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123화 (123/211)

* * *

기병의 신은 말을 달리며 생각했다.

사흉신 전원이 나타났다. 더욱이 그중 둘이 성채 내부로 침입까지 하였다.

성채 밖에서의 공격은 익숙했다. 하지만 내부에서의 공격은 아니었다. 12층의 방비를 맡은 이후 처음 겪는 일이었다.

기둥에 의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방어의 취약점을 악신들이 몰라서가 아니었다.

놈들이 침투하지 않는 이유는 무척이나 단순하고 명확했다.

‘너무 무모하니까.’

기습적으로 소수의 인원이 침투하는 것은 가능했다. 하지만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침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당장 이번에도 단둘이었기에 눈에 띄지 않은 것이지, 공중 병력을 동원했다면 진즉에 눈치채고 요격을 했을 터였다.

소수 인원으로 정의의 성채 내부에 침투하면 어찌 될 것인가. 더욱이 방어선이 구축되어 있는 중심부로 파고든다면.

짚을 들고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았다. 악신들 가운데 성격 파탄자들이 많긴 했지만, 그렇다고 자살 희망자들이 넘쳐 나는 것은 아니었다.

9년.

기병의 신이 12층의 방비를 맡기 시작한 이래 보낸 세월이었다. 간혹 다른 층에서 중심부로 침투한 악신의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자신의 층에서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애당초 12층에 출몰하는 악신들 가운데 이런 일을 감행할 정도로 강한 악신이 없다시피 했고 말이다.

방심했다.

그래서 중심의 방어선이 약해졌다.

악신을 막을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기병의 신은 스스로를 질타하며 이를 악물었다. 다시 한 번 박차를 가해 군마의 속도를 높였다.

앞서 날아간 천호가 보였다. 황금 신상들이 보였고, 그들 너머에 자리한, 성난 포효를 내지르고 있는 마검 형태의 악신들이 보였다.

기병의 신은 검을 뽑아 드는 대신 등에 메고 있던 랜스를 손에 쥐었다. 이대로 질주해 정면에서부터 치고 들어갈 생각이었다.

천호가 그런 기병의 신을 보았다. 질풍처럼 질주하는 그녀의 신력이 계속해서 커져 나간 터라 절로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천호가 대미궁에 들어온 이래 처음으로 보는 전투 계열의 신이었다. 과연 그 기세가 남달랐다. 신력 자체만 놓고 본다면 음악의 신이나 회화의 신과 대동소이했지만, 그 성질이 달랐다. 찌릿찌릿한 투기가 대기를 진감시키고 있었다.

천호가 다시 정면을 보았다. 방금까지 검은 마검을 휘두르던 하얀 마검이 요란한 검명을 울리고 있었다. 동시에 검은 마검이 팔을 뻗어 하얀 마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휘두르는 자와 휘둘러지는 자가 순식간에 뒤바뀌었고, 검은 마검은 하얀 마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준비 시간은 없다시피 했다.

하얀 마검이 하늘을 찌른 그 순간 악신의 신력이 발동하였다.

빛이었다.

눈부신 수준을 넘어, 시야 전체를 가득 채우는 강한 빛이 하얀 마검으로부터 방출되었다.

천호는 급히 눈을 감았다. 빛이 너무 강해 반사적으로 비행을 정지할 지경이었다.

미처 눈을 가리지 못한 인간들과 천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대여!]

미트라가 소리쳤다. 순간적으로 시각을 상실한 것에 놀라 지른 소리가 아니었다. 비명이 아닌 경고였다.

천호도 느꼈다. 기척 감지였다. 어마어마한 빛 속에서 사흉신이- 하얀 죽음의 이드무스와 검은 죽음의 파라무스가 움직이고 있었다.

천호는 눈을 감은 채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렸다. 평면 위의 지도가 아닌, 입체적인 지도였다.

눈을 감기 전에 보았던 기병의 신의 위치를 포착했다. 기척을 통해 사흉신의 위치를 잡아냈고, 둘의 신력이 기병의 신을 향하고 있음을 간파했다.

짧은 순간에 이뤄진 일이었다. 그리고 생각이 끝남과 동시에 천호의 날개가 움직였다. 기병의 신을 향해 급히 몸을 날리며 천호가 소리쳤다.

“정면!”

일갈에 기병의 신이 고개를 들었다. 억지로 눈을 떴지만 이내 다시 감고 말았다.

빛이 여전했다.

하지만 기병의 신은 빛 속에서 이질적인 무언가를 윤곽이나마 잡아냈다. 천호와 마찬가지로 사흉신의 신력을 감지했다.

“카라스!”

기병의 신이 포효하며 신력을 방출했다. 어떤 공격이 올지 모르니 탄막을 만들듯 신력을 마구 방출한 것이었다.

쾅!

폭발음이 터졌다. 무지막지한 충격에 기병의 신과 군마가 함께 튕겨져 날아가 바닥을 뒹굴었다. 기병의 신의 신력과 사흉신의 신력이 맞닿은 순간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난 탓이었다.

천호는 계속해서 기척을 감지했다. 기병의 신을 향해 다시 날아가며 눈을 떴다.

빛이 사라져 있었다. 사흉신은 지척에 있지 않았다. 여전히 기둥 앞에 서 있는 채였다.

더 이상 마검 두 자루가 아니었다.

두 자루 마검이 하나 된 상태였다. 오른쪽은 하얀색이었고 왼손은 검정색이었다. 장장 15미터에 달하던 크기 또한 작아져 이제는 3미터 남짓으로 보였다.

그리고 그런 사흉신과 기병의 신의 사이.

공백지가 생겨났다. 마치 공간을 도려내기라도 한 것처럼, 직경이 30미터는 족히 될 폭발 범위 내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사흉신이 천호를 보았다. 기병의 신을 보았고, 양팔을 벌렸다. 다시 한 번 강한 빛이 방출되었다!

“용사님!”

루시엘이 소리쳤다. 천호는 눈을 감음과 동시에 황금 신상들에게 명령했다. 루시엘이 이쪽으로 다가오지 못하도록 그녀의 허리를 붙잡게 했다.

[온다!]

사흉신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신력의 덩어리였다.

기병의 신이 신음을 흘렸다. 폭발의 여파로 입은 부상 때문 같았다. 지금 당장은 움직이지 못할 것 같았다.

천호는 이를 악물고 태양의 마력을 발동시켰다. 몸을 피하는 대신 여명의 검을 펼쳐 보였다.

위에서 아래로.

세상을 양분할 것만 같은 세로 베기.

펼친 순간 천호는 직감했다. 사흉신의 신력을 베어 낼 수 없다. 양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명의 검으로부터 뻗어 나간 황금빛 섬광이 칠흑과 순백이 뒤섞인 신력의 덩어리와 충돌했고, 다시 한 번 어마어마한 폭발을 일으켰다.

“용사님!”

루시엘이 비명처럼 외쳤다.

천호는 잠시 동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평소라면 폭발의 기세를 타고 몸을 날렸을 터였지만 지금 등 뒤에는 기병의 신이 있었다. 그녀를 지키기 위해 자리를 고수해야 했다.

“커헉!”

천호가 숨을 토했다. 바닥이었다. 기병의 신과 함께 나뒹굴고 있었다. 앞이 보였다. 기병의 신이 몸을 일으켰고, 황금 신상들을 뿌리친 루시엘이 이쪽을 향해 날아왔다.

[빛과 어둠.]

미트라가 신음처럼 말했다. 그녀는 사흉신 가운데 둘인 하얀 죽음의 이드무스와 검은 죽음의 파라무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이해했다.

서로 상극인 빛과 어둠의 힘을 완전히 동일한 수준으로 조정한 뒤 서로를 격발시켜 대소멸을 야기하는 것이었다.

서로 상극인 힘인 만큼 본래라면 상쇄되어야 정상이었지만, 격발한 것은 신력이었다.

사흉신은 정밀하기 짝이 없는 신력 조작과 자신들만의 신성 마법을 사용하여 지금과 같은 이적을 일으켰다.

천호에게 다가선 루시엘이 치유 마법을 펼쳤다. 천호는 그런 루시엘을 돌아볼 틈도 없이 사흉신에게 시선을 던졌다.

놈들은 아까 있던 위치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이동한 상태였다. 두 팔을 벌리고 있었고, 그런 놈의 주위에 반은 하얗고 반은 검은 신력의 덩어리들이 몇 개나 두둥실 떠 있었다.

엿 같은 상황이었다.

검인 주제에 놈들은 접근전을 아예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철저할 정도의 원거리전.

더욱이 빛이 문제였다. 차라리 어둠이었다면 태양의 마력으로 걷어 내기라도 했을 터인데, 빛이니 놈들의 시야 차단을 막아 낼 도리가 없었다.

“안 돼.”

기병의 신이 말한 그때, 다시 한 번 빛이 터졌다. 사흉신의 주위에 두둥실 떠 있던 빛의 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번에는 이쪽으로 향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기병의 신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렀다.

사방에서 폭발음이 울렸다. 사흉신의 검기로 인해 이미 반파되다시피 한 방어선 곳곳에서 폭발이 일었고, 병사들과 천사들이 문자 그대로 소멸했다.

빛이 잦아들고 다시 시야가 회복되었을 때, 기병의 신은 숨을 헐떡였다. 군마 위에 올라탄 뒤 신력을 끌어 올렸다.

중앙의 기둥까지는 100미터가 넘는 거리가 있었다.

그랬기에 본래라면 11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있는 기둥의 입구를 바로 볼 수 없어야 했다. 사이에 놓인 건물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볼 수 있었다. 사이에 놓여 있던 것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그 사실이 기병의 신을 격노시켰다. 기병의 신은 다시 한 번 신력을 폭발시켰다. 그녀를 태운 군마가 벼락처럼 솟구쳐 올랐다.

“우오오오오!”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기병의 신이 포효한 순간 다시 한 번 빛이 세상을 뒤덮었다.

검고 하얀 신력 덩어리들이 기병의 신을 향해 날아들었다.

기병의 신은 눈을 감았다. 기병의 신의 군마가 허공을 질타하며 몇 번이나 방향을 선회했다. 신력의 덩어리들을 피하며 사흉신과의 거리를 좁혔다.

쾅!

허공을 꿰뚫었다. 기병의 신의 랜스가 사흉신에 닿지 못했다. 허공만을 격타했고, 그대로 관통하고 지났다.

사흉신은 기병의 신이 선회하는 것을 기다리지 않았다. 작은 신력의 덩어리들을 몇 개나 쏘아 보내 연쇄폭발을 일으켰다.

허공이 뒤흔들리며 기병의 신이 균형을 잃었다. 사흉신은 그런 그녀에게 추가타를 가하는 대신 지상을 돌아보았다. 기병의 신이 선신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은 그였다.

신력의 덩어리들이 지상으로 향했다.

아직 살아남아 있던 천사들과 병사들에게 향했고, 기병의 신은 다급히 지상으로 몸을 날렸다. 천호 역시 사흉신에게 향하는 대신 미트라를 크게 휘둘러 신력 덩어리들을 걷어 냈다.

콰가강!

다시 연쇄폭발이 일어났다.

지면이 뒤흔들렸고, 기병의 신이 바닥을 뒹굴었다. 병사들을 보호하는 그녀의 등 뒤에서 신력 덩어리가 폭발한 탓이었다.

기둥 주변은 거의 초토화가 된 상황이었다. 사흉신은 여전히 허공에 있었고, 천호는 지켜 낸 천사들을 도주시키며 끊임없이 생각했다.

어찌할 것인가.

아버지가 여기 계셨다면 어찌하셨을 것인가.

놈의 신력 덩어리를 막아 낼 방법은 없는 것인가.

빛에 의한 시야 차단을 어찌할 것인가.

머릿속에 몇 가지 안이 떠올랐다. 하지만 실행에는 몇 가지 난항이 있었다.

사흉신이 다시 신력 덩어리를 흩뿌렸다.

천호는 황금 신상들로 하여금 스크롤을 난사하게 했다. 폭발로 폭발을 밀어내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최선이었다.

다시 굉음이 연달아 일어났고, 천호는 미트라를 고쳐 쥐었다. 폭발의 틈바구니 속을 뚫고 지나 사흉신을 직접 공격할 요량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기병의 신!”

조금 앳된, 하지만 강건한 목소리는 기둥 쪽에서 들려왔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린 천호는 익숙하면서도 낯선 이의 모습을 발견했다.

금발 미소년.

정화의 신.

그가 부상을 입은 기병의 신에게 달려갔다. 그런 그의 머리 위로 신력의 덩어리가 쇄도했다.

“안 돼!”

기병의 신이 외쳤다.

천호는 사흉신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고 정화의 신을 향해 몸을 날렸다.

기병의 신의 외침에 놀란 정화의 신이 순간 멈춰 서서 고개를 들었다.

검고 하얀 신력의 덩어리.

정화의 신이 반사적으로 방출한 신력에 닿았다. 지금까지 그러했던 것처럼 그대로 폭발하려 했다.

하지만 그 직전.

기둥 입구에서부터 쏜 살처럼 튀어나오는 자가 있었다. 날카롭고 빠른 검격이 신력의 덩어리를 향해 휘둘러졌다.

무리였다. 결국 폭발이 일어날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검격이 펼쳐진 순간 천호는 알 수 있었다.

평범한 검격이 아니었다. 아버지의 검과 닮아 있었다.

호세사천왕.

바이슈라바나의 장.

참원斬源.

검격이 신력의 덩어리를 베어 냈다. 빛의 힘과 어둠의 힘을 정확히 양분했다. 근원을 끊어 내 폭발 자체를 저지했다.

기병의 신이 눈을 크게 떴다. 천호가 그녀 이상으로 경악했다.

호세사천왕 때문만이 아니었다.

사흉신의 신력을 베어 낸 자.

지면에 안착한 은발의 엘프 여기사.

그녀가 천호를 보았다.

천호도 그녀를 보았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알 것 같았다. 그녀가 펼친 호세사천왕과 몇 가지 외모적 특징이 그렇게 만들었다.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 몇 번이나 등장한 인물.

아버지의 첫 동료.

엘프 여기사? 크리스도 천호를 알아보았다. 그 사람과는 별로 닮지 않은, 오히려 그 여자를 많이 닮은 얼굴이었지만 마주하자마자 알 수 있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눈빛 하나만큼은 그 사람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천호와 크리스가 동시에 입을 벌렸다. 둘 다 무의식중에 한 일이었고, 천호가 조금 더 빨랐다.

“아버지 첫사랑?”

“에?”

전투 중이었다. 주변이 난장판이었다. 하지만 크리스의 넋을 빼 놓기에는 충분한 말이었다.

“정신 차려! 온다!”

정화의 신이 외쳤고, 크리스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당황으로 얼굴을 붉힌 채 하늘을 보았고, 천호 또한 그러했다. 검고 하얀 신력의 덩어리가 쇄도하고 있었다.

작지 않았다. 크리스가 처음 베어 낸 것이 겨우 배구공 크기만 한 것이었다면, 지금은 직경이 1미터가 넘었다.

크리스가 표정을 고쳤다. 다시 한 번 참원을 펼쳤다.

갈라졌다. 이번에도 신력은 폭발하지 못했다. 빛과 어둠의 힘이 양분되어 흩어졌다.

멀리서나마 사흉신의 당황이 느껴졌다. 놀란 것은 기병의 신과 미트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천호는 답을 알고 있었다. 참원은 이름 그대로 근원과 흐름을 끊어 내는 기술이었다.

사흉신의 신력이 빛과 어둠의 혼합체라는 것을 간파한 크리스가 두 힘의 연결고리를 참원의 힘으로 가른 것이었다.

빛이 터졌다.

당황한 사흉신이 일단 시간을 벌기 위해 모두의 시야를 차단했다.

하지만 이미 몇 번이나 일어난 일이었다. 정화의 신을 제외한 모두는 당황하지 않았다.

천호는 눈을 감았다. 기척 감지로 주변을 감지함과 동시에 머릿속으로 한 가지 형상을 떠올렸다.

참원을 펼치는 크리스였다.

호세사천왕의 상위 기술.

중요한 것은 형이 아니었다. 크리스의 육신 내부에서 일어난 힘의 운용이었다.

어쩐지 알 것 같았다.

단순히 그냥 보기만 했다면 몰랐을 터였지만, 호세사천왕의 비급을 독파한 상태였다. 하나로 이어지지 못한 채 널브러져 있던 지식들이 완성된 형태를 본 순간 하나로 이어졌다.

더욱이 한 번 본 것이 아니었으니까. 두 번이나 보았으니까.

미궁 세계 최강의 성검이자, 최고의 검사인 미트라의 힘과 지식을 공유하는 자신이었으니까!

천호가 미트라를 고쳐 쥐었다. 빛 속에서 쇄도해 오는 신력을 향해 참원을 펼쳐 보였다.

미트라가 신력을 갈랐다. 빛과 어둠을 흩어 놓았다.

미트라는 당황했다.

겨우 두 번 본 것만으로, 이런저런 이유가 붙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참원을 펼쳐 보인 천호의 괴물 같은 천재성 때문만이 아니었다.

참원이 펼쳐진 순간 미트라는 느꼈다. 천호의 안에서 새로이 약동하기 시작한 힘을 감지했다.

피의 두근거림.

태양의 마력을 각성했을 때와 비슷한, 하지만 전혀 다른 힘의 각성.

아직 온전히 깨어난 것이 아니었다. 겨우 전조에 불과했다. 하지만 시작된 것은 분명했다.

어머니의 피에 이은 아버지의 피.

용사의 피가 아닌 다른 무언가.

[그, 그대의 집안은 대체 어찌 된 것인가?!]

어머니만 초월종이 아니었단 말인가?

아버지는 레온처럼 용사이기만 한 것이 아니었단 것인가?

미트라의 당혹과 의구심은 타당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투 중이었다. 출생의 비밀을 파헤칠 때가 아니었다.

천호가 눈을 떴다. 빛의 창을 보는 대신 사흉신을 보았다.

비행의 신의 날개를 펼쳐 보였다.

* * *

[???(2)의 피 Lv1을 획득했습니다.]

시간의 흐름은 누구에게나 공평했다.

하지만 그 시간의 흐름 속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에는 큰 차이가 존재했다.

사흉신이 일으킨 빛이 세상을 뒤덮은 순간 정화의 신은 생각했다.

‘으악! 내 눈!’

그가 두 손으로 눈을 가린 그때, 반사적으로 눈을 감은 크리스는 머릿속은 물론이고 가슴까지 복잡케 하는 생각들을 억누르기 위해 무진 애를 썼다. 그도 그럴 것이, 천호를 만났을 때 일어날 수 있는- 거의 백 개 가까이 생각한 경우의 수에조차 포함되지 않은, 그야말로 예상 밖의 상황이 터졌기 때문이다.

‘아, 아버지 첫사랑?’

전투 중임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하얗게 변하는 말이었다. 대체 무슨 소리냐고 당장에 따져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때가 아니었다. 아니,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조차 아니었다.

정신을 차려야 했다. 전투에 집중해야 했다.

기병의 신은 고개를 쳐들었다. 눈은 뜨지 못했지만 신력의 흐름을 읽었다. 천호에게 향한 사흉신의 신력이 둘로 갈라져 흩어지는 것을 포착했다.

루시엘은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빛이 시야를 가득 채운 그때, 다시 한 번 천호를 부르짖기만 하는 대신 순간적인 발상을 실행에 옮겼다.

빛이 걷혔다.

천호가 비행의 신의 날개를 펼쳤다. 사흉신은 다시 한 번 자신의 기술이 파훼되었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천호가 솟구쳐 올랐다.

잡념을 떨쳐 낸 크리스가 고개를 쳐들었고, 기병의 신이 랜스를 고쳐 쥐었다.

사흉신은 천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무시무시한 기세로 쇄도하는 천호에게 다시 한 번 빛과 어둠의 신력 덩어리를 내쏘았다.

참원.

다시 갈라졌다.

이번에는 빛이 시야를 가린 와중이 아니었다. 천호의 일검이 빛과 어둠을 갈라놓는 것을 모두가 보았다.

기병의 신은 눈을 크게 떴다. 정화의 신은 참원보다는 천호가 비행의 신의 날개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눈을 껌벅였다. 크리스는 천호가 펼치는 참원에서 그리운 그 남자를 떠올렸다.

천호가 사흉신에게 돌진했다. 사흉신은 천호에게 검으로 맞서는 대신, 빛과 어둠의 신력을 각기 난사했다. 천호와 거리를 벌리고자 했다.

하지만 신력을 난사한 직후였다. 급히 몸을 날리려던 사흉신의 진로를 황금빛 장벽이 가로막았다.

[루시엘!]

미트라가 환호했다.

황금 신상들이었다. 천호와 마찬가지로 용갑주를 가진 루시엘은 황금 신상들을 조종할 수 있었다.

그녀는 황금 신상들로 공격을 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전술적으로 천호에게 도움이 될 방법을 모색했다.

‘장벽.’

태초의 대장간에서 보았던 황금빛 빛의 장벽.

그것을 재현했다. 훨씬 더 좁은 범위로. 밖에서의 공격을 막기보다는, 사흉신을 안에 가두기 위한 용도로!

황금 신상들이 직경 10미터 남짓한 원을 그리고 있었다. 하늘 높이 솟구친 황금빛 장벽의 직경 역시 동일했다.

물론 무적은 아니었다. 황금빛 장벽은 얼마든지 파괴될 수 있었다.

하지만 파괴를 위해서는 힘이 필요했다. 힘을 펼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황금빛 장벽이 사흉신의 순간을 빼앗았다. 놈이 천호와 거리를 벌리려는 그 찰나를 강탈해 도주를 저지했다.

천호와 사흉신이 충돌했다. 천호의 손에는 미트라가, 사흉신의 양손에는 각기 하얗고 검은 신력의 검이 쥐어져 있었다.

세 자루 검이 얽힌 순간 무시무시한 굉음이 황금빛 장벽 안을 가득 채웠다.

사흉신은 생긴 것만 검이 아니었다. 놈의 쌍검술은 놀라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여섯 개의 검을 동시에 펼친 마키나조차 검술로 찍어 누른 천호였다. 여명의 검이 천변만화했고, 사흉신을 밀어붙였다.

“용사님! 위로!”

루시엘이 외쳤다. 지상이 아니었다. 하늘, 천호보다 더 높은 곳에서 소리쳤고, 천호는 루시엘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녀가 왜 그렇게 외쳤는지 생각하는 대신 즉각 반응했다. 미트라를 크게 휘둘러 사흉신을 떨쳐 낸 뒤 그녀의 말마따나 위로 솟구쳐 올랐다.

사흉신이 고개를 들었다. 천호와 루시엘을 보았다. 루시엘이 그런 사흉신을 마주하며 스크롤 세 장을 동시에 찢었다.

루시엘이 생각한 것.

황금빛 장벽만이 아니었다. 황금빛 장벽은 준비 단계에 불과했다.

어머님의 스크롤.

파괴 마법이 아니었다.

지옥의 불길을 소환하는 마법 역시 아니었다.

그라비티 폴.

중력 마법. 위에서 아래로 찍어 누르는, 수수하지만 강력한 마법.

쾅!

하나도 아니고 셋이었다.

돌연 가해진 무지막지한 중력에 사흉신은 저항하지 못했다. 추락하듯? 아니, 추락해 지면과 충돌했다.

“하악!”

루시엘이 거친 숨을 토했다. 천호가 그런 루시엘의 허리를 안아 지탱하며 미트라의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용갑주를 통해 황금 신상들을 조작했다.

황금빛 장벽이 걷어졌다. 황금 신상들이 제각기 흩어져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사흉신과 거리를 벌렸다.

단순한 이유였다.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천호 자신만이 아니었으니까.

사흉신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존재가 하나 더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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