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141화 (141/211)

“왜요?”

[흥, 아니다.]

“뭐가 아닌데요?”

천호의 물음에 마검 미트라는 답하는 대신 입술을 몇 번인가 삐죽이더니 다시 흥 소리를 내며 말했다.

[근데 말이야.]

“네.”

[이거 딱히 널 걱정해서 묻는 건 아닌데.]

“아닌데?”

[몸은 괜찮아?]

번뇌력인지 뭔지로 마력을 회복하긴 했지만 이래저래 힘을 많이 소진했으니까.

더욱이 야차신왕으로의 변신도 몸에 꽤 무리를 주는 것 같았다.

마검 미트라의 걱정에 천호는 작게 웃고는 보석을 어루만지며 답했다.

“뭐, 그럭저럭요. 좀 쉬고 싶긴 하지만.”

[흐음.]

아닌 척했지만 안도한 기색이 느껴졌다.

더욱이 딱히 걱정해서 묻는 건 아니라니.

‘정석이네, 정석.’

역시 성검 미트라든 마검 미트라든 결국 미트라는 미트라였다.

‘반응도 그렇고.’

야차신왕을 처음 보았을 때 마검 미트라가 보인 반응.

성검 미트라는 어떨지 꽤나 궁금해지는 천호였다.

“아무튼 미트라, 일단 다시 성검으로 돌릴게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미트라의 기본 상태는 마검이 아닌 성검이었다.

자연스러운 상태로 쉬기 위해서는 성검 쪽이 나았다.

[흥, 알았어. 대신에 이따 다시 불러 줘야 해?]

“이따요?”

[이따 밤에.]

거기까지 말한 마검 미트라는 스스로 변신을 해제했다.

검붉은 검신이 다시 하얗게 변했고, 핏빛이었던 보석은 황금색이 되었다.

[으음. 돌아왔다.]

미트라가 낮게 말하자 천호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며 미트라를 살펴보았다.

분명 성검과 마검은 이중인격이라기보다는 동일 인물의 성격 변화에 가까운 것이었는데, 가끔 보면 마검 쪽이 아예 따로 인격이 있는 걸로도 보였다.

“흐음.”

[왜 그러나?]

“아뇨, 나중에 연구해 보죠.”

거기까지 말한 천호는 다시 일행 쪽을, 정확히는 루시엘을 품에 안고 있는 라구엘을 보았다.

“루시엘은 괜찮나요?”

“네? 아··· 네. 단순히 잠든 것뿐입니다.”

라구엘이 얼른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표정도 평온하고 숨결도 고른 것이, 라구엘 말마따나 편히 잠든 상태 같았다.

“하아······.”

천호는 저도 모르게 조금 감탄 섞인 목소리를 흘렸다. 잠든 모습이 진짜 천사 같은 천사 루시엘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근 2년 만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의 문 너머에서 보낸 시간들.

감회에 빠진 천호의 모습에 라구엘과 마키나는 빙긋이 미소 지었지만 크리스는 여전히 당황한 상태였다.

그 남자의 아들인 천호.

호세사천왕의 스승이 된 지 이제 겨우 일주일 남짓이나 되었을까.

그래도 아직은 아슬아슬한 우위에 있었는데, 그 우위가 단숨에 날아가고 말았다.

이제는 크리스 자신이 천호를 가르치는 게 아니라 천호에게 한 수 배워야만 할 것 같았다.

‘아, 안 돼.’

이번에는 좀 다르게 해 보려 했는데.

파티에서 밀려나는 일도 없게 하려 했는데.

정화의 신과 함께 다닌 탓인지 묘하게 존재감이 엷어진 크리스였다.

그녀가 홀로 번민하는 동안 눈으로나마 천호를 관찰하던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이 말했다.

“아무튼 강해졌네.”

“경사야, 경사.”

14층까지만 해도 중층 최상위권에 속하긴 해도 무토나 카마엘에 비하자면 다소 손색이 있던 천호였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어쩌면 카를로스는 물론이고 무토나 카마엘보다도 더 강할지 몰랐다.

“그럼 이제 밤의 천호가 낮의 천호보다 더 강한 거야?”

음악의 신의 물음에 천호는 쓰게 웃으며 답했다.

“약간 더 강하긴 한데, 결정적인 차이까지는 없어요. 낮에는 태양의 마력을, 밤에는 밤의 마력을 쓴다는 차이뿐이니까요.”

보여 주지 않았을 뿐, 어머니의 피를 일깨우는 데도 익숙해진 천호였다.

태양의 마력과 태양의 신성.

어머니의 피는 결코 아버지의 피에 뒤지지 않았다. 단순 마력의 양만 따진다면 오히려 밤보다 낮이 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밤의 천호가 낮의 천호보다 더 강한 것은 상성 때문이었다.

신성 포식은 어머니가 아닌 야차신왕의 힘이었다.

살신의 야수. 신을 사냥하는 밤의 괴물.

어머니는 정명한 신성의 소유자셨으니, 신성 사냥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야차신왕 쪽이 상성상 우위에 설 수밖에 없었다.

밤에는 어머니보다 강해진다고 말씀하셨던 아버지.

이제는 이해가 되었다. 낮이 어머니의 시간이듯이, 밤은 아버지의 시간이었다.

“아무튼 굉장해.”

“맞아, 맞아. 시간의 문을 사용한 보람이 있네.”

“안에서 얼마나 보냈어?”

“1년? 2년?”

“2년 조금 안 되게요.”

천호가 새삼 감회에 찬 표정으로 답했다.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2년 남짓.

장구한 세월을 살아가는 신들에게는 찰나에 불과한 시간일지 모르지만, 천호에게는 인생의 10분의 1이나 되는 시간이었다.

“와, 시간의 문 역시 대단해.”

“그러게, 밖에서는 10초 남짓밖에 안 지났는데.”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이 서로를 보며 재잘재잘 떠들자 천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10초요?”

“응응, 너 들어가고 10초 정도밖에 안 지났어.”

음악의 신의 대답에 천호는 미트라를 돌아보았다.

“미트라.”

[으응?]

어쩐지 모를 불길함에 미트라가 어설프게 답했다. 천호는 미트라를 아예 바로 세운 뒤 황금색 보석을 보며 계속해서 말했다.

“아까 저 많이 보고 싶었다고 하셨죠?”

[그···랬다만?]

“겨우 10초 만에 그렇게 보고 싶으셨던 거예요?”

천호의 물음에 미트라는 움찔하더니 얼굴을 붉혔다. 허둥거리며 답했다.

[아, 아니. 그······.]

“헉, 아니라고요? 안 보고 싶었어요?”

[그, 그건 아닌데, 보고 싶긴 했는데······.]

“했는데?”

[으으······.]

미트라가 안절부절못하며 끙끙 앓는 소리를 냈고, 천호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조금 이상한 소리였지만, 미트라와 이러고 있으니 정말로 돌아온 기분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그런 천호와 미트라의 대화를 지켜보던 음악의 신이 회화의 신을 돌아보며 말했다.

“늘 생각한 거지만, 쟤 좀 이상한 거 같아.”

“응응. 가끔 이상해.”

미트라에게만 들리도록 목소리를 낮춘 천호인 터라 대화 자체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분위기라는 것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찌 되었든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성소에서의 볼일은 대강 끝난 것 같네.”

“치유의 신 언니도 만났고, 용사는 시간의 문 너머에 다녀와서 강해졌고, 만사형통이네.”

“그럼 이제 그만 숙소로 갈까?”

“그게 좋겠어. 용사도 쉬고, 루시엘도 쉬어야 하니까.”

“15층 애들 만나는 건 내일로 미루자.”

“좋아, 그럼 내가 앞장설게.”

순식간에 대화를 끝마친 음악의 신이 정말로 앞장서자 회화의 신이 나머지 일행을 재촉했다.

그리고 잠시 후, 모두가 성소를 나간 뒤.

“음.”

따라가지 않고 성소에 남은 정화의 신은 미간을 좁혔다.

이번에는 딱히 버려지거나 남겨져서가 아니었다.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은 물론이고 모두가 잊고 나가 버렸지만, 정화의 신 자신까지 그럴 수는 없었으니까.

침대 위에서 세상모르게 잠든 시간의 신.

한숨을 한 번 내쉰 정화의 신은 어깨를 으쓱였다. 시간의 신 본인은 어떨지 모르지만, 약간의 동병상련을 느끼며 이동식 침대를 밀었다.

* * *

14층과 마찬가지로 15층에는 민간인이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거주 구역이 존재하기는 해도 다른 층들과는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군인 기숙사.’

깔끔하고 단정하지만 딱딱한 느낌이 드는 장소.

천호가 배정받은 숙소 역시 그러했다. 네모반듯한 방과 네모반듯한 가구들.

더욱이 방이 넓기까지 해서 더 휑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근 2년 동안 캠핑장에서 야숙만 한 천호인 터라 침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했다.

천호는 방 안에 돌아오자마자 일단 욕조에 물부터 채웠다.

“미트라의 성수가 그리웠어요.”

[흠.]

천호의 말에 미트라는 뿌듯함과 자랑스러움이 반씩 섞인 목소리를 토했다. 예전에는 목욕물 받기 싫다고 툴툴거리기 일쑤였지만, 어느새 목욕물 만들기에 자부심까지 갖게 된 미트라였다.

[오늘은 특별히 더 신경을 써 보았다.]

“감사합니다.”

웃으며 답한 천호는 시간을 확인했다. 지난 2년 세월이 10초 만에 지나갔다는 사실 자체에는 아직도 실감이 잘 나지 않았지만, 덕분에 여전히 대낮이었다. 느긋하게 쉬다가 잠에서 깨어난 루시엘과 저녁을 먹으면 딱 좋을 것 같았다.

“하아······.”

욕조 가득 찬 미트라의 성수에 몸을 담근 천호는 진심에서 우러난 감탄을 토했다.

“미트라가 정말 보고 싶었어요.”

[으음.]

기쁘긴 한데, 이야기를 듣는 상황이 상황인 터라 뭔가 살짝 애매한 기분도 드는 미트라였다.

천호는 그런 미트라의 황금색 보석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요. 지난 2년 동안 변한 것들도 알려 드리고 싶고.”

[음, 나도 무척이나 궁금하다.]

밤의 야차신왕 외에도 무엇이 달라졌는지. 어떤 능력들을 길렀는지.

“정말 보고 싶었어요.”

[나도 보고 싶었다.]

“10초 만에요?”

천호의 물음에 미트라는 다시 안절부절못했고, 천호는 유쾌하게 웃었다.

“정신세계로 가죠. 정말로 보고 싶었으니까.”

미트라에게는 10초 만이었지만, 천호에게는 정말로 근 2년에 달하는 시간이었으니까. 성검 상태의 미트라도 미트라였지만, 미트라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알겠다. 유도하겠다.]

미트라가 들뜬 기색을 애써 감추며 말했고, 천호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몇 초.

익숙한 감각을 느끼며 눈을 뜨자 정겨운 광경이 보였다.

맑고 높은 푸른 하늘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트이는 넓은 초원.

하지만 그것들 때문만이 아니었다.

미트라가 있었다. 어쩌지 모르게 수줍은 표정을 지은 채 딴청을 하고 있는 성검이.

“이제야 정말로 돌아온 기분이네요.”

[그, 그런가?]

미트라가 기쁜 기색을 애써 감추며 그리 말했다. 시간의 문 덕분에 훌쩍 성장한 천호였지만, 미트라는 그대로였다.

십 대 중후반쯤으로 보이는 소녀.

천호는 그런 미트라에게 바짝 다가서며 물었다.

“그럼 뭐부터 해 볼까요?”

2년 동안 변한 것들.

사실 태양의 마력 쪽에도 적잖은 변화가 있었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태양의 신인神人이라고 해야 할까.

적어도 외양만이라면 야차신왕 이상으로 큰 변화가 생기는 변신이었다.

천호의 물음에 미트라는 입술을 움츠리더니 무척이나 열심히 고민하는 척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성검 미트라가 가장 궁금해하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일단.]

“일단?”

[밤이 좋겠다.]

“밤이요?”

[그렇다. 제일 큰 변화부터 관찰하는 게 여러모로 효율적일 테니 말이다.]

거기까지 말한 미트라는 치유의 신처럼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맑고 푸른 하늘이 순식간에 검게 변하더니 밤이 되었다.

“음.”

뭔가 흑심이 있는 것 같은데.

천호가 눈을 가늘게 뜨자 미트라는 연신 헛기침을 토하며 딴청을 했다.

“뭐, 그렇게 보고 싶다고 하신다면야.”

어깨를 으쓱인 천호는 바로 다시 아버지의 피를 일깨워 야차신왕 쿠베라의 화신으로 변신했다.

천호의 모습이 변했다.

본래부터가 장신인 천호였지만 키가 더 자랐다. 어깨가 떡 벌어졌고, 전신의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용갑주를 해제한 상태였기에 치유의 신과 싸웠을 때 이상으로 많은 것들이 변했다. 천호의 상의가 신성의 방출에 불타올랐고, 하얗고 깨끗한, 동시에 단단한 근육들이 여실히 드러났다.

[아.]

바로 눈앞에서 일어난 변화에 멍한 표정을 지은 미트라는 저도 모르게 손을 놀려 천호의 가슴을 살짝 건드렸다.

대리석처럼 단단했고, 금방이라도 달아오를 것처럼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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