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정말 싫으면…….”
[아니다, 싫진 않다. 어차피 전력 강화를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고 말이다.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마음 써 줘서 고맙다.]
빠르게 말한 미트라는 루시엘을 흉내 내 활짝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읏.’
천호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을 닮아 고결한 느낌을 주는 미트라의 외모였다. 잘 웃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의 그녀가 지금처럼 활짝 웃으니 그 효과가 굉장했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면 기병의 신의 미소를 봤을 때와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천호는 현자의 시간을 사용해 머리를 맑게 한 뒤 마음을 다잡았다. 꼬맹이 미트라 때와 달리 지금의 소녀 미트라는 솔직히 너무 예뻐서 조금만 방심하면 주도권(?)을 빼앗길 것 같았다.
“좋아요, 시작하죠.”
[그래. 준비되었다.]
미트라가 자기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말했다. 역시 외모에서 풍기는 분위기와 하는 행동이 영 다른 그녀였다.
천호는 새삼 다시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일단 분신부터 가도록 하죠.”
[음, 좋다. 어떻게 될지 나도 궁금하군.]
정신세계 안에도 분신이 생길 것인가.
생긴다면 정말로 개별적인 자아를 가진 분신이 생겨나는 것일까.
“시작하죠.”
[알겠다. 분신!]
미트라가 소리 내어 외치자 순간 웃음이 새어 나온 천호였지만 꾹 참고 지켜보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이었다. 미트라 바로 옆에 또 하나의 미트라가? 천호가 잘 아는 미트라가 나타났다.
[>_
이모티콘 얼굴을 가진 졸라맨 미트라.
그것도 꼬맹이 버전이었다.
미트라는 당황해서 눈을 껌벅였고, 천호는 직감적으로 지금 같은 일이 일어난 이유를 이해했다.
‘레벨이 낮아.’
그랬다. 이제 겨우 1레벨이었다. 처음부터 완벽한 분신을 만들게 해 줄 리가 없었다.
졸라맨 미트라가 소녀 미트라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고 친근함을 표했다. 이모티콘 얼굴 덕에 감정을 알기 쉬웠다.
[^▽^]
처음엔 당황하던 미트라였지만 이내 졸라맨 미트라를 마주 안아 주었다.
[으음, 나쁘지 않군.]
분신을 마주하면 기분 나쁘거나 하지 않을까 했는데, 일단 외양이 너무 달라서 그런지 딱히 거부감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았다.
방실방실 웃는 졸라맨 미트라를 안아 주던 미트라는 돌연 입술을 벌렸다. 졸라맨 미트라에 대해 알아낸 것이 있어서였다.
[아무래도 분신은 나와 별개로- 그러니까 분신으로서 사고하는 것 같다.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지만 자신이 분신이라는 것은 인식하고 있는 상태 말이다.]
“좋은 소식이네요.”
생각했던 경우의 수 중에서 가장 유용한 형태였다.
미트라가 계속해서 말했다.
[레벨이 높아지면 보다 정밀한 형태의? 그러니까 본체인 나에 가까운 분신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 같다. 지금 내 눈앞의 분신은… 많이 약한 상태다. 히트 대거를 처음 흡수했을 때 정도의 강함인 것 같군.]
이러니저러니 해도 분신은 결국 분신이었다.
말하는 것으로 보아 미트라와 완전히 동일한 능력을 갖춘 분신까지는 만들지 못하는 것 같았다.
“분신의 숫자는요?”
[아직은 하나가 한계인 것 같다. 하지만 이것도 레벨이 높아지면 늘어날 것 같다.]
천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스킬을 상징하는 그림에 칼이 여러 자루 그려져 있었던 터라 방금 질문은 확인에 가까웠다.
[음, 분신은 나랑 성격이 좀 다른 것 같군.]
“똑같은데요, 뭘. 아, 조금 더 솔직하려나.”
미트라의 허리에 매달려 친근함을 잔뜩 표하던 졸라맨 미트라는 밝은 미소를 그리다 사라졌다.
소멸이라기보다는, 돌아간다는 느낌이었다. 다음에 다시 분신을 불러내도 그녀가 나온다는 느낌이랄까.
분신 검증을 마친 미트라는 안도의 숨을 토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느낌이 좋은 스킬이었다.
[유용할 것 같구나.]
“그러게요.”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활용방안을 떠올린 천호는 씩 웃었다. 미트라의 말처럼 분신이 유용해서만이 아니었다.
“그럼 이제 더 중요한 걸 시작해 보죠.”
[으으음.]
미트라가 어깨를 움츠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마검승화.
천호가 달래듯 말했다.
“마검화처럼, 어쩌면 별거 아닐 수도 있어요.”
어둠의 힘을 이끌어 내 마검으로 변신한다는 마검화.
하지만 레벨이 낮기 때문인지 이것도 사실 그리 큰 변화는 없었다. 외적으로는 마검 스킬이 좀 강해진 게 다였고, 내적으로는 정신세계 속 미트라의 전신에 옅고 검은 아우라가 생긴 게 다였으니 말이다.
[그래, 아직 레벨1이기도 하니 말이다.]
마음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 낸 미트라는 자세를 바로한 뒤 다시 한 번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준비되었다.]
“시작하죠.”
마검승화.
미트라는 눈을 감고 스킬을 발동시켰다. 순간 검은 기류가 미트라를 에워싸는가 싶더니 칠흑이 터졌다. 새카만 아우라가 미트라를 뒤덮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몇 초.
다시 한 번 칠흑이 터졌다. 새카만 아우라를 전신에 두른 미트라가 모습을 드러냈다.
달라졌다.
마검화 때와 달리 외모가 달라진 미트라였다.
십 대 중후반 소녀인 것은 같았다.
하지만 옷차림을 비롯해 많은 것들이 변해 있었다.
일단 피부색이 달랐다.
본래도 하얀 미트라의 피부였지만, 지금은 더 하얗게 변해 차가운 느낌마저 주었다.
인상도 보다 날카로웠고, 스모키 화장을 한 눈 덕분에 조금이지만 퇴폐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붉은 기가 감돌아 적발에 가까운 흑발은 무척이나 길어 엉덩이 근처까지 내려왔다.
“미트라?”
천호가 조심스럽게 부르자 마검 미트라가 천천히 눈을 떴다. 이내 평소의 미트라에게서는 상상도 못 할 요사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안녕.]
그저 미소 지었을 뿐인데 요염함이 뚝뚝 흘러넘치는 것 같았다.
천호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자 마검 미트라가 어깨를 흔들며 웃었다.
[나는 마검 미트라다. 고지식한 모범생 성검하고는 달라. 훨씬 우월한 존재지.]
마검 미트라는 아랫입술을 혀로 살짝 핥더니 보란 듯이 두 팔을 벌렸다.
[차이점을 알겠지?]
“어… 그렇긴 하지만… 혹시 직접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흥, 뭐, 어쩔 수 없지.]
코웃음을 친 마검 미트라는 스스로를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나는 성검처럼 촌스럽지 않아. 옷도 이렇게 멋지고 야하게 차려입었지.]
“멋지고 야하게요?”
[그, 그래. 보면 알지 않나.]
말을 살짝 더듬은 마검 미트라는 자기 옷 여기저기를 살짝 잡아 흔들며 말했다.
[일단 치마를 입었다.]
“성검 미트라도 요즘엔 치마 입어요.”
[걔랑은 달라! 봐! 걔보다 3센티미터나 치마를 올려 입었다고!]
듣고 보니 치마가 좀 짧아진 것 같기는 했다.
[그, 그리고 앞섶 단추도 세 개나 풀었다고! 성검 미트라는 답답하게 꽉 채우고 다니는데 말이야.]
정말 그랬다. 잘 보니 가슴골도 조금 보였다.
[뭐, 뭘 보는 거냐.]
“아니, 잘 보라면서요.”
[그, 그러긴 했다만.]
얼굴을 붉힌 마검 미트라는 손으로 앞섶을 슬쩍 가리더니 치맛단도 괜히 아래쪽으로 끌었다. 새삼 부끄러워진 모양이었다.
[그, 그리고! 나는 성검과 달리 욕도 잘한다.]
“욕이요?”
[그래, 욕이라고는 한 마디도 못 하는 먹통 성검하고는 다르단 이 말씀이지. 잘 들어 봐라.]
심호흡을 크게 한 마검 미트라는 땅바닥에 무척이나 소심하게 침을 뱉더니 천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이 바보 멍청이 해삼 말미… 미, 미안. 이건 좀 너무 심한 것 같네. 사과할게.]
“아니, 괜찮은데. 계속해 봐요.”
[계, 계속?]
“네, 더 심한 욕도 되니까.”
천호의 요구에 마검 미트라는 끙끙 앓는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뭔가 더 심한 욕을 떠올리기는 한 것 같은데, 입 밖에 내는 것이 꺼려지는 모양이었다.
[으으, 으… 너, 너는 변…….]
“음, 욕은 그쯤 하도록 하죠.”
뭔가 욕이 아니라 사실 확인인 기분도 살짝 들었으니까.
어찌 되었든 천호의 허락(?)이 떨어지자 마검 미트라는 안도의 숨을 토했다. 조금 지친 듯 어깨까지 늘어트린 뒤 말했다.
[자, 봤겠지? 내가 성검이랑 얼마나 다른지.]
“어, 예. 뭐… 약간 다르네요.”
[야, 약간?]
“네, 약간.”
천호가 단언하자 마검 미트라는 어깨를 움츠리며 의기소침한 표정이 되었다. 원판 불변이라더니, 마검이 되어도 미트라는 미트라였다.
천호는 간신히 웃음을 참은 뒤 제법 진지하게 말했다.
“그래도 다르긴 다르네요.”
[그, 그렇지? 그럴 줄 알았어. 성검이랑은 다르단 말이야. 그런데 어디가 그렇게 다른데?]
마검 미트라가 반색하며 묻자 천호는 품평하듯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더 귀엽네요.”
[그, 그래? 더 귀여워? 헤헤…….]
뺨을 긁적이며 좋아하던 마검 미트라는 순간 움찔하더니 얼굴을 확 붉혔다. 놀림 당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이익! 아, 아직 레벨이 낮아서 그래! 마검승화 레벨이 올라가면 훨씬 더 많이 변할 거다. 요염하고 섹시하고, 아무튼 엉큼한 네가 홀딱 반할 정도로 멋진 여자로 말이야!]
“아, 예.”
[히잉.]
울상을 지은 마검 미트라는 잇소리를 내더니 천호에게 삿대질을 하며 선언했다.
[나중에, 나중에 복수해 줄 거다!]
“기대하지 않으면서 기대하죠.”
[흑흑, 두고 보자.]
거기까지였다. 마검 미트라는 새카만 아우라로 스스로를 뒤덮었다.
그리고 잠시 후.
새카만 아우라가 성스러운 황금빛 아우라로 바뀐 뒤.
빛이 걷힌 자리에 미트라가 쪼그려 앉아 있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있었는데, 드러난 양쪽 귀가 빨갛다 못 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내가 아니다. 아무튼 내가 아니다. 아니란 말이다.]
말하는 것을 보니 마검 미트라도 미트라가 맞는 모양이었다.
“뭐… 기대한 것과는 좀 달랐지만 나쁘진 않네요.”
레벨이 올라가면 마검 미트라 말마따나 좀 더 많이 변할 것도 같고.
천호의 말에 미트라는 우물쭈물하더니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그대여.]
“네, 미트라.”
[그…….]
“그?”
[정말인가?]
“뭐가요?”
[마검 쪽이 더 귀…….]
“귀?”
[이익!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다 알지 않나! 그대는 심술쟁이다!]
미트라가 두 손을 치우고 성을 내자 천호는 눈을 꽉 감았다. 웃음을 참는 것은 포기한 채 미트라에게 말했다.
“미트라가 훨씬 더 귀여워요.”
천호의 말에 미트라는 입술을 깨문 뒤 다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여전히 새빨간 귀가 움찔움찔하는데 묘하게 기뻐 보였다. 잘 들어 보니 헤헤거리는 소리도 들리는 것 같고.
“아무튼 미트라, 검증을 계속해 보죠.”
[계속?]
미트라가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분신과 마검승화 모두 해 보지 않았던가.
“아니, 성능 실험을 해 봐야죠. 현실에서는 분신이랑 마검승화가 어떻게 적용되는지도 봐야 하고.”
사실 정신세계에서 어떻게 변하는지 여부는 직접적인 전투 능력과는 상관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이건 미트라와는 좀 관련이 없는 이야기였지만, 각성하기 시작한 아버지의 피 역시 정신세계에서 점검해 볼 필요가 있었다.
“자, 일단 마검승화부터 다시 해 보죠.”
두고 보자던 마검도 다시 보고.
천호의 요구에 미트라는 미적거리긴 했지만 언제나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몇 분 뒤.
천호를 다시 마주한 마검 미트라는 저도 모르게 외치고 말았다.
[으앙!]
다음 날 아침.
조금 늦게 잠에서 깬 천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분신과 마검승화의 성능이 꽤나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일단 분신의 경우 현실에서도 미트라가 한 자루 더 생겼다. 물론 정신세계 속에서 졸라맨 미트라가 나왔듯이 그 위력이나 강도는 물론이고 생김새까지 모두 작금의 미트라에 미치지 못했지만 그렇다 해도 쓸모는 충분했다.
‘특히 투척에 좋아.’
천호의 특기이자 주요 전술 가운데 하나인 단검 투척.
분신의 성능이 미트라에 미치지 못하는 건 사실이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평범한 단검보다는 훨씬 더 뛰어났다. 특히 우레같이 마력을 실어 던질 경우에는 위력 차이가 상당한 수준이었다.
물론 분신을 만들기 위해 소진되는 마력도 무시할 수 없으니 마구 난사할 수는 없었지만, 어찌 되었든 강력한 한 수를 갖추게 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잠시 오랜만에 본 졸라맨 미트라의 웃는 표정을 떠올린 천호는 피식 웃으며 미트라의 황금색 보석을 쓰다듬었다.
자연스럽게 마검 미트라의 얼굴이 떠올랐다.
스모키 화장을 하고, 열심히 오만한 척, 도도한 척, 요염한 척하지만 그래도 본질까지는 어찌하지 못한 그녀.
미트라 흑화 버전이라기보다는 뭐랄까, 불량소녀 버전에 가까운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마지막에는 결국 미트라답게 으앙 하기도 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