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126화 (126/211)

[그 구체적이면서도 이상한 비유는 대체 무엇인가.]

미트라가 작게 툴툴거리는 동안 천호는 기병의 신과 악수를 나누었다. 기병의 신이 계속해서 말했다.

“잠시 쉬고 있게. 전투를 마무리 지어야 할 터이니. 자세한 이야기는 승전 연회 때 하도록 함세.”

찡긋 윙크까지 한 기병의 신은 그대로 돌아서서는 잠시 숨을 돌린 군마 위에 올랐다. 보무도 당당하게 날아오르는 그 모습이 무척이나 멋있었다.

“용사님, 전 부상병들을 치료하러 갈게요.”

“네, 루시엘. 부탁할게요.”

역시 천사다운 천사 루시엘이었다. 그녀는 곧장 성벽 위로 날아가 치유의 검을 사방에 뿌려 부상병들을 치유하기 시작했다.

기병의 신 말대로 전투가 끝나 가고 있었다.

승전.

그것도 사흉신 가운데 둘을 꺾은 대승.

덕분인지 얻은 것들도 많은 전투였다.

[이것저것 정리할 게 좀 많겠군.]

“그러게요.”

당장 미트라의 분신과 마검승화도 검증해야 했으니까.

“밤이 무척 기대되네요.”

천호의 말에 미트라는 아주 작게 끙끙거렸다. 어쩐지 몸을 비비 꼬고 있는 것 같은 소리였다.

습관처럼 황금색 보석을 쓰다듬은 천호는 다시 시선을 성벽 쪽으로 돌렸다.

미트라의 말대로 정리할 것들이 많았다.

분신과 마검승화 말고도 이번 전투로 얻은 것들이 많았으니까.

호세사천왕.

깨어나기 시작한 아버지의 피.

그리고 아버지의 옛 동료 크리스 폰 크리사오르.

정말로 밤이 기대되는 천호였다.

* * *

“정의의 성채를 위하여!”

“위하여!”

“위하여!”

전투가 끝나고 해 질 무렵이 되자 기병의 신은 앞뒤 가릴 것 없이 승전 연회를 열었다.

사흉신에 의해 파괴된 도시 중심부의 복구는 물론이고 해야 할 일이 태산처럼 쌓여 있었지만, 승전의 밤에는 승전을 축하해야만 했다.

“하아, 아직도 팔에 힘이 안 들어가.”

“먹고 싶은 게 많은데 손이 안 움직여.”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은 나란히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중얼거렸다. 엄살이 아닌지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하는 그녀들이었다.

승전 연회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화려한 궁전에서 펼쳐지는 연회가 아닌, 연병장에서 펼쳐진 연회였기에 마치 길거리 축제 같았다.

연병장이 내려다보이는 단상 위에 선 기병의 신은 흐뭇한 미소를 짓더니 이내 단상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천호에게 손을 뻗었다.

“올라와라. 그대를 소개할 터이니.”

오늘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역시 천호였다.

물론 기병의 신 자신도 못잖은 공을 세웠지만, 천호는 용사였고, 기병의 신 자신은 애당초 이 성채의 방위를 맡은 책임자였다.

“사흉신을 격퇴한 용사에게 환호를!”

기병의 신이 천호의 손을 들어 올리자 병사들과 천사들이 일제히 환호했다. 그 수가 수천을 넘어 이만에 필적하니 하늘과 땅이 뒤흔들리는 것 같았다.

천호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이 와중에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은 무리였다.

“그의 천사 루시엘에게도 박수를!”

기병의 신은 루시엘도 잊지 않았다. 병사들이 더욱 크게 환호했고, 루시엘은 얼굴을 새빨갛게 붉힌 채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정말로 고맙다. 그대 덕분에 성채를 지켜 낼 수 있었다.”

“모두가 함께한 덕분입니다.”

“그대는 마음에 드는 말만 하는군.”

기병의 신은 기분 좋게 웃은 뒤 천호를 연회장의 상석으로 손수 인도했다.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이 반쯤 눕다시피 한 자세로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정화의 신이 앉아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리고 상석에 자리한 마지막 한 사람.

아버지의 이야기 속 등장인물인 동시에 천호에게 있어서는 연예인과 같은 존재.

천호는 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한 가슴을 살짝 짓누르며 발걸음을 떼었다.

크리스 폰 크리사오르를 향해 나아갔다.

* * *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

크리스가 태연하기 위해 노력하며 약간 딱딱하게 답했다.

천호는 그런 크리스의 안색을 살피며 다시 말을 이었다.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그, 그래?”

무슨 이야기를?

그러니까 첫사랑이라는 건 무슨 이야기?

묻고 싶은 게 많은 크리스였지만 일단은 참았다.

천호는 웃으며 말했다.

“네, 아버지의 첫 동료셨으니까요.”

아름다운 엘프 여기사.

아버지의 이야기가 소설이나 만화였다면 히로인이 분명했을 터인데.

하지만 아쉽게도 아버지의 이야기 속 진히로인이 누구인지 이야기를 듣기 전부터 알고 있던 천호였다.

‘그래서 더 정이 갔지만.’

천호는 새삼 다시 작게 웃었고, 크리스는 어설픈 웃음을 흘렸다.

“저기, 그런데…….”

“네?”

“아, 아니. 그냥. 이거 맛있다고. 먹어.”

첫사랑 이야기를 꺼내는 건 역시 무리였다. 사실 꺼내도 의미 없는 일이었고.

크리스는 앞에 놓여 있던 접시를 천호 쪽으로 살짝 밀며 말을 얼버무렸다.

“아, 예. 감사합니다.”

[흐음.]

뭔가 숨기는 것 같기는 한데.

미트라가 모처럼 여자의 감을 발휘하고 있을 때였다. 루시엘이 천진난만한 얼굴로 접시를 하나 들어 올렸다.

“용사님, 이것도 드세요. 맛있어요.”

“네, 루시엘.”

웃으며 답한 천호는 일단 크리스의 접시에서 튀김 요리를 꺼내 먹었다.

크리스가 그런 천호를 가만히 바라보다 물었다.

“그… 아버지는 잘 지내시니?”

“네, 잘 지내셨어요. 최근 모습은 저도 잘 모르지만… 파이엔에 다시 가셨거든요.”

“파이엔에?”

“네, 마왕들이 다시 부활했다고…….”

“허…….”

눈을 껌벅인 크리스였지만 사실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그 남자’가 나중에는 얼마나 강해졌는지 잘 알았으니까. 더욱이 그 남자의 곁에는 ‘그 여자’도 함께하고 있었다.

도저히 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예 그 사람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크리스 자신이 아닌 그 사람이 미궁 세계에 소환되었다면.

이미 숙련된 용사인 그 사람이 벌써 미궁 세계를 구하지 않았을까?

크리스가 잠시 오랜 망상을 이어 갈 때였다.

그 사람 대신이라도 되듯 나타난 그 사람의 아들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크리스 님은 미궁 세계에 오신 지 얼마나 되셨어요?”

“6년 정도 됐어. 나도 너처럼 소환되었거든. 시작할 때 등급이 3성이었나?”

“전 1성이었어요.”

“시스템이 엉망이네.”

크리스가 끌끌 혀를 차자 루시엘이 흠칫했다.

“그, 그게…….”

“농담이야. 등급 매기는 기준은 나도 아니까.”

크리스가 루시엘의 반응이 귀엽다는 듯 웃었다.

본래 이렇게까지 웃음이 헤프진 않은 크리스였지만, 이상하게 천호와 루시엘 앞에서는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으음… 그런데 그녀에게는 담당 천사가 없는 건가?]

미트라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미궁 세계에서 만난 영웅들은 저마다 담당 천사를 데리고 있었는데, 크리스는 혼자였다.

천호 역시 의아했던 점이지만 쉽게 물을 수는 없었다.

천호가 어디를 가든 항상 함께하는 루시엘이었다. 루실리아와 실리키엘의 관계도 그러했다.

영웅과 담당 천사.

항상 함께하는 둘.

“담당은 전사했어. 그 뒤로는 그냥 혼자 다니고 있고.”

크리스가 지나가듯 말했다. 천호의 눈에 잠깐이지만 어린 의아함을 읽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아냐, 옛날 일인걸. 네 잘못도 아니고.”

그리고 익숙한 질문이기도 하였다.

“자, 일단 한 잔 받아.”

“감사합니다.”

천호가 공손히 잔을 받자 크리스는 다시 묘한 기분을 느꼈다.

동생이라 하기는 뭐하고, 정말 조카라도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였다.

바로 그때 묘하게 대화에서 소외되고 있던 정화의 신이 입을 열었다.

“크리스,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건가? 용사와 함께 다닐 건가? 난 일단 누님 명령대로 함께할 생각이다.”

담당 천사가 없는 크리스는 홀로 대미궁 곳곳을 누비며 자유기사처럼 살고 있었다.

천호와 만난다-까지만 생각했지 그 이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도, 이야기한 적도 없는 그녀였기에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질문이었다.

“저는… 음…… 천호 네 생각은 어떠니?”

크리스의 물음에 천호는 바로 반색하며 말했다.

“함께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사실… 크리스 님께 배우고 싶은 것도 있고요.”

“배우고 싶은 거?”

“호세사천왕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 사람의 무공 호세사천왕.

크리스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이미 할 줄 알지 않아?”

“그… 기초밖에 모릅니다.”

“참원 썼잖아.”

“그건 크리스 님이 하시는 걸 보고…….”

“내가 쓰는 거 보고 흉내 내서 썼다고?”

“예.”

천호의 대답에 크리스는 잠시 말을 멈췄고, 멍한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이내 헛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네 아버지랑 똑같구나.”

“네?”

“뭐, 좋아. 애당초 너희 아버지에게 배운 거니까. 네게 돌려주는 게 이치에도 맞겠지.”

“감사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할게.”

“네, 크리스 님.”

“크리스는 너무 딱딱하고… 동문이니 앞으로는 사저라고 부르렴. 따지고 보면 나도 너도 네 아버지 제자인 셈이니까.”

“알겠습니다. 크리스 사저.”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서는 훨씬 더 딱딱하고 낯가림이 심한 사람이었는데, 현실의 크리스는 훨씬 더 다정다감한 성격인 것 같았다.

“자, 한 잔 더 받고.”

“이번에는 제가 따라 드릴게요.”

“그래.”

“용사님, 저도.”

술잔이 오갔고, 연회는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다.

그리고 자정을 지나 새벽이 가까울 시간.

“용사님…….”

뺨을 장밋빛으로 물들인 채 루시엘이 잠꼬대를 했고, 그녀를 침대에 눕힌 천호는 작게 웃은 뒤 목욕의 신의 욕조에 몸을 담갔다.

하루에 한 번은 목욕을 하기로 목욕의 신과 약속을 했으니까.

더욱이 내일로 미루기 싫은 일이 있었으니까.

[으으음. 그렇게 보고 싶나?]

“그렇게 보고 싶어요.”

[우으.]

끙끙 앓는 소리를 내는 미트라였지만, 역시나 거부하지는 않았다.

천호에게 있어 호세사천왕만큼이나 중요한 것.

분신과 마검승화.

천호는 눈을 감았다.

정신세계 속에서 미트라를 마주하였다.

* * *

[히든 퀘스트 ‘성벽 수호’를 완수했습니다.]

[선신들의 조력자 Lv2가 되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은 고고한 아름다움의 소유자였다.

이지적인 눈빛과 한 자루 검과 같이 날카로우면서도 단정한 자태.

치유의 신이 여왕같이 우아하다면,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은 성녀처럼 고결했다.

절벽 위에 핀 꽃과 같이 그저 멀리서 바라만 봐야 하는, 결코 가까이 다가설 수 없는 구름 위의 존재.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이 그러했으니, 눈앞의 십 대 중후반 소녀도 그러했다.

소녀가 자라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이 될 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역시 미성숙한 소녀라 그런 것인지, 눈앞의 소녀는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과 조금?아니, 꽤나 분위기가 달랐다. 고결한 아름다움 자체는 비슷했지만 말이다.

[으음. 그대 왔는가.]

미트라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천호를 마주했다.

정신세계 속에서 천호를 보는 건 언제나 환영인 미트라였지만,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불안감은 어찌할 수 없었다.

미트라가 어깨를 움츠린 채 우물쭈물하자 천호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져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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