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140화 (140/211)

* * *

제19장?아버지의 피

여자는 밤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인간의 눈보다 훨씬 더 멀리, 그리고 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는 여자의 눈이었다.

밤하늘은 별의 바다였다. 저마다 다른 빛을 발하는 별들은 너무나 많고 많아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무수히 많은 별.

무수히 많은 세계.

여자는 테라스의 난간을 움켜쥐었다.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며 힘을 주자 난간이 주먹 안에서 산산이 조각나다 못해 으스러졌다.

시간이 지났다.

열두 대의 캐리어가 떠나고도 두 달여.

세상마다 시간의 흐름이 다른 것을 감안한다 해도 너무 길었다.

처음 보낸 캐리어는 도착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아들의 답변이 돌아온 것이 그 증거였다.

그러니 두 번째 캐리어 역시 도착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열두 대의 캐리어들 가운데 적어도 하나는 도착했으리라.

그런데 신호가 돌아오지 않았다.

캐리어들에 내장시킨 각종 송신 마법진들 모두가 망가지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었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들이 간 세계.

미궁 세계라 불리는 곳.

평범한 세상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여느 세상들과는 다른 이치가 적용되고 있을 가능성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세상 간 이동을 시도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성이 감정을 저지했다.

다른 세상으로 물건을 보내는 것과 본인이 직접 세상 간 이동을 하는 것 사이에는 실로 엄청난 격차가 존재했다.

더욱이 아들이 간 세상을 비롯해, 캐리어들을 보낸 세상들의 좌표 값을 정확히 모른다는 것 역시 문제였다.

캐리어들이야 물건이니 좌표 값이 부정확해도 세상 간 이동을 시도할 수 있었다. 여차해서 실패한다 해도 시전자의 목숨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람은 달랐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단순히 죽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조차 있었다.

정황상 아들은 미궁 세계의 존재들에 의해 소환당한 것 같았다.

소위 말하는 용사 소환.

이쪽은 차라리 좀 수월했다. 어쨌든 한쪽의, 소환하는 쪽의 좌표가 명확했으니 말이다.

“괜찮을 거야.”

등 뒤에서 남자가 말했다. 아무런 근거 없는 무책임한 말에 여자는 순간 화가 치밀었지만 지금은 다행히 밤이었다.

남자가 여자의 노기를 억눌렀다. 약간이지만 근거를 덧붙였다.

“당신의 피를 각성했으니까.”

여자의 피를.

저 위대한 태양의 힘을.

일단 태양의 마력을 각성했으니 어디 가서 맞고 다니진 않으리라.

“무슨 동네 애들 싸움인 줄 알아?”

“아닌 거 알지. 그래서 준비를 시켰던 거고.”

여자도 남자의 준비를 알았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진정할 수 있었다. 몇 번인가 심호흡을 한 끝에 남자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물었다.

“당신의 피는··· 어렵겠지?”

파이엔을 구하고, 본래 세계로 돌아가고 나서야 정확히 알게 된 남자의 힘의 근원.

용사의 가문에 전해져 내려온 초월종의 피.

남자가 그 힘을 일깨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파이엔에서 근 1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고 나서야 겨우 각성시킬 수 있었으니까.

아들이 미궁 세계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냈는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본 모습으로 유추하건대, 아무리 길어도 2년 남짓일 가능성이 높았다.

겨우 그 정도의 시간으로는 남자의 피를 일깨울 수 없었다. 설사 기연이 닿아 각성한다 할지라도, 단순 각성과 제대로 된 사용 사이에는 하늘과 땅의 간극만큼이나 큰 차이가 존재했다.

남자도 그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남자는 어쩐지 모르게 자꾸만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처럼 감이 아니었다.

조금 빈약하긴 했지만,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당신의 피를 각성했으니까.”

“내 피를?”

“태양의 신성을 손에 넣었을 테니까.”

남자가 용사의 가문에 전해져 온 피의 힘을 일깨우는 데 오래 걸린 것은 남자가 평범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들은 달랐다.

아들에게는 이미 여자로부터 물려받은 신성이 존재했다.

이미 신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 신성을 사용할 수 있다면.

“가능할지도 몰라.”

그 힘을 깨우는 것이.

그 힘을 사용하는 것이.

영민한 여자는 남자의 말을 바로 이해했다. 저도 모르게 두근거리기 시작한 가슴을 살며시 짓누르며 말했다.

“만약에, 정말 그럴 수 있다면, 내 힘과 당신의 힘을 동시에 쓸 수 있다면······.”

“낮에도 이기고 밤에도 이기는 무적의 용사가 탄생하겠지.”

남자는 말했고, 여자는 작게 웃었다. 정말로 그러길 바라며 밤하늘을 우러렀다.

* * *

그것은 찰나의 변화였다.

하지만 치유의 신은 그 찰나를 포착했다.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고요한 밤이 일렁거렸다.

별의 바다가 난잡한 침묵으로 술렁거렸다.

신성이 깨어났다.

태양의 신성이 아니었다. 그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치유의 신은 오싹함을 느꼈다. 등골이 서늘해 저도 모르게 허리를 곧추세웠다.

밤이 번졌다.

하늘에서 흘러내려 땅을 덮었다.

천호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렇게 느끼게 하였다.

변화는 고요 속에 일어났다. 세상을 진감시키는 충격이 하늘과 땅을 덮쳤지만 거짓말처럼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천호의 머리칼이 검게 변했다.

검푸르던 그것이 온전한 칠흑이 되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무척이나 길어져 천호의 등을 덮었다.

황금빛 눈동자가 핏빛이 되었다. 피부는 더욱 하얗게 변하였고, 붉은 입술 사이로 송곳니가 모습을 보였다.

동시에 몸이 부풀어 올랐다. 마지막 야수를 사용했을 때와 같았다.

치유의 신은 오싹함의 원인을 깨달았다. 고요 속에서 가쁜 숨을 토했다. 입술 사이로 희열이 흘렀다.

신성 포식.

어머니의 피 때문만이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어머니의 피는 연관이 없을지도 몰랐다.

이계의 초월종.

이계의 신성.

이질적이었다. 근본부터가 달랐다. 저것은 차라리 신을 죽이고 잡아먹는 괴물에 가까웠다.

밤의 짐승.

살신의 야수.

천호가 붉고 붉어 선홍인 눈으로 치유의 신을 보았다.

그 순간 치유의 신은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알고 있었다. 미궁 세계에 소환된 여러 영웅들 가운데 작금의 천호와 비슷한 파장을 가진 자가 존재했었다.

물론 그 힘의 크기는 비교조차 할 수 없었다. 그 영웅이 반딧불이라면 지금의 천호는 보름달과 같았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치유의 신은 이해했다.

그 영웅이 속해 있던 종족의 신.

그 피가 천호에게 흘렀다. 천호가 그 피를 일깨웠다.

“아······.”

치유의 신이 탄성을 토했다.

부지불식간에 이름을 떠올렸다.

팔부신중.

이계에 존재하는 여덟 신족.

그 가운데 하나.

천호가 숨을 삼켰다. 깊이 내쉬며 마검 미트라를 고쳐 쥐었다.

피를 일깨웠을 때 알게 된 것.

까마득한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 그 피의 근원이 된 존재.

그녀는 무신이었다.

북방의 수호자인 저 다문천 바이슈라바나의 전신이었다.

밤의 짐승 야차夜叉.

그들을 이끄는 무적의 투신.

천호는 그녀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 이름을 선포함으로써 그녀의 힘을 일부나마 계승하였다.

“쿠베라.”

일컬어 부르나니 야차신왕夜叉神王.

밤이 천호와 함께했다.

천호의 것이 되었다.

* * *

야차신왕.

팔부신중의 위대한 여덟 신 가운데 하나.

다섯 여신에 결코 뒤지지 않을 이계의 대신.

치유의 신은 유쾌하게 웃었다. 정말로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미 이계의 대신인, 태양의 신성을 가진 초월종의 자식인 천호였다.

그런데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야차신왕의 피를, 저 어두운 밤의 신성을 이어받고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핏줄인 것일까.

어떻게 하면 저런 말도 안 되는 가문이 탄생하는 것일까.

태양의 여신 아이테르의 딸.

본인도 미궁 세계에서 손꼽히는 강대한 대신 가운데 하나인 치유의 신.

그런데도 핏줄에서 밀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기분이 든 것은, 아니, 애당초 핏줄에서 밀리네 마네 하는 생각을 해 본 것 자체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아직은 약했다.

진짜 밤이 아니었다.

성소에 구현된 거짓된 밤이었다.

천호는 아직 야차신왕의 힘을 모두 다루지 못 했다.

하지만 충분했다.

미숙하다고는 하나 천호는 이미 살신의 힘을 가진 밤의 짐승이었다.

그래서 치유의 신은 결정했다.

루시엘의 전신이 다시 붉은 아우라로 뒤덮였다.

그리고 이내 치유의 신의 일부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치유의 신이 빠져나간 루시엘이 저 먼 곳에 자리한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을 향해 홀로 날아갔다.

루시엘의 몸에 강신하는 쪽이 좀 더 큰 힘을 다룰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루시엘이 다치고 말 터였다.

비록 힘의 운용이 비효율적으로 변한다 할지라도, 힘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더 짧아진다 할지라도.

제대로 붙어 보고 싶었다. 끓어오르는 호승심을 마구 터트리고 싶었다.

치유의 신의 길고 아름다운 금발이 바람에 흩날렸다.

여기저기 트여 있어 움직이기 편한 초록빛 드레스의 양옆으로 붉은 검 두 자루가 자연스레 자리했다.

천호는 가만히 서서 그런 치유의 신을 보았다.

마검 미트라는 천호를 보았다. 목소리를 흘렸다.

[머, 멋있어요.]

크고 아름다운 근육.

야성의 짐승 그 자체.

저도 모르게 존댓말을 한 마검 미트라가 정신세계 속에서 뺨을 발갛게 물들였다. 하악하악 빠르고 거친 숨을 토했다.

아주 작게 말했지만 천호는 마검 미트라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렇기에 최선을 다해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역시.’

마검이니 성검이니 해도 결국 근간은 미트라.

미트라의 취향은 역시 짐승남이었다.

‘성검 미트라는 뭐라고 하려나.’

기쁨의 으앙이라도 하려나.

하트가 붙은 으앙을 떠올린 천호는 현자의 시간을 사용해 정신을 맑게 했다.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미트라, 부탁할게요.”

[네에♥]

마검 미트라가 순하디순한 어조로 답했고, 천호는 태양의 마력이 아닌 밤의 마력으로 마검 미트라를 뒤덮었다.

시간의 문 너머에서 익힌 것은 야차신왕의 신성을 각성시키는 방법만이 아니었다.

호세사천왕.

비루다카의 장.

광원의 스칸다.

그것은 바람을 앞서는 위타천의 빠르기일지니.

천호가 치유의 신을 향해 돌진했다. 문자 그대로 바람을 앞서는 질주였다.

치유의 신이 마저 달렸다. 서로의 눈이 마주친 그때, 암묵적인 합의가 오갔다. 근접박투가 시작되었다.

카카카카카카카카카캉?!

눈 깜박할 사이에 굉음이 연달아 터졌다.

수십 개의 소리가 뭉쳐 하나가 되었다.

치유의 신의 검격은 빠르고 무거웠다. 폭풍처럼 몰아치니 그야말로 검의 폭격이었다.

천호는 이에 노도로 맞섰다. 마검 미트라로 치유의 신의 검격을 막아 내는가 싶더니 비어 있는 왼손으로 장을 뻗었다.

일장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보이는 손 수십 개가 함께 했다.

콰가가가가가가가가강?!

장의 노도에 치유의 신이 견디지 못했다. 급히 검의 폭격을 수비로 돌렸지만 맞튕겨 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쾅!

천호와 치유의 신이 동시에 튕기듯 물러났다. 그리고 다시 동시에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치유의 신은 작전을 바꿨다. 무수한 검격을 퍼붓는 대신 생명의 힘을 가득 담은 일격을 준비했다.

생명의 검.

적을 멸해 아군이 상하는 일을 원천봉쇄하는 궁극의 치유 행위!

푸르고 푸른 검이 무시무시한 궤적을 그렸다. 천호를 향해 똑바로 쇄도했다.

천호는 마검 미트라를 휘둘렀다. 밤의 마력으로 충만한 검붉은 검으로 치유의 신의 푸른 궤적에 맞섰다.

격돌했다. 그리고 동시에 발동했다.

[라이프 드레인!]

마검 미트라가 생명의 검에 어린 생명의 힘을 마음껏 집어삼켰다.

[우욱! 욱!]

받아들이는 과정 자체가 고통스러울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지만 마검 미트라는 흡수를 멈추지 않았다. 마검의 힘으로 생명의 힘을 밤의 힘으로 맞바꾸었다.

상성이 나빴다.

치유의 신은 아예 검을 놓아 버림으로써 라이프 드레인에서 빠져나왔다. 순식간에 자세를 고쳐 천호에게 일권을 내질렀다.

빠르고 강한, 단순하지만 그렇기에 위력적인 일격.

직경이 10미터는 족히 될 권압이 주먹과 함께했다. 천호는 급히 광원의 스칸다를 발동시켜 멀찍이 물러섰다. 거의 블링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속도였다.

치유의 신은 아쉬워하지 않았다. 애당초 방금 일권은 거리를 벌리기 위함이었다.

즐거웠다. 힘들어 죽겠음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계속할 수 없었다. 이곳에 있는 것은 결국 치유의 신 자신의 일부.

본신이 아니기에 발휘할 수 있는 힘의 한계가 있었다. 그나마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니 마지막 한 방을 터트린다. 시원하고 호쾌한 일격으로 천호의 힘을 시험한다!

천호는 치유의 신을 보았다. 너무나 상쾌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에 따라 웃고 말았다.

치유의 신이 하고자 하는 것.

이해했다. 그랬기에 천호도 똑같이 응해 주었다.

천호가 마검 미트라의 검신과 지면이 수평이 되게 만들었다. 밤의 힘 모두를 마검 미트라의 검신에 집중시켰다.

치유의 신도 같았다. 허공에서 뽑아 든 선홍빛 치유의 검을 두 손으로 움켜쥔 채 주문을 외웠다.

치유의 검이 붉게 타올랐다. 복잡한 마법진 여럿이 치유의 검의 검신을 휘감았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불덩이는 신의 심판일지니.

치유의 신이 치유의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그었다. 심판의 검을 상징하는 붉은 불기둥이 검의 궤적을 따라 솟구쳐 불꽃의 파도가 되었다. 금방이라도 천호를 집어삼킬 기세로 맹진했다.

천호는 그것을 보았다. 불꽃의 중심을 향해 마검 미트라를 내찔렀다.

호세사천왕.

바이슈라바나의 장.

자야刺夜.

밤을 찌르는 일검.

어둠이 소리 없는 포효와 함께 질주했다. 작렬하는 어둠의 번개가 되어 불꽃의 노도를 꿰뚫었다!

콰가가가가가강?!

무지막지한 굉음이 터졌다. 강렬한 신성의 충돌에 세상이 진감했다. 하늘과 땅의 경계가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정말로 밤이 흘러내렸다.

치유의 신이 유지하고 있던 성소의 이적이 붕괴를 시작한 탓이었다.

천호는 마검 미트라를 늘어트린 채 정면을 보았다.

한바탕 빛과 어둠, 강렬한 충격이 지난 자리에는 치유의 신이 서 있었다.

초록빛 드레스가 거의 반 이상 찢겨져 나갔지만 그녀는 건재했다.

겉모습만은 말이다.

“굉장하네.”

치유의 신이 시원하게 웃으며 말했고, 치유의 신을 마주한 천호는 헛기침을 토했다. 나름 열심히 포커페이스를 유지했지만 속일 수 없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자, 잠깐만요. 아니, 잠깐. 야?]

마검 미트라가 당황해서 말했다.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의 문 너머에서 익힌 것들 가운데 하나.

자야로 소진된 마력이 빠르게 차올랐고, 마검 미트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음.]

“음.”

둘이 갑자기 왜 저러는 것일까.

치유의 신은 눈을 깜박였고, 이내 시원하게 웃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마음껏 싸웠고,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었다.

“심층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어떤 소원을 빌지도 기대하면서.

마지막으로 윙크한 치유의 신은 지금까지의 싸움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빛이 되어 사라졌다.

그리하여 남겨진 것은 눈을 가늘게 뜬 마검 미트라와 여전히 혼절 중인 루시엘, 경악을 감추지 못하는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 일행.

그리고 남겨지는 데 빠질 수 없는 정화의 신.

괜스레 다시 헛기침을 터트린 천호는 야차신왕의 힘을 해제했다.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성소에 서서 치유의 신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저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졌다.

치유의 신.

정말로 폭풍 같은 그녀였다.

* * *

[엉큼한 Lv7이 발동합니다.]

[번뇌력 Lv5가 발동합니다.]

“언니 갔네.”

“언니 갔어.”

치유의 신이 돌아가고 몇 초.

천호와 치유의 신의 대련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바라보던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이 어깨를 늘어트리며 안도의 숨을 토했다. 누가 쌍둥이 아니랄까 봐 동작의 호흡이 똑같았다.

“방금, 우리가 제대로 본 거 맞지?”

“맞아, 용사가 밤에 짐승이 되는 법을 터득한 게 분명해.”

“어머나.”

분명 사실이긴 한데 어폐가 있는 말을 두 여신이 주고받을 때였다.

[흐으음.]

마검 미트라가 여전히 눈을 가늘게 뜬 채 목소리를 흘렸다. 천호는 검붉은 보석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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