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130화 (130/211)

“크아오!”

대기를 뒤흔드는 포효였다. 천호는 루시엘의 허리를 감듯이 안으며 급히 돌아섰다. 나머지 일행 역시 전투태세를 취했다.

거대한 마물이었다.

티라노사우르스를 닮은, 공룡같이 생긴 마물이 땅을 뒤흔들며 이쪽을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다.

천호는 놈을 봄과 동시에 놈의 배경 역시 보았다.

등 뒤.

성벽이 아니었다. 열대우림 같은 곳이 보였다.

어떻게 된 것일까. 13층의 구조는 12층과 다른 것일까?

[온다!]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루시엘은 뒤로 물러서며 날개를 펼쳤고, 천호 역시 비행의 신의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미?고!”

머리 위에서 우렁찬 포효가 터졌다. 마물의 포효를 짓눌러 버린 그것이 땅을 덮었고, 천호 일행은 마치 중력이 두 배가 된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천호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포효를 좇아 눈동자를 굴렸고, 이내 발견할 수 있었다.

하늘 위, 태양을 등지며 강하하는 자.

“우오오오오오!”

포효하며 검을 휘둘렀다.

아니, 평범한 검이 아니었다. 무척이나 거대한 식칼이었다.

식칼이 마물의 등을 찔렀다. 단순한 찌르기가 아닌, 정확히 노린 일격이었는지 그 일격으로 마물은 침묵했다. 고통에 몸부림치는 대신 컥 하고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더니 그대로 옆으로 쓰러졌다. 즉사한 모양이었다.

천호는 숨을 멈췄다. 쓰러진 마물 위에 안착한 자를 경계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로 그때였다.

“반가워!”

“얏호! 오랜만이야!”

회화의 신과 음악의 신이 밝게 웃으며 마물 위에 안착한 자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그런 두 여신의 반응에 천호는 이를 악물었다.

‘아, 안 돼!’

거대한 식칼.

두 여신의 반응.

그것이 의미하는 바.

마물 위에 안착한 자가 호쾌한 사나이의 미소를 그렸다.

레온에 버금가는 강건하고 거대한 육신. 터질 것 같은 근육.

미트라가 저도 모르게 꿀꺽 침을 삼킨 그때, 관우처럼 길고 아름다운 수염을 기른 자가 하얀 모자를 고쳐 썼다. 마찬가지로 하얀 옷이 근육의 움직임을 따라 꿈틀꿈틀했다.

백전연마의 노장.

복장만 아니라면 격투의 신 혹은 전투의 신이라 생각될 것 같은 자가 천호를 보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네가 용사구나.”

목소리에 반가움이 가득했다.

때문에 천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선 자.

1층에서부터 천호에게 관심을 가졌던, 미궁 세계에서 처음으로 알게 된 신.

“반갑다. 나는 요리의 신이다.”

하늘색 머리칼과 하늘색 눈동자.

긴 생머리 대신 긴 수염.

“음.”

천호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고, 미트라는 기분 좋은 미소를 그렸다.

* * *

[엉큼한 Lv7의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박천호입니다. 이쪽은 제 담당 천사 루시엘이고, 성검 미트라입니다.”

“그래, 다들 반갑다.”

요리의 신이 흐뭇한 얼굴로 천호와 루시엘을 내려다보았다.

거리를 두고 봐도 컸는데, 바로 앞에서 보니 정말로 큰 그였다.

천호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레온보다 다시 머리 하나가 더 크니 루시엘 입장에서는 거의 거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완전 미트라 취향이네.’

터질 것 같은 근육이 꿈틀꿈틀하는 짐승남.

어째서 저런 호완이 요리의 신인 것일까. 아름다운 여신이 요리의 신이면 안 되는 걸까? 아니, 그쪽이 더 어울리지 않나?

하지만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납득이 빠른 천호였다. 그냥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그래도 가슴이 아프구나.’

1층에서 처음 메시지를 받은 이후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이미지가 있었으니까.

안녕, 요리의 신.

마음속의 여신이여.

천호가 홀로 작별하는 동안 진짜 요리의 신은 관우처럼 긴 수염을 쓰다듬더니 자신의 등 뒤를, 정확히는 쓰러져 꼼짝도 않는 거대한 마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와일드 티라노이드.”

일행의 시선이 마물에게 향했다. 몸길이가 15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거대한 마물이었다.

요리의 신이 설명을 이었다.

“13층에서 자주 출몰하는 마물이지. 이전까지는 그저 격퇴의 대상이었지만··· 요즘엔 사냥감이 되었다.”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마물을 요리한다. 식량으로 삼는다.

요리의 신이 솥뚜껑처럼 거대한 손을 천호의 어깨 위에 올렸다.

“용사여, 그대의 실험 정신과 도전 정신을 나는 무척이나 높이 사고 있다. 덕분에 마물식 개발에 힘쓰게 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13층의 식량 사정 역시 좋아졌지.”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국 대미궁 안이었다. 깊이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평범한 가축이나 농작물을 기르기 어려웠다.

목욕의 신이나 음악의 신, 회화의 신처럼 전투와 무관한 신들이 대미궁 밖이 아닌 안에 위치한 이유.

저층도 아닌 중층 깊은 곳에 자리한 이유.

단순했다. 조금이라도 대미궁의 마기를 몰아내기 위함이었다. 13층에도 전투와 무관한 여러 신들이 인간들 틈에 섞여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마기를 완전히 몰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때문에 정의의 성채의 식량 사정은 조금씩, 하지만 분명히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마물식의 개발은 그런 식량 사정을 호전시킬 좋은 방안이었다.

천호는 계기가 되었다.

마물을 먹을 수 있다는 발상 자체를 제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 발상 자체는 예전에도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천호는 인식 전환에 도움을 주었다.

마물식.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먹기 꺼려지는 그것.

하지만 천사 네트워크를 통해 퍼진 천호의 이야기는 그런 인식을 누그러트렸다.

마물을 먹어도 괜찮다.

마물이 오히려 더 맛있다.

천호가 한 마물 요리를 황홀한 얼굴로 맛있게 먹는 천사들의 모습은 좋은 선전도구가 되었다.

“음악의 신, 초대장은 잘 전해 주었나?”

“응! 잘 전해 줬어. 나 잘했지?”

“나도 같이 전해 줬어!”

음악의 신이 손을 번쩍 들며 답하자 회화의 신이 질세라 똑같이 손을 들었다. 요리의 신은 그런 두 여신의 모습에 흐뭇하게 웃더니 손을 뻗어 두 사람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둘 다 잘했다.”

“음, 흠흠.”

“우리들이 누난데.”

겉모습은 반대였지만, 실제 나이는 두 여신들 쪽이 더 연상이었다.

하지만 애당초 불로인 신들에게 일이백 년 정도의 나이 차이는 무의미했다.

요리의 신은 개의치 않았고, 두 여신도 기분 좋게 요리의 신의 쓰다듬을 즐겼다. 애당초 신이다 보니 이런 식으로 머리를 쓰다듬 받을 일 자체가 드문 두 여신이었다.

요리의 신이 다시 천호를 돌아보았다.

“용사여, 만찬회는 내일 밤이다. 기대해도 좋다. 그대를 위해 최고의 요리를 준비할 터이니.”

“감사합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요리의 신이 준비한 만찬회.

천호도 내색은 크게 안 했지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아니, 이건 내일 이야기하는 것이 낫겠군.”

말하다 말고 얼버무린 요리의 신은 한 번씩 웃더니 티라노이드를 향해 걸어갔다. 한 손으로 무지막지하게 길고 커다란 꼬리를 탁 붙잡더니 어깨에 얹으며 일행을 돌아보았다.

“내일 보도록 하자!”

“아?미?고!”

“내일 봐!”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이 폴짝 뛰며 인사하자 천사들도 다급히 예를 표했고, 요리의 신은 다시 씩 웃었다. 그대로 높이 뛰어오르더니 티라노이드와 함께 저 먼 하늘로 사라졌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가는 것일까.

멍하니 바라보던 가운데 루시엘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치유의 신님 같아요.”

“네?”

“폭풍 같은 점이요.”

폭풍.

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12층에서와 마찬가지로 5급 천사가 일행을 숙소까지 안내해 주었다. 13층의 수비를 책임지는 창병의 신은 요리의 신의 만찬회 때 만나기로 하였다.

[다들 요리의 신의 만찬회에 참석하고 싶어 하는 것 같군.]

미트라의 지적은 정확했다.

애당초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이 13층까지 따라온 것도 요리의 신의 만찬회에 참석하기 위함이었으니 말이다.

“영웅분들이 모이고 계세요.”

숙소에 짐을 푼 뒤 천사 네트워크를 살펴보던 루시엘이 말했다.

중층 곳곳으로 파견 나가 있던 영웅들이 모이고 있었다. 특히 13층과 14층의 영웅들이 귀환을 서두르고 있었다.

15층에서 벌어질 신기 쟁탈전.

치유의 신은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중층에서 있었던 그 어떤 싸움보다도 큰 싸움이 머지않아 일어날 터였다.

그 전에 충분한 준비를 해야 했다.

마키나는 간이 대장간을 만든 뒤 천호의 용갑주를 점검하기 시작했다. 지난번 사흉신과의 전투에서 레온의 무구들이 제 특성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용갑주와 레온의 무구들이 진정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추가 공정이 필요했다.

천사 3인방은 격의 상승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 수련에 힘썼다. 중도에 이탈한 일행과 달리 어떻게든 끝까지 천호와, 그리고 루시엘과 함께하고 있은 세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이를 악물고 수련해야만 했다.

사스치엘과 엘리엘도 놀고만 있지 않았기에 일행은 짐을 풀자마자 맹훈련에 들어간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그건 천호도 예외가 아니었다.

바이슈라바나의 장.

참원.

드리타라슈트라의 장.

하늘 꿰뚫기, 하늘 받치기.

비루다카의 장.

광원의 스칸다.

위루파크샤의 장.

창염.

크리스가 시범을 펼치면 천호가 그것을 보았다. 흉내 내기로 시작해 제대로 된 호세사천왕을 펼쳤다.

물론 모든 기술을 단번에 익힌 것은 아니었다.

바이슈라바나의 장- 비사문천의 무예는 꽤나 쉽게 익히는 천호였지만, 무공이라기보다는 주술이나 마법에 가까운 위루파크샤의 장은 진도가 무척 느렸다.

드리타라슈트라의 장과 비루다카의 장은 중간 정도.

하지만 굳이 비교를 하자면 드리타라슈트라의 장 쪽이 좀 더 습득이 수월했다.

아무래도 비루다카의 장의 새 기술인 광원의 스칸다는 보법을 일단 몸에 익혀야 했기 때문이다.

드리타라슈트라의 장.

하늘 꿰뚫기와 하늘 받치기.

이름 그대로 하늘을 꿰뚫는 일권과 하늘을 받쳐 밀어낼 정도로 강대한 일장이었다.

비루다카의 장.

광원의 스칸다.

신속의 스칸다를 능가하는 이동기.

온전히 습득할 수 있다면 일정 범위 내에서는 거의 공간이동이나 다름없는 기동력을 보유할 수 있었다.

위루파크샤의 장.

창염.

아버지께서 마법 그까짓 거 없어도 된다며 자주 보여 주시던 삼매진화.

사이한 것을 불태우는 정화의 불길.

천호와 수련을 시작한 지 반나절가량이 되었을 때 크리스는 최대한 동요를 감추고 말했다.

“음, 오늘은 이쯤 할까? 너무 서두르지 말자.”

천호가 배우는 게 너무 빨랐다. 물론 배우는 게 빠른 건 좋은 일이었다. 천호가 강해지는 것도 흐뭇한 일이었고.

하지만 이대로라면 일주일도 안 되어서 밑천이 드러날 것 같았다.

‘아직 첫사랑 이야기도 못 했는데!’

물론 밑천을 드러낼 수 없다는 사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천호가 익히는 게 아무리 빠르다고는 해도 소화에는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호세사천왕 정도의 절정 무공은 허투루 익힐 만한 것이 아니었다. 기술을 하나하나 곱씹을 시간이 필요했다.

“정말 감사해요.”

천호가 새삼 웃으며 인사하자 크리스는 헛기침을 토하다 아주 작게 웃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이상하게 천호가 마음에 드는 크리스였다.

남자로서 마음에 든다기보다는 뭐랄까, 이전에 떠올린 것처럼 눈에도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런 조카나 자식처럼 보인다고 해야 할까?

“흠, 당연한 일이란다.”

크리스가 감추지 못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천호는 마주 웃으며 생각했다.

‘아버지 이야기가 잘못된 부분도 있네.’

저렇게 솔직하고 착하고 잘 웃는 분인데, 왜 그런 식으로 묘사했을까.

딱딱하고 철벽치고? 소위 말하는 츤데레의 정석.

어찌 되었든 수련을 끝마친 천호는 깨끗이 씻은 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점심.

요리의 신의 만찬회가 약속된 시간.

천호는 멍한 얼굴로 루시엘을 바라보았다. 그리할 수밖에 없었다.

“용사님, 어, 어때요?”

수줍게 묻는 루시엘의 뺨은 장밋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어머니의 옷상자 안에 들어 있던 예복.

간소화된 웨딩드레스를 연상시키는 하얀 드레스를 차려입은 루시엘의 모습은 천호의 포커페이스를 무너트리기에 충분했다.

예쁘다. 아니, 사랑스럽다.

천호의 넋 나간 표정을 확인한 에이젤은 루시엘에게 엄지를 세웠고, 에이젤과 더불어 화장을 담당한 라구엘은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헤헤헤.”

루시엘도 눈이 있으니 천호의 감상이 어떤지는 굳이 말로 듣지 않아도 알았다. 치맛단을 살짝 붙잡고 괜히 한 바퀴 돌아보았다.

천사의 고리 아래 분홍색 머리칼이 바람에 흩날렸고, 치맛단도 촤르륵 바람을 탔다.

천사.

진짜 천사.

정신세계 속에서 똑같이 예복을 갖춰 입은 미트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루시엘은 진짜 천사였다.

[나, 나중에 정신세계에 들어와라. 오늘 밤이다, 오늘 밤. 알겠나?]

“네, 미트라.”

미트라에게 답한 덕분에 정신을 차린 천호는 새삼 심호흡을 했다.

눈앞의 천사가 자신의 담당 천사였다.

매일 같이 밥 먹고 잠도 자고, 아무튼 늘 함께하는.

[왜 그러나, 그대여.]

“아뇨, 새삼 제가 대견해서.”

번뇌력과 엉큼함에 지지 않는 인내심과 순박함이여.

“가요, 루시엘.”

“네, 용사님.”

루시엘이 자연스럽게 천호의 한쪽 팔에 팔짱을 끼었고, 천사 3인방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구경하던 크리스도 한껏 풀어진 얼굴이었다.

[음.]

미트라 홀로 앓는 소리를 내는 가운데 일행은 숙소를 나섰다.

* * *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 루실리아와 실리키엘과 중도에 합류한 일행은 13층 중앙에 위치한 요리의 신의 만찬회장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마주친 이들이 하나같이 루시엘을 돌아보며 감탄하자 절로 목에 힘이 들어가는 천호였다.

“완전 여신이다, 얘.”

“천사도 신은 신이니까.”

언제나처럼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이 재잘거렸다. 그녀들은 의외로 별로 꾸미지 않았는데, 이유는 단순했다.

“많이 먹어야 하잖아.”

“맞아, 먹는 게 더 중요해.”

요리의 신의 만찬회는 꾸미고 멋을 낼 자리가 아니었다.

한 접시라도, 아니, 한 수저라도 더 먹는 게 이득인 장소였다.

그리고 이러한 생각은 창병의 신 또한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기병의 신의 언니인 창병의 신 또한 무척이나 펑퍼짐한, 편안함 그 자체로 보이는 천이 넉넉한 옷을 입고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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