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133화 (133/211)

“알겠어요, 미트라. 오늘 밤에는 꼭 정신세계에 들어갈게요.”

[음, 약속한 거다.]

“네, 미트라. 오늘 밤에는 꼭 미트라의 드레스 차림을 감상할게요.”

어머니께서 미트라에게 보내 주신 옷상자 안에 있는 옷들은 전부 특별한 처리가 되어 있었다. 덕분에 정신세계 안에서나마 그 옷들을 모두 입어 볼 수 있는 미트라였다.

[그, 그런 거 때문에 보자는 것이 아니다.]

“그럼요?”

[그··· 여명의 검에 대한 토론이라든가······.]

“그럼 드레스 대신 제복 입고 계실 거죠?”

[그, 그건······.]

조금만 더 하면 으앙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천호는 더 하는 대신 웃으며 황금색 보석을 쓰다듬었다.

“아무튼 기대할게요.”

[···흥이다.]

“네, 흥.”

황금색 보석을 톡톡 두드리자 미트라가 무어라 작게 중얼거렸다. 마검 미트라였다면 지금 상황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아무튼 이쯤 하죠. 땀도 많이 흘렸고.”

[그래, 그게 좋겠다. 슬슬 점심때도 다가오는 것 같으니.]

“새삼 아쉽네요.”

[무엇이 말인가?]

“어제랑 같은 요리를 끼니마다 만들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천호는 잠시 어젯밤에 본 광경을 떠올리며 미소 지었고, 미트라는 정신세계 속에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랬다가는 일행의 옷이 남아나질 않을 거다.]

“하긴 그렇겠네요. 그런데 미트라.”

[왜 그러나.]

“엉큼한 레벨은 대체 왜 오른 거예요?”

엉큼한 레벨 8.

만찬회 전까지는 분명 레벨 7이었는데 오늘 아침에 보니 레벨 8이었다.

이번에는 천호가 눈을 가늘게 떴고, 미트라는 어색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 글쎄? 나, 나는 잘 모르겠다.]

“호오.”

그리고 그때였다.

“용사님!”

[오, 루시엘! 루시엘이다! 루시엘이 왔다!]

미트라가 얼른 소리 높여 답했고, 천호는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돌아보았다. 미트라의 말마따나 루시엘이었다.

“루시엘?”

“창병의 신님께서 용사님을 찾고 계세요.”

“저를요?”

“네, 급한 일인 것 같아요. 용사님뿐만 아니라 음악의 신님과 회화의 신님도 찾으셨어요.”

아무래도 뭔가 일이 있긴 있는 모양이었다.

[빨리 가 보자.]

“네, 미트라.”

천호는 단검으로 변신한 미트라를 허리춤에 꽂은 뒤 루시엘과 함께 날개를 펼쳤다.

* * *

정의의 성채 13층의 안보를 책임진 창병의 신은 기병의 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중앙에 위치한 만신전에 머물고 있었다.

심층에 가까워질수록 마기가 강해졌기에, 정의의 성채에 머무는 신들의 숫자와 강함 역시 심층에 가까워질수록 많아졌고, 또한 강해졌다.

요리의 신과 같이 비전투 계열 신들이 대다수이긴 했지만, 전투 계열 신이 기병의 신 하나뿐인 12층과 달리 13층에는 창병의 신 외에도 몇 명인가 전투 계열 신들이 더 자리하고 있었다.

“용사여, 부름에 응해 주어 고맙다.”

“아닙니다, 무슨 일이신지요.”

어제 만찬회에서 이미 통성명을 한 사이인 터라 의례적인 대화가 길어질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무기고를 연상시키는 창병의 신의 성소에 자리한 것은 창병의 신만이 아니었다.

“일단 소개부터 하도록 하지. 이쪽은 내 자매들 중 하나인 방패병의 신이다.”

창병의 신의 옥좌 옆에 서 있던 중무장한 여인이 천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방패병의 신이다.”

“박천호입니다.”

기병의 신도 풀 플레이트 메일을 챙겨 입기는 했지만, 눈앞의 여인은 그 이상이었다. 특히 성문을 연상시킬 정도로 크고 단단한 타워 실드가 인상적이었다.

창병의 신이 다시 말을 이었다.

“정의의 성채로 귀환 중이던 영웅들에게서 연락이 왔다. 귀환 중에 악신들의 진지를 하나 발견한 모양이다.”

창병의 신이 손가락을 놀리자 허공에 빛의 지도가 펼쳐졌다.

현재 위치와 14층으로 이어지는 기둥의 위치, 영웅들이 발견했다는 악신들의 진지 위치가 하나씩 표시되었다.

“공격하려고?”

“12층에서처럼 습격을 당하느니 치는 쪽이 나으니까.”

비록 사흉신을 격퇴하긴 했지만 12층이 입은 피해는 막대했다.

악신들이 이렇게까지 근접한 곳에 진지를 구축한 이유는 습격 외에는 생각하기 어려웠으니, 당하기 전에 쳐야 성채 내부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음악의 신의 물음에 딱 잘라 대답한 창병의 신은 천호를 돌아보았다.

“지금 들은 대로 악신들의 진지를 공격할 계획이다. 그대의 협조를 구하고 싶다. 가능하겠는가? 아, 물론 보상도 충분히 준비할 것이다.”

기병의 신을 닮은 얼굴로 부탁하니 천호로서는 거절할 방도가 없었다.

사실 거절할 이유도 없었고 말이다.

‘오히려 잘된 걸지도.’

천사 3인방과 사스치엘, 엘리엘에게는 지금보다 더 레벨을 높일 기회가 필요했다. 지금 수준으로는 14층과 15층에서 있을 격의 상승을 견딜 수 없었다.

‘실험해 보고 싶은 것도 있고.’

새로운 경지에 오른 여명의 검과 새로 익히기 시작한 호세사천왕. 그리고 그에 말미암은 천호 자신의 변화- 아버지의 피까지.

물론 게임이 아닌 실전이었다. 가벼운 마음만으로 임할 수 있는 전투가 아니었다. 천호는 그 사실을 잊지 않았다.

“돕도록 하겠습니다.”

“흔쾌히 답해 주어 정말 고맙다.”

기병의 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평소 딱딱한 표정과 달리 활짝 웃어 보인 창병의 신은 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도록 하지. 이번에 발견한 적진에는 악신이 다섯 정도 머물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개중에는 이미 그대가 알고 있는 자들 또한 존재한다.”

단수가 아닌 복수.

천호와 얼굴을 맞대고도 살아남은 악신은 역병신을 제한다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때문에 지금의 설명만으로도 천호는 누구를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사흉신 가운데 남은 둘.

붉은 죽음의 카드무스와 파란 죽음의 아드모스.

천호가 미트라의 황금색 보석을 쓰다듬었다.

제18장?신기 쟁탈전

어느 날 문득, 미궁 세계에 소환된 영웅들 가운데 하나가 작은 의문 하나를 떠올렸다.

대미궁에 공격받고 있는, 세계의 절반 이상이 대미궁에 침식당한 세계.

이 세계의 이름은 미궁 세계였다.

하지만 대미궁의 침공 이후에 정해진 이름이 아니었다. 그 이전에도, 용사 레온의 시대에도 이 세계의 이름은 미궁 세계였다.

어째서일까.

왜 미궁 세계인 것일까.

* * *

대미궁은 중층 13층을 경계로 하여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1층에서 12층까지는 대미궁 곳곳에 독립된 세력들이 존재했다.

포레스트 엘프들, 플로렌 왕국, 산의 일족, 제국의 후예들과 같이 말이다.

하지만 13층부터는 실질적으로 정의의 성채와 그 주변 일대뿐이었다.

그 외 지역은 모두 대미궁- 저 악신들의 영역이라 해도 좋았다.

이 같은 차이는 마기의 밀도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13층 이하에서 천사나 영웅이 아닌 평범한 인간들이 생존할 수 있는 것은 신성력으로 마기를 중화시켜 주는 선신들의 존재 덕분이었다.

대미궁의 침식으로 인해 처음부터 13층 이하에 흡수된 지역의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마기에 중독되어 죽음을 맞이했다.

정의의 성채는 심층 공략대의 보급선인 동시에 대미궁 중층에 거하는 인간들의 유일무이한 도피처였다.

모여든 인간들을 어떻게든 강화시켜 비교적 안전한 상층으로 올려 보낸다.

저층과 중층 초반부에서 단련된 영웅들과 천사들을 받아들여 심층 공략대에 참여할 수 있을 인재들로 길러 낸다.

때문에 13층과 14층에서는 싸움이 잦았다.

12층처럼 수비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다면 선제공격을 주저하지 않았다.

“악신들이 진지를 숨기기는 쉬워.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곳은 대미궁 안이니까.”

정의의 성채 외에는 온통 마기뿐인 곳이었으니, 마물들뿐만 아니라 악신들까지도 몸을 숨기기가 쉬웠다.

“응응, 그래서 놈들도 막 개떼같이 몰려 있는 경우는 드물어. 그냥 여기저기 나뉘어서 몸을 숨기고 있다가 습격 날에 확 일어나서 뭉치는 경우가 많지.”

“아무리 몸을 숨기기 쉽다고 해도 뭉쳐 다니면 들키기 쉬우니까.”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은 언제나처럼 떠들썩하면서도 간단했다.

“그러니까 이쪽도 최정예를 모아서 적의 심장부만 팍! 하고 찌른 다음에 철수하는, 그런 히트 앤 런 작전으로 갈 거야.”

타당했다.

그리고 이쪽 역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다면 잠복 중인 악신들에게 발각될 가능성이 높았다.

창병의 신은 이틀 뒤를 생각했다.

사흉신이 끼어 있는 악신의 무리를 급습하기 위해서는 이쪽 역시 충분한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설명을 마친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이 언제나처럼 만담을 시작하자 루시엘은 미트라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쪽은 육성이었고, 다른 한쪽은 빛이었다.

“정말요?”

루시엘이 검신을 쓰다듬으며 눈을 깜박이자 미트라가 황금색 보석을 빛냈다 말았다 하는 식으로 뜻을 표현했다.

미궁 세계 판 모스 부호라 할 수 있을 자타르 부호였다.

미트라의 대답에 루시엘은 까르르 웃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목욕의 신과 대면했을 때 미트라가 처음으로 자타르 부호를 사용한 이후, 부쩍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진 두 사람이었다.

그동안은 함께 여행하기는 했어도 천호를 거치지 않으면 이렇다 할 말 한마디 나누기 어려웠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자타르 부호 덕분에 시간은 좀 걸릴지언정 서로 간의 직접적인 대화가 가능했다.

“미트라 님, 너무 재미있으세요.”

루시엘이 까르르 웃자 미트라가 다시 응답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천호는 옆에 있던 에이젤에게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요?”

“으… 죄송해요. 저, 자타르 부호 할 줄 몰라요.”

에이젤이 우울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루실리아가 그런 에이젤을 위로하듯 어깨를 안아 주며 말했다.

“괜찮아! 나도 할 줄 모르니까!”

루실리아가 해맑게 웃자 에이젤은 어찌할 바를 모르다 어색하게 웃었고, 두 사람의 보호자 격인 라구엘과 실리키엘이 각기 말을 보탰다.

“그냥 잡담 같습니다.”

“그… 솔직히 너무 빨라서 저도 해석이 어렵습니다. 루시엘은 자타르 부호에 꽤나 익숙한 것 같네요.”

천호가 보기에도 그랬다. 자타르 부호를 해석하는 루시엘의 솜씨는 실로 굉장했다.

‘진짜 은근히 다재다능하단 말이지.’

아우라엘 말로는 지부의 차기 에이스 후보였다는데, 이해가 갔다. 신성력도 신성력이지만 은근히 못 하는 게 없는 루시엘이었다.

“음.”

천호는 잠시 담소를 나누는 루시엘과 미트라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사이좋게 지내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지만, 슬슬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아, 용사님.”

[음, 슬슬 시간인가 보군.]

루시엘이 방긋 웃으며 미트라를 천호에게 건네주었다.

출진이 아닌, 창병의 신과 잡아 둔 대련 약속 때문이었다.

[실험해 볼 기술이 있다면 실전에서 쓰는 게 아니라 그 전에 연습을 해 봐야지.]

아버지는 전투 중에 ‘따단!’ 하고 각성하는 일이 많으셨지만, 이런 쪽으로는 꽤나 엄격한 미트라였다.

때문에 천호는 출진 전에 창병의 신에게 대련 요청을 해 두었다.

이번에 실험해 볼 기술은 미트라를 적극 활용해야 하는 터라 정신세계에서는 연습이 불가능했다.

천호는 루시엘을 비롯한 일행과 함께 이동하며 미트라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루시엘하고 대화가 부쩍 느셨네요.”

[음, 루시엘과의 대화는 무척 즐겁다. 누구처럼 날 괴롭히지 않으니 말이다.]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까지 흥얼거린 미트라가 말을 보탰다.

[그리고 뭐랄까, 루시엘과는 뭔가 잘 통한다.]

“말이요? 관심사 같은?”

[그것도 있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파장이 맞는다고 할까? 같이 있으면 무척 편안해진다. 단순 기분상의 문제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말이다. 잘 만들어진 검집에 몸을 쏙 집어넣고 있는 것처럼.]

“호오.”

미트라가 이렇게까지 나오니 천호도 호기심이 생겼다. 옆에서 걷던 루시엘에게 미트라의 말을 전한 뒤 질문을 던졌다.

“루시엘도 그래요?”

“어… 네, 뭔가 잘 맞는 느낌이에요. 미트라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파장… 그러니까 영혼의 파장 같은 게?”

[루시엘이 내 자타르 부호를 빨리 해석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심전심이라고 할까? 그녀가 내 손잡이를 쥐고 있으면 정말로 몸과 마음이 이어지는 기분이 든다. 예전부터 이런 감각을 느끼기는 했지만… 근래 들어 부쩍 강해진 것 같다.]

천사와 성검의 파장이 잘 맞는다. 사이가 좋다.

함께하는 일행인 만큼 천호에게는 반가우면 반가웠지 결코 싫은 이야기가 아니었다.

“바람직하네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걷다 보니 어느새 약속 장소인 대련장에 도착했다.

13층 정의의 성채 동쪽 성벽에 위치한 대련장 주변에는 여러 천사들과 선신들, 영웅들이 모여 있었다.

[저쪽에 요리의 신도 있군.]

천호와 뜨거운 눈빛으로 인사를 나눈 요리의 신이 대련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천호 또한 자연스럽게 대련장에 선 신을 바라보았다.

창병의 신.

자매답게 기병의 신과 닮은 그녀는 비교적 경장이라 할 수 있을 가죽 갑옷 차림이었다.

2미터는 됨 직한 창을 길게 늘어트리고 선 창병의 신이 천호에게 미소를 보였다.

“한 수 부탁한다.”

“저야말로 부탁드립니다.”

창병의 신은 기병의 신보다 강했다.

그리고 12층에서 보았듯이 제대로 된 투신들은 가지고 있는 신성력 이상의 힘을 전투에서 발휘할 수 있었다.

중층에 들어선 이래 그야말로 놀라운 성장을 거듭한 천호 자신이었지만 종합 전투력은 아직 창병의 신보다 아래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대련의 가치가 있었다.

전력을 쏟아 낼 수 있는 상대.

자신의 전력을 받아 줄 수 있는 상대.

창병의 신도 천호에게 관심이 많았다.

치유의 신이 총애하는 영웅.

초대 용사 레온 이후 실로 오랜만에 나타난 용사.

성검 미트라의 주인.

무뚝뚝한 성격인 기병의 신, 그 아이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요리의 신은 천호야말로 대미궁 공략의 희망이 될 것이라 확신했다.

15층에서 일어날 신기 쟁탈전.

지금까지 정체되어 있던 흐름을 어떤 식으로든 재개시킬 중요한 전투.

그렇기에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용사의 저력을.

박천호란 인간의 힘을.

“두 분 모두 다치지 않게 해 주세요.”

루시엘이 두 손을 꼭 모아 쥐고 기도를 올렸다.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이 요리의 신을 닦달해 팝콘을 받아 냈다.

그리고 잠시 후.

대련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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