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139화 (139/211)

“재밌긴 하네.”

“이런 거구나.”

시간의 문을 처음 본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도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보였다.

천호는 그러든가 말든가 루시엘과 미트라에 이어 마키나와 크리스와도 화포를 풀었다.

눈에 띄게 반가워하는 천호의 태도에 천사와 성검이 그러했듯이 당황한 두 사람이었지만, 어찌어찌 어색하게나마 천호와 해후의 포옹을 나누었다.

그렇게 몇 분.

겨우 진정한 천호가 루시엘에게 미트라와 잔불이를 건네받자 치유의 신이 다리를 바꿔 꼬며 물었다.

“그래서 용사여, 성과는 있었나?”

시간의 문을 사용해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수련한 결과.

치유의 신의 물음에 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짜 아버지가 그러했던 것처럼 사나이의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같은 시간 다른 장소.

15층을 수호하는 네 기둥 중 하나로 불리는 3급 전투 천사 카마엘은 안절부절못했다.

연신 다리를 떨었고, 다리 위에 올려놓은 두 손도 가만히 있지를 않았다. 마치 피아노라도 치듯 허공에서 손가락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전차 안이었다.

일상처럼 일어난 정의의 성채 외곽부의 전투를 마치고 귀환하는 중이었다. 15층으로 영웅들과 천사들이 모이는 것이 신경 쓰였는지, 근래 들어 조금씩 악신들의 공세가 강해지고 있었다.

카마엘은 소문난 전투광이었다. 때리는 것도 좋아했고 맞는 것도 좋아했다. 심지어는 이기는 것과 지는 것 역시 둘 다 좋아했다.

이기면 이겨서 좋았고, 지면 복수할 수 있어서 좋았다. 패배의 쓴맛도 각별했고.

때리고 맞는 것도 비슷한 논리였다.

때릴 때는 즐거웠다. 적의 몸에 칼날을 쑤셔 박을 때마다 삶이 충실해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의 힘을 맘껏 펼칠 때 카마엘은 살아 있음을 실감했다.

맞을 때도 즐거웠다. 고통 역시 쾌락이었다. 때릴 때와 마찬가지로 살아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때문에 카마엘은 전투를 좋아했다. 카마엘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모조리 만끽할 수 있는 순간이었으니 말이다.

‘심층에 가고 싶어.’

카마엘의 입버릇 중에 하나였다.

중층의 수문장 역할을 하는 그녀는 심층에 가고 싶어 했다. 심층에서 미친 듯이 싸우는 것이 그녀의 가장 큰 소망이었다.

하지만 치유의 신은 그녀에게 15층에 남을 것을 명했다. 심층에 오는 대신 심층 공략대에 생명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심층과 중층의 경계를 지키는 임무를 내렸다.

카마엘을 괴롭히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물론, 카마엘은 그 괴로움 또한 즐거움의 일부로 승화시킬 천사이긴 했지만, 그보다는 카마엘의 성향 때문이었다.

전투광임에도 불구하고 카마엘은 지키는 것에 능했다.

애당초 그녀가 가장 선두에 서서 싸우는 것은 1초라도 더 빨리 쾌락을 맛보기 위함이 아니었다.

다른 이들을 지키기 위해.

가장 앞에 섬으로써 모두를 자신의 등 뒤에 서게 하고자.

치유의 신을 비롯한 선신들 대부분은 이계에서 소환한 영웅들에게 강한 부채감과 미안함을 품고 있었다.

천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는데, 카마엘은 그중에서도 유독 부채감이 강한 편이었다.

‘그러니 앞장서서 싸워야 해.’

이계에서 온 영웅들을 조금이라도 안전해질 수 있도록, 한 번이라도 덜 싸움터에 서도록.

지독한 전투광이었지만 동시에 지독하게 상냥한, 너무나 천사다운 천사.

때문에 카마엘에게는 빼앗기 위한 싸움보다는 지키기 위한 싸움이 어울렸다.

“늘 느끼는 거지만, 저러는 거 보면 다 거짓말 같단 말이지.”

카마엘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내가 질렸다는 얼굴로 카마엘을 보며 말했다.

여섯 장의 날개와 화려한 천사의 고리.

마치 사자의 갈기처럼 정돈되지 않은 하늘색 머리칼.

쭉쭉 길게 뻗은 사지와 맵시가 좋은 몸매.

천사답게 아름다운 얼굴.

보석처럼 빛나는 파란 눈동자.

하지만 금단 증상에 시달리는 마약 중독자라도 된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모든 것을 망쳐 놓았다.

한바탕 신나게 싸우고 왔는데도 카마엘이 저러는 이유는 단순했다.

마침내 15층에 당도한 용사.

그와 싸워 보고 싶다.

그의 힘을 시험해 보고 싶다.

그를 때리고, 그에게 맞고 싶다!

“이상해, 진짜 이상해.”

질색하는 사내는 미궁 세계의 원주민이었다.

카마엘이 15층의 천사들 가운데 가장 강하다면, 그는 15층의 원주민들 가운데서 가장 강했다.

15층을 지키는 네 기둥 가운데 하나.

흑기사 카를로스.

이제는 멸망한 제국의 검을 사용하는 그는 검의 명가 바이에른 가의 마지막 후손이었다.

칠흑의 중장갑옷을 걸친 그는 동의를 구하듯 전차 안에 탄 세 번째이자 마지막 탑승객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상대는 카를로스와 생각이 조금 다른 듯했다.

“순수한 모습이 보기 좋잖소.”

잔잔한 미소까지 짓는 모습이, 귀여운 야생동물을 보는 사람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무토.

15층을 수호하는 네 기둥 가운데 하나이자, 이계에서 소환된 영웅들 가운데서도 이름난 강자.

철완의 무토라는 이명이 증명하듯, 그는 강철 같은 근육을 가진 거한이었다. 굉장히 얇은 천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기보다는 몸에 걸치기만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장갑옷을 챙겨 입은 카를로스보다 덩치가 더 좋은 그였다.

피부는 검고 눈은 맑았다.

삭발한 머리 아래 떠오른 표정은 평온 그 자체였다.

“둘 다 모르겠어, 둘 다 이상해.”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가로젓는 카를로스에게 무토는 다시 조용한 미소를 보였다. 그러고는 카마엘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카를로스에게만 전음을 보냈다.

[사실, 조금 걱정되는 게 있소.]

‘뭔데?’

카를로스가 눈빛으로나마 되묻자 무토는 허허 웃으며 턱을 쓰다듬었다.

[한 분 더 계시지 않소.]

전투광이.

어떤 의미로는 카마엘 이상으로 싸움을 좋아하는 분이.

“아.”

카를로스도 떠올렸다. 생각해 보니 군대의 신에게서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기도 했다.

“지금 계시려나?”

아주 작게 묻자 무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어쩌면 이미 시작한 걸지도.]

무토는 전차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멀리 보이는 정의의 성채 중심부를 향해 그윽한 시선을 보냈다.

* * *

천호에게 있어 수련은 무척이나 익숙한 일이었다.

태어난 이래 지금까지 평생 해 온 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2년 남짓한 시간.

분명 짧지 않았지만 천호가 수련해 온 시간을 생각한다면 그렇게까지 긴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특별했다.

시간의 문 안에서 보낸 시간들은.

가짜 아버지와 함께해 온 수련들은.

진짜 아버지와 함께한 10여 년과 홀로 한 4년여의 수련 전체를 합친 것보다 훨씬 더 각별했다.

미궁 세계에 오기 전의 천호와, 오고 난 후의 천호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했으니까.

수련의 성과를 묻는 치유의 신의 물음에 천호는 포커페이스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어머니의 피가 깨어난 이후 조금씩 변해, 이제는 잘생겼다기보다는 아름답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얼굴로 아버지의 미소를 그려 보였다.

보여 주고 싶었다.

어린애 같은 치기였지만 자랑하고 싶었다.

가짜 아버지와 함께 이룬 것들을, 이제는 사라진 그가 무엇을 남겼는지를.

“좋군.”

치유의 신 역시 평소처럼 호탕하게 웃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어린 감정은 호승심이었다.

치유의 신은 단순히 신격만 높은 신이 아니었다. 심층에는 강력한 투신들이 많았다.

전쟁의 여신 이브나일이 가장 사랑한 딸인 승리의 신.

미궁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검사인,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검의 신.

치유의 신의 스승이라 할 수 있을 격투의 신.

하지만 공략대를 이끄는 것은 치유의 신이었다.

가장 앞장서서 싸우는 이는 언제나 치유의 신이었다.

호전적이다.

어릴 때부터 들은 이야기였다.

지기 싫어한다.

지고서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흉포하다.

악신들과 마물들 한정으론 맞는 말이었다.

치유의 신은 싸우는 것을 좋아했다. 강한 이와 싸우는 것을 즐겼다. 강자들을 사랑했다.

“누, 누님?”

“안 좋은 버릇 또 나온다, 또 나와.”

“역시 사도랑 대면하고 운운은 핑계였어.”

정화의 신이 당황했고,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은 언제나처럼 저들끼리 재잘재잘하며 뒤로 물러섰다.

치유의 신은 불꽃같이 뜨거운 시선을 천호에게 고정시킨 채 호명했다.

“루시엘.”

“네!”

“미안하지만, 몸을 빌려줄 수 있겠니?”

“모, 몸이요?”

루시엘이 저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신을 상대로 천사가 결코 저질러서는 안 되는 무례였지만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몸을 빌려 달라면, 그 몸으로 할 일은 하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치유의 신은 무례를 탓하지 않았다. 화내지 않고 루시엘에게 시선을 돌렸다. 분명 뜨거웠지만, 노여움이 아닌 열정과 기대로 인한 강렬함이었다.

“부탁할게.”

“···알겠습니다.”

루시엘은 마음을 다잡아 답한 뒤 천호를 돌아보았다. 천호 역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괜찮을 거다.]

미트라가 다시 한 번 루시엘을 안심시켜 주었다.

만약 천호나 루시엘 둘 중 하나가 다치기라도 한다면 결코 치유의 신을 용서할 생각이 없는 미트라였다.

“고마워요.”

루시엘은 미트라에게 짧게 말한 뒤 다시 천호를 보았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용사님이 이기시면 좋겠어요.”

치유의 신의 사도인 루시엘 자신이었지만, 그래도.

천호가 눈빛으로 답하자 루시엘은 다시 생긋 웃었다.

“다치지 말고요.”

“노력할게요.”

루시엘은 시간을 더 지체하지 않았다. 그대로 빙글 돌아서서는 치유의 신에게 다가섰다.

“고맙다, 루시엘.”

“살살··· 해 주세요.”

“노력하마.”

천호와 비슷한 답을 한 치유의 신이 손가락을 탁 하고 튕기자 주변이 붉은빛에 휩싸였다.

옥좌 위에 자리하고 있던 치유의 신이 사라졌다. 대신이라도 되듯 루시엘의 전신에서 강렬한 붉은 아우라가 불꽃처럼 솟구쳐 올랐다.

15층 성소에 강림시킨 치유의 신의 일부가 루시엘의 몸을 취한 결과였다.

“방해되지 않도록.”

루시엘의 목소리로 말한 치유의 신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이번엔 치유의 신의 성소가 변모했다. 바닥이 순식간에 수십 배 이상 넓어졌다. 정확히는 천호와 치유의 신이 선 중심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 전체가 갑자기 확장되었다.

졸지에 수백 미터 밖까지 밀려난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이 무어라 소리쳤지만 이내 들리지 않게 되었다. 직경 10여 미터 남짓하던 성소가 이제는 직경 수 킬로미터에 달하는 드넓은 공간이 된 탓이었다.

천장도 높아졌다. 쑥쑥 높아지더니 이내 아주 달라지고 말았다.

“어디가 좋아?”

치유의 신이 쾌활하게 물었다. 천호는 눈앞에서 일어난 이적에 눈을 휘둥그레 뜨는 대신 숨을 깊이 삼킨 뒤 답했다.

“평원이 좋겠어요. 실리피안 평원.

[그대여.]

미트라가 채 말을 잇기도 전에 모든 것이 변하였다.

짧은 풀이 돋아난 평원이 펼쳐졌다. 하늘은 맑고 높았고, 먼 데서부터 불어온 바람이 기분 좋게 어깨를 스쳤다.

“자, 그럼 시작할까?”

치유의 신이 다시 손을 놀리자 이번에는 루시엘의 외양이 변했다. 하늘하늘한 드레스 대신 천호의 것과 닮은 붉은색 마갑이었다. 양손에는 피처럼 붉은빛의 검이 한 자루씩 쥐어졌다.

“늘 느끼는 거지만.”

“거지만?”

“치유의 신이신 거 맞죠?”

“그러게.”

대답 아닌 대답을 내놓은 치유의 신은 빙글 검을 돌렸다. 루시엘이 4급 천사로 승급한 덕분에 제법 많은 힘을 담을 수 있었지만 여전히 본체에는 미치지 못했다. 하지만 이 정도면 치유의 신 자신이 즐기기에는? 아니, 천호의 힘을 시험하는 데는 문제가 없으리라.

“본심을 숨기는 건 어렵단 말이지.”

누구에게인지 모를 말을 중얼거리며 치유의 신은 자세를 고쳤다. 그녀의 얼굴에는 천호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최고의 미소가 어려 있었다.

환희.

이제부터 시작될 싸움에 대한 기대.

때문에 천호는 마주 싸우는 대신 손을 들어 올렸다. 당장이라도 돌진해 오려는 치유의 신을 제지했다.

[그대여?]

“무슨 일이지?”

설마하니 이제 와서 대련이 두렵다는 건 아닐 테고.

치유의 신의 물음에 천호는 바로 답하지 않고 잠시 뜸을 들였다.

이왕 시작한 대련인 만큼 하나하나 가진 걸 모두 보여 주면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았다.

천호 자신이 아닌 치유의 신의 시간이 말이다.

그러니 간추린다.

가장 극명하게 변한 것을 우선 보여 준다.

“미트라, 마검으로 부탁할게요.”

[마검으로 말인가?]

지난번에 제법 레벨이 오르긴 했지만, 마검승화는 아직 미숙했다. 성검 미트라 쪽이 마검 미트라보다 훨씬 더 강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천호는 부탁했다.

지금부터 하려는 일에는 성검보다는 마검 쪽이 더 어울렸기 때문이다.

“부탁할게요.”

[으음··· 알겠다.]

아무 생각 없이 이런 부탁을 할 천호가 아니었으니까.

미트라의 검신이 검고 붉게 물들었다. 황금색이던 보석이 피처럼 붉은빛을 발했다.

[뭐야, 내가 보고 싶기라도 했던 거야?]

마검 미트라가 살짝 기대 어린 목소리로 새침하게 묻자 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많이 보고 싶었어요.”

[흠, 흠흠.]

얼굴이 빨개져서 몸을 비비 꼬고 있는 마검 미트라가 보이는 것 같았다. 성검이니 마검이니 나누긴 했지만 근본은 똑같다고 해야 할까.

내친김에 성검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으앙 소리 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지만 그렇게까지 여유를 부릴 상황은 아니었다. 저만치에 선 치유의 신이 호기심 반, 조급함 반인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으앙은 나중에 많이 들을게요.”

[어?]

천호는 답하는 대신 마검 미트라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반대쪽 빈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치유의 신에게 물었다.

“밤으로 부탁해도 될까요?”

낮이 아닌 밤.

태양의 마력을 지닌 천호에게 있어 유리할 게 하등 없는 시간.

하지만 천호는 부탁했고, 치유의 신의 두 눈에는 이채가 어렸다. 치유의 신은 조금 더 격해지기 시작한 심장의 고동을 들으며 천호의 뜻을 이루어 주었다.

실리피안 평원에 밤이 찾아왔다.

푸른 하늘이 검게 물들었고, 태양만이 도도하게 빛나던 하늘에 별빛이 쏟아졌다.

시간의 문 안에서 익히고 배운 것들.

그것들 가운데서 가장 큰 성과라 할 수 있는 것.

천호는 숨을 길게 토했다.

아버지의 피를 일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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