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137화 (137/211)

[만남이 기대된다.]

“저도요.”

미트라에게 답한 것은 천호가 아닌 루시엘이었다. 작은 변화였지만, 미트라는 정신세계 속에서 무척이나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말이 통하니 좋구나.]

“네, 미트라 님. 저도 좋아요.”

그동안 답답했던 것은 미트라만이 아니었으니까. 천호가 미트라의 황금색 보석을 쓰다듬으며 혼잣말같이 무어라 중얼거릴 때면 늘 무슨 대화를 하나 신경이 쓰이던 루시엘이었다.

“아무튼 들어가자.”

뒤에 서서 언제 들어가나 기다리던 정화의 신이 대뜸 앞으로 나서며 성소의 문을 열었다.

치유의 신의 성소.

다른 층들과 마찬가지로 정갈하면서 소박한 공간이었다.

하지만 차이점이 한 가지 존재했다.

“안녕.”

“누님!”

온통 하얀 성소 중앙에 위치한 옥좌 위.

한쪽 다리를 꼬고 앉은 치유의 신이 인사하자 정화의 신이 반색하며 달려갔다. 과장 조금 보태서 주인 만난 강아지 같았다.

“얼굴 맞대는 건 오랜만이네?”

“네, 누님. 오랜만입니다.”

“그래, 그럼 일단 저리 가 있으렴. 누나 일해야 하니.”

생긋 웃으며 정화의 신을 밀어낸 치유의 신은 천호 일행에게 시선을 돌렸고, 정화의 신은 버려짐의 프로답게 기죽지 않고 치유의 신 옆에 자리했다.

“치유의 신님을 뵙습니다.”

루시엘이 제일 먼저 예를 표하자 라구엘이 뒤를 이었다. 마키나와 크리스까지 어색하게나마 예를 표하고 나자 치유의 신이 다시 미소 지었다.

“그래, 다들 보니 좋구나.”

“우리도 있어, 언니.”

“루시엘을 거치는 편이 좀 더 낫지 않아?”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이 한마디씩 하자 치유의 신은 언제나처럼 여유롭게 답했다.

“그래, 너희도 있지. 앞으로도 많이 도와주렴. 그리고··· 가성비가 좀 안 좋긴 해도 이번에는 이렇게 하고 싶었어. 이래저래 15층이잖니.”

중층 최하층.

심층으로 이어진 장소.

이브나일의 신기를 되찾기 위한 전쟁이 일어날 땅.

“내 사도와도 얼굴을 맞대고 싶었고.”

치유의 신이 루시엘을 보며 자애로운 미소를 짓자 루시엘이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몸을 살짝 떨며 뺨을 붉혔다. 말은 안 했지만 눈빛을 보니 무척이나 기뻐 보였다.

“자, 아무튼. 이야기를 진행해야지. 여기까지 정말 잘 와 주었다, 용사.”

치유의 신이 호탕하게 웃으며 천호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오라는 신호였기에 천호는 치유의 신에게 다가섰다.

“오는 중에도 공을 많이 세웠던데?”

“모두의 덕분입니다.”

“대답이 늘 교과서적이란 말이지.”

쿡쿡 웃은 치유의 신은 옥좌에 몸을 묻으며 말을 이었다.

“서론은 이쯤 하고, 본론부터 말하자면··· 앞으로 닷새 뒤에 전투를 시작할 예정이야.”

심층의 싸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15층에서 펼쳐질 신기 쟁탈전의 이야기였다.

“이미 전투 준비 자체는 거의 다 끝난 상황이야. 애당초 15층은 밖으로 파견 나간 영웅들이 거의 없는 편이고.”

잠시 말을 끊은 치유의 신은 손가락을 놀려 허공에 빛의 지도를 만들어 냈다.

태초의 대장간에서 이미 본 바가 있는 15층의 지도였다.

“군대의 신이 북부로 공격을 개시할 거야. 목표는 심층으로 이어진 또 하나의 기둥이 있는 악신들의 본거지. 물론 진짜 목적은 신기지만.”

빛의 지도 위에서 푸른 점들이 붉은 점들로 뒤덮인 북부로 진출했다.

“놈들의 시선을 북부 최전선으로 돌린 뒤 특별 편성한 수색조로 신기를 확보할 예정이야. 작전 자체는 간단한 편이지.”

“그 수색조는 우리고?”

음악의 신이 묻자 치유의 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카마엘과 무토는 적들에게 얼굴을 보여 줘야 하니까. 군대의 신도 마찬가지고.”

선신들의 목적이 이브나일의 신기임을 적들이 모르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목표는 북쪽의 기둥.

어디까지나 영토 확장이 목적.

악신들이 그렇게 믿게 하기 위해서는 15층의 이름난 전력들을 모두 전장에 내보낼 필요가 있었다.

“최전선이 아니라고는 해도 적진이야. 완전히 후방이 될 때까지 기다릴 여유까지는 없고. 때문에 위험하겠지만··· 정말로 중요한 일이야. 맡아 줄 수 있겠니?”

치유의 신이 천호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녀답지 않게 조금이지만 간절함까지 섞인 눈빛이었다.

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돕기로 한 이상 전력을 다하는 것이 천호의 성격이기도 했지만, 치유의 신의 지금 같은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그리하겠습니다.”

“정말 고마워, 네가 나서 준다니 안심이 되네.”

정말로 한시름 놓았다는 듯 숨까지 길게 내쉰 치유의 신은 어깨를 늘어트렸다. 심층에서의 싸움이 근래 힘들어졌는지 이전보다 지친 기색이 완연한 그녀였다.

“언니, 괜찮아?”

“누님, 괜찮으세요?”

“괜찮아, 괜찮아.”

씩 웃으며 손사래를 친 치유의 신은 다시 천호를 보며 말했다.

“용사에게 한 가지 제안할 게 있어.”

“제게요?”

“응, 마침 시간의 신이 잠에서 깨어났거든.”

아직까지는 맥락을 알 수 없는 이야기였지만 ‘시간의 신’이라는 말에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은 짝 하고 박수를 쳤다.

“용사한테 시키려고?”

“용사가 하겠다고 하면.”

“음, 일단 들어 볼 수 있을까요?”

천호의 물음에 치유의 신은 다시 손가락을 놀려 새로운 빛의 창을 만들어 낸 뒤 말했다.

“시간의 신은 잠이 많은 신이야. 거의 늘 잠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

빛의 창 속에는 문자 그대로 잠자는 숲 속의 미녀가 있었다. 동화와 다른 것은 처녀가 아니라 소녀라는 점 정도일까.

“그래도 가끔 깨어나면 이것저것 유용한 일을 해 주는데, 그중에 시간의 방이라는 게 있어.”

“아.”

이쯤 되니 천호도 대강 짐작이 갔다.

시간의 신과 시간의 방.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도 비슷한 사례가 하나 있었다.

“짐작이 가?”

“그, 시간의 흐름이 다른 장소라든지?”

“정답.”

“이곳에서의 한순간이 시간의 방에서는 수백, 수천 시간이 될 수도 있어. 즉, 열심히 수련하고 나와도 현실에서는 시간이 별로 안 흘러 있다는 거지.”

음악의 신이 추가로 설명하자 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정신과 시간의 방이네.’

아버지의 이야기에도 나왔고, 유명한 만화에도 나온 적이 있는.

“기본적으로 시간의 신이 깨어났을 때만 사용이 가능한 터라 들어갈 기회가 그리 많지는 않아. 지금까지는 보통 카마엘이나 무토가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네가 들어갔으면 해.”

신기 쟁탈전 개시까지 남은 시간은 닷새.

그사이에 시간의 방을 사용하면 단시간? 어디까지나 현실 기준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시간 안에 상당한 전투력 강화가 가능할 터였다.

[음, 좋은 제안인 것 같다.]

미트라의 말에 천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호세사천왕을 비롯해 지금까지 익힌 것들을 숙성시킬 시간이 필요하던 참이었다.

중층에 들어온 이후 너무 급속도로 많은 것들을 익혀 솔직히 약간은 소화불량인 기분이었으니 말이다.

“용사님, 함께할게요.”

루시엘이 천호의 손을 잡으며 말하자 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루시엘과 함께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아, 미안. 시간의 방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한 사람뿐이야.”

치유의 신의 말에 루시엘이 어깨를 떨구었고, 천호 역시 약간이지만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미트라가 웃으며 말했다.

[괜찮다, 그대여. 내가 있지 않은가.]

어쩐지 모르게 평소보다 기쁜 기색이 완연한 목소리였다.

천호도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더블 으앙은 물론이고 쿼드라 으앙까지 완성해 볼 요량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어, 미안. 성검도 안 돼. 일단 한 사람 취급이라.”

치유의 신이 묘하게 즐거운 얼굴로 말했다.

생각해 보면 저층에서 중층으로 올 때 이미 비슷한 일을 경험한 일행이었다.

[으윽.]

미트라가 정신세계 속에서 어깨를 늘어트렸다. 루시엘과 똑같은 표정이 된 그녀였다.

치유의 신이 천호를 보며 말했다.

“그래도 완전히 혼자는 아냐. 시간의 방에 들어가면 네 기억을 재료로 해서 수련을 도와줄 사람이 가상으로나마 구현될 거야.”

가상의 수련 도우미.

기억을 베이스로 한다는 말에 천호는 루시엘과 미트라를 돌아보았다.

“뭐, 어쩌면 내가 나올 수도 있고.”

어깨를 으쓱인 치유의 신은 옥좌에서 일어섰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바로 들어가는 게 어때?”

치유의 신이 손가락을 튕기자 번쩍하는 섬광과 함께 커다란 침대 하나가 나타났다.

침대 위에는 하얀 머리칼의 소녀가 침을 질질 흐리며 잠들어 있었다.

“정화의 신.”

“네, 누님!”

바로 답한 정화의 신이 소녀를 마구 흔들어 깨웠다.

“으으으······.”

“누님께서 기다리신다. 빨리 일어나라, 빨리!”

어깨를 마구 흔들자 소녀가 기괴한 신음을 흘리며 눈을 반쯤 떴다. 그래도 여전히 침대에서 일어나지는 않는 소녀? 시간의 신이었다.

“부탁할게.”

치유의 신이 말하자 정화의 신이 시간의 신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고, 시간의 신은 마치 나무늘보처럼 천천히 손을 놀렸다. 요 근래 잠에서 깨어나면 하는 일은 항상 똑같았기 때문이다.

시간의 방.

무척이나 고풍스러운 문이 일행 앞에 나타났다. 밑에 부분은 너무나 낡아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은 나무문이었고, 위에 부분은 마치 새것처럼 깨끗한 강철문이었다.

“얼마나 지내게 되는 거죠?”

“개인차가 있지만 아마 1년 정도?”

1년.

결코 짧지 않은 기간이었다.

[그, 그대여.]

“용사님.”

미트라와 루시엘이 안절부절못했다.

천호 역시 두 사람과 1년 가까이 떨어져야 한다는 사실에 순간 움찔하긴 했지만 이내 마음을 정했다.

“괜찮아요, 군대 가는 셈 치죠.”

휴가와 면회와 외박이 없는 군대.

뭔가 말해 놓고 보니 더 끔찍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녀올게요.”

“용사님!”

루시엘이 천호를 와락 끌어안았고, 미트라는 정신세계 속에서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천호는 루시엘을 마주 한 번 꼭 안아 준 뒤 숨을 길게 토했다. 루시엘에게 미트라를 넘겨주었다.

“루시엘을 잘 부탁해요, 미트라. 미트라를 잘 부탁할게요, 루시엘.”

“네, 용사님.”

[그리하겠다.]

갑작스럽긴 했지만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났다.

마음을 다잡은 천호는 크리스와 마키나에게도 인사한 뒤 시간의 문 앞에 섰다.

“빨리 가, 졸려.”

시간의 신이 꾸벅꾸벅 졸며 말하자 시간의 문이 열렸다. 치유의 신의 성소처럼 온통 하얀 공간이 문 너머에 보였다.

“다녀올게요.”

“다녀오세요.”

[조심해서 다녀와라.]

루시엘과 미트라가 다시 한 번 말했고, 천호는 마지막으로 치유의 신을 보았다.

치유의 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고 있겠다.”

천호는 발걸음을 내디뎠다. 시간의 문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 * *

온통 하얀 공간.

시간의 흐름이 다른 장소.

하지만 잠깐뿐이었다.

이내 하늘과 땅에 변화가 생겼다.

노을이 진 하늘.

초목이 푸르른 산중의 캠핑장.

너무나 낯익은 광경에 절로 미소가 떠오른 천호는 자연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예상했던 인물이 그곳에 서 있었다.

“아버지.”

“요, 아들.”

장난스럽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 왔다.

아버지.

천호는 잠시 그대로 서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기억 속의 모습과 같았다.

크고 강하고 멋진 남자.

“시선이 좀 부담스럽구나.”

“아버지가 맞네요.”

헛기침을 터트리는 대신 키득 웃은 천호는 새삼 주변을 돌아보았다.

어린 시절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산중의 캠핑장.

애당초 배경이 이곳이 된 이상, 수련 도우미로 나올 사람은 아버지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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