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143화 (143/211)

“미트라.”

[응?]

“입에서 침 흘러요.”

[흐에?]

미트라는 얼른 입술을 훔쳤고, 천호는 작게 웃었다.

“농담이에요.”

[으…….]

미트라가 으르렁거렸지만 잠깐뿐이었다.

[아무튼 시작하겠다.]

심호흡까지 크게 한 미트라가 천호의 몸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름 열심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했지만 그래 봐야 몇 분이었다.

[헤헤, 헤헤헤.]

들뜬 얼굴로 근육을 쪼물딱거리는 미트라의 모습을 보며 천호는 눈동자를 위로 굴렸고, 열심히 오르고 있는 미트라의 ‘엉큼한’ 경험치를 보며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천생연분인가.’

그 용사에 그 성검이라더니.

하지만 아무튼 좋았다. 미트라가 저렇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2년 만이었으니까.

천호는 느긋한 얼굴로 밤하늘을 우러렀다. 저 멀리 사나이의 미소를 짓고 계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 * *

“으아, 만나고 싶어. 만나고 싶다고!”

의자에 꽁꽁 묶인 채 앙탈 부리는 카마엘의 모습에 카를로스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정작 묶은 장본인인 무토는 태연하기만 했다.

“전력이 거의 다 모였구려.”

외부에 나가 있던 영웅들과 천사들의 귀환이 끝났다.

14층에서 15층으로 향한 영웅들과 천사들은 천호 일행만이 아니었다.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처럼 지원을 나온 선신들 또한 적지 않았다.

잠시 무토가 바라보고 있는 빛의 창을 힐끔 살펴본 카를로스는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런데 이래도 되는 걸까?”

“무엇이 말이오.”

“사실상 전력투구잖아.”

각층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수비 전력을 제외한 중층의 전 역량이 15층에 집중되었다.

이번 작전에 투입되는 천사들의 숫자는 자그마치 1만이 넘었고, 골렘들의 숫자는 수만에 달했다. 카를로스 자신 같은 원주민들 역시 수천을 헤아렸다.

치유의 신은 이번 작전에 저 병력 모두를 동원할 생각이었다.

사실상 랜스 차징이나 다름없는 행위.

뒤를 돌아보지 않는 전력투구.

무토는 카를로스의 걱정을 이해했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은 곧 뒤가 없다는 소리와 같았으니 말이다.

이 정도 병력을 투입했다가 패하기라도 한다면.

승리한다 할지라도 저 피로스의 승리처럼 상처뿐인 승리를 거둔다면.

15층의 안위뿐만 아니라 정의의 성채 전체에 위기가 닥쳐올 수 있었다.

무토도 그것을 알았다. 하지만 카를로스와 조금은 다르게 생각했다.

“전쟁이잖소.”

치유의 신은 툭툭 치고받는 국지전을 할 생각이 없었다.

정말로 대대적인 전쟁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

이번 전쟁의 목적인 전쟁의 신 이브나일의 신기.

“불경하다! 카를로스! 불경해!”

의자에 묶인 채 천호를 만나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카마엘이 씩씩거리며 말했다.

천사인 그녀의 입장상 당연한 반응이었다.

“아니, 뭐… 신기라는 걸 손에 넣으면 상황을 정말 반전시킬 수 있나 해서.”

카를로스도 알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을 질질 끌기만 해서는 결코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공략조는 사실상 23층에서 발이 묶이고 말았다.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언가 계기가 필요했다.

“충분하다.”

무토가 아니었다.

낮고 웅장한 목소리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군대의 신을 뵙습니다.”

무토가 예를 표했고, 카를로스도 자세를 바로 한 뒤 고개를 숙였다. 카마엘은 의자에 묶인 채로나마 열심히 절을 했다.

군대의 신.

15층을 지키는 네 기둥 가운데 하나이자, 사실상 중심 역할을 하는 자.

기병의 신과 창병의 신, 방패병의 신의 오라비인 군대의 신은 무토 이상으로 거대했다.

“이브나일 님의 신기를 얻는다면 지금의 상황을 반전시킬 수 있다.”

선신들과 악신들 모두 우두머리가 없는 상태에서 싸우고 있었다.

대미궁의 침식 속도를 늦추기 위해 나선 다섯 여신과 그런 다섯 여신을 저지하기 위해 힘을 쏟고 있는 마신.

선신들을 이끌고 있는 것은 치유의 신이었고, 악신들을 이끌고 있는 것은 심층의 마왕이었다.

치유의 신의 힘이 여느 선신들의 힘과 격이 다르듯, 다섯 여신의 힘은 치유의 신과 격이 달랐다. 그중 하나인 이브나일의 신기를 손에 넣는다면 팽팽하다고 해도 좋을 지금의 균형에 충분히 이변을 일으킬 수 있었다.

“치유의 신은… 이번 전투를 단초로 해 대미궁과의 전쟁을 끝낼 생각이다.”

그러니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이번 전쟁에 전력을 쏟아붓는다.

카를로스는 군대의 신의 말에 약간의 이질감을 느꼈다. 치유의 신과 군대의 신 모두가 너무 서두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태여 의문을 표출하지는 않았다.

벌써 대미궁의 침공이 계시된 지 수십 년이니 서두르는 것이 당연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만들 쉬거라. 내일 아침 일찍 군무회의를 열 터이니. 용사와의 만남 역시 그때 이루어질 것이다.”

마지막 말은 카마엘을 향한 것이었다.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던 카마엘이었지만 역시 천사는 천사인지, 선신의 명에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신기 쟁탈전…….”

낮게 말한 군대의 신은 그대로 시선을 멀리 했다. 창밖 너머, 악신들의 영역인 북쪽을 바라보았다.

* * *

천호가 눈을 떴을 때 본 광경은 미트라의 성수로 가득 찬 욕조가 아닌 침대 위였다.

“아?”

약간 멍한 소리를 내며 일어나자 바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용사님.”

[일어났나?]

침대 머리맡에 놓인 의자 위.

미트라를 품에 안은 루시엘이 앉아 있었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치유의 신과의 대련이 힘들기는 했던 모양이다. 잠깐 눈을 붙이나 했더니 그대로 잠들어서 일어나지 못했다.]

말하는 걸 들어 보니 잠깐 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반사적으로 손목시계를 확인하니 오전 9시.

목욕물 받았던 시간으로부터 거의 열다섯 시간이 넘게 흘러 있었다.

“그, 옷은?”

“다른 천사분들이 도와주셨어요.”

루시엘이 방긋 웃으며 말하자 천호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일행도 아니고 모르는 사람이 옷을 갈아입힐 동안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니.

야차신왕의 생각지 못한 부작용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뭐, 괜찮다. 돌아와서 안심한 것도 있겠지. 그리고 여차하면 내가 있지 않은가. 필요할 때는 어떻게든 깨워 주겠다.]

“든든하네요.”

웃으며 답한 것은 천호가 아닌 루시엘이었다.

목소리가 들리게 된 뒤로 퍽 대화가 는 천사와 성검이었다.

[아무튼 그대여. 그렇지 않아도 슬슬 깨우려던 참이다.]

“15층의 책임자이신 군대의 신께서 군무회의의 출석을 부탁하셨어요.”

[이제 한 시간하고 조금 남았다.]

“자, 준비 도와 드릴게요.”

미트라와 탁탁탁 말을 주고받은 루시엘이 천호에게 다가섰고, 천호는 그 손을 잡았다. 무척 새삼스럽지만 역시 진짜 천사 같은 천사 루시엘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한 시간 남짓 뒤.

천호는 군무회의에 출석이 허락된 이들과 함께 군대의 신이 기다리고 있을 정의의 성채 중앙으로 향했다.

“군대의 신 오빠를 보는 건 우리도 오랜만이야.”

“응응, 커다란 오빠.”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은 언제나처럼 발랄했다.

하지만 천호에게는 2년 만이라 그런지, 묘하게 새로운 기분이었다.

“이익! 갈 거면 내게 말하라 하지 않았나! 응접실에 나와 있었으니 망정이지, 방에 있었으면 또 놓칠 뻔했다.”

남겨짐의 프로인 정화의 신이 두 여신에게 항의하는 모습도 참으로 정겨웠다.

지난 2년 동안 정화의 신을 떠올린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아무튼 그랬다.

“어차피 잘 따라왔는데 뭘.”

“맞아, 맞아. 따라왔으면 됐지.”

깔깔 웃은 두 여신은 발걸음을 서둘러 휙휙 앞서 나갔다.

10층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느낀 거지만, 여러 가지 의미로 정말 강한 여신들이었다.

“정화의 신님, 저희와 함께 가요.”

남겨진 정화의 신에게 루시엘이 방긋 웃으며 권했다.

정화의 신은 쓰게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역은 이쪽이니.”

정화의 신의 시선에 천호는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일행 가운데 군무회의 참석을 허가받은 것은 두 여신과 정화의 신, 천호와 천호의 담당 천사인 루시엘뿐이었다.

[애당초 참가자가 적은 회의인 것 같다. 15층의 네 기둥이라는 자들만 참가하는 회의이니 말이다.]

15층의 책임자인 군대의 신.

중층 최강의 천사 카마엘.

중층 최강의 영웅 무토.

중층 최강의 원주민(?) 카를로스.

“궁금하네요.”

카마엘도 카마엘이었지만, 무토와 카를로스에게 흥미가 갔다.

천호가 남자에게 호기심을 보이는 건 무척 드문 일이라 그런지 미트라 역시 제법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음음, 무토와 카를로스 모두 훌륭한 체격을 가진 전사들이라고 들었다. 군대의 신은 말할 것도 없고.]

뭐랄까, 여러 가지 의미로 초지일관인 미트라였다.

이제는 딱히 취향을 감출 마음도 없어 보이는 미트라의 황금색 보석을 어루만진 천호는 정면을 보았다.

군무회의가 있을 장소.

군대의 신의 성소가 눈앞에 있었다.

* * *

“안녕!”

“오랜만!”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이 손을 번쩍 들며 입장하자 원탁 앞에 착석하고 있던 인물들 가운데 셋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음악의 신님과 회화의 신님을 뵙습니다.”

무토가 가장 먼저 예를 표하자 카를로스는 따라서 꾸벅 고개를 숙였고, 카마엘 역시 일단 천사는 천사인지 무척이나 공손히 예를 표했다.

“에이, 그렇게 딱딱한 인사는 됐어. 친근한 게 좋아, 친근한 게.”

“맞아, 맞아. 그런 의미에서 군대의 신 오빠, 안녕?!”

“…둘 다 여전하군.”

놀라울 정도로 하이텐션인 두 여신의 모습에 군대의 신이 쓴웃음을 지었다. 여동생이 많은 그였지만, 여동생들 가운데 눈앞의 두 여신처럼 발랄한 이는 없었다. 애당초 자신을 ‘오빠’라며 친근하게 부르는 여동생도 없었으니까. 호칭은 다들 ‘오라버니’였다.

“음, 오랜만입니다.”

“너도 왔구나.”

“음.”

어쩐지 덤으로 여겨지는 것 같은 건 그냥 기분 탓이겠지?

헛기침을 토한 정화의 신은 자신에게 공손히 예를 표하는 카마엘에게 흐뭇한 표정을 지어 주었다.

하지만 잠깐뿐이었다. 바로 연이어 성소에 들어온 인물 때문에 카마엘이 고개를 번쩍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단 카마엘뿐이 아니었다. 성소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마침내 중층 최하층에 도달한 용사.

치유의 신의 무한한 신뢰를 받고 있는 자.

카마엘이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물었다. 천호에게 원한이 있어서가 아니라, 당장이라도 대련하자고 외치고 싶은 자신을 억누르기 위함이었다.

자타 공인 전투광인 카마엘은 냄새만으로도 상대가 강자인지 약자인지 알 수 있었다. 그런 그녀의 코가 말하고 있었다.

용사는 강하다.

결코 자신보다 약하지 않다.

무토와 카마엘도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카마엘이나 치유의 신이 아니었기에 대련하자고 소리치는 대신 그저 눈인사만 보냈다.

“박천호입니다. 이쪽은 성검 미트라입니다.”

“용사님의 담당 천사 루시엘입니다.”

[음, 안 들리겠지만 일단 인사하지. 미트라다.]

“반갑다, 15층에 온 것을 환영하는 바이다. 나는 군대의 신이다.”

모두를 대표해 천호와 루시엘, 미트라의 인사를 받은 군대의 신이 자리를 권했다.

네 명이 앉아 있던 원탁에 다섯 명이 더해지니, 커다란 원탁이 금방 만석이 되었다.

[흐음, 역시 다들 강하군.]

미트라가 흐뭇한 목소리로 말했다. 15층을 지키는 네 기둥들이 든든해서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대가 제일 강한 것 같다.]

군대의 신을 제외한 나머지 셋.

카마엘과 무토, 카를로스.

천사 네트워크를 통해 확인한 그들의 레벨은 각각 91, 93, 89.

천호의 레벨이 이제 90이었으니, 레벨만 따지면 무토와 카마엘 쪽이 더 높았지만, 그래 봐야 근소한 차이였다.

태양의 신인이나 야차신왕을 사용하면 지금 상태에서 한층 더 강해지는 천호였으니, 레벨 한두 개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헤헤, 헤헤헤.]

루시엘이 듣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천호였지만, 나중에 루시엘이 들었다는 사실을 알고 민망해할 미트라가 보고 싶었기에 그냥 침묵했다.

“이미 사전 정보들은 충분할 터이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기병의 신과 창병의 신의 오라비답게, 두 사람과 닮은 군대의 신이었다.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까지 닮았는지 쓸데없이 말을 늘이지 않았다.

“많은 이들의 희생과 노력으로 이브나일 님의 신기가 위치한 장소를 알아냈다.”

군대의 신이 손가락을 놀리자 원탁 중앙에 빛으로 된 입체 지도가 떠올랐다.

신기의 위치는 이미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이런 식으로 지형까지 생생히 확인 가능한 입체 지도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미 들었겠지만 작전은 단순하다. 내일 아침, 15층에 집결한 병력을 이끌고 북부 악신들의 지역을 공격한다.”

지도 위로 군대의 신과 병력들이 나타났다. 목적지는 북부에 위치한 악신들의 본거지인 부덕의 성채였다.

“최대한 이목을 집중시키며 일점돌파를 할 거다. 그리고 어느 정도 진군하고 나면 별동대를 파견해 신기를 회수한다.”

간단히 말해 성동격서.

악신들의 시선을 주력에 집중시킨 뒤 외딴 곳에 놓여 있는 신기를 확보한다는 전략이었다.

“악신들의 이목을 집중시켜야 하니 15층의 주력인 나와 카마엘, 무토, 카를로스는 별동대로 빠질 수 없다.”

총력전을 펼치는 와중에 저들 중 하나가 보이지 않으면 악신들의 의심을 피할 수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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