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120화 (120/211)

“에이젤, 정말 괜찮아?”

“괜찮아요. 어떻게든 버텨 볼게요.”

루시엘의 물음에 천사 3인방의 막내인 에이젤이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답했다.

격의 상승이 버거운 것은 에이젤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이젤은 일행을 이탈할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온전한 격의 상승을 이루지 못한다 할지라도 끝까지 함께할 생각이었다.

‘가족이니까.’

루시엘과 아우라엘과 라구엘.

지부의 생존자들.

에이젤에게 있어 세 사람은 친언니나 다름없었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되었을까.’

지부를 파괴했던 자.

에이젤은 이내 몸서리를 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날의 악몽을 떠올리기 싫었기 때문이다.

‘괜찮아, 괜찮아. 다시 나타나도 용사님이 물리쳐 주실 거야.’

가쁜 호흡을 가라앉힌 에이젤은 작은 주먹을 꽉 쥐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래도 일행이 줄기만 한 건 아니잖니.”

“맞아, 맞아. 우리가 있잖아?”

열둘에 다시 둘.

회화의 신과 음악의 신이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흥이 많은 두 자매는 15층까지 안내역이라며 일행에 합류했다.

[진짜 목적은 13층인 것 같다만.]

요리의 신의 만찬회.

물론 정말로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그녀들이 15층으로 향하는 것은 치유의 신이 구상 중인 15층의 신기 쟁탈전 때문이기도 했다.

전투에는 능하지 못했지만 꽤나 강한 신력을 가진 회화의 신과 음악의 신이었다. 정화의 신과 마찬가지로 도움이 될 터였다.

“이동식 배터리라고 해야 할까?”

“잘 먹고 잘 자면 채워지니까 아낌없이 팍팍 써도 돼.”

두 자매의 말에 천호는 아주 잠깐 정화의 신을 떠올렸다.

실리피안 요새와 제도 아이테리움에서 배터리가 되어 주었던 정화의 신.

‘뭐, 잘 지내겠지.’

딱히 위험한 곳에 있는 것도 아니고.

관심을 접은 천호는 계단을 마저 내려가며 일행과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논의했다.

안내역인 음악의 신이 제일 먼저 입을 열었다.

“알다시피 정의의 성채는 중앙을 관통하는 일련의 요새 도시들의 집합을 의미해.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각 층마다 위치나 규모가 조금씩 달라.”

중앙에 기둥들이 모여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나로 쭉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10층에서 11층으로 통하는 기둥에서 동쪽으로 꽤나 이동해야 12층으로 통하는 기둥이 나타나고 하는 식이었다.

정의의 성채는 위와 아래로 통하는 두 기둥을 성채 안쪽에 위치시키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각 층마다 성채의 위치와 규모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가장 규모가 큰 건 10층. 여긴 다른 곳보다 민간인들이 많으니까. 아래층으로 내려갈수록 민간인들이 줄어들고, 사실상 전투 인원들밖에 없게 돼.”

13층이 사실상 마지막 민간인 거주구라 할 수 있었는데,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14층 이하부터는 민간인이 발견되는 족족 위로 올려 보낸다.

둘째, 애당초 14층 이하부터는 민간인이 살아남을 수 없는 환경이다.

대미궁에 침식되었을 때 저층이나 중층 초반에 배치된 이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14층에 배치된 자들은 사실상 전멸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아무튼 12층까지는 바로바로 내려왔지만, 여기서부터는 좀 시간을 들여서 내려가는 게 좋을 거야. 우리랑 용사는 몰라도 나머지 일행은 각 층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격의 상승은 둘째 치고 마기의 양이 문제였다.

심층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대미궁의 마기 역시 강해졌다. 적응 과정 없이 바로 깊은 곳에 내려가면 마기에 중독되어 죽을 수도 있었다.

“어차피 치유의 신 언니가 전쟁 준비를 하는 데는 시간이 좀 필요할 테니까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어. 고작해야 며칠 차이일 테고.”

음악의 신이 빙글빙글 웃으며 다독이듯 말했다.

흥이 많고 장난스러워서 그렇지, 그녀 역시 자애롭고 사려 깊은 선신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니까 결론은, 일단 오늘은 그만 짐 풀고 쉬자는 거지.”

“응응, 쉬자고.”

회화의 신과 음악의 신은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지막 계단을 동시에 폴짝 뛰어 내려갔다.

기둥 밖 풍경은 황무지나 설원이 아닌 잘 정돈된 요새 도시 내부였다.

천사 일곱 명이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12층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12층에서의 안내를 맡은 5급 천사 오리엘과 그 수하들이었다.

[15층까지는 제법 평안할 것 같구나.]

기둥들이 전부 정의의 성채 안쪽에 있으니 일부러 성채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딱히 위험한 일도 없을 것 같았다.

[흠, 그럼 슬슬 때가 된 것 같군.]

미트라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트라가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 잘 아는 천호였지만 일단은 모른 척을 했다.

“뭐가요?”

[그렇게 나올 건가?]

“그러니까 뭐가요.”

[우긋··· 정신세계 말이다, 정신세계.]

10층에서 태초의 대장간을 나온 이후 지금까지 정신세계에서의 만남을 일절 갖지 않은 천호와 미트라였다.

딱히 큰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말 그대로 어쩌다 보니랄까.

정신세계에서 급히 볼일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10층에서 12층까지 내려오느라 바빴으니까.

천호는 작게 웃은 뒤 황금색 보석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렇게 보여 주고 싶어요?”

[뭐, 뭐가 말이냐. 나는 그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미트라가 국어책 읽듯이 뻣뻣하게 말했고, 천호는 다시 웃었다.

단순한 이야기였다.

제국 수호검을 흡수함에 따라 미트라가 성장했다.

정신세계에서의 겉모습 역시 변하였다.

얼마나 변했을까.

이제는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과 같아졌을까?

[뭐, 그럼 됐다. 나중에 해도 된다.]

미트라가 약간은 토라진 어조로 중얼거렸고, 천호는 다시 황금색 보석을 쓰다듬었다.

“숙소에 가면 들어갈게요. 이것저것 점검할 것들도 있으니.”

[흠흠, 알겠다.]

목소리에 다시 흥이 어렸다. 참 알기 쉬우면서도 귀여운 성검이었다.

그리고 30여 분 뒤.

정신세계에서 눈을 뜬 천호는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마른침까지 한 번 꿀꺽 삼켰다.

미트라 때문이었다.

[흠흠, 어떤가.]

평소와 같았다.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실리피안 고원과 그 사이에 선 미트라.

하지만 달랐다. 평소와 같다고 할 수 없었다.

미트라는 성장했다. 더 이상 어린 소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십 대 후반. 루시엘과 또래로 보이는 소녀.

키가 훌쩍 자라 있었다.

체형 또한 더 이상 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여성성의 극치라 해도 좋을 아름다운 곡선들이 미트라의 몸 곳곳에 자리했다.

젖살이 빠진 얼굴로 미트라가 입술을 움츠렸다. 살짝 부끄럽다는 듯, 뺨을 장밋빛으로 물들인 채 천호를 보았다.

황금빛 눈동자에 불안과 기대가 뒤섞여 가련하면서도 아름다운 빛을 발했다.

레온과 마주했을 때는 이런 적이 없던 미트라였다.

레온과 마주하면서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렸던 적은 없었다.

쿵쿵 뛰는 가슴을 억누르며 미트라가 천호를 보았고, 천호는 다시 마른침을 삼켰다.

이미 황금빛 눈동자의 여인을 본 천호였다.

치유의 신을 필두로 한 여신들 역시 보았다. 하나같이 빼어난 미인들이었다.

하지만 순간 넋이 나가고 말았다. 멍하니 미트라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흠흠.]

미트라가 살짝 몸을 꼬며 말했고, 천호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저도 모르게 멍청하게 웃더니 말했다.

“예뻐요.”

[···응?]

“너무 예뻐요.”

미트라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기대한 말이기는 했지만, 막상 진짜로 들으니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흐음, 흠, 흠.]

애써 헛기침을 터트리는 미트라였지만 얼굴은 여전히 새빨간 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입 밖에 내려다가 겨우 삼킨 말이 있어서였다.

그것까지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말했다가는 부끄러움과 기타 등등으로 죽고 말리라.

[아, 아무튼! 점검을 하자!]

미트라가 뒤로 빙글 돌아서며 말했다. 천호를 마주하고 말하기가 버거웠기 때문이다.

천호도 비슷한 심정이었던 터라 돌아선 것에 대해 딱히 무어라 하지는 않았다. 뒷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기도 했고.

“흠흠, 그럼 일단 스킬 좀 볼게요. 여명의 검 복습도 하고.”

[그, 그래라.]

여명의 검을 익힌 이후 천호가 가지고 있던 거의 대부분의 스킬들은 여명의 검 하위 스킬이 되었다. 이는 용사 스킬 또한 마찬가지였다.

빛의 창을 바라보던 천호의 시선은 최상단, 용사의 궁극기로 향했다.

그간 눈부신 성장을 거듭한 덕분에 몇 단계나 격이 상승한 천호였지만 궁극기를 사용하려면 아직도 격을 네 단계나 더 성장시켜야 했다.

용사의 궁극기.

대체 무엇일까.

미트라가 때가 되기 전까지는 말해 주지 않겠다고 한 이유는 무엇일까.

잠시 궁극기 칸을 바라보던 천호는 이내 호흡을 골랐다.

재배치된 스킬들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한편 미트라는 뒤돌아선 채 꼼지락거리다 마찬가지로 빛의 창을 열었다.

평소였다면 천호와 함께 스킬창을 살펴보았을 터였지만, 지금은 혼자서 보고 싶었다.

[음음.]

이럴 거면 뭐하러 정신세계로 부른 것인가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소정의 목적(?)은 달성했으니 만족이었다.

미트라는 다시 헛기침을 토한 뒤 여전히 두근거리는 가슴을 짓누른 채 빛의 창을 보았다.

성검 스킬이 담긴 빛의 창이었다.

여명의 검을 익힘에 따라 스킬창이 완전히 달라진 천호와 달리 미트라는 이전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위에서 아래로 한 줄뿐인 스킬 트리.

이번에 성장하면서 두 단계가 더 개방되어 스킬 두 개를 더 획득하게 되었다.

하나는 비행.

문자 그대로 미트라 스스로 비행을 할 수 있는 스킬이었다. 천호 없이도 어느 정도는 운신의 자유가 생긴 셈이었다.

다른 하나는 능력 공유의 강화. 지금까지 이상으로 미트라 자신의 힘을 천호에게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미트라는 눈동자를 위로 굴려 아직 개방되지 않은 스킬들을 보았다.

천호와 달리 앞으로 개방할 스킬은 단 두 개뿐이었다.

‘미리 알 수는 없을까.’

용사 스킬의 경우 궁극기가 무엇인지까지 아는 미트라였지만, 성검 스킬은 이번에 완전히 새로 생긴 것이었으니까.

경험이 없으니 뭐가 생길지도 알 수 없었다.

미트라는 입술을 움츠리다 빛의 창을 만져 보았다. 그러자 위에 남아 있던 두 개의 스킬 칸에 쩌적 하고 금이 가더니 다른 스킬들과 마찬가지로 그림이 나타났다.

색은 아직 회색이었다. 하지만 그림을 알아보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 미트라는 그림을 살펴보았다. 상징성이 있는 그림인 만큼 잘 살펴보면 어떤 스킬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첫 번째 스킬은 검이 여러 개 그려져 있었다.

가운데 뚜렷한 검의 형상이 하나 있고, 양옆으로 동일한 형태의 검들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가운데 검에서 멀어질수록 그 형상이 흐려졌다.

[서, 설마?]

천호가 예전에 갈망했던 것.

미트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예상한 그것이라면 분명 도움이 될 터였지만, 어쩐지 싫은 기분이었다.

미트라는 다시 위를 보았다.

마지막 스킬.

성검의 궁극기.

검과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왼쪽에 검, 오른쪽에 사람. 그리고 둘 사이에 놓여 있는 양방향 화살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뚫어져라 바라보던 미트라는 어느 순간 숨을 삼켰다. 스스로를 돌아보았다.

* * *

스킬을 상징하는 그림은 단순했다.

단순하기에 직관적이었고, 그렇기에 오해의 여지 또한 존재했다.

검과 사람.

그 사이에 놓여 있는 양방향 화살표.

머릿속에 팍 하고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미트라는 섣불리 판단하지 않았다.

천호가 곧잘 입에 담던 말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기대를 하니까 실망을 하는 거예요.’

그랬다. 그러니 섣부른 기대는 삼가야 했다.

[후우?.]

일단 심호흡부터 한 미트라는 합리적인 판단을 위해 다른 그림들을 돌이켜 보았다.

성검 스킬은 레온 시절에는 없던 것이지만, 어찌 되었든 용사 스킬과 같은 시스템을 공유하고 있었다.

같은 시스템.

같은 표현 방식.

상징하는 바가 각기 달라 형태 역시 다른 용사 스킬의 그림들이었지만 그래도 비슷한 부분들이 존재했다.

[화살표.]

용사 스킬의 그림들 안에서 가장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기호였다.

아래에서 위로 향한 화살표.

딱 보면 알 수 있듯이, 상승을 의미했다.

힘을 강화하는 스킬, 민첩성을 강화하는 스킬 등등, 대부분의 강화 스킬 속에는 위로 향하는 화살표가 있었다.

[다른 화살표.]

양방향 화살표.

아니, 적어도 가로로 놓여 있는 화살표라도.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궁리하던 미트라는 이내 어깨를 늘어트렸다.

딱히 생각나는 게 없었다. 그리고 당연한 일이었다. 레온의 용사 스킬 가운데 ‘변신’ 스킬은 없었으니 말이다.

마지막 야수 계열도 덩치가 커지긴 했지만 외형이 완전히 변하는 변신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천호의 스킬 중에는 변신이 없을까?

레온의 스킬과 천호의 스킬 사이에는 차이가 좀 있었으니까.

어쩌면 이번에 여명의 검을 만들어 내면서 뭔가 더 변화가 생겼을지 몰랐다.

늑대나 야수 같은 걸로 완전히 변신하는 스킬 같은 게 말이다.

“미트라?”

[꺅?!]

바로 등 뒤, 정확히는 머리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란 미트라는 제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오오, 반응 좋네요.”

[야잇!]

느긋한 목소리에 악 소리를 낸 미트라는 씩씩거리며 돌아섰다. 역시 예상대로 천호가 서 있었다.

[깜짝 놀라지 않았나! 인기척을 내라! 인기척을!]

“아니, 그냥 평범하게 걸어와서 말 건 건데··· 뭔가 고민이라도 있어요?”

딱히 발소리를 죽이거나 한 것도 아니었다. 평소의 미트라였다면 풀 밟는 소리만으로 알아차리고 돌아섰을 터였다.

천호가 이상하다는 듯 미간을 좁히자 미트라는 손부채질로 얼굴을 식히며 답했다.

[그, 뭐··· 고민까지는 아니다.]

“그럼 골똘히 생각할 거라도?”

[으음··· 뭐, 사실 비밀도 아니니까. 같이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도 같구나.]

말하고 보니 정말이었다.

무엇하러 감춘단 말인가.

[음, 이걸 봐라.]

“성검 스킬이네요. 오, 위에 두 단계도 그림이 있긴 있네요? 회색이라 그렇지.”

[그렇다. 아무래도 앞으로 익히게 될 스킬들을 예고하는 것 같다.]

“흠, 그럼 앞으로 익힐 스킬들이 뭘까 추론하고 계셨군요.”

[음, 그대 말대로다.]

미트라는 빛의 창을 놔둔 채 천호 쪽으로 돌아섰다. 나란히 서서 빛의 창을 보기 위함이었다.

천호는 손가락을 놀려 그림을 확대시키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