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레이커-119화 (119/211)

‘너무해.’

너무했다. 아무튼 너무했다. 이 무슨 고문 아닌 고문이란 말인가.

“그런데 용사 몸 좋다.”

“그러게, 조각상 같아.”

“아까 만져 봤는데, 엄청 단단해.”

“피부도 좋고.”

여신들이 으흐흐 웃으며 말했다. 어쩐지 모르게 뜨거운 시선들이 느껴졌다.

“으음.”

[으음이 아니다. 탕 속에 몸을 깊이 묻어라. 머리만 내놓아라.]

천호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려 하자 미트라가 급히 말했다. 꽤나 골이 난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렇게 한 시간여.

길고도 짧았던 목욕이 끝났다. 이제는 목욕의 신의 성소를 떠날 시간이었다.

“이건 내 선물이야. 받아 줘.”

방금 목욕을 한 터라 뺨을 장밋빛으로 물들인 목욕의 신이 웃으며 말했다.

예상한 대로의 선물이 그곳에 있었다.

커다란 이동식 욕조.

“마법이 걸린 물건이라 커질 수 있어. 마력을 많이 넣으면 넣을수록 커질 거야.”

평소엔 1인용 욕조였지만 최대 30인용 욕조로까지 커질 수 있다는 모양이었다.

“여기서 목욕하면 피로가 더 잘 풀릴 거야. 체력 회복 효과도 있고.”

이미 미트라의 목욕물에 다 있는 기능들이었지만, 배가되어 나쁠 것이 없었다.

“그리고 이거.”

목욕의 신이 내민 것은 몸을 씻는 데 쓰는 천이었다. 이번에도 예상한 물건이었지만, 그래서 더 기뻤다.

“이거로 씻으면 자동으로 비눗물이 나올 거야.”

“감사합니다.”

둘 모두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루시엘도 무척 기쁜 얼굴이었다.

“앞으로도 목욕을 많이 사랑해 줘.”

“꼭 그러겠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응! 지켜볼게!”

목욕의 신은 손을 흔들며 천호 일행을 배웅했다.

“자, 그럼 오늘은 이제 쉬자.”

“저녁 만찬이 있을 예정이니까 그때까지 푹 쉬어.”

그리 말한 두 여신은 몸소 천호를 숙소까지 안내해 주었다.

음악의 신과 회화의 신이 그리 강한 신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치유의 신과 언니, 동생 하는 신들이었다.

그런 두 신이 천호를 지금까지 직접 안내했으니, 특별 대우가 분명했다.

천호의 숙소는 만신전 바로 아래층에 위치했다.

사람들의 출입이 제한된 곳인지 무척이나 조용하고 고요했다.

‘5성 호텔 온 기분이네.’

전체적으로 순백인 숙소였다. 가운데 커다란 응접실이 있었고, 응접실을 에워싸는 형태로 방 여덟 개가 있었다.

그리고 그 방들 안에는 다시 작은 방들이 딸려 있어 규모가 은근히 컸다.

호화로운 숙소.

하지만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역시 경관이었다.

응접실 끝에 난 커다란 창 너머로 보이는 광경.

천호는 루시엘과 나란히 선 채 창밖을 보았다.

정의의 성채.

중앙을 관통하는 일련의 요새 도시들.

많은 선신들이 모여 있기 때문인지 하늘이 맑았다. 잿빛이 아닌 푸른 하늘이었다.

지상의 광경 또한 화려했다. 아니, 정확히는 복잡하고 다채로웠다.

대미궁 안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역시 정의의 성채였다.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정의의 성채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었다.

10층에 거하는 이들의 숫자만 해도 수십만을 헤아렸으니, 이 정도면 대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저곳에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문득 락 드워프들의 도시가 떠올랐다. 플로렌 왕국의 왕도에 자리 잡았을 산의 일족 역시 생각났다.

그리고 그들만이 아니었다.

포레스트 엘프들, 실리피안 고원에 거하는 제국의 사람들.

천호 자신과 함께 싸웠고, 천호 자신이 지킨 사람들.

사실 따지고 보면 생판 남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되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광경을 지키고 싶었다.

‘용사니까.’

아버지께서 자주 입에 담으시던 말.

역시 피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이었다.

“용사님.”

루시엘이 작게 말하며 천호의 손을 잡았다. 어쩐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아서였다.

천호도 루시엘의 손을 마주 잡았다. 미트라가 툴툴거리지 않도록 다른 한 손으로는 미트라의 손잡이를 잡았다.

용사와 성검과 천사.

‘그러니 우리 함께 미궁 세계를 구해 보자꾸나.’

1층에서 처음 만났을 때 미트라가 했던 말.

[그대여, 왜 그렇게 웃는 건가?]

“그냥, 옛날 생각이 좀 나서요.”

다섯 여신 중 하나인 전쟁의 여신, 이브나일의 신기.

미궁 세계를 구하기 위해 반드시 되찾아야 한다. 치유의 신이 말한 그것.

15층.

중층 최하층인 동시에 중층 최대의 격전지.

천호는 미트라와 루시엘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눈앞의 광경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겼다.

* * *

천호 일행이 정의의 성채에 도착하고 닷새.

걷고 또 걸어 마침내 정의의 성채에 도달한 정화의 신은 마중 나온 천사들을 마주했고, 눈을 가늘게 떴다. 이내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갔지?”

짤막한 물음에 천사들이 어설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치유의 신 누님께서 같이 15층에 오라고 하셨는데.

“뭐, 15층에서 만나면 되는 거겠지.”

이미 해탈한 정화의 신이었다. 이리 될 것을 예상하기도 했고.

어찌 되었든 만나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굳이 붙어 다닐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실망하지 말라고. 어차피 15층 가면 만날 테니.”

정화의 신이 격려하듯 말하자 파이엔 출신의 영웅 크리스는 어설프게 웃었다.

‘똑같네, 진짜.’

파이엔의 용사인 그 사람도 그랬으니까.

누가 훼방이라도 놓는지, 만나려고만 하면 서로 길이 엇갈렸으니까.

“아무튼 가자고. 일단 여독부터 풀어야 할 테니.”

정화의 신이 느긋한 걸음을 내디뎠고, 크리스는 불안함을 달래듯 입술을 한차례 깨문 뒤 정화의 신의 뒤를 따랐다.

정화의 신의 말마따나 15층에 가면 만나겠지. 만날 수 있겠지.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마음을 달래듯 가슴을 살짝 짓누른 크리스는 숨을 길게 토했다. 정의의 성채를 향해 나아갔다.

[엉큼한 Lv7의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엉큼한 Lv7의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엉큼한 Lv7의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번뇌력 Lv4의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번뇌력 Lv5가 되었습니다.]

[엉큼한 Lv7의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엉큼한 Lv7의 경험치가 올랐습니다.]

제15장?호세사천왕

남자와 여자는 서로 마주 앉아 있었다.

언제나와 같이 여자의 탑 안이었다.

여자는 장구한 세월을 살아왔지만, 그녀에게 있어 진정 삶이란 것이 시작된 것은 남자를 만난 이후였다.

그렇기 때문인지, 여자는 여느 장생자들과는 시간관념이 달랐다. 그녀의 시간관념은 바쁘게 살아가는 필멸자들에 가까웠다.

‘그래, 그러니 그런 거지.’

남자는 터지기 직전의 폭탄 같은 모습을 며칠 전부터 유지 중인 여자를 보며 생각했다.

애써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여자의 인내심은 슬슬 한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두 번째 캐리어를 보내고도 벌써 한 달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길면서도 짧은 시간이었다.

세상 간에는 시간의 흐름 차이라는 게 존재했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한 달이 저쪽에서의 하루나 1년이 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을 거야.”

여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냥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다. 분명한 근거가 존재했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아들과의 실시간 통신이 이루어졌다. 시간의 차이가 극단적이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의 좌표는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간혹 고정되어 있는 세계도 있었지만, 여자의 세계인 파이엔과, 남자의 세계인 지구와, 아들이 간 것으로 추정되는 세계는 좌표가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시냇물 속을 열심히 헤엄치는 작은 물고기들 하나하나가 세계인 것과 비슷했다.

그래도 방향성이라는 것이 존재했기에, 대강 위치를 추정할 수 있었다.

캐리어 열두 개를 보냈다. 하나가 아들을 발견하면 인근 세계로 흩어진 다른 열한 개를 불러내는 형식이었다.

캐리어가 무식하게 큰 이유는 변신과 합체 때문만이 아니었다. 세상 간 이동을 두 번이나 해내기 위해 그야말로 엄청난 양의 마력을 담아야 했기 때문이다.

여자는 두 번째 캐리어 발송을 위해 탑과 성왕국의 국고만을 탕진시킨 게 아니었다. 여자의 탑에 저장되어 있던 마력의 절반 가까이를 두 번째 캐리어 발송에 쏟아부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다만 결과가 돌아오지 않아 답답할 뿐이었다.

도착하면 어떻게든 이쪽에 신호가 돌아오도록 만들었는데, 어째 신호가 통 오지 않았다.

가능성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본래 세상 간 이동이란 것은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열두 개나 되는 캐리어들 중에서 반수 정도만 도착할 거라 기대한 것도 그래서였고 말이다.

“도착했을 거야.”

남자가 말했고, 여자는 근거를 대라며 툴툴거리는 대신 남자처럼 생각하기로 했다.

“성장도 순조로울 거고. 당신의 피도··· 그러니까 태양의 마력도 각성했잖아? 아마 곧 첫 번째 캐리어에 넣어 두었던 스크롤도 발동시킬 수 있을 거야.”

여자가 준비한 히든카드.

여자는 눈을 감았고, 숨을 길게 토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말이 맞아.”

약간이지만 여자의 노기가 가라앉았다. 그러고 보니 밤이 가까운 시간이었다.

여자가 말했다.

“당신의 피도··· 물려받았겠지?”

남자의 피.

정확히는 남자 가문의, 대대로 이어져 온 용사 가문의 피.

그 피를 각성한다면.

그리하여 남자와 같은 힘을 손에 넣는다면.

여자는 파이엔 최강을 자부했다. 태양 아래에서만이 아니었다. 파이엔 안에서라면 그녀는 실로 신과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에게는 무리였다.

정확히는 밤 한정이었지만, 어찌 되었든 낮이 아닌 밤에는 파이엔 최강을 자부하는 여자조차도 남자를 이길 수 없었다.

남자는 미간을 살짝 좁히더니 턱을 긁적이며 말했다.

“아마도.”

아니, 거의 확신했다. 다만 여자의 힘이 그러했던 것처럼 남자의 힘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과정이 필요했다.

“비급만으로 될까?”

여자가 묻자 남자는 쓰게 웃었다.

“내 자식이긴 하지만 배우는 거 하나는 괴물 수준이니까. 시행착오가 있어도 어떻게든 익히긴 하겠지.”

천마신공과 호세사천왕.

둘 모두 남자의 피를 일깨우기 위해 필요한 무공이었다.

특히 각성 단계에서는 호세사천왕이 중요했다.

사실 남자도 조금 불안했다.

독학으로 호세사천왕을 익힌 남자가 피를 각성시키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아들 녀석이 여자를 닮아 배우는 게 빠르긴 했지만, 엄밀히 말해 몸으로 배우는 게 빠른 타입이었다. 비급을 백 번 정독하는 것보다 실제로 본 호세사천왕의 한 수에서 더 많은 것을 얻으리라.

누군가 아들에게 호세사천왕을 시연해 줄 수 있다면. 한 수라도 가르쳐 줄 수 있다면.

아들 녀석은 실로 눈부신 성취를 보여 주리라.

여자도 그것을 알았다. 그래서 어깨를 늘어트린 채 허무한 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애당초 당신뿐이잖아.”

호세사천왕을 익힌 것은.

여자의 말에 남자는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

여자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야, 그 반응은 뭔데?”

“아니, 그, 뭐랄까······.”

여자는 묘하게 그 사람 이야기만 나오면 신경이 날카로워졌으니까. 직접 만난 적도 없는 사이인데 말이다.

“있긴 있거든, 나 말고도.”

호세사천왕을 익힌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남자 자신이 직접 전수까지 해 준 사람이.

여자도 이쯤 되니 눈치를 챘다. 눈을 더욱 가늘게 뜨더니 이내 하-하고 한숨을 쉬었다.

“소용없는 이야기네.”

남자가 말하는 그 사람이 미궁 세계란 곳에 있을 리가 없으니까.

“뭐, 그렇겠지.”

그러고 보니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남자는 잠시 그 사람을 떠올렸다.

은색 단발과 초록색 눈을 가진 아름다운 엘프 성기사.

‘크리스 폰 크리사오르.’

그리운 이름이었다.

* * *

10층을 떠나 12층까지 내려오면서 천호 일행에도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일행의 구성이 달라진 것이다.

일단 태초의 대장간에서 합류했던 릴리엘을 필두로 한 수색조가 이탈했다.

애당초 태초의 대장간 수색을 위해 자신들이 거하던 층을 떠났던 이들이기 때문에 본래 거하던 층, 12층에 도착하자 더 이상 천호 일행과 함께할 이유가 없었다.

“건강하세요. 항상 응원하고 있을게요.”

“릴리엘도요.”

짤막한 인사를 나눈 뒤 릴리엘 일행은 12층 서부로 향했다.

정의의 성채 외에도 지켜야 할 곳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떠난 것은 수색조만이 아니었다.

사스치엘을 필두로 한 전투 천사들의 구성에도 변화가 있었다.

“나와 엘리엘만 남기로 했다.”

대미궁에서는 한 층 한 층 내려갈 때마다 격의 상승을 이룰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격이 상승하는 것은 아니었다.

내려가는 이가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을 때 비로소 격의 상승이 온전히 이루어졌다.

천호와 함께하며 온갖 일을 다 겪은 덕분에 10층까지는 비교적 무난하게 격의 상승을 이뤄 온 전투 천사들이었지만, 11층부터는 힘에 부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스치엘은 그런 이들을 무턱대고 데려가는 대신 11층에 남기기로 했다.

무지엘, 카지엘, 유지엘, 라엘.

네 동물형 전투 천사들은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눈 뒤 10층으로 올라갔다.

락 드워프들 역시 인원의 변화가 있었다.

격의 상승을 쫓아가지 못하는 것은 락 드워프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치유의 신의 전차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오레놀과 조수를 맡은 사라를 제외한 나머지 락 드워프들은 전투 천사들을 따라 10층으로 올라갔다.

스무 명이 훌쩍 넘던 일행이었지만 열네 명이나 빠지고 나니 규모가 확 쪼그라들었다.

천호와 루시엘, 천사 3인방.

14층까지만 함께하기로 한 루실리아와 실리키엘.

사스치엘과 엘리엘.

오레놀과 사라.

마키나.

남은 인원은 열둘.

여전히 적진 않았지만 그래도 휑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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