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132화 (132/211)

[나, 나만 이상한 건가.]

마검 미트라에게라도 물어보고 싶어진 미트라가 작게 중얼거리는 그때, 천호는 두 번째 칼질을 시작했다.

깨달음을 통해 얻은 묘가 더해지니 두 번째 칼질은 첫 번째 칼질을 능가했다.

그리고 칼질을 모두 마쳤을 때.

요리의 신과 함께 육회를 마무리 지은 그 순간.

이번에는 요리의 신에게서 찬란한 빛이 일었다. 두 눈을 감은 요리의 신은 두 팔을 벌리며 허공에 둥실 떠올랐고, 천호는 따스한 눈으로 요리의 신을 바라보았다.

생전 처음 보는 것이었지만 천호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신격의 상승.

기존의 한계를 뛰어넘어 더 높은 곳으로 향한 신성.

성스러운 빛과 바람이 요리의 신을 휘감았다. 요리의 신은 천천히 눈을 떴고, 자애로운 미소를 지었다.

신격이 상승한 이유는 단순했다.

요리의 신으로서 지금까지 만들어 내지 못했던 지고의 요리를 완성했기 때문이다.

“그대의 덕분이다.”

혼자서는 할 수 없었다.

미트라와 천호의 극의가 더해졌기에, 그로 말미암아 와일드 티라노이드의 특수부위가 격의 상승을 이루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새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요리의 신의 신성은 실로 막강했다. 아직 치유의 신 같은 대신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천호가 중층에서 만난 그 어떤 신보다도 강력한 신성이었다.

[으음, 으으음.]

미트라가 다시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아니, 뭐, 요리의 신이 신격의 상승을 이룬 것은 좋았다. 요리의 신이니 요리로 신격이 오르는 것이 당연하기도 했고.

하지만 뭔가 지금의 상황 자체가 참으로 미묘하게 느껴지는 미트라였다.

“축하드립니다.”

“선물을 주려 했는데 오히려 선물을 받고 말았군.”

하지만 세상 진지한 천호와 요리의 신이었다. 서로에게 보내는 시선이 참으로 따스했다.

요리의 신은 자연스럽게 주먹을 내밀었고, 천호는 마주 주먹을 내밀었다. 허공에서 용사와 신의 주먹이 가볍게 부딪쳤다.

“이 기쁨을 이제 나누고 싶군.”

“저도요.”

용사와 신의 시선이 요리로 향하였다.

* * *

“용사님, 다녀오셨어요?”

천호가 돌아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던 루시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밝게 웃었다.

천호는 그런 루시엘에게 마주 미소를 보이며 작은 손수레를 밀었다. 수레 위에는 요리의 신과 함께 완성한 육회가 다섯 접시나 올라가 있었다.

“만찬회의 마지막을 장식할 요리라네. 용사와 함께 완성한 아주 특별한 요리이지.”

이미 후식까지 다 먹은 와중에 새삼 다시 고기 요리- 굳이 따지자면 전채에 해당할 요리가 나온 상황이라 다들 의아해했지만 그래도 일단 요리의 신의 요리였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사이좋게 나눠들 먹게나.”

인원수대로 돌리기에는 와일드 티라노이드의 특수부위가 너무 작았다.

테이블에 한 접시씩.

배식을 마친 천호와 요리의 신은 나란히 서서 서로를 돌아보았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미소를 지었다.

“쟤네 왜 저래?”

“잠깐 사이에 뭔가 통했나?”

그 전에도 친해 보이긴 했지만, 지금은 거의 죽마고우 수준이었다.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은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갸웃했지만 잠깐뿐이었다. 사이가 좋아져서 나쁠 것은 없으니 눈앞의 요리에 집중하는 것이 사리에도 맞았다.

“그럼 먹을게!”

“먹자!”

“먹도록 하지.”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에 이어 창병의 신까지 각자의 식기를 드니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다들 식기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아아, 아아아!”

“앙♥”

“하아!”

“아흣!”

“하…….”

육회가 혀에 닿은 순간 녹아내렸다. 한입 씹은 순간 맛의 쾌감이 문자 그대로 폭발했다.

음악의 신이 교성을 토하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회화의 신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순백의 빛이 회화의 신을 뒤덮는가 싶더니 입고 있던 옷이 찢겨져 나갔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름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던 창병의 신의 얼굴이 완전히 풀려 버렸다. 황홀한 표정을 지은 채 의자 위에서 몸을 늘어트렸다.

의복이 찢겨 나간 것은 천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딱히 옷을 입고 있지 않았던 엘리엘과 사스치엘은 일부지만 털이 뽑혀져 나왔다.

[으음, 으으음.]

요리를 먹었는데 왜 옷이 찢겨져 나가는 걸까. 황홀해하는 것까지는 어떻게든 이해할 수 있지만.

“하아… 아♥”

루시엘이 뺨을 장밋빛으로 물들이며 달뜬 숨을 토했다. 지고의 요리를 통해 지고의 쾌감을 맛본 덕이었다.

에이젤도, 라구엘도, 아우라엘도, 모두가 같았다. 예외는 존재하지 않았다.

“음.”

포커페이스를 유지한 천호는 눈앞의 광경을 외면하지 않았다. 잠시도 눈을 돌리지 않고 똑똑히 바라보았다.

“만족스럽군.”

요리의 신이 말했고, 천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로 만족스러운 만찬회였다.

“우리도 먹어 볼까?”

“먹죠.”

막상 만들기만 하고 시식조차 안 해 본 천호와 요리의 신이었으니까.

천호와 요리의 신은 거의 동시에 육회를 입에 넣었고, 모두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아아!”

“오!”

천호의 옷이 찢겨져 나갔다. 요리의 신이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녹다운. 자연스럽게 다리의 힘이 풀려 주저앉는 용사와 신.

[으음, 으으음.]

모두가 이상해진 가운데 홀로 맑은 정신을 유지한 미트라는 정신세계 속에서 참으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천호와 요리의 신의 요리를 먹어 볼 수 없다는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헷갈리는 그녀였다.

[음, 으흠.]

하지만 고민의 시간은 짧았다.

미트라는 얼굴을 붉힌 채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눈앞에 펼쳐진 근육의 향연. 특히나 처음 보는 천호의 황홀한 표정.

[으흠! 으흠!]

미트라는 서둘러 빛의 창을 지웠다.

* * *

“뭔가 엄청난 일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응, 뭐랄까. 개판이라고 해야 할까?”

[요리의 신의 극의 ? 식칼 사용법 Lv1을 획득했습니다.]

[성검 스킬 : 만검만화를 획득했습니다.]

[여명의 검 Lv4가 되었습니다.]

[검술 관련 스킬들의 레벨이 모두 1씩 올랐습니다.]

[미궁 세계가 당신의 놀라운 이야기를 기억합니다.]

[성검 : 엉큼한 Lv8이 되었습니다.]

“뭔가 엄청난 일이 있었던 것 같아요.”

“응, 뭐랄까. 개판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도 맛있었어··· 마왕님 치킨보다 더······.”

다음 날 아침.

루시엘의 감상에 음악의 신이 답했고, 루실리아가 멍한 목소리를 흘렸다.

만찬회로부터 하루가 지난 상황이었지만 여전히 육회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모두였다.

“저기··· 그런데 옷은 왜 찢겨져 나간 걸까요?”

에이젤이 누구에게랄 것 없이 작은 목소리로 묻자 회화의 신이 간단하다는 듯 짝 소리가 나게 박수를 치며 답했다.

“상상을 초월한, 영혼이 뒤흔들릴 정도로 격한 감동을 맛봐서 그래. 그 충격으로 영혼이 성장하고, 성장과 충격과 기타 등등이 종합되어 순간적으로 강력한 힘을 발산하거든. 그 결과 옷이 마구 찢겨 나가는 거고. 가끔 내 그림 보고 옷 찢어지는 애들이 있어서 잘 알아.”

“내 노래랑 음악도!”

“그, 그렇군요.”

회화의 신에 이은 음악의 신의 대답에 에이젤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다지 와닿는 설명은 아니었지만, 어찌 되었든 말은 되는 것 같았다.

에이젤은 잠시 만찬회 날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회화의 신 말대로 영혼이 뒤흔들릴 만치 감동한 탓인지 육회를 먹기 전후의 기억이 불분명했다.

그냥 먹고, 뭔가 황홀경에 빠졌다가 정신 차려 보니 아침이었다고 할까.

‘그래도 다행이야.’

나만 옷이 찢어진 게 아니라 다들 공평하게 찢어져서. 혼자만 옷이 찢어졌으면 진짜 민망했을 텐데.

다만 그래도 걱정되는 게 하나 있는 에이젤이었다.

“루시엘 선배, 괜찮아요?”

“응, 자동 수복 기능이 있다고 용사님이 그러셨어.”

다른 이들과 달리 루시엘이 만찬회 날에 입은 옷은 특별했으니까.

어머님의 드레스.

하지만 다행히도 자동 수복 기능이 있었다. 당분간은 입지 못할 터였지만, 그래도 복구만 된다면 만족이었다.

“진짜 대단한 옷이네요.”

“응, 정말 하나하나가 대단해.”

루시엘은 기분 좋게 답하며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지금 입고 있는 옷도 어머님의 옷상자에서 나온 옷이었다.

“하아, 부럽다.”

에이젤도 자기 옷을 돌아보며 말했다. 루시엘처럼 특별한 옷이 아닌, 그냥 평범하고 흔한 천사복이었다.

“미, 미안.”

“에이, 선배가 미안할 게 뭐 있어요.”

히히, 하고 어깨를 으쓱인 에이젤은 진짜로 미안해하기 시작한 루시엘의 관심을 돌리고자 물었다.

“용사님은요?”

에이젤의 물음에 다른 이들 역시 새삼 루시엘을 돌아보았다. 일행 중 이 자리에 없는 건 천호뿐이었다.

어찌 보면 어제의 대참사(?)를 야기한 장본인.

모두의 물음에 루시엘은 빙긋 웃으며 답했다.

“수련하고 계세요.”

* * *

천호는 홀로 검무를 췄다.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진일보한 여명의 검을 처음부터 끝까지 살핌으로써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다른 하나는 미트라의 형태를 결정하기 위해.

어젯밤, 요리의 신의 신물인 식극의 식칼을 흡수한 미트라는 레온과 함께하던 시절의 힘을 온전히 되찾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만검만화 스킬을 획득한 미트라는 이제 ‘검’이기만 하면 뭐든 원하는 형태로 변신이 가능했다.

요리할 때는 식칼.

다림질할 때는 폭이 넓고 큰 언월도.

샤워할 때는 딱 좋은 크기의 단검.

세탁할 때는 가늘고 긴, 그러면서 뭉툭한 장검.

이제는 정말 만능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미트라였다.

하지만 만검만화의 진정한 활용법은 따로 있었다.

천호에게 맞는 최적의 검.

길이, 폭, 무게, 무게중심의 위치, 심지어는 칼날의 날카로움까지.

미트라는 이제 오직 천호만을 위한 검으로 거듭나는 것이 가능했다.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은 용사의 검을 펼칠 때 예장용이라 생각될 정도로 가늘고 긴, 검신이 2미터가 훌쩍 넘는 검을 사용했다.

레온은 검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거대한, 기둥에 가까운 대검을 사용했다.

양쪽 모두 각각의 사용자에게 완전히 특화된 검이었다.

천호의 검무 동작이 바뀔 때마다 미트라 역시 스스로를 변화시켰다.

능력 공유를 통해 감각 역시 어느 정도 공유가 가능한 천호와 미트라인 터라, 이렇다 할 대화 없이도 최적의 상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었다.

검무를 추기 시작한 지 한 시간여.

천호의 전신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을 때.

천호가 돌연 검무를 멈추었다.

위에서 아래로, 강렬한 내려베기를 펼친 직후, 지금까지의 격렬함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완전히 정지했다.

“후우?.”

천호는 긴 숨을 토하며 자신의 손끝을, 미트라의 검 끝을 바라보았다.

형태가 결정되었다.

장검.

검신의 폭이 제법 넓었다. 그 길이도 평범한 장검 이상이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대검.

그중에서도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더들이 즐겨 사용했다는 클레이모어.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이 사용하던 검과 레온이 사용하던 검의 중간 단계.

하지만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었다. 천호의 기억 속에는 지금의 미트라와 흡사한 검이 하나 들어 있었다.

용검龍劍 크샤트리아.

파이엔 최강의 검이자, 아버지의 검.

비슷한 형태였다.

길이나 검신의 폭이 조금 다를지는 몰라도, 전체적인 형태가 닮아 있었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추종의 결과는 아니었다.

단지 천호 자신과 아버지의 기호가 닮은 것뿐이었다.

말 그대로, 아버지와 아들이었으니까.

[그대여, 마음에 드는가?]

미트라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살짝 불안한 그 목소리에 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미트라. 마치 미트라가 제 몸의 일부인 것 같아요.”

[그, 그런가? 흠흠, 잘되었구나.]

자기 몸의 일부라니.

레온 때도 비슷한 말을 들었지만, 그때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괜히 민망해진 미트라였다.

[음, 아무튼 그럼 앞으로는 전투 시에 지금의 형태를 취하겠다.]

“네, 미트라. 부탁할게요.”

[그래.]

“전투 외에도요.”

[그래.]

천호가 일부러 조금은 짓궂게 덧붙였지만 미트라는 순순히 답했다.

살짝 놀란 천호가 미트라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 식칼 같은 것도 괜찮아요?”

[괜찮다. 그대를 위해서라면.]

미트라의 대답에 이번에는 천호가 민망해졌다. 능력 공유 덕에 감정도 어느 정도 공유가 되는 터라 진심이란 걸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흠, 흠흠.”

[음, 음음.]

용사와 성검이 서로 민망해할 때였다.

[아, 아무튼! 오늘 밤에는 꼭 정신세계에 들어오는 거다. 알겠나?]

미트라가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인 듯 제법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가서는 진짜 본심이 되었지만.

사실 약속대로라면 어젯밤, 만찬회가 끝난 뒤 정신세계에 들어왔어야 하는 천호였지만 육회 시식 덕분에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자기가 만든 음식을 먹고 맛에 취해 의식이 혼탁해지다니.

쓰게 웃은 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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