적으로 단순했다.
마음껏 날뛰어라.
전술 병기나 다름없는 그 전투력을 유감없이 발휘해라.
하지만 카를로스는 달랐다. 부대를 이끄는 몸이었기에 군대의 신에게 보다 자세한 지시를 받았고, 전투 중에도 몇 번씩이나 새로운 명령을 전달받았다.
군대의 신의 지휘는 실로 신묘했다.
그의 말대로 움직이다보면 적진이 와해되었고, 이쪽의 숫자가 많든 적든 적을 포위했다. 시킨 대로 하다 보면 왜 그런지는 몰라도 어느새 승리하고 있었다.
“음음, 군대의 신께서는 신이시니까.”
천사인 카마엘이 흡족한 얼굴로 동조하자, 무토가 작게 웃었다. 카를로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활약 역시 무시할 수 없구려.”
누구를 말하는지는 너무나 뻔하였다.
카를로스와 카마엘은 반사적으로 같은 방향을 돌아보았다.
오늘의 전투에서 모두의 시선을 모은 자.
누구보다 큰 활약을 한 자.
“혼자서 악신을 셋이나 잡았으니까.”
사실 그것만이 아니었다. 모루 역할을 충실히 해 준 그가 있었기에 망치 역할인 자신들이 종횡무진으로 활약할 수 있었다.
“태양의 신인이라고 했었지?”
카마엘이 눈을 반짝이며 묻자, 무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태양 아래 강해지는 자, 태양의 신성을 가진 자.”
정말이었다. 이미 몇 차례나 확인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설마 낮이 아닌 밤에도 강해질 줄이야.
“뭔가 느낌이 많이 달랐지만 아무튼 강했어.”
“나도 오래는 못 봤지만…… 어떤 의미로는 낮보다 더 강해 보이던데?”
“소승이 보기에는 낮과 밤 각각의 장단이 있는 것 같았소.”
태양의 힘을 사용할 때는 광역 공격에 익숙해 보였다. 큰 힘을 널리 퍼트리는 데 좋다고 할까.
반면 밤의 힘을 사용할 때는 큰 힘을 개인에게 때려 박는 느낌이었다.
“낮에는 카마엘에 가깝고, 밤에는 소승에 가깝다 할 수 있구려.”
무토의 해설에 카마엘은 헤-하고 입을 벌리더니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역시 대련해 보고 싶어!”
“나중에 해라, 나중에.”
군마 위에서 고개를 내저은 카를로스는 다시 천호를 보았다. 성검과 무어라 대화를 나누는 그를 보며 쓰게 웃었다.
“낮에도 이기고 밤에도 이기는 건가? 적들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이겠군.”
낮에 강하면 밤에 약한 게 보통이었으니까.
그 반대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용사는 낮에는 낮대로, 밤에는 밤대로 강했다.
“천사 분의 활약도 인상적이구려. 아군의 피해가 적은 것은 그녀 덕분이 컸다고 생각하오.”
무토가 다시 합장하며 루시엘이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3급 천사인 카마엘보다 아직 한 급수 아래인 그녀였지만, ‘천사다움’만을 논한다면 카마엘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특히 그렇게 생각하는 카를로스가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게 진짜 천사지.”
부상자들을 열심히 돌보는 루시엘의 모습은 무척이나 아름다워 마치 성화를 보는 것만 같았다.
“치, 쟤도 싸울 땐 살벌했는데.”
카마엘이 볼을 부풀리며 말하자 무토가 다시 웃었다.
“치유의 신을 닮은 것이 아니겠소.”
“흠, 그런가.”
“그런가가 아니라 당장 너부터가 치유의 신의 사도잖아.”
카를로스의 지적에 카마엘이 에헤헤 웃었다.
치유의 신의 사도들과 천사들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호전적이었다.
싸움을 즐겼고, 싸움 속에서 삶의 보람을 느꼈다.
“천사는 모시는 신을 닮기 마련이니 말이오.”
“응, 그래서 다들 착하고 예뻐.”
카마엘이 활짝 웃으며 말하자 카를로스는 부정하고 싶다는 표정이 되었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은 사실이었으니 말이다.
카마엘도 입만 다물고 있으면 예뻤다. 성격도 일단은 착했고.
“아무튼 굉장하군. 낮이밤이 용사라니.”
“낮이밤이?”
“낮에도 이기고 밤에도 이긴다고.”
카를로스의 농담에 무토는 푸근하게 웃었고, 카마엘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헤에, 그럼 낮져밤져도 있겠네? 낮에도 지고, 밤에도 지고!”
재미있다는 듯 까르르 웃는 그녀의 모습에 카를로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마따나 낮이밤이가 있으면 낮져밤져도 있는 게 이치에 맞았으니까.
그리고 그런 카를로스의 예상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낮이밤이 용사의 곁에는 낮져밤져인 존재가 함께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으음.]
“왜요?”
[아니, 그냥…… 어쩐지 귀가 좀 간지럽다.]
누가 자기 이야기라도 하는 걸까.
정신세계 속에서 어깨를 으쓱한 미트라는 이내 다시 말을 돌렸다.
[아무튼, 승리했군.]
“승리했죠.”
그것도 그냥 승리가 아닌 대승이었다.
[그대의 활약이 컸다.]
“음, 뭐…… 그렇긴 하죠.”
악신 가운데 반수 가량을 천호 혼자서 해치웠으니까. 더욱이 태양의 신인으로 화해 쓰러트린 마물들의 숫자도 어마어마했다.
[음, 음음.]
미트라가 무척이나 뿌듯한 얼굴로 기분 좋은 목소리를 흘렸다. 정신세계 속 이야기이긴 했지만, 뺨이 풀어지기 직전이었다.
낮과 밤 모두 강한 용사.
밤의 야차신왕을 발휘하는 순간 느낄 수 있었던 악신들의 당혹감.
[므흣, 흐흐흣.]
마치 에이젤처럼 웃는 미트라의 모습에 천호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황금색 보석을 쓰다듬으며 눈으로나마 루시엘을 찾았다.
전투 내내 맹활약한 그녀는 부상병들을 치료하고 있었다.
낮에도 지고 밤에도 지는 성검과 달리, 언제 어느 때 보아도 진짜 천사 같은 천사 루시엘이었다.
“성화같아요.”
[그녀는 진짜 천사니까.]
사이좋게 루시엘을 감상하던 용사와 성검은 이내 다시 정신을 차렸다.
오늘의 대승은 분명 기뻐할 만한 일이었지만, 이전의 승리들과 다소 다른 구석이 있었으니 말이다.
“오늘이겠군요.”
[음, 이제 진짜 작전을 시작할 때가 된 것 같다.]
신기를 탈환하기 위한 별동대의 운영.
천호는 다시 시선을 돌렸다.
군대의 신을 바라보았다.
* * *
군대의 신은 전투가 벌어진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진지를 구축했다.
천사들과 영웅들, 원주민들의 숫자가 2만에 육박하는 원정군이었지만, 군의 주축을 이루는 것은 3만에 달하는 골렘들이었다.
골렘들의 강점은 마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수복할 수 있다는 것만이 아니었다.
3만여 골렘들이 줄지어 선 뒤 몸을 굳히니, 순식간에 든든한 성벽이 만들어졌다.
오늘의 승리를 기뻐하며 모두가 작은 연회를 즐기는 동안, 천호 일행은 군대의 신과 대면했다.
“시간을 끌며 천천히 진군하겠다.”
군대의 신이 빛의 지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까지 승승장구한 원정대였지만, 사실 이제부터가 진짜 싸움의 시작이라 할 수 있었다.
부덕의 성채가 가까워졌으니, 마물들의 질과 양이 모두 강화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악신들도 문제였다.
부덕의 성채에 거하는 것은 소악신들만이 아니었다.
성채를 책임지는 저주의 신은 솔직히 말해 군대의 신 자신보다 반 급수 정도 상위의 신이었다.
갈수록 난도가 높아지는 전장.
점점 더 강해지는 적들.
하지만 애당초 원정군의 목적은 부덕의 성채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었다.
별동대가 무사히 신기를 탈환할 수 있도록 놈들의 시선을 끌며 시간을 버는 게 역할이었으니, 높아진 난도에 맞춰 천천히 진군하면 될 일이었다.
“다만…… 그대가 너무 눈에 띈 게 좀 마음에 걸리긴 하는군.”
군대의 신의 지적에 천호는 살짝 헛기침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요 며칠- 특히 오늘의 활약은 다소 지나칠 정도였으니 말이다.
애당초 존재감을 과시한 이유는 적들이 천호의 부재를 눈치채지 못 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조금 이상한 말이었지만, 사실이었다.
“그래도…… 잘될 겁니다. 신상들도 모두 남겨 놓고 갈 예정이니.”
거기까지 말한 천호는 군대의 신 옆에 자리한 크리스를 바라보았다. 천호와 반대로 요 며칠 전장에 코빼기조차 보이지 않은 그녀였다.
그리고 그 이유는 명확했다.
그녀의 부재를 적들이 눈치채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으음…… 잘될까?”
“잘될 겁니다.”
불안한 듯 어깨를 움츠리는 크리스에게 시원하게 웃어 보인 천호는 탁자 위에 놓인 초록색 물약을 바라보았다.
어머니께서 보내 주신 변신 물약.
작전은 단순했다.
크리스가 천호로 변신한다.
천호인 척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진짜 천호는 신기를 탈환하기 위해 서쪽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